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90
“알겠어요. 해 볼게요.”
“그래, 잠깐만 붙잡아 두면 된다. 너무 긴장하지 마. 상대는 기습에 당황할 테니, 전력을 발휘하지 못할 거야.”
나는 잠깐 심호흡하고 운해비영을 펼쳐 최고속으로 쇄도했다.
‘일단 한 마리!’
첫 키클롭스는 내 접근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목이 잘렸다. 심지어 두 번째 키클롭스도 운철묵검이 목에 닿기 직전에야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챘다.
“우워어어어!”
세 번째 키클롭스가 고함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비룡축전을 펼쳐 빠르게 접근했다.
운철묵검이 놈의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 오두막의 지붕이 박살 났다.
와장창!
지붕을 뚫고 튀어나온 혈마법사는 온몸을 시커먼 로브로 가리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더니, 키클롭스가 셋이나 죽은 걸 보고 미련 없이 도망을 시도했다.
파드드득!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박쥐로 변해 흩어지는 혈마법사. 그 정체는 역시 뱀파이어였다.
혈마법사와 똑같이 박쥐 떼로 변신한 이자벨라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공중에서 수십 마리 박쥐가 뒤엉켜 싸우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나는 마지막 키클롭스에게 일 검을 날렸다. 검기를 진하게 머금은 운철묵검은 키클롭스를 썩은 무처럼 두 동강 내 버렸다.
“이자벨라, 물러서라!”
키클롭스를 모두 처치했으니 다음은 뱀파이어 차례다.
나는 답허성실을 펼쳐 공중으로 솟구치며 외쳤다.
“비키지 않으면 너도 휩쓸린다!”
내 경고에 뒤엉켜 싸우던 박쥐 중 절반이 황급히 흩어졌다.
나는 공중에서 우왕좌왕하는 박쥐 떼를 향해 창룡후부터 터뜨렸다.
“파!”
그와 동시에 선운비뢰장이 번개같이 펼쳐졌다.
퍼퍽! 퍼퍼퍼퍽! 퍼퍼퍼퍼퍼퍼퍽!
타격이 적중할 때마다 점점 빨라지는 선운비뢰장의 연환 공격.
허공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던 수십 마리 박쥐도 그 신묘한 묘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박쥐가 장법에 얻어맞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살고 싶으면 원래 모습을 드러내라!”
나는 박쥐 떼를 쫓아 하강하며 다시 한번 선운비뢰장을 준비했다.
박쥐들도 같은 기술에 한 번 더 당하면 죽는다는 걸 알았는지, 급히 한곳으로 뭉치며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웬, 웬 놈이냐!”
“문답무용!”
“컥!”
정체를 묻는 혈마법사.
나는 대답 대신 놈의 품으로 파고들어 파쇄추부터 먹였다. 팔꿈치가 상대의 가슴뼈를 부수는 게 느껴졌다. 치명상을 입고 추락한 혈마법사가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사파에서 온 용사
카심 발렌티누스
타탁!
혈마법사를 가볍게 제압하고 땅으로 내려왔다. 상대가 용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히 무력화시켰다고 생각했다.
‘흉골을 부쉈으니 말을 할 수 없을 테고, 당연히 주문을 외우지도 못할 것이다. 설령 용처럼 주문 없이 마법을 펼치더라도 기미가 보이는 순간 창룡후로 방해하면 돼.’
이미 마법사를 상대하는 데 요령이 붙은 나였다.
파블로처럼 주문도 없이 마법을 쏟아 내는 상대가 아니라면, 어지간한 마법사는 더 이상 내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꺅! 잡았다! 드디어 잡았어!”
내가 혈마법사를 제압한 직후 이자벨라도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펄쩍펄쩍 뛰며 소리를 질러 댔다. 적혈의 뱀파이어를 생포하다니, 그녀에게는 꿈같은 일일 터다.
“각하, 이놈의 마력을 흡수하고 나에게 산 채로 넘겨주세요! 죽이는 건 내가 할게요! 아니지, 그 전에 고문부터 해야지! 아주 천천히, 발끝에서부터 조각조각…… 어라?”
신이 나서 떠들던 이자벨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혈마법사의 로브 안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왜 그래?”
“…….”
이자벨라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분노와 경멸, 연민과 당혹감 등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죠?”
“……콜록!”
이자벨라의 물음에 혈마법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뼈가 주저앉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으으…….”
혈마법사는 떨리는 손으로 품을 뒤적거렸다. 제압하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일단 하는 행동을 두고 보기로 했다. 이자벨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알던 사이인가?’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혈마법사는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 내부에는 붉은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는데, 혈마법사는 힘겹게 뚜껑을 열고 붉은 액체를 벌컥벌컥 마셨다.
우둑, 우두둑!
액체를 마시자마자 혈마법사의 몸에 변화가 시작됐다. 함몰된 가슴뼈가 제자리를 찾고 혈색도 돌아왔다. 호흡도 금방 안정됐다.
“누, 누구냐……? 누구인데 날 습격하는 거야? 가만 보니 너희는 적혈의 뱀파이어도 아닌데?”
“내 얼굴을 잊었나요?”
당황한 혈마법사 앞에 이자벨라가 나섰다. 인간으로 위장한 그녀가 얼굴을 덮은 색조 화장을 마구 문질러 지웠다.
그 모습을 본 혈마법사도 표정이 변했다.
“……이자벨라?”
“맞아요.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이자벨라가 혈마법사의 이름을 말했다.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요, 도망자 카심.”
* * *
“아는 놈이야?”
“아주 잘 알죠. 인간식으로 표현하자면, 이자는…… 나의 외할아버지거든요.”
그 말은 즉, 이놈이 적혈의 뱀파이어가 아니란 뜻이었다. 이자벨라와 같은 일족이라면 이놈도 암혈의 뱀파이어일 테니까.
내가 둘의 관계에 놀라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카심이라 불린 혈마법사도 놀라고 있었다.
“이자벨라, 너 살아 있었냐? 게다가 저자는 누구야? 각하라니?”
“나를 알아보자마자 할 말이 겨우 그거예요? 무릎 꿇고 사죄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자벨라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터져 나오는 분노와 눈물을 간신히 삼키고 있는 듯했다.
“적혈의 침공에 맞선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혼자 살겠다며 도망쳐 버린 주제에! 아직도 뻔뻔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어?!”
“흥, 그럼 죽을 게 뻔한 싸움에 바보처럼 뛰어들란 말이냐? 그날의 옥쇄는 멍청한 짓이었다. 나라도 살아야지.”
“이 개자식이 아직도……!”
“자 자, 둘 사이의 해후는 그쯤하고.”
두 흡혈귀의 싸움이 격해지는 것 같아 내가 끼어들었다.
나는 일단 가장 중요한 것부터 확인했다.
“너, 이름이 카심이라고 했나? 네놈도 이자벨라와 같은 암혈의 뱀파이어냐?”
“그렇다. 내 이름은 카심 발렌티누스. 암혈의 후예이자 꼭두각시술의 전승자…….”
“그 입 닥치지 못해! 당신처럼 비겁한 뱀파이어가 무슨 암혈의 후예야! 꼭두각시술도 허락 없이 훔쳐 배운 주제에!”
이자벨라는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끼어들어 소리를 질러 댔다. 붉게 충혈된 눈과 이마에 도드라진 혈관을 보니 어지간히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이 어린 계집이 듣자 듣자 하니까…….”
“어이.”
성질을 내려던 카심은 자기 목에 닿은 운철묵검을 느끼고 즉시 멈췄다. 그는 금방 감정을 추스르더니 양손을 들어 올렸다.
“말로 하자고, 말로.”
이 늙은 뱀파이어는 한눈에 보기에도 이기적이고 교활한 성품을 가졌다. 하지만 그만큼 상황 파악이 빠르고 행동에 눈치가 있었다.
“너와 이자벨라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대충 알겠다. 하지만 난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어. 나에게 중요한 건 네놈이 혈마법을 사용할 수 있느냐지.”
“혈마법은 왜……?”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난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칼끝을 카심의 얼굴 앞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카심은 불쾌해하면서도 차마 칼을 밀어 내지 못했다. 내 표정이 농담하는 표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혈마법을 다룰 수 있다. 단순히 마력만 따지면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기술적인 부분은 꽤 완숙하지.”
“이자벨라에게 듣자 하니 너희 암혈은 육체의 권능을 사용하고, 최근에는 그것조차 잃었다면서? 그런데 넌 어떻게 피의 권능이 필요한 혈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
“그게 사연이 좀 복잡한데…….”
카심의 설명은 장황했지만, 요약하면 간단했다.
암혈이 멸망한 뒤 대륙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던 카심은 우연한 기회에 미성숙한 적혈의 뱀파이어와 마주쳤고, 일대일 사투를 벌인 끝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포한 적혈의 뱀파이어에게 온갖 잔혹한 고문과 실험을 자행한 끝에 능력을 일부 빼앗은 것이다.
“그놈을 고문해서 혈마법 주문도 알아내고, 마법진을 활용해서 피의 권능도 약간 훔쳤지. 최근에는 그렇게 빼앗은 피의 권능을 발달시키는 것에 집중하고 있고.”
“당신이 피의 권능을 얻었다고……?”
이자벨라는 혼란스러운 반응이었다.
일족의 존망을 건 싸움에서 도망쳤던 배신자 카심이 피의 권능을 손에 넣었다.
비록 아직은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중요한 씨앗이 심어진 셈이다. 능력을 갈고닦으면 적혈처럼 능수능란하게 혈마법을 구사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이게 대체…….”
“삶이란 게 원래 그렇게 얄궂은 거야.”
일족의 복수에 모든 것을 바친 이자벨라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자기 혼자 살겠다며 도망쳤던 카심은 일족 부흥의 단초를 쌓고 있었다.
카심은 아무 사명감 없이 자기 생존을 위해 저지른 일이지만, 인생이란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입만 벙긋거리는 이자벨라를 뒤로하고 카심에게 바짝 다가갔다. 어쨌거나 카심이 혈마법을 사용한다는 걸 확인했으니, 나도 내 할 일을 해야 했다.
“너에게 사적인 원한은 없다.”
“그게 무슨…… 웁!”
왼손으로 카심의 면상을 덥석 잡았다.
카심이 내 손을 뿌리치려 파닥거렸지만, 그의 힘으로는 어림없는 짓이다. 설령 마법을 쓰려고 해도 즉시 창룡후로 파훼해 버릴 셈이었다.
“마력을 내놓아라.”
흡성대법을 끌어 올리자 노궁혈에서 천천히 흡기가 발생했다.
자기 마력이 딸려 가는 걸 느낀 걸까? 카심이 아까보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소리를 질렀다.
“잠, 잠깐! 이러지 마! 협상을 하자!”
“각하, 잠시만! 멈춰!”
카심의 저항은 상관없지만 이자벨라까지 말리는 탓에 잠깐 흡성대법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