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88
보나 마나 뻔했다. 철부지 드워프 여럿이 우르르 몰려가 키클롭스에게 덤볐다가, 호되게 당하고 절벽 위로 도망쳤겠지.
“키클롭스가 그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요. 아무리 거인종이라지만 드워프 십여 명이 고작 두 마리에게 쫓겨 도망 다닐 줄이야…….”
설명하던 다레스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혈기 왕성한 젊은 드워프에게 첫 패배는 뼈아픈 경험이었다.
드워프가 아무리 힘이 장사라도 거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은 두란처럼 전투에 능한 것도 아니었고, 순전히 쪽수와 근력만 믿고 거인에게 덤볐으니 패하는 게 당연했다.
‘목숨이라도 건진 게 다행이로군.’
구원받은 다레스도 같은 생각인지, 괜히 나선 걸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곁눈질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니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합니다. 우릴 몰아붙인 그 키클롭스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게 혹시 저놈이야?”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키클롭스 한 마리가 머리통이 날아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오는 길에 귀찮게 치근대길래 죽여 버린 그놈이다.
“마, 맞는 것 같은데요? 이 몽둥이나 허리에 두른 곰 가죽도 낯익고…….”
“원래는 두 마리였다며? 그럼 이 근처에 한 마리가 더 있다는 말이네?”
드워프들은 어안이 벙벙해 무어라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기들을 그토록 매섭게 몰아붙이던 괴력의 거인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흙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심지어 시녀라는 계집은 눈을 반짝이며 나머지 한 마리를 언급했다. 마치 만나기를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각하, 혹시 나머지 한 마리를 마주치면 제발 생포해 주세요!”
“새, 생포요?”
이자벨라의 말에 드워프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사파에서 온 용사
난쟁이와 거인 (3)
“생포하면? 네가 무슨 재주로 저렇게 큰 덩치를 마을까지 끌고 가려고?”
“각하께서 키클롭스의 사지를 부러뜨려 주시면, 부프테가 수레에 실어 옮겨 줄 거예요. 그렇지, 부프테?”
‘부프테?’
이자벨라의 물음에 뚱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뚱보에게 급조한 이름을 붙인 모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부프테는 뚱뚱한 남자라는 뜻이었다.
“상황 봐서 결정하지.”
“감사해요, 각하.”
이자벨라는 내가 단칼에 거절하지 않은 것에 만족했는지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다레스를 비롯한 젊은 드워프들은 우리 대화를 들으며 놀란 표정이었다.
“설마 각하께서 이 키클롭스를 사냥한 겁니까?”
“사냥……이라기보다는 그냥 한 방 먹여 준 거지. 자꾸 시답잖은 질문이나 하면서 귀찮게 하길래.”
“각하의 무기는 검이 아닙니까? 한데 이 상처는 검이 아니라 공성추나 투석기에 맞은 것 같은데요.”
“주먹으로 때려죽였다.”
“……용살의 기사라더니, 과연 신력을 타고나셨군요!”
다레스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보니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드워프들은 북부의 용살대전을 비롯해 나에 관한 소문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
다레스가 말하기를, 절벽 동굴에 갇혀 있던 드워프뿐만 아니라 라프카스산맥의 모든 드워프는 나를 모를 것이라고 했다.
벌써 일 년 가까이 산맥에 고립된 채 지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내 명성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겠군.’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는 붉은 모루 마을에 도착했다.
* * *
도착한 붉은 모루 마을의 모습은 내 예상과 달랐다.
손재주 좋은 드워프의 도시답게 웅장한 성채와 정교한 장식을 기대했는데, 성채는커녕 마을다운 모습도 없었다.
붉은 모루 드워프들은 넓은 산봉우리에 가족 단위로 흩어져 살았고, 종종 용건이 있을 때만 서로의 집에 방문하는 식으로 만남을 가졌다.
십여 년 전, 일족의 절반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전염병의 공포가 그들에게 밀집 거주를 꺼리게 만들고 있었다.
“다만, 요즘 들어 통합 도시 건설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키클롭스의 공세가 거세지는 만큼 우리도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으니까요.”
실제로 장로들끼리 몇 차례 회의를 열어 심도 깊게 논의하기도 했단다.
다레스의 설명을 들으며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가 거의 오천 명 가까이 살고 있는데, 그깟 미개한 거인들을 상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거였군.’
드워프는 재주가 많은 종족이지만, 이런 식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힘들다.
심지어 그 침입자가 드워프보다 훨씬 크고 강한 키클롭스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저곳이 장로 회관입니다, 각하. 저희 부족의 노인들이 머무는 곳이지요.”
마을 같지도 않은 마을을 한참 가로질러 도착한 곳에는 아담한 석조 건물이 있었다.
반듯하게 자른 돌을 정교하게 쌓아 만든 회관은 투박하면서도 주변의 울창한 수림과 잘 어울렸다.
네모반듯한 모양의 건물이었는데, 벽면에 망치와 모루 문양이 양각으로 돋아 있었고, 주변에 화로를 배치해 이끼가 끼는 걸 방지했다.
실용적이면서 안정감이 느껴지는 건물만 보아도 붉은 모루 드워프의 손재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이 작정하고 도시를 건설하면 순식간에 성채를 세우겠지. 다른 문명이 없는 라프카스산맥 일대를 평정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거야.’
역병에 대한 공포로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않았으면, 드워프들이 키클롭스 따위에게 위협을 당할 일은 애초에 없었다. 종족의 단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대목이었다.
‘나약한 인간이 이 험난한 세계에서 끝없이 영역을 넓히는 건 빠른 도시화와 그 도시를 유지할 수 있는 정치체제 덕분인지도 모르겠군.’
중원에서 지낼 때는 몰랐지만, 이곳에서 다양한 아인종과 제각각 다른 형태로 발전한 통치 방식을 구경해 보니 새삼 인간의 사회성이 대단한 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드워프처럼 힘이 세거나 기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뱀파이어나 용처럼 초자연적인 권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탁월한 단결력과 발달한 사회 체제를 기반으로 인간은 그 어느 종족보다 거대한 도시를 세우고, 강력한 군대를 조직했다.
가진 것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발전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켜보니, 앞으로도 인간의 황금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영감님들, 밖으로 좀 나와 보슈! 귀한 손님을 모셔 왔소!”
“으응? 이 목소리는 다레스 아니냐?”
다레스의 부름에 회관의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것은 적발, 적염이 거의 회색으로 변한 늙은 드워프들이었다.
드워프 장로들은 돌아온 젊은이들을 보며 반갑게 외쳤다.
“다레스! 무사히 돌아왔구나! 한참이나 소식이 없길래 죽은 줄 알았다!”
“죽긴 누가 죽는다고……. 내가 뭐라고 했소? 건방진 외눈박이 거인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온다고 하지 않았소?”
“저, 정말 키클롭스들과 싸워 이기고 돌아온 게냐? 놈들을 혼쭐내고 온 게야?”
“크흠, 그런 건 아니고…….”
다레스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물러섰다. 그러고는 나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사실 나를 비롯한 원정대는 키클롭스에게 패해 절벽 동굴로 몸을 피해야 했소. 맥주는커녕 물 한 잔도 없는 동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갇혀 있었지. 여기 계신 테온 크로우 백작 각하께서 키클롭스를 쓰러뜨리고 우리를 구해 주셨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수다.”
“백작 각하라고?”
다레스의 거창한 소개에 장로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나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내가 백작이란 건 중요한 게 아니고.”
드워프 장로들 앞에서 인간 세계의 작위를 내세울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확실하게 호감을 살 방법이 있으니까.
“나는 이곳에 인간 귀족이 아닌 드워프의 친구로서 방문했다. 붉은 모루 부족의 전사, 두란 레드앤빌이 나와 함께 싸운 전우지.”
“두란? 바릭의 아들 두란 말인가?”
“자기는 대장장이가 아니라 전사가 되고 싶다면서, 친구들과 함께 가출한 그 천방지축 두란?”
드워프 장로들이 두란의 이름에 알은체를 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뚱보의 등짐을 뒤적여 두란의 선물을 꺼냈다.
정교하게 세공된 도낏자루 장식이 오랜만에 햇살 아래에서 반짝였다.
“두란이 내게 준 우정의 징표다. 대륙 어디서든 붉은 모루 드워프에게 이 징표를 보여 주면 손님으로 맞이할 거라더군.”
“어디 봅시다, 각……하.”
장로 중 한 명이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손에 있던 세공품을 받아 갔다.
그들은 세공품을 한참이나 돌려 보더니 이내 경계심을 풀고 나를 손님으로 맞이했다.
“분명 우리 부족의 전통 방식으로 만든 세공품이군요. 두란의 친구라면 우리 부족의 손님이지요. 우선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각하. 두란 녀석이 괴짜이긴 했지만, 설마 인간과, 그것도 백작 각하와 친구가 되었을 줄이야…….”
“아, 두란과 처음 만났을 땐 나도 평민이었어.”
“……?”
내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드워프 장로들.
그들이 앞뒤 사정을 이해한 것은 실내에서 한참이나 대화가 오간 뒤였다.
* * *
“놀랍군요. 이백 년 가까이 살아온 저도 각하에 비견할 영웅담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알겠으니까 내 얼굴에 금칠은 그만하지.”
기나긴 소개가 끝났다.
내 소개는 낯 간지러워하는 나를 대신해서 이자벨라가 전담했고, 그녀는 의외로 이런 게 적성에 맞는지 음유시인처럼 장황하게 나의 일대기를 늘어놓았다.
드워프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입을 헤 벌리고 그 장엄한 서사시를 듣고 있었다.
‘이거야 원, 촌뜨기 등쳐 먹는 사기꾼이 된 기분이네.’
이자벨라는 안 그래도 목소리며 말투가 끈적하고 교태로운데, 시녀랍시고 모시는 귀족의 자화자찬을 계속 늘어놓으니 사짜 냄새가 풀풀 풍겼다.
“각설하고, 두란과 붉은 모루 용병단은 모두 잘 지내고 있다. 최소한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은 그랬어. 오르샤바의 놀 토벌전에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가야르도 백작에게 굵직한 일거리도 받고 있었지.”
“다행이군요. 두란 그 녀석, 태생이 대장장이인 놈이 난데없이 전사로 출세하겠다며 마을의 청년들을 이끌고 떠나 버려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태생이 대장장이라기엔 제법 잘 싸우던데? 붉은 모루 용병단은 놀 토벌전에 참여한 여러 용병단 중에서도 가장 강한 집단이었다.”
내 말에 주위의 젊은 드워프들이 ‘오오’ 하며 감탄했다. 그들의 눈은 선망으로 빛났고, 늙은 드워프들은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지켜보고 있었다.
“두란 녀석, 용병단 이름을 붉은 모루라고 지었습니까?”
“그렇다. 자기 뿌리를 잊지 않고 용병단 이름으로 지었으니 기특하지 않나?”
“형편없군요. 모름지기 용병단 이름이면 최소한 ‘우정과 낭만’ 정도는 넣어야 하는데.”
“…….”
두란의 괴악한 작명 감각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각하께서 두란에게 징표를 받아 오셨으니, 마땅히 원하는 무구를 만들어 드려야 하는데…….”
“하는데?”
“지금은 여건이 좀……. 아시다시피 저희 마을은 키클롭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리면 더 자주 찾아오는 것 같아요.”
결국, 당장은 무구를 만들어 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약속을 지키라며 생떼를 쓸 수도 없는 것이, 망치질을 하면 키클롭스가 찾아온다니 이들에게는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무구를 받기 위해 내가 주변의 외눈박이 거인들을 쓸어버려야 하나?’
결국 또 몸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짧은 생각에 잠겼다.
키클롭스의 개체 수를 대폭 줄이면 드워프들이 무구 제작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는 길에 한 마리를 상대해 보니 키클롭스는 내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각하, 드워프의 작업 여건 보장을 위해서 각하께서 나서시면 어떨까요? 인근의 키클롭스들을 몽땅 사냥하면 무구 제작에 애로가 없을 거예요.”
이자벨라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