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43
‘갑자기 상황이 급해졌네.’
이제 선택해야 했다. 이자벨라의 맹세를 믿고 그냥 보내 주든지, 도시로 데려가 죽게 만들든지.
‘마정석을 얻기 위해 도박을 하느냐, 아니면 혹시 모를 후환을 없애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 * *
“어이! 여기야!”
“테온! 무사했군요!”
어두운 통로를 지나 강시 보관소에 도착한 사람은 역시나 아우레오였다.
백작의 기사들과 사제 아우레오를 필두로 한 병단이 한 사람씩 지하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해. 그 시체들은 독연을 뿜어.”
“구울이군요. 오, 가엾은 영혼들!”
강시에서 나오는 녹색 아지랑이를 본 사제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품에서 모종의 가루를 꺼내 시체 위에 골고루 뿌렸다.
제독이 끝나고 나서야 병사들도 광장에 들어섰다.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수십 구의 강시와 마법사의 실험실이었다.
“마법사는 놓쳤다.”
“마, 마법사요?”
“그래. 놀 주술사가 아니라 인간 마법사가 있었어. 거의 다 잡았는데, 너희가 들어오는 걸 눈치채고 급히 도망치더군.”
나는 난간에서 훌쩍 뛰어 내려왔다. 아우레오와 기사들은 내 말에 집중했다.
“지난번 마녀처럼 펑퍼짐한 옷을 입었던데.”
“로브 말이군요.”
“아, 그걸 로브라고 해? 로브 때문에 외모는 자세히 보지 못했어.”
나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마법사를 놓쳐 버렸다는 말에 기사와 병사 들은 물론이고 사제들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참 속상한 일이네요. 하지만 테온이 무사한 것만 해도 참 다행입니다.”
아우레오가 나를 다독이며 분위기를 바꿨다.
그의 말에 다른 사제들과 병사들도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존경을 표했다.
다만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게 테온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지 않았소? 교회에서 무턱대고 진입하는 바람에 마법사를 놓쳐 버린 셈이오.”
한 기사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그는 무엇이 그리 아쉬운지 투덜투덜 싫은 소리를 이어 갔다.
하지만 그를 보는 다른 병사들이나 사제들의 표정은 달랐다.
“이런 음험한 지하 소굴에 테온이 홀로 발을 디뎠는데,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습니까. 경은 비난을 삼가세요.”
“뭐, 뭐요?”
교구 사제의 단호한 말에 기사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별다른 말 없이 사람들은 인도했다.
“이쪽으로 와. 마법사가 제법 거창한 실험실을 만들어 뒀더라고. 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너희가 보면 다르겠지.”
“오, 어서 가 봅시다.”
사제들은 흥분을 감추지 않고 내 뒤를 따랐다.
기사는 잠시 아우레오를 노려보다 병사들에게 고갯짓했다.
“입구로 돌아가서 리암 경에게 보고해라. 사원은 마법사의 은신처였고, 개척을 끝냈다고.”
지시받은 병사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입구를 향해 달렸다.
사파에서 온 용사
마정석
오르샤바로 돌아왔다.
기사들은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위해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고, 나는 사제들과 함께 교구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고생했어요, 테온. 푹 쉬세요. 저도 이만 가 볼게요.”
“잠깐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
응접실을 나서려던 아우레오가 내 말에 걸음을 멈췄다.
“말씀하세요, 테온.”
“마정석이란 게 뭐지?”
내 물음에 아우레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지저분한 오물에 대해 말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옆으로 늘리며 말했다.
“마정석은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흉물입니다. 마나는 아도나이의 뜻에 따라 온 세상에 고르게 흩어져야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마정석은 그런 마나를 강제로 잡아 둔 물건이죠. 추악한 욕심의 산물이랄까요.”
“흐음, 계속 얘기해 봐.”
“마정석이라는 광물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마나를 봉인하기 위해 단단한 광물이나 금속을 주로 사용하는 것뿐이지요. 마법사들은 다이아몬드나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을 주로 사용한다고 해요. 종류에 따라 효율이 다르다고 하던데, 그중에서도 다이아몬드를 최고로 친다더군요.”
아우레오는 사제답게 마정석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의 설명은 길게 이어졌고, 나는 이자벨라의 말이 대부분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정석은 일종의 내단(內丹)이군. 다만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니라,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야.’
아우레오의 설명에 따르면 마정석은 재료의 품질과 세공 기술에 따라 저장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달라진다고 했다.
한번 정해진 용량은 바꿀 수 없고, 저장해 둔 마나를 다 쓰고 나면 그 용량만큼 다시 충전할 수도 있었다.
“다만 마정석에 마나를 충전하는 건 소수의 실력 있는 마법사만 가능하고, 오랜 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마정석은 암시장에서 무척 비싼 값에 거래되곤 하지요.”
아무나 제작할 수 없고 재료가 되는 광물이나 금속 자체도 비싼 것이니, 마나가 가득 담긴 마정석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 안에 들어 있는 마정석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나만 알고 있는 게 좋겠군.’
이자벨라는 도망치기 전 연구실에 있는 모든 마정석을 내게 넘겼다.
그녀는 마정석을 모두 내줄 테니 놀 주술사의 사체만 넘겨 달라고 애원했다.
[그 괴물 시체는 어디다 쓰려고?] [우리 일족은 육체의 권능을 잃어버렸지만, 나에게는 꼭두각시술이 남아 있지. 놀 주술사를 세뇌해 꼭두각시로 만들면 다른 놀까지 통제할 수 있어.]이자벨라가 말하는 꼭두각시술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놀 주술사의 사체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놀 주술사의 사체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놀 주술사의 사체를 주교나 백작에게 넘겨도 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 하지만 이 뱀파이어 계집에게 주면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할 터.’
모든 선택의 기준은 온전히 나의 이득에 달려 있었다.
영주가 말하는 민생이나 교회가 주장하는 정의 따위는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이자벨라가 저 괴물 사체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하건 나는 그 대가만 받아 내면 그만이었다.
[놀 주술사의 사쳇값은 네년의 목숨값과 별개로 받겠다.] [지독한 놈……. 알겠다.]사체를 넘겨받은 이자벨라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 주술사가 들어 있는 시험관은 부피가 크고 무거웠다.
딸랑-.
이자벨라가 핸드벨을 흔들자 강시 두 구가 다가와 시험관을 들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나를 노려본 뒤 네발 강시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언데드라고 했나? 저것 참 유용해 보이네.]나는 멀어지는 이자벨라의 뒷모습을 보며 강시술에 대해 생각했다.
원래 무공에 욕심이 많은 나였지만, 죽은 이의 시체를 부하처럼 부려 먹는 강시술은 특히나 쓸모가 많아 보였다.
‘이자벨라에게 강시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씨알도 안 먹힐 소리겠지?’
나를 상념에서 깨운 것은 아우레오였다.
“테온, 물어볼 게 더 있나요?”
“아, 하나 더 있다. 뱀파이어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줘.”
“뱀파이어……요?”
아우레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마정석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오물을 대하듯 했지만, 뱀파이어는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경하다는 반응이었다.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테온. 마정석도 그렇고 뱀파이어도 그렇고……. 테온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이 아닌데요.”
“정보가 필요해서 그래.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은 법이지.”
“와, 참 멋진 말이네요.”
“그렇지? 내가 만든 말이야.”
아우레오는 감탄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뱀파이어는…… 설명이 좀 길어지겠네요. 차라리 앉아서 이야기하지요.”
“그래.”
아예 자리를 잡고 앉은 아우레오. 그의 설명은 한 시진이 넘게 이어졌다.
나는 뱀파이어가 단순히 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문명을 이루었던 아인종이었다.
“뱀파이어는 본래 세 파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교활한 ‘적혈’과 포악한 ‘암혈’,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는 ‘귀혈’이 있었지요.”
“귀혈(Royal blood)?”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이자벨라는 적혈과 암혈에 대해서만 말했지, 귀혈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네, 뱀파이어 세계의 귀족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하지만 귀혈은 이미 씨가 말랐습니다. 아도나이의 뜻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거든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아우레오의 설명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일단 그냥 들어 보기로 했다.
“지배 계층인 귀혈이 사라진 뒤 적혈과 암혈은 서로 싸웠고, 그 결과 두 파벌 모두 큰 피해를 입었어요. 덕분에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개체 수가 줄었지요. 특히 암혈은 이미 멸종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아우레오의 설명은 이자벨라의 말과 대부분 일치했다. 비록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 보니 견해의 차이는 있었지만, 적혈에 의해 암혈이 와해된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나는 아우레오를 통해 뱀파이어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다. 무려 한 시진을 넘게 떠들어 대다 보니 뱀파이어의 강점과 약점, 특징이나 대략적인 역사까지 알 수 있었다.
“드워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신기한 종족이네.”
“테온은 기억을 잃어 모든 아인종이 생소하게 느껴지시겠지요. 대륙엔 드워프나 뱀파이어 말고도 다양한 아인종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아인종도 있을 테고요.”
“하긴, 이 땅은 구 할이 미개척지라고 했지?”
아우레오의 말에 따르면 이 대륙에서 인간이 차지한 영역은 극히 일부였다.
그나마도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와 광휘를 휘두르는 성기사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인간의 시대가 열렸을 뿐,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각자의 영역에서 부족 단위의 야만적인 삶을 영위했다.
게다가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강력한 힘이었던 ‘신성제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락했고, 현재는 그때보다 오히려 인간의 영역이 줄어든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묻자. 피의 맹세라는 건 뭐지?”
“피의 맹세요? 뱀파이어도 모르는 테온이 피의 맹세를 알고 있다니 신기하네요.”
아우레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어서 설명하라는 뜻으로 턱짓했다.
“피의 맹세는 뱀파이어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단지 입으로 내뱉는 맹세에 불과하지만, 뱀파이어는 그 맹세를 절대 거스를 수 없어요. 아마 뱀파이어를 처음 만들어 낸 저주받은 존재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한 원리는 저도 몰라요.”
“뱀파이어가 피의 맹세를 어기면 어떻게 되는데?”
“재가 되어 흩어져 버려요.”
“……!”
놀라운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