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89
하지만 그녀의 눈은 옅은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시체에 환장한 계집 같으니.’
사실 그녀는 드워프들이 무슨 꼴을 당하든, 내가 새로운 무구를 얻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다만, 이걸 빌미로 키클롭스를 사냥하면 그 사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넓은 라프카스산맥을 뛰어다니며 거인 사냥이나 하긴 싫은데.’
키클롭스를 사냥하면 분명한 보상이 따르겠지만, 광활한 라프카스산맥을 개 발에 땀 나도록 돌아다녀야 하는 것에 비하면 그 보상이 조금 약했다.
‘무구는 포기하고 곧장 오덴세섬으로 떠날까? 굳이 무구를 얻기 위해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빨리 영지를 안정화하고 이자벨라와 함께 서부에서 적혈의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게 나을지도…….’
일단 오덴세섬부터 확보하고, 드워프 마을에는 추후에 다시 방문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드워프들은 조금만 더 궁지에 몰리면 알아서 조직을 이루고, 끝내 키클롭스를 몰아낼 터였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사건이 곧장 발생했다.
“영감님들, 큰일입니다! 영감님들!”
회관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리고, 누군가 문짝을 부술 듯이 두들겼다.
“몸을 피해요! 어서요! 키클롭스가 떼거리로……!”
“……?!”
대경한 드워프들이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나와 이자벨라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사파에서 온 용사
난쟁이와 거인 (4)
회관 밖으로 나와서 얼마간 달려가니,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사내들 고함이 뒤섞여 들렸다. 언뜻 들어도 한두 마리의 거인이 쳐들어온 게 아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드워프 장로가 대경해서 외쳤다.
눈앞의 상황은 심각했다. 무려 열 마리의 키클롭스가 제각기 흉기를 들고 날뛰고, 인근에서 모여든 드워프들이 거인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대피해! 다른 집으로 가서 어른들을 불러와! 싸울 수 있는 드워프는 전부 이쪽으로 보내!”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드워프들은 키클롭스의 집단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충돌이 있었다지만, 두 자릿수의 거인이 한꺼번에 쳐들어온 적은 없었다.
“영감님들도 피하시죠! 이쪽으로!”
“아닐세, 다른 젊은이들이 올 때까지 우리라도 힘을 보태야지!”
보다 못한 장로들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싸움에 끼어들려고 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건 용기가 아닌데.’
십여 명의 젊은 드워프가 키클롭스 떼를 상대하고 있지만, 사실 대적한다기보다는 이리저리 뛰며 주의를 끌고 있을 뿐이었다.
키클롭스가 풍차처럼 휘두르는 몽둥이는 일격에 드워프를 죽일 만한 위력이었고, 행동인 굼뜬 노인들이 끼어들어 봤자 피해만 커질 것이다.
“끄악!”
아니나 다를까, 잠깐 멈칫한 사이에 드워프 장로 하나가 하늘을 날았다.
다행히 방패 위로 얻어맞아 즉사는 면했지만,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꼴을 보니 족히 몇 주는 와병해야 할 것 같았다.
“별수 없군.”
“각하, 싸움에 나서려고요?”
보다 못한 내가 난입하려는데 이자벨라가 내 소매를 잡았다. 그녀의 눈이 또다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가능하면 생포해 주세요. 정 어려우면 마지막 한 마리만이라도요!”
“또 그 소리냐? 귀찮게 하네.”
“아이, 그러지 말고 해 주세요. 키클롭스를 생포해서 살펴보면 쟤들이 갑자기 왜 지능이 높아졌는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교활한 이자벨라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다른 드워프 장로들이 놀란 표정으로 주목했다.
“정말 생포해서 살펴보면 원인을 밝힐 수 있나?”
“아마도요? 저는 각하를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사악한 마법을 식별하는 훈련을 받았거든요. 키클롭스들은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확실한 건 생포해서 살펴봐야 알 수 있어요.”
“과연 그렇군!”
입에 침 한 방울 바르지 않고 잘도 지껄여 대는 이자벨라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순전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이 키클롭스의 행동이 비범한 건 사실이니, 정말 정신지배를 받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단 여기서 기다려.”
이자벨라는 이번 싸움에 끼어들 수 없다. 그녀가 쓰는 기술은 특색이 너무 짙어서 단숨에 정체가 들통날 테니까.
결국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재주를 넘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싸우는 게 내 팔자인가.’
나는 신행미종보를 밟으며 전장에 합류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싸움이 벌어지다니, 이제는 무림인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할 때도 된 것 같았다.
“너희도 이만 빠져.”
키클롭스를 쓰러뜨리기에 앞서 일단 궁지에 몰린 드워프들부터 빼냈다.
나름대로 분투하던 드워프들이 덜미를 잡혀 전장 밖으로 날아갔다.
스릉-.
드워프를 모두 빼내고 오랜만에 운철묵검을 손에 들었다.
지난 몇 주간 검을 뽑지 않아서일까? 손아귀에 착 감기는 검병의 감촉이 반가웠다.
그때 키클롭스 하나가 나를 노리고 주먹을 날렸다.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드워프를 빼내는 내가 얄미웠나 보다.
“우아아! 약삭빠른 인간! 너도 죽인다!”
처음에는 열 마리 모두 팔다리만 잘라 생포할까 생각도 했지만, 키클롭스의 우렁찬 목청에 생각을 바꿨다.
인간이 아니니 아혈을 점할 수도 없고, 열 마리가 동시에 괴성을 질러 대면 귀가 떨어져 나갈 것이다.
‘딱 한 놈만 살려 두자.’
무정한 운철묵검이 키클롭스 사이를 누볐다. 태허도룡검의 검로를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칼날에 옅은 검기가 맺혀 있었다.
풀썩, 풀썩-!
묵빛 섬광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아홉 마리의 키클롭스가 목이 잘려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검을 집어넣고, 보법을 펼쳐 마지막 키클롭스의 등 뒤로 돌아갔다.
휘릭-.
거인의 등에 매달려 양팔로 놈의 목을 단단히 감았다. 목덜미가 어찌나 굵고 탄탄한지 황소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꾸엑!”
목을 잡힌 키클롭스가 빠져나가려 발광을 해 댔다. 솥뚜껑 같은 주먹으로 자기 목덜미를 쿵쿵 때리며 어떻게든 조르기를 풀어내려 했다.
‘소용없다, 이놈아.’
이미 내 몸에는 희미한 종학금룡기가 흐르고 있었고, 아무리 괴력을 가진 키클롭스라도 강철 같은 호신기를 맨주먹으로 뚫지는 못했다.
“끄으으……!”
이내 마지막 키클롭스의 눈이 뒤집히며 거품 끓는 소리를 냈다. 놈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나는 키클롭스가 죽기 전에 서둘러 목을 풀고 머리를 받쳐 뒤로 눕혔다.
“한 놈은 살려 뒀다.”
“꺄악! 정말 고마워요, 각하!”
이자벨라가 기절한 키클롭스를 보며 폴짝폴짝 뛰었다.
반면, 드워프들은 눈알이 빠질 듯 눈을 부릅뜨고 입을 쩍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이자벨라는 생포한 키클롭스의 눈꺼풀을 뒤집고, 몸 여기저기에 바늘을 꽂는 등 갖은 실험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역시라면?”
“확실해요. 키클롭스의 배후에 이들을 조종하는 흑막이 있어요. 마법사인 것 같네요.”
“마, 마법사!”
이자벨라의 말에 드워프들이 동요했다. 그 와중에 이자벨라는 나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혈마법이에요. 아무래도 범인은 적혈의 뱀파이어 같아요.
그녀의 눈짓만 봐도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표정에서부터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복수를 위해 인간과 손을 잡은 이자벨라에게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부에 사는 적혈의 뱀파이어가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하필 드워프의 영역을 침범하며 세력을 넓히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키클롭스의 배후에 놈들이 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배후를 알아냈으니, 이후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키클롭스의 배후에 마법사가 있다니, 교회의 수호자이자 드워프의 친구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지금 당장 척살에 나서겠다.”
“각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내가 결연하게 외치자 드워프들이 감격했다. 심지어 몇몇 젊은 드워프들은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나설 정도였다.
‘연기가 과했나?’
요즘 영웅 역할에 익숙해진 탓에 웅변을 너무 잘해 버렸다.
적혈의 뱀파이어를 만나면 이자벨라의 정체가 드러날 텐데, 드워프들이 쫓아와서 알게 되면 여러모로 낭패였다.
“너희들은 마을에 남아서 부상자를 수습하고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라. 배후의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내 시녀와 뚱보…… 아니, 부프테만 데리고 가도 충분하다.”
청년 드워프들은 전투에 별다른 재주도 없으니, 따라와 봤자 방해만 된다.
엉겨 붙는 드워프들을 뿌리치고 마을을 벗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걸음이 느린 뚱보도 두고 가고 싶었지만, 언데드인 뚱보만 드워프들 곁에 두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자벨라, 키클롭스의 배후에 적혈의 뱀파이어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놈을 어떻게 추적하지?”
“일단 키클롭스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돼요. 키클롭스의 근거지를 찾아가면 놈을 만날 수 있겠죠.”
적혈의 뱀파이어가 숨어 있는 위치는 모르지만, 거인의 흔적을 되짚어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키클롭스는 커다란 덩치에 걸맞게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며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쿵……. 쿵…….
발자국을 따라가는 동안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키클롭스 몇 마리와 마주쳤다.
-각하, 싸우지 말고 그냥 가요.
이자벨라가 눈짓으로 싸움을 말렸다. 정신지배에 걸린 키클롭스를 죽이면 배후의 혈마법사가 알아챈다는 것이다.
나는 이자벨라의 의견에 따라 운잠홍으로 기척을 숨기고 키클롭스의 눈을 피해 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큰 산봉우리를 두 개나 넘었을 때, 우리는 드디어 혈마법사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장소를 발견했다.
“협곡에 자리를 잡았군. 절묘한 장소를 잘도 찾았네.”
두 절벽이 만나 교차하는 지점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나무와 바위, 절벽이 교묘하게 가려 주어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이상 바로 옆을 지나가도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위치였다.
오두막 주변에는 키클롭스가 네 마리나 서성이고 있었는데, 마치 경비병처럼 사방을 경계하는 걸 보니 정신지배에 단단히 걸려든 모양이었다.
“각하, 어쩌죠? 오두막에 접근하려면 키클롭스를 처리해야 하는데, 큰 소란이 일어나면 혈마법사는 분명 도망칠 거예요.”
“키클롭스 넷 정도는 내가 금방 처치할 수 있다. 그동안 네가 놈의 도주를 막아 줘야 해. 할 수 있겠나?”
내 말에 이자벨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복수만 바라보며 살아온 그녀였지만, 역시 적혈의 뱀파이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해 보였다.
이미 적혈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까지 있어서 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