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46
이단심문관의 의식으로 마녀가 죽기 직전, 그녀의 피가 허공에서 그렸던 문양과 똑같았다.
“마을 전체가 마법진이라니, 이게 대체……?”
“도대체 얼마나 거대한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길래!”
마녀가 준비하던 마법이 심상치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산 제물이 필요한 마법치고 약한 마법은 없으니까. 심지어 그 산 제물이 소나 양도 아니고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젊고 신성을 많이 쌓은 사제를 제물로 바치는 마법. 까다로운 조건만큼 무서운 위력의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으리란 건 진작에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어마어마한 크기의 마법진을 발견하니 그 위협이 새롭게 와닿았다.
“큰 성과로군. 고생 많았소, 조사단장.”
“과찬이십니다.”
옐란치노 주교의 칭찬에 조사단장의 어깨가 우쭐했다.
‘진짜 과찬이네. 큰 성과는 뭐가 큰 성과라는 거야.’
따지고 보면 아무 성과도 없는 셈이다. 마녀가 더 강력한 배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죽기 직전 보여 준 문양이 무언가 중요한 의미일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조사단장의 발견은 그 추측에 힘을 보태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결정적으로 저 문양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니, 결국 얻어 낸 건 없는 셈……. 음?’
내가 가야르도 백작의 표정에서 이상한 기미를 읽은 것은 우연이었다.
무척 짧은 순간이지만, 그는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마치 ‘이게 왜 여기서 나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을 스쳐 간 당혹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평소의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것 봐라?’
가야르도 백작은 분명 문양에 관해 무언가 알고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호들갑 떨지 마라. 건물의 배치가 마법진과 비슷할 뿐이지, 진짜 마법진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나.”
“각하는 모르시겠지만, 우리 교구에서는 이미 저것과 똑같은 문양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생포한 마녀가 사망하면서 그녀의 피가 허공에 저 문양을 그렸지요.”
“예하는 그런 중요한 정보를 왜 나에게 공유하지 않았소?”
“그야 각하께서 놀 토벌을 준비하느라 바쁘셨으니까요. 토벌을 마친 직후에는 사교도의 사원으로 추정되는 곳을 몰래 탐색하느라 바쁘셨고요.”
“무어라?”
두 권력자가 날 선 대화를 했다. 하지만 이곳은 영주의 저택. 결국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건 가야르도 백작이었다.
“마녀가 단지 상징적인 형태로 건물을 배치했을 수도 있잖나. 그들은 미신과 징조에 예민한 자들이니.”
백작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본래 마법사나 마녀는 남들이 보기엔 별 의미 없는 배치나 순서 따위에 목숨을 거는 자들. 자기들을 상징하는 문양과 비슷하게 마을의 구조물을 배치했다는 게 마을 전체가 마법진이라는 주장보다 훨씬 그럴싸했다.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 저 문양을 똑같이 베끼고 모든 기사와 병사에게 숙지하게 하라.”
“예, 각하.”
노련한 백작은 이쯤에서 한발 물러서며 상황을 정리했다.
옐란치노 주교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어쨌거나 영주 휘하의 기사들과 교구의 성직자들이 모두 심각성을 깨달았으니 됐다는 반응이었다.
오직 한 사람. 나 혼자만 가야르도 백작의 가식적인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 * *
그날 밤. 나는 은밀히 교회를 빠져나와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경비가 삼엄한 내성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가로지르는 일이지만, 이미 탄탄한 내공을 갖춘 나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곤륜의 하나뿐인 잠행술, 운잠홍(雲潛鴻)의 묘리에 따라 시야의 사각지대만 밟아 가며 빠르게 도시를 가로질렀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인데.’
가야르도 백작이 머무는 저택은 침입하기 어려운 곳이다. 경비병과 시종 들이 잘 짜인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며 빈틈없이 경비하고 있었다.
외벽을 타고 올라가 침입하려 해도, 저택의 창문은 개폐 시 큰 소음이 발생하는 구조였다.
굴뚝으로 잠입하는 방법도 떠올렸지만, 종일 불을 때는 통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손을 써야겠군.’
이렇게 된 이상 경비병과 시종을 제압해 가며 최단거리로 백작의 침실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도시가 시끄러워지겠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찍찍!
“……?”
지붕 위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웬 박쥐 한 마리가 근처로 다가왔다. 박쥐는 날 보며 알은체를 하더니, 잠시 후 수십 마리의 친구를 불러왔다.
“뭐야, 씨팔.”
갑작스러운 박쥐 떼의 등장에 손을 쓰려던 순간, 수십 마리의 박쥐가 한 덩어리로 뭉쳐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이자벨라?”
“쳇, 왜 이렇게 만나기 어려워?”
등장한 인물은 뱀파이어 이자벨라 발렌티누스였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설마 가야르도 백작에게 해코지할 셈인가?”
“무슨 개소리야? 내가 할 일 없이 백작을 왜 죽여?”
“근데 이년이 말하는 싸가지가…….”
내가 몸을 일으키자 이자벨라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물러섰다.
“나, 난 널 만나러 온 거야! 당연한 거잖아!”
“나를? 왜 하필 지금 이런 곳에서?”
“그럼 교회로 찾아갈까? 아니면 백작과 연회 중에 찾아갔어야 해?”
“…….”
생각해 보니 도시로 귀환한 뒤 혼자 있었던 적이 없다.
이자벨라를 다시 만나는 건 북부에 도착해서 아우레오와 헤어진 이후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태평한 생각이었다.
나와의 약속에 목숨이 걸린 이자벨라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 내가 혼자 있는 순간을 계속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미안한데?’
이자벨라를 쳐다보는 내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사파에서 온 용사
가야르도 백작의 비밀 (2)
“마정석 전해 주려고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거냐? 그렇게 막연히 기다리지 말고 신호라도 줬으면 내가 자리를 만들었을 텐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진짜 미안하면 맹세 좀 풀어 줘.”
“지금 마정석을 전부 넘겨주면 맹세는 저절로 풀리잖아.”
“다 가지고 오지 못했어. 다른 지역에 숨겨 둔 것도 있고, 몇 개는 당장 가지고 오지 못할 사정이 있거든.”
“그럼 왜 왔어?”
퉁명스러운 태도에 이자벨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협상을 하러 왔다. 그날은 내가 너무 급해서 모든 마정석을 주겠다고 맹세했잖아.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일부 마정석은 다시 꺼내 오기 힘든 곳에 있어.”
“그건 네 사정이지. 재가 되기 싫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고 가지고 와라.”
“넌 지금 백작의 침실에 들어갈 생각인 것 같은데, 맞지?”
이자벨라가 교태롭게 웃으며 말했다.
“맹세의 내용을 조금만 수정해 줘. 그럼 들키지 않고 들어가게 도와주지.”
“방법이 있나? 들어 보고 결정하겠다.”
구미가 당기는 모습을 보여 주자 이자벨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나는 어둠과 피의 일족. 야음을 틈타 잠입하는 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재주야.”
“잡소리 하지 말고 본론이나 말해.”
그녀는 새빨간 입술을 오물거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저택 동쪽 첨탑에 긴 창문이 있어. 거기로 잠입해.”
“거긴 이미 확인했다. 저택 바깥에서 볼 때 너무 드러나 있고, 창문이 고정식이라 억지로 열면 큰 소리가 날 거야.”
“그건 내가 해결할 수 있어. 봐.”
이자벨라의 한쪽 팔이 거무튀튀한 안개처럼 흩어졌다. 환술인가 싶어 급히 내공을 끌어 올려 심지를 보호했다.
“호호, 쫄기는. 이건 ‘피의 장막’이야. 안개처럼 만들어서 시야를 가릴 수 있고, 소음도 막아 주지. 이걸로 창문 주변을 가려 줄게. 오늘은 달빛도 없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잠입할 수 있겠지?”
‘아오, 놀래라.’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만 봐도 놀라는 법. 마녀의 환술에 크게 덴 후 환술 비슷한 기술만 봐도 깜짝 놀라는 나였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저런 기술을 쓰는 이자벨라를 보며 욕지거리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런 마법 같은 기술은 적혈의 특기 아니었나? 너희 암혈은 육체가 강하다며?”
“이 정도는 뱀파이어라면 당연한 권능이야!”
내가 뱀파이어를 너무 무시하고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피의 장막이라는 기술도 그렇고, 처음 등장할 때 박쥐로 변한 모습도 대단한 재주였다.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권능도 있나?”
“몇 가지가 더 있지. 너한테 말해 줄 이유는 없지만.”
그녀는 모처럼 한 방 먹여 줬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좋다. 제안을 수락하지. 맹세를 어떻게 바꾸길 원하나?”
“내가 꺼내 오기 힘든 곳에 있는 마정석은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줘.”
“그렇게 애매한 조건은 곤란해. 네가 죄다 꺼내 오기 힘들다고 우기면 어떡하라고?”
“넌 뱀파이어를 무슨 사기꾼으로 아는 거야?!”
이자벨라가 짜증을 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조건을 바꿔 주기에는 불명확한 부분이 많았다.
“이렇게 해 줘. 내가 가진 마정석 중 ‘발렌티노플’에 있는 마정석을 제외한 나머지를 달라고.”
“발란티노플?”
“내 고향이야. 지금은 적혈에게 빼앗긴 땅이지.”
“알 만하군.”
이자벨라의 일족 암혈은 적혈에게 패해 뿔뿔이 흩어졌고, 서로의 생사도 모르는 상태라고 했다. 그녀 역시 고향을 급히 떠나야 했고, 그곳에 두고 온 물건이 많이 있을 터다.
“집에 두고 온 마정석을 가져오려면 적혈에게서 발렌티노플을 탈환해야 해. 지금 내 능력으로는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
“좋다. 발렌티노플에 두고 온 마정석을 제외한 나머지만 가져다주면 맹세를 지킨 것으로 인정해 주지. 단, 내가 백작의 침실에 무사히 침입한다면 말이야.”
이자벨라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맹세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바로 들어갈 거지? 먼저 가서 안개를 깔아 둘게.”
“잠깐.”
“……?”
“발렌티노플에 있는 걸 제외하면 내게 줄 마정석의 양이 어느 정도지?”
“지난번에 준 양의 세 배 정도?”
“……!”
지난번의 세 배라면 약 십오 년 치에 해당한다.
처음에 받은 오 년 치와 합치면 이십 년 내공이니, 숲에서 마녀와 목숨 걸고 싸워 얻은 내공의 두 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