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54
제 154 화
“그래서 얻은 건?”
테오의 질문에 데몽이 한숨을 내쉬었다. 얻은 게 하나도 없단 의미였다.
그는 앞에 있는 일곱 명의 친구를 보며 쓰게 웃었다.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어.”
그 말에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감기까지 걸려가며 며칠 내리 고생했는데 결국 얻은 게 하나도 없었다.
아쉽다는 일행 사이로 하민이 옅게 웃으며 그들을 달랬다.
“그래도 내부의 적이 원하는 게 얼음 서고라는 걸 알았으니 큰 수확을 얻은 거지.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테오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하민은 그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그러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보다 형이 그러는데, 여행 일정이 잡혔나 봐.”
“진짜? 빠르네.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장소는?”
레이먼의 질문에 하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말 안 해줬어. 그보다 문제는 따로 있어. 교수님들이 서로 안 가겠다고 버티고 계셔.”
은하와 레이먼을 제외한 모두가 교수님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 자신들이 그 상황이라 해도 분명 안 가려 발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는 꼭 가야 하지 않냐?”
“응. 일단 정해진 건, 둘이 가는 건가 봐.”
둘이나 보내다니. 디하르가 의외라는 투로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안전하게 둘 보내겠다 이건가.”
“‘나 혼자는 못 죽어’가 더 맞지 않냐?”
“그치. 혼자는 절대 못 죽는 개미지옥 심보가 발동한 거야.”
데몽과 테오의 추측에 모두가 다시금 깊이 공감했다.
그때 레이먼의 침대에 앉아 있던 은하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너희는 어느 교수님이 갔으면 좋겠어?”
“……글쎄. 난 솔직히 우리 형이랑 갔으면 좋겠는데…….”
“난 다단 교수님께서 가면 좋을 것 같아. 잘 통솔하실 것 같지 않아?”
하민과 레이먼의 말에 루아가 자긴 싫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난 싫어. 그 두 분이랑 가면 엄청 딱딱한 여행이 될 거야. 놀 땐 자유롭게 풀어주시는 교수님이 더 좋다고.”
“그게 누군데?”
레이먼의 반문에 루아가 손가락으로 턱을 툭툭 치더니 말했다.
“진유 교수님하고 해우 교수님? 자유 시간 완전 많이 주실 것 같지 않아?”
확실히 그 두 사람은 그런 이미지였다.
“아, 세룬 교수님도 좋다. 그분은 애들하고 같이 잘 뛰놀 것 같아.”
“난 히야스 교수님도 괜찮은 것 같아.”
은하의 발언에 모두가 경악했다.
“진담이야?!”
“차라리 하진 교수님하고 다단 교수님하고 가고 말지!”
“야. 이 여행이 영영 가버리는 그 여행이 돼버릴지 몰라. 생각 잘해!”
절대 납득할 수 없다는 하민, 루아, 테오의 모습에 은하가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근데 림 보면 히야스 교수님도 의외로 이것저것 잘 챙겨주는 거 같던데…… 괜찮을 거 같지 않아?”
최근 8형과 붙어 있을 기회가 있었던 데몽이 그들을 떠올렸다.
히야스 교수가 유림을 잘 챙겨주던가? 약 올리고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
“……한 가지 확실한 건, 불법적인 행위는 다 허용할 것 같아. 도박이라든지 뭐 그런 거.”
“……그런 의미에선 제일 자유롭게 놀 수 있겠군.”
데몽과 디하르의 입에 쓴 미소가 걸렸다. 어디로 갈진 모르겠지만 리벨피에르(도박이 엄청나게 성행한 나라) 같은 곳에 간다면 그 누구보다 최고긴 할 것이다.
하민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드물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때 그가 갑자기 고갤 들더니 방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림이 안 보이네?”
그제야 유림의 부재를 안 일부가 은하와 데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런 모두의 시선은 은하가 데몽을 본 순간 다 그에게로 옮겨졌다.
“아, 유림이…….”
현재 유림은 얼음 서고에서 나올 때까지 코빼기도 안 보인 히야스에게 따지러 간 상태였다. 겸사겸사 얼음을 녹일 방법도 찾겠다며 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았던-정확히는 이로인해 말이 길어질 것을 짐작한-데몽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대충 말했다.
“어딘가에 잘 살아 있겠지.”
***
“어라? 교수님 안 계세요?”
유림의 말에 아슈팔이 손을 흔들었다. ‘안녕’과 ‘없어’라는 대답을 동시에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아슈팔을 바라봤다.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있는 것이 딱 돈 많은 백수 꼴이었다.
“……선배,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바빠.”
“어디 가요?”
“인류의 평화를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 말에 시선이 소파 옆으로 이동했다. 날밑과 칼자루가 덜 만들어진 검 세 자루가 탁상 위에 올려 있었다, 검의 외관을 간단하게 그려둔 스케치도.
저기요, 무기를 만들든지 평화를 챙기든지 하나만 하세요. 왜 꼭 둘을 같이하는 겁니까.
“……교수님 어디 계세요?”
“호출받고 나가셨어.”
“호출?”
아슈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임 교수들끼리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연락 왔어.”
그리고 이 말에 유림의 머리 위로 거대한 물음표가 그려졌다.
***
“시바, 그니까 이게 긴급회의라고?”
히야스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온실을 울렸다.
현재, 이사장의 긴급 호출로 인해 클레이즈의 여덟 간부 교수와 이사장이 온실의 중앙 탁자에 앉아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앉은 건 여덟 명이었고 케이는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곰방대를 입에 물며 말이다.
“긴급회의지. 여행 장소와 날짜는 다 잡혔는데 갈 교수가 안 정해졌으니 말이야.”
“하하하. 아주 좋은 회의군.”
히야스가 짜증을 팍팍 내며 다리를 꼬았다. 이건 다른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급할 때만 쓰는 긴급 호출이 왔기에 하던 일 다 제치고 달려왔는데 오자마자 하는 말이 ‘누가 갈 거냐?’라니…….
면상에다 대고 쌍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괜히 저를 보낼까 싶어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의 욕이란 욕을 다 눌러 삼킨 히야스가 비꼬듯 물었다.
“그래서 누가 가게?”
“자진 신청을 받지.”
케이는 가볍게 손을 들며 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라 했다. 그러나 가겠다며 나설 멍청이는 없었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후…… 이렇게 참여성이 없어서야…….”
“너 같으면 가고 싶겠냐?!”
“맞아, 케이. 단둘이서 서른 명을 인솔하는 건 너무 해.”
“너희는 능력자니까 충분히 가능할 거야.”
개소리하지 마.
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했다. 리리아는 숨을 삼키며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녀뿐 아니라 몇몇도 필사적으로 욕을 참아야 했다.
모두 아무 반응이 없자, 결국 케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옆의 나뭇잎을 따 종이와 연필로 변형시켰다. 그러곤 선을 긋기 시작했다.
새하얀 종이 위에 세로로 기다란 선이 여덟 개 쭉쭉 그려졌다. 그런 뒤, 이번엔 가로로 중간중간 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가 뭘 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하진이 미간을 좁혔다.
“케이…… 설마 사다리 타기를 하자 이거냐?”
“희망자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아니면 그냥 내가 지목할까?”
그 말에 모두가 도리질을 쳤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운에 맡기는 게 좋았다. 케이 녀석이 골랐다간 후에 더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 사다리에서 걸린 두 사람이 가는 거야?”
해우가 팔걸이에 턱을 괴며 묻자 사다리를 점점 복잡하게 만들던 케이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재미없으니 걸린 한 명이 같이 갈 사람을 뽑기로 하지.”
“좋다.”
“괜찮네.”
“그건 맘에 드네요.”
역시 남 잘되는 꼴은 못 보는 이들답게 한마음으로 동의했다. 이윽고 사다리가 완성되고, 케이가 교수들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야, 잠깐. 난 네 번째에 넣어줘.”
“전 끝이요.”
“난 두 번째.”
“아, 나도 두 번째 끌리는데 어쩔 수 없지. 첫 번째.”
서로 한마디씩 거들며 자신의 위치를 요구하는 탓에 다소 귀찮긴 했지만, 별말 없이 그들의 요구대로 이름을 적어준 케이였다.
그는 아랫부분의 종이를 접어 이름을 가린 후 곰방대를 물었다.
그리고 사다리의 윗부분에 숫자를 적었다.
“이제 몇 번이 갈지 골라야 하는데……몇 번이 갈까?”
그러자 각자가 숫자를 외쳤다. 그 짧은 사이에 사다리를 다 외워 어느 숫자가 걸리는지를 파악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벌칙 자리부터 정하고 이름을 적을 걸 그랬다. 아니다. 쓸데없이 똑똑한 놈들이니, 결국은 사다리를 외웠을 것이다.
그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하다는 듯 턱을 쓸었다. 그때였다.
“어라……?”
그들의 귀를 두드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그곳엔 다소 얼빠진 표정의 유림이 눈을 깜빡인 채 서 있었다.
“한유림?”
“여긴 무슨 일이지?”
케이의 질문에 전임 교수들이 이곳에 있을 줄은 전혀 몰랐던 유림이 당혹스럽단 표정을 지었다.
그들끼리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기에 이사장은 해당 사항 없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누구 호출이었냐고 물어볼 걸 그랬다.
이왕 나온 김에 이사장님께 애들하고 있었던 일 말해주려고 들른 건데…….
모두의 앞에서 차마 대놓고 말할 수 없었던 유림이 대충 둘러댔다.
“아뇨…… 그, 지나가다가…… 근데 다들 여기서 뭐하세요?”
“뭐긴 회의하지.”
히야스의 퉁명한 대답에 유림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여태 온실에서 회의를 한 걸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간중간 교수님들이 놀러 오시긴 했지만, 이사장의 개인적 공간이어서 그런지 공적으론 절대 쓰지 않으셨다.
어쨌든 뭔가에 잔뜩 집중하고 있던 그들의 모습에 제가 방해를 했음을 깨달은 유림이 식은땀을 흘리며 인사했다.
“저……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때였다, 케이가 부른 것이.
“한유림.”
“에?”
유림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회의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게 누워 있는 케이가 유림을 향해 오라고 손짓했다.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이 왠지 느낌이 쎄- 했다.
“그냥 회의하시지…… 저는 또 왜…….”
“손이 아프군.”
“넵. 당장 가겠습니다.”
유림은 빠른 걸음으로 후다닥 케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데요?”
“골라봐.”
“네?”
“골라보라고.”
유림의 시선이 케이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새하얀 종이, 그리고 그곳에 그려진 사다리…….
불길함이 사실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제 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 은하가 빌었던 소원과 관련된 것이다.
“이사장님…… 이거 설마 1클래스 여행에 갈 교수님 뽑는 거 아니죠?”
“눈치가 빠르군.”
“…….”
미치셨습니까?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걸 뽑으라고 하시는 건데요.
유림은 차마 입 밖으로 하지 못할 말을 목구멍 아래로 꾹꾹 눌러 담으며 쓰게 웃었다. 그녀는 최대한 이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저…… 이사장님…… 이런 건, 제가 아니라 이사장님이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안 돼.”
“왜요?”
“사다리를 다 외워 버렸어.”
이 빌어먹을 인간아. 그걸 왜 외워?!
“하하하. 그럼 연필을 굴린다든지 주사위를 굴린다든지…….”
“잔말 말고 골라.”
단호한 말에 유림이 눈물을 머금었다.
정말이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리로 온 과거의 자신을 뜯어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따끔따끔한 교수님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흡사 자길 뽑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투였다.
유림은 어차피 누굴 뽑아도 제 인생이 평탄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거 조금이라도 뒤탈이 적을 사람을 뽑길 기도했다.
유림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그녀가 사다리에 적혀 있는 여덟 개의 숫자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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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