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98
주민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이미 수차례 반격을 시도했고, 처참한 실패를 맛본 상태였다. 수년간 계속된 식민 통치와 노예 생활에 희망마저 꺾여 버린 것이다.
“이웃이 죽는 꼴을 보는 건 지긋지긋해.”
“그럼 계속 이렇게 살겠다는 말인가? 발가벗은 노예의 모습으로?”
“방법이 없는 걸 어떡해? 당신처럼 뭐라도 할 것처럼 칼 들고 설치던 녀석들, 전부 죽었어. 산 채로 가죽이 벗겨졌다고.”
주민들에게는 패배주의와 체념만 남았다.
무기를 들고 맞서 싸우던 자들은 이미 목숨을 잃었고, 아직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순응하며 굴복한 사람뿐이었다.
“이런 한심한……!”
내가 역정을 내려는 와중에 멀찍이서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기병대가 다가오는 것 같은데, 말발굽 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각하, 그 녹인이란 놈들이 오는 것 같은데요?”
“일단 은신해서 지켜보는 게 어떻겠나?”
나는 두 뱀파이어의 조언을 무시하고 제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주민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먼지구름을 보고 허둥지둥 일터로 돌아갔다.
“크로우 백작이라고 했지? 당신, 죽고 싶지 않으면 칼 버리고 바닥에 엎드려!”
“난파당한 선원이라고 해. 그럼 저들이 일거리를 주고 목숨도 살려 줄 거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잖아!”
몇몇 주민이 조언이랍시고 몇 마디 던지는 꼴이 비할 데 없이 구차했다.
이윽고 발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취익-!
듣기 싫은 숨소리와 함께 나타난 몬스터의 생김새는 듣던 것과 똑같았다.
녹색 피부에 건장한 몸, 대가리는 돼지와 비슷했다.
제각기 무기도 들고 있었는데, 나무 몽둥이 따위가 아니라 철제 도끼나 창이 대부분이었다.
체격을 보니 백병전에서 평범한 인간 병사보다는 몇 수 위로 보였고, 커다란 멧돼지를 타고 떼를 지어 다니는 걸 보면 기병 전술도 사용할 것 같았다.
‘오덴세섬에서 저것들을 막아 내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되는군.’
오덴세섬은 상비군 없이 주민들끼리 지내는 섬이었다. 겔라구스 왕국에서는 영지 관리인을 파견해 매년 세금만 거두었을 뿐, 병력을 배치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거구에 기병까지 운용하는 몬스터 떼를 막아 내지 못한 건 당연했다.
내가 그들의 첫인상을 평가하고 있을 때 몬스터 한 마리가 멧돼지를 몰아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
몬스터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껄였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당신한테 누구냐고 묻고 있어. 저들은 우리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으니,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대답하고 바닥에 엎드려.”
아까 조언했던 주민이 내 쪽으로 다가와 통역했다.
그는 억지 미소를 띠며 몬스터에게 굽신거리더니, 내 목덜미를 잡아 강제로 꿇어앉히려 했다.
“엎드리라니까? 제길, 힘이 왜 이렇게 센 거야?”
그는 한참 낑낑대며 힘을 쓰더니, 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포기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빌어먹을, 사람이 죽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는데……!”
투덜거리며 몸을 돌린 사내는 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몬스터가 창을 뻗어 그를 겨눴기 때문이다.
“@@@@@@@?”
“저, 저도 모릅니다요……. 갑자기 나타났습니다요.”
“@@@@@@@@.”
“히익,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몬스터는 징그럽게 웃더니 창을 치켜들었다. 무딘 창에는 다른 짐승의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
“악!”
몬스터의 창이 주민을 꿰뚫기 직전, 내 손이 움직였다.
금룡십팔해를 펼쳐 상대의 창을 비껴 내고, 진각으로 땅을 강하게 디뎠다. 앞으로 곧게 뻗은 주먹에서 권풍이 쏘아졌다.
펑!
몬스터의 머리통이 사라졌다. 거칠게 뜯긴 모가지에서는 거무죽죽한 피가 삐죽삐죽 솟았다.
“@@@@!”
“@@@@@@!”
옆에서 지켜보던 몬스터들이 멧돼지 옆구리를 박차며 돌격했다. 동료의 죽음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덤벼드는 모습. 대단히 호전적인 종이었다.
나는 신행미종보를 밟으며 녹색 괴물을 하나씩 척살했다.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어떤 놈은 주먹으로, 어떤 놈은 장법으로, 어떤 놈은 각법으로 머리를 날려 버렸다.
“@@@@!”
절반 정도를 죽이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멧돼지 고삐를 당겼다.
녀석들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달리기 시작했다. 후퇴하는 것이다.
“살려 보낼 것 같으냐?”
답허성실을 펼쳐 공중으로 솟구쳤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괴물의 모습이 마치 윈스크 빈민가에서 내게 덤볐던 건달 패거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같은 선물을 주어야겠지.”
공중에서 지풍을 마구 쏟아 냈다. 유성우처럼 퍼붓는 지풍이 피 분수를 일으켰다.
“케에에엑!”
“끄아아악!”
언어는 달라도 비명은 비슷했다. 마을에 찾아왔던 십여 마리의 몬스터는 그들이 타고 온 멧돼지와 함께 사체가 되었다.
타탁.
놈들을 쓸어버리고 사뿐히 지상에 착지했다.
주민들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린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주민들을 보며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다. 영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니.”
“……고마울 게 없다고?”
사람들의 반응은 이번에도 내 예상과 달랐다. 수군대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더니, 이내 나를 성토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저들을 죽이면 어떡해! 이 멍청한 놈아!”
“이런 빌어먹을, 이래서 귀족 놈들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돼!”
“이제 끝장이야! 반란을 일으켰으니 녹인들이 우리를 다 죽일 거라고!”
주민들은 오히려 나를 비난했다.
나 때문에 자기들이 다 죽게 생겼다며 이기적이고 영웅놀이에 심취한 철없는 귀족 청년으로 매도했다.
“무책임한 놈!”
“백작이라고 밝혔을 때 우리 손으로 붙잡아서 저들에게 바쳤어야 하는 건데!”
“으으, 인제 어쩌지? 도, 도망쳐야 하나?”
주민 일부는 나를 향해 적나라한 미움을 드러냈고, 일부는 벌써 보복의 두려움에 휩싸였다.
수십 명의 주민 중 나와 함께 몬스터에게 맞서 싸우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인간들이란.”
이자벨라가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다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끈적한 목소리로 자기 의견을 말했다.
“각하는 웅변에 능하잖아요? 저들은 감정이 격동하고 있으니 말 몇 마디로 휘두를 수 있을 거예요. 억눌러 둔 분노를 이끌어 전투 참여를 유도하는 게 어때요?”
옆에서 듣고 있던 카심은 고개를 젓더니 다른 의견을 냈다.
“저들은 이미 공포에 잡아먹혔네. 차라리 몬스터가 없는 해안으로 이주시킨 뒤 사자갈기 용병단에게 감시를 맡기게. 시간이 흐르고, 안전을 확신하면 제정신을 찾겠지.”
두 뱀파이어의 의견은 각각의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양쪽 의견을 모두 귀담아듣고, 주민들을 향해 다가갔다.
파팍!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운철묵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주민 몇 명의 머리가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가장 열성적으로 나를 비난하던 사람들이었다.
“들어라. 나는 너희를 구원하러 온 게 아니라 소유하러 왔다.”
“……!”
“오덴세섬은 나의 영지고, 너희는 그 영지에 딸린 부속이다. 저런 미개한 녹색 괴물이 아니라, 나에게 충성하고 나를 위해 일해야 할 나의 재산이란 말이야.”
모욕적인 말에도 사람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들은 공포에 굴복하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몸뚱이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바닥을 뒹구는 몬스터와 목이 잘린 사람의 시체가 그들을 또 한 번 굴복시키고 있었다.
“너희가 힘의 논리에 길들었다면, 나 역시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겠다.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했다니, 짐승으로 대해야 옳겠지. 카라예프!”
“예, 옙, 각하!”
멀찍이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던 카라예프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의 등 뒤로 사자갈기 용병단이 뒤따랐다.
갑자기 백여 명의 무장한 사내들이 몰려오자 주민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자들의 감시는 사자갈기 용병단에 맡기겠다.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얼마든지 채찍질해도 좋다.”
“알겠습니다, 각하.”
“다음 마을로 이동한다. 오덴세섬을 장악한 게 몬스터라니, 더 이상 시간 끌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부터 섬 전역을 휩쓸며 모든 마을을 해방하겠다. 나와 함께 싸우는 자는 사람으로 대할 것이며, 힘없이 뒤따르는 자는 가축으로 대하겠다!”
나는 일부러 주민들이 듣게끔 큰 소리로 외쳤다.
선전포고와 함께 오덴세섬 해방전이 시작되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탈환
첫 마을에서 구출한 주민들을 이끌고 두 번째 마을로 향했다.
전방 수색은 사자갈기 용병단에서 발이 빠른 자들이 담당했다.
나중에는 수색도 필요가 없었는데, 섬 중앙으로 갈수록 마을이 자주 나타났기 때문이다.
“각하, 두 번째 마을이 보입니다.”
“좋아. 이번에는 사자갈기 용병단도 함께 싸운다. 세 명만 남아서 주민들을 지키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말이 지키는 거지, 주민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고작 세 명으로 수십 명의 주민을 감시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이미 저항할 의지를 잃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신세에 체념하고 있었으니까.
“또 녹인을 공격하려는 건가? 보복이 있을 텐데…….”
“이건 미친 짓이야……. 이러다 우리까지 다 죽을 거라고…….”
주민들은 공포에 떨면서도 감히 내게 반항하지 못했다. 나는 그 무력한 모습에 더더욱 열이 뻗쳤다.
“돌격!”
“각하를 따르라!”
“오덴세섬을 해방해라!”
내가 칼을 뽑아 들고 선두에서 달리자 사자갈기 용병단이 용맹하게 뒤를 따랐다. 그들 역시 인간을 핍박하는 몬스터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두 번째 마을의 규모는 첫 번째와 비슷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녹인들이 이미 마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니 대화도 필요 없다. 운철묵검이 자비 없이 휘둘러지고, 돼지 대가리와 검은 피가 하늘을 수놓았다.
“분대 단위로 모여! 방패수가 시선을 끌고 창수가 뒤에서 찔러라!”
뒤이어 들이닥친 사자갈기 용병단도 능숙하게 녹인을 상대했다.
녹인은 인간보다 크고 강했지만 방어구가 조악했다. 반면, 사자갈기 용병단은 전원이 가죽 갑옷 이상의 장비를 착용했고, 조직력도 탄탄했다.
그들은 다섯 명씩 조를 짜고, 각 조마다 녹인을 한 마리씩 맡아 안전하게 척살하고 있었다.
“축사를 부수고 주민들의 족쇄를 풀어 줘라.”
사자갈기 용병단이 냉큼 달려들어 주민들을 풀어 줬다.
전투는 싱거울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아군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음 마을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