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26
제 126 화
어서 와.
그 한마디가 유림의 귓가를 두드렸다.
여느 때와 같은 장소. 여느 때와 같은 사람. 그러나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달랐다.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유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꽉 쥐고 있는 두 손과 마치 큰 각오를 결심한 것처럼 결의에 찬 표정.
덴 케이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기다렸어, 한유림.”
그리고 그 말에 유림이 발을 움직였다.
케이가 곰방대를 들며 제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이에 유림이 그 자리에 앉았다. 긴장감에 온몸이 저렸고, 늘 앉아왔던 자리가 지나칠 정도로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가시방석. 그 말이 딱 지금 상황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불편할 수가 있는 거지? 이사장님을 처음 만난 면접에서도 이만큼 불편하고 긴장되진 않았다.
유림은 아릿한 손을 주무르며 덴 케이를 마주 봤다. 그러자 아주 느긋하고, 또 여유로운 자세로 저를 응시하는 그가 보였다. 하지만 태도와 달리 눈동자만큼은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자신만을 비추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우승 축하해, 역사에 둘도 없을 최고로 황당한 우승이었지만. 뭐 이런 것도 재미있으니까.”
“아…… 감사합니다. 저도 우승할 줄 몰랐어요. 뭐 간절하긴 했지만요.”
“그래? 난 아슈팔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했는데.”
이사장의 능청스런 말에 유림의 미간이 구겨졌다.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고? 자신이 어떤 소원을 빌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그게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을 비꼬는 것일까, 것도 아니면 내심 기다렸던 걸까?
유림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소원은…… 절대적이라 했죠?”
“그래. 클레이즈의 큰 틀을 흔들지 않는 한 절대적이지.”
“그럼 제 질문은 클레이즈의 큰 틀을 흔드나요?”
유림의 질문에 덴 케이가 옅게 웃었다.
“글쎄. 그건 네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지.”
내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니. 대체 무슨 소리지?
유림이 미간을 구겼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은데 질문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긴장해서 그런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무서워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빌며 입을 열었다.
“이사장님, 저번의 질문…… 이어서 해도 괜찮나요?”
“……그게 네 소원이야?”
“네.”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유림의 확고한 대답에 다시금 덴 케이가 작게 웃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제 앞에 그녀가 아닌 하림이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선배는 자신과 똑 닮은 아이를 키운 것 같았다. 이런 부분에서조차 겹쳐 보이다니…… 어떻게 해야 이렇게 자랄 수 있는 걸까.
덴 케이는 긴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특유의 향이 나는 가루를 넣고 불을 켰다.
“후-”
담배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알싸하고도 달콤한 향이 퍼졌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가 내게 어떤 부탁을 했는지 궁금하다 했지?”
“……네.”
“그리고 그걸 아는 게 네 소원이고?”
“네.”
덴 케이는 알았단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이전에 두 가지만 약속해.”
“약속이요?”
“그래.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냉철하게 들을 것. 두 번째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넌 네 아버지를 믿을 것.”
냉철하게 들어? 거기다 아버지를 믿으라고?
유림은 이사장이 하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약속에 응하지 않으면 뒷이야기를 안 해줄 것 같았다.
억지로 약속을 강요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는 약속을 말이다.
“약속할게요. 그러니 말해주세요.”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공기가 바뀌었다.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까. 조금 더 차분해졌고, 다정해졌다. 유림은 어쩐지 그게 슬프면서도 애잔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론 저를 통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투영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유림은 그 어색한 느낌에 고개를 기울였다.
“이사장님……?”
덴 케이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우선 네 질문에 대답을 하기 이전에 먼저 한하림이란 사람에 대해 알려줄게.”
“아버지에 대해요?”
“그래. 그래야 네 소원에 대한 답을 들려줄 수 있어. 또 네가 알아야 할 일이기도 하니까.”
내가 알아야 할 일이라고?
유림은 그 말에 어쩐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 의문을 뒤로한 채, 덴 케이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그를 만난 건, 그가 전임 교수 계승을 받기 위해 조교수로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야. 한하림이란 사람은 말이지, 생긴 거랑 달리 정말로 특이한 사람이었어. 성격도 별났고 호불호도 강했지. 특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걸 좋아했는데, 논문을 쓰느라 며칠을 잠도 못 자고 꼬빡 새웠음에도 웃고 넘길 정도였지. 선생으로서도 괜찮았어. 친화력도 좋고 애들도 잘 챙겨줬으니까, 오지랖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건 유림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장난기가 많았고, 귀찮단 생각이 정도로 참견이 심했다. 거기다 지식이 많았고, 저나 은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힘썼었다. 그 때문에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유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가 작게 웃었다.
“그건 같이 살았던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네…….”
“그랬기에 난 그가 누구보다 교수직에 어울린다 생각했어. 계승을 받으려 한 것도 그 때문이라 생각했지. 그건 누가 봐도 천생이었으니까. 나 말고도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많을 거야.”
맞는 말이었다. 실로 그는 은하의 스승이 되어 그녀에게 늄의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저에게도 그랬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네 아버진 그러지 않았어. 클레이즈의 겨울방학 때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말하더니 그대로 오지 않았지. 그리고 계승권을 포기했어. 그 이유를 알고 있니?”
겨울방학.
유림은 직감적으로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있었다.
“……저 때문인가요?”
“그래, 딸이 생겼다더군. ‘한유림’이란 딸이…….”
덴 케이는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는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맨 처음엔 몰랐어. 계승권의 포기는 일방적인 통보로 했고,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다 반년쯤 지났을 때 그가 편지를 보내왔지. 딸이 생겼단 것도 그때 알게 되었어. 처음엔 결혼을 했다고 생각했어. 방학 동안 어여쁜 아가씨를 만나 아이를 가진 줄 알았지.”
그는 스스로의 생각이 어이없는지 작게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지. 결혼이라니…… 아이도 열 살이 다 넘은 양딸이었는데 말이야.”
유림은 시선을 내려 애먼 발만 바라봤다. 세상이 계속 밝았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럼 이사장님은 처음부터 절 알고 계셨어요?”
“그래. 알고 있었어. 너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로 들었고, 한 번뿐이지만 사진도 받았으니까.”
“그런데 왜 아는 척을 안 하셨어요? 입학시험 때도, 면담 때도. 그게 아니라도 단둘이 있었던 상황은 많았잖아요.”
“그럴 수가 없었어.”
“왜요? 아버지의 부탁 때문에?”
“정확히는 네 아버지에게 들은 네 이야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들은 내 이야기?
“제 이야기요?”
“정확히는 네 아버지가 내게 한 너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것과 이어지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야.”
유림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꼭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연구에 대한 일이 떠오른 건 반문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이사장님 설마 제 이야기라는 게…….”
“그래, 연구에 관한 거야.”
유림은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그는 알고 있었다, 제 유년 시절을. 그것도 아버지에게 들어서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어디 가서도 하지 말라고 늘 강조하셨다. 심지어 은하에게조차 입단속을 시켰었다. 그런 그가 아무리 친하다 해도 이사장님께 이야길 하다니.
아니, 근데 그거랑 클레이즈에 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이사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아버지가 이 이야길 이사장님께 왜 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게 제 질문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조금 전 내가 선배가 교수 되는 건 천생이라 생각했다고 말했었지?”
제 질문에 케이가 다른 질문으로 답했다.
유림은 그가 갑자기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여 줄 뿐이었다.
“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조교수가 된 것도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었지.”
“네?”
덴 케이는 다시금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내뱉었다.
“물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단순한 흥미와 취미였지, 직업으론 생각하지 않았어.”
“그럼 아버진 왜 계승을 받으려 한 거죠?”
“하고 싶은 일이 있었거든. 그 일을 하기 위해선 클레이즈에 있어야 했어.”
하고 싶은 일? 아버지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고?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했는데요?”
“연구.”
“연구요?”
“그래.”
“그럼…… 학교에 남아 있던, 아니, 교수를 계승받으려 한 이유가 연구 때문이에요?”
“그래.”
덴 케이의 말에 유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더더욱 이해가 안 갔다. 거기다 지금 이사장이 하는 말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사장님은 지금 아버지가 어떠한 목적이 있어 학교에 남았고, 그 목적이 ‘연구’라고 말하고 있었다.
클레이즈의 졸업생 중, 연구나 공부를 위해 학교에 남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연구생의 신분으로 별도의 교사에서 따로 공부하고 연구했다.
아버지가 정말로 연구를, 그것도 클레이즈에서 하고 싶었다면, 연구생의 신분으로 남아 있으면 된다. 굳이 교사가 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아요. 연구를 하고 싶었다면 굳이 교수가 될 이유가 없잖아요. 그것도 전임 교수여야만 하는 이유가 뭐가 있는데요.”
“네 아버지가 하고 싶은 연구는 평범한 공부와는 달랐으니까.”
“달라요? 대체 아버지가 뭘 공부하고 싶었는데요?”
“그는 늄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보이고 있었어.”
“늄……?”
갑자기 늘 들어왔던 그 단어가 지독할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네 아버지는 늄이 가장 숭고한 힘이고, 그 힘을 이용하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지. 마치 병을 치료하는 약이 개발되는 것처럼 늄의 근본에 도달하면 인간은 더 많은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한편으론 참으로 학자다운 생각이지. 그렇지 않아?”
그 말에 어쩐지 유림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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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