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39
제 39 화
“처음엔 기대한 것보다 지루했어요. 물론 기숙사는 마음에 들었어요. 밥값을 받는 게 좀 흠이었지만 입에 맞았고 우선 다양한 걸 먹어볼 수 있어서 좋았거든요. 방도 좋았고요. 그런데 수업은 그만큼의 매력이 없었어요. 뭐랄까, 너무 평이하달까?”
“재미가 없었나?”
“음…… 재미는 잘 모르겠어요. 이건 뭐 사람마다 다르고 거기다 첫 수업 하나 가지고 재미를 따지기엔 그러니까요. 그냥 느낌으로 봤을 때 전반적으로 무난하달까요? 아, 물론 어제까지의 이야깁니다.”
“어제까지?”
“네, 어제까지요.”
그렇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림에게 있어 클레이즈는 그냥 무난한 학교였다. 수업도 재밌네 마네를 따지기 좀 그랬으며, 그냥 교수들이 유능하단 것 말고는 다른 곳과 큰 차이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오늘부로 그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학생에게 돈을 뜯는 교수라니!
“오늘 세룬 교수님 수업을 들었는데 돈을 받더라고요.”
“돈을 받아?”
“네, 수업료라고 하면서 받더라고요. 그것도 완전 뻔뻔하게요. 그래서 책잡아서 환불 요구하려고 했는데 수업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그것도 못 했어요.”
유림의 말에 케이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런가?”
“네. 아, 진짜. 잘난 사람이 잘난 척하는 것만큼 짜증 나는 건 없는데 왜 그렇게 잘나신 건지.”
“세룬 교수님은 확실히 유능한 교수시지, 거기다 가장 유순하기도 하고.”
덴 케이의 말에 유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내가 지금 뭘 들었지? 누가 뭐해?
“유순…… 하시다고요?”
“그래. 우리 아홉 명 중 가장 유순하지.”
그 말에 유림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꼴사나운 표정으로 케이를 바라봤다.
헐, 교수님들 중 세룬 교수님이 가장 유순하다고?
수업 당시 세룬 교수 스스로가 자신이 가장 양호하단 말을 던지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평인 줄 알았다. 그러나 케이의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객관적인 평인가 보다.
물론, 자신이 만난 이사장인 덴 케이나 히야스가 세룬에 비해 좀 더 비정상적인 인물임은 알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이 두 사람이 좀 특이한 경우인 줄 알았다. 그리고 세룬 또한 이들처럼 특이한 부류에 속한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세룬이 가장 유순한 거라면, 다른 교수들이 다 이 모양이란 건데…… 대체 이놈의 학교는 무슨 기
준으로 교수를 뽑는 거야? 헛, 설마…….
“진지하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뭘?”
“이 학교의 교수는 병신력을 기준으로 뽑습니까?”
“…….”
“…….”
묘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케이는 곰방대를 뻑뻑 불며 유림을 빤히 쳐다봤다. 표정이 제법 진지한 것이 농으로 묻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거참, 웃긴 녀석일세.
케이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물고 있던 곰방대를 꺼내 그 재를 가볍게 털었다.
탁탁.
백색의 가루가 알싸한 꽃향기를 풍기며 떨어졌다.
“흐음- 글쎄. 옆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지. 형님이 교수니 말이야.”
케이의 말에 하민이 전임 교수의 동생임을 상기한 유림이 아차한 마음에 혀를 찼다. 졸지에 그의 형을 욕해 버렸다.
“미안, 하민아. 내가 좀 생각 없이 말했다.”
유림이 미안함에 머쓱하게 웃으며 사과하자 하민이 괜찮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으응, 괜찮아. 거기다 클레이즈 교수님들이 이상한 건 이미 알고 있었어. 형이 말해줬거든.”
“응?”
“음?”
하민은 다소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꽃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상하고 별난 사람들 많다고 아무나 쫓아가지 말라더라고.”
“…….”
“…….”
두 사람이 미묘하게 굳었다. 이상하고 별난 사람 많다고 아무나 쫓아가지 말라니…….
“거기다 이 학교는 신기하게 위로 갈수록 상태가 더 심각하다고 했어.”
다시금 두 사람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직 하민만이 부드럽게 웃으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유림은 그 이상한 사람이 왠지 케이를 말하는 것 같단 생각에 그를 흘끗 쳐다봤다. 케이는 시선을 올려 온실의 유리 천장을 보고 있었는데, 마치 하진을 어떤 식으로 괴롭힐지 고민하는 사람 같았다. 실제로 케이는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진의 최대 약점이 하민이니…… 당분간 계속 자신이 끼고 있으면 되려나?
케이가 한창 하진을 어떤 식으로 엿 먹일까 하고 생각할 때, 유림이 차를 홀짝이며 하민을 바라봤다.
“하진 교수님은 어떤 분이야?”
“우리 형? 혹시 입학식 때 여덟 의자에 앉았던 사람들 기억해? 그중 1번 자리에 있던 사람이야.”
그 말에 유림이 입학식을 떠올렸다. 그러나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원체 사람을 잘 기억 못 하는 데다, 당시 히야스 찾기에 급급해,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은 별로 집중하여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림은 나중에 확인해 봐야지 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야. 멋있고 다부지고 강하고 우직하고…… 나랑 여덟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가장으로서 나와 누나를 키워왔어.”
하민의 말에 유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하민이 말한 그의 나이가 유림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하민과 유림은 동갑이었다. 그렇다는 건, 하진의
나이가 올해 스물일곱 살밖에 안 됐다는 소리가 아니던가.
클레이즈의 교수들이 생각보다 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서른도 안 됐을 줄은 몰랐다.
“대박 젊으시다.”
“그치? 거기다 내가 알기론 해우 교수님을 비롯해 몇몇 분은 스물일곱 살인 걸로 알고 있어. 이사장님도 형과 동갑이지 않나요? 동기라고 들었어요.”
“아아-”
하민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민의 말대로 이즈네, 세룬, 진유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사람은 모두 스물일곱으로 동갑이었다.
유림은 케이의 말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간부급 교수님들이 그렇게 젊어요? 그것도 세계 제1 마법 대학이라는 곳의?”
“클레이즈의 교수는 세습 체제거든. 전(前) 교수가 졸업생 중 뛰어난 학생을 데리고 있다 일정 수준이 지났을 때 넘겨주는 것이 풍습이지, 우리는 그게 좀 빨랐고.”
그제야 그들이 왜 이렇게 젊은지를 이해한 유림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민을 바라봤다.
“대단하다, 너희 형.”
진심 어린 감탄이 튀어나왔다.
하민은 유림이 제 형을 칭찬한 것이 기뻤는지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응, 정말 멋진 사람이야. 또다시 형 동생으로 태어나고 싶을 만큼 말이야.”
하민의 말에 유림이 부드럽게 웃었다.
“형 많이 좋아하나 봐?”
“응, 좋아해. 무척 좋아해. 그래서 미안해.”
“왜?”
“난 형한테 미안한 동생이거든.”
“미안한 동생?”
“응.”
하민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유림은 그 내용이 궁금했으나, 옅게 띤 미소가 너무 서글프게 느껴져 차마 그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림은 형제 없어?”
이번엔 유림에게 질문이 돌아왔다. 그 질문은 덴 케이도 마음에 들었는지 보기 드물 정도의 흥미롭단 표정으로 유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제? 형제가 있냐고?
유림은 쓰게 웃었다. 설마 은하 말고 이 질문을 하는 이가 또 있을 줄은 몰랐다.
“친형제는 없어, 나 고아거든.”
“고아……?”
“응, 하지만 가족은 있어.”
그 말에 하민과 덴 케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물론 지금은 만날 수 없는 곳에 있지만 말이야.”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한 하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도 돼?”
음, 어떤 사람이냐고?
유림은 그 질문에 유일했던…… 아니, 앞으로도 유일할 것이 분명한 자신의 가족을 생각했다. 처음 사혈에 오게 되었을 때 자신에게 살 장소를 마련해 주고 이름을 지어준 이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림아’라고 가장 먼저 불러준 이가 바로 그였다. 물론, 그 뒤엔 항상 ‘등 두드려’라는 사람 짜증 나게 하는 말이 뒤따랐지만, 지금만큼은 그 말이 무
척 그리웠다.
“아버지.”
“아버지?”
“응, 아버지.”
당연히 친아버지는 아니었다.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교육을 빙자해 이것저것을 시켰다. 물론, 도움이 되는 것도 많이 배웠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무 깎는 기술도, 늄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도 그에게 배운 것이다. 어쩌면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모두 알려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열한 살 때 사혈에 가게 됐는데, 그때 만나 내가 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야.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주셨어. 내가 가진 재능, 기술, 그리고 각종 꼼수까지. 아, 물론 아버지라 부르지만, 나이는 열다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살아계셨다면 아마 서른넷이겠지.”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래간만에 생각하는구나. 사는 것이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다, 정말 미안하게도.
유림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옅게 웃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이상하게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차분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거기다 차 맛이 유난히 달았다. 어쩌면 잊고 있던 향수를 건드려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가능하면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다. 자신보다 더 귀찮음이 많은 성격이었기에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정말 정신없었지만, 지금만큼은 그걸 느껴보고 싶었다.
뭐, 이젠 상상으로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더욱이 점심을 가장한 저녁까지 얻어먹어서인지 유림이 온실을 나왔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하민은 자신의 형을 만나기 위해 교수들이 사용하는 연구실 쪽으로 향했고 유림은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늘을 덮기 시작하는 주홍빛의 노을을 보며 유림은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은하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쯤 되면 어디냐고 연락할 법한데, 아무 소식도 없었다.
은하는 아직도 수업 중인 건가?
유림은 치마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걸음을 옮겼다.
묘하게 조용한 학교. 평소에도 조용하긴 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더 조용했다. 거기다 분위기가 묘했다.
뭐랄까…… 마치 무언가 크게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랄까?
갑자기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유림은 주머니에 있는 통신구를 만지작거렸다. 은하에게 연락을 해볼까란 생각이 들었으나, 그럴 바엔 차라리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걸음을 서둘렀다.
기숙사도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분명 저녁 시간이라 북적북적해야 할 것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왜지?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식당은 한산했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2클래스 내지는 3클래스 사람들이 전부였다. 그것도 한두 그룹뿐이었고, 휑할 정도로 비어 있어 지금이 저녁 식사 시간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유림은 식당에서 시선을 돌린 뒤,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여학생들이 거주하는 2층 복도에도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평소였다면 편한 옷차림으로 이리저리 오가거나 이것저것 떠들며 왁자지껄하게 다녔을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학교뿐 아니라 기숙사도 조용하니 왠지 점점 불안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감이 서질 않았다. 자신이 온실에서 있었던 그 몇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어깨가 뻣뻣할 정도로 긴장감이 일었다.
뛰다시피 해 제 방 앞에 도착한 유림은 마른침을 삼키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발을 내던지듯 벗고 자신과 은하가 지내는 방문을 열었다.
순간, 유림은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경직된 표정으로 자신의 침대에 앉아 있는 루아와 레이먼, 테오는 카펫이 깔린 따스한 바닥에 힘없이 엎어져 있었고, 륜은 허탈한 표정으로 막 방으로 들어온 유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림!”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유림에게 다가와 안기는 은하였다.
은하는 부르르 떠는 손으로 유림을 부여잡으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앙-!”
은하의 울음소리가 싸늘한 방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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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