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63
스칼렛이 이고르의 등짝을 때렸다. 그녀는 반대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이제 도망칠 필요 없어, 바보야.”
스칼렛은 이제 완전히 마음을 놓은 듯했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흥미진진한 장난기마저 느껴졌다.
이고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스칼렛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강풍과 눈보라 사이로 일단의 기병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혹시……?”
“그래, 맞아.”
이고르의 물음에 스칼렛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원 너머로 나타난 자들은 못해도 백 명은 넘어 보였다. 하나같이 말을 타고 있었는데, 허리 높이까지 쌓은 눈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치며 걸어오는 거대한 전마(戰馬)였다.
뿌우우우…!
기병대가 뿔 나팔을 길게 불었다. 멀리서 들리는 나팔 소리는 마치 우리가 왔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성전사들도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기수들에게 관심이 쏠렸다.
“저놈들은 또 뭐야?”
성전사들은 이유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그들이 상대의 정체를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기병대는 상당히 가까운 위치까지 다가왔다.
히이잉-!
선두에 있던 기수 하나가 앞으로 치고 나왔다.
“아가씨! 무사하셨군요!”
말 등에서 뛰어내린 로라가 스칼렛을 껴안았다.
스칼렛도 활짝 웃으며 로라를 안아 주었다.
“로라! 왜 이렇게 늦었어? 이 커다란 엉덩이가 무거워서 늦었지!?”
“어머, 제 딴엔 최대한 서두른 거라고요!”
스칼렛의 농담 섞인 질책에 로라도 장난식으로 대꾸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녀들 뒤로 전마를 탄 백여 명의 기수들이 다가왔다.
스칼렛 앞에 멈춰 선 기수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곧장 투구를 벗고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레이디 보론초바,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출한 스칼렛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블라토프 공작 가문의 병사들이 도착한 것이다.
* * *
“악!”
맨 앞에서 성수를 뿌리던 신관의 팔이 잘렸다.
나는 운철묵검을 뽑아 들고 놈들을 향해 먼저 달려들었다.
“신관들은 뒤로 물러나시오! 성전사들은 앞으로 나서라!”
“적을 두려워하지 마라! 놈이 날뛰지 못하게 사방에서 압박해!”
성전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진형을 펼쳤다. 이미 몇 명의 신관과 성전사가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나는 포위되지 않도록 발 빠르게 움직이며 대처했다.
“윽! 내 다리!”
또 한 명의 신관이 오금을 붙잡고 바닥을 굴렀다.
상급 성전사가 휘두르는 양손 검을 가뿐히 피한 내가 바닥을 미끄러지듯 다가가 신관의 하체를 공격한 것이다.
“저 쥐새끼 같은 놈!”
“부상자를 진형 밖으로 끌어내라! 신관들은 멀리 떨어져!”
나는 성전사와 정면 대결을 피하며 집요하게 신관만 노렸다.
가뜩이나 신체 능력이 약한 데다 갑옷도 입지 않은 신관은 칼질 한 번에 치명상을 입기 일쑤였다.
이곳저곳에서 신관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전사들의 전력도 분산되었다.
“이 몸이 얼마나 비겁한지 보여 주마!”
껄껄 웃으며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성전사들이 커다란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지만 어렵지 않게 피해 냈다.
원래부터 몸놀림이 빠른 내가 갑옷도 입지 않고 있으니, 둔한 성전사에 비하면 그야말로 바람처럼 움직였다.
검을 휘두르자, 또 한 명의 신관이 팔이 잘리고 비명을 질렀다.
“빌어먹을! 공격 중지! 공격을 멈추고 신관들부터 보호하세요!”
“공격 중지! 신관을 중심으로 진형을 다시 짜라! 방어 대형이다!”
전투의 향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보다 못한 자바니에가 진형을 바꾸도록 명했다.
성전사들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포위 대형을 풀고 신관들을 둘러싸며 방어 대형으로 재집결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이쯤에서 우리도 도망치자! 동생들이 큰일을 당할 수도 있어!]적을 어느 정도 무력화시켰다고 판단한 보브찬친이 강력하게 후퇴를 주장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라 즉시 운해비영을 펼쳐 놈들과 멀어졌다.
이미 대부분의 신관이 팔다리가 잘린 상태. 북부정교회도 명색이 교회인데 저들을 눈밭에 버리고 추격에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부축하든 들쳐 업든 해야 할 테니, 결국 다친 신관의 숫자만큼 성전사들도 전력에서 제외되는 셈이었다.
‘이 정도면 감히 뒤쫓아올 생각은 못 하겠지.’
“저길 보세요! 놈이 도망칩니다!”
성전사들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강둑을 한달음에 내려간 나는 순식간에 구마병단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파에서 온 용사
북부에 부는 피바람
머릿속에 보브찬친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말대로 추격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구마병단은 이미 많은 부상자를 떠안고 있었다. 가벼운 몸으로 혼자 도망치는 나를 추격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북부정교회는 아마 도시에서 검문을 통해 우릴 잡으려 하겠지.”
[캬하핫, 하지만 놈들은 스칼렛의 정체를 모르지. 일단 도시에 들어가면 북부정교회고 나발이고, 누구도 스칼렛을 구속할 수 없다. 덕분에 아이들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고.]보브찬친에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교공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그의 말대로 도시에서 북부정교회가 스칼렛을 연행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를 연행하려 해도 아우레오가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터, 나는 마음 편히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선 아이들이 도망친 방향으로 가 보자. 잘 빠져나갔어야 할 텐데.”
[그러게. 녀석들, 나름대로 숨겨 둔 수가 제법 있는 것 같던데 별일 없겠지?]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경공을 펼쳐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빠르게 이동하며 수색하다 보니, 금방 흔적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이게 뭐야, 구마병단이 더 있었던 건가?”
눈밭을 낯선 발자국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족히 백 명은 넘는 사람이 돌아다닌 흔적이었는데, 심지어 말까지 타고 있었는지 발굽 자국이 빽빽했다.
[설마 동생들이 잡혀간 건 아니겠지?]보브찬친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황급히 발자국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걱정은 안도로 바뀌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앞서가는 무리를 발견한 것이다.
[저 깃발은…….]기수들이 붉은 곰이 그려진 깃발을 앞세우고 윈스크로 향하고 있었다.
보브찬친은 그 붉은 곰 문양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아니, 북부인치고 저 문양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론초바 공작 가문의 사병들이군. 가출한 스칼렛을 데리러 온 건가? 덕분에 추격을 뿌리친 모양인데?]행렬의 중앙, 가장 안전한 위치에 스칼렛이 있었고 그 옆으로 보브찬친의 동생들도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지금 내가 보론초바의 기병대에 합류하긴 좀 그렇고, 일단 윈스크로 돌아가자.”
아이들의 무사를 확인한 나는 경공을 펼쳐 윈스크로 향했다.
* * *
윈스크로 돌아와서, 나는 일단 교회로 복귀했다.
망령인 보브찬친은 교회에 들어가기 두렵다며 교수대에 남았다.
내가 운철묵검에 묻은 피를 닦고 있을 때, 아우레오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테온! 북문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웬 호들갑이야?”
“지금 도시에 난리가 났어요! 큰 싸움이 벌어지려고 한다고요!”
보론초바 가문과 북부정교회가 충돌한 지 고작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도시 전체가 소란스러웠다.
“보론초바의 기병대가 북문으로 우르르 나가더니, 북부정교회 성전사들의 목을 베어 들고 돌아왔어요. 무려 세 명이나요. 테온도 북문에 다녀왔다면서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나는 아우레오에게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망령 보브찬친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단지 사정이 딱한 아이들을 우연히 알게 되어 도와주러 갔었다고 했다.
또한, 스칼렛이 그 아이들을 남몰래 후원하고 있었다는 내용도 전달했다.
“북부정교회가 테온을 마법사로 몰아 체포하려 했다고요?”
“그래, 지난번 자기를 무시한 걸로 앙심을 품었더군. 작심하고 찾아온 모양새였다.”
“그런데 그들이 함께 있던 보론초바의 공작 영애를 몰라보고 공격했고?”
“그렇다니까.”
“오, 이런!”
아우레오의 표정이 복잡했다.
“뭐가 문제야? 내가 보아하니 윈스크 교구와 북부정교회는 언젠가는 부딪힐 관계였다. 오히려 북부정교회가 공작 영애를 공격하는 바람에 명분을 내주었으니, 주교공 입장에서는 이득이지.”
“싸움의 명분이 주교공 예하에게 있다는 건 다행이지만, 문제는 그 명분이라는 게…… 너무 강력해요. 훈련받은 성전사가 죄 없고 가녀린 귀족 여인을 공격한 셈이니까요.”
아우레오가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보론초바 주교공은 이번 사건을 빌미로 북부정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그는 북부정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회의 성기사단을 동원해 소탕에 나섰다.
‘딸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명분이 있으니, 공작 가문의 사병까지 투입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북부정교회는 강제 해산을 당할 겁니다. 그러니 그들도 손 놓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지요. 북부정교회가 결사 항전을 각오한다면, 양쪽 모두 엄청난 피가 흐를 거예요.”
‘어차피 벌어질 싸움 아닌가? 아우레오가 호들갑을 떠는군.’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윈스크 교구와 북부정교회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이니, 언젠가는 사생결단을 내야 했다.
아우레오처럼 머리가 꽃밭에 가 있는 놈은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충돌도 있는 법이었다.
“테온이 중재하면 어떨까요? 당신은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고, 직접적인 연관이 있잖아요? 어쩌면 싸움을 말릴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왜?”
“그러지 말고 도와줘요, 테온. 무고한 이들이 피를 흘린다고요.”
솔직히 말하면, 주교공이 북부정교회를 공격하는 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권력자끼리의 세력 다툼에 무고한 이들이 피를 흘리는 것 또한 인간사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주교공 예하께서 북부정교회 소탕에만 열중하시면, 테온의 마법사 처단도 그만큼 늦어져요. 그런 걸 바라시나요?”
“…….”
생각해 보니 그랬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태평하게 ‘예하, 날씨도 좋은데 마법사 사냥하러 가실래요?’라고 제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도시의 상황이 어떤지 직접 봐야겠다.”
“그러시죠. 함께 가요.”
나는 아우레오와 함께 번화가로 나갔다.
거리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곳곳에 보론초바 공작 가문의 기사와 병사 들이 창칼을 들고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괜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 하나같이 눈을 내리깔고 종종걸음으로 다녔다.
그때, 보론초바 가문을 섬기는 기사가 지나가는 중년인을 붙잡았다.
“거기, 너. 겉옷을 벗어 봐라.”
“왜, 왜 이러시오? 생사람 잡지 말고…….”
중년인이 무어라 따지기도 전에 기사는 그의 겉옷을 양손으로 잡아 찢었다. 겉옷 안에서 북부정교회 신관을 상징하는 목걸이가 나왔다.
“역시 신관이었군. 날 따라와라. 이단자를 모조리 연행하라는 주교공 전하의 명령이다.”
“웃기는 소리! 아무리 기사라도 신을 섬기는 성직자를 마음대로 연행할 수는 없…… 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