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118. 칼날이라도 보이면
혁련미림은 회의에 초대되긴 했으나, 진천의 뒤에 섰다.
아무리 지백요가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전략 회의에 초대하는 특혜를 주었어도 대부들 및 군장들과 동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백요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이에 윤갈은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먼저 현제까지 파악된 중행범연합의 전력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기본적으로 3군을 이루고, 위나라와 정나라에서 보낸 천여 명의 지원군이 합류했으며…….”
그제야 혁련미림에게서 시선을 돌린 지백요는 설명을 다 듣고 말했다.
“우리가 공의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반란을 꾀한 무리의 전력이 우위에 있음은 참담한 일이오. 그러나 명분은 우리에게 있고, 병력의 사기 또한 높으며, 우리가 더 잘 아는 지형을 전장으로 삼는다면, 사특한 반역의 도당을 소탕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고, 나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자신하오.”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을 치며 옳다 동조하니, 한껏 고조된 열기가 넓은 막사 내부를 가득 채웠다.
만족한 지백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윤 참모가 적들을 상대로 펼칠 전술 전략에 관해 설명할 것인데, 그 전에 의견이 있으면 누구든 말해보시오.”
이미 다른 대부들이 원수 지백요와 그의 참모 윤갈에게 전권을 일임한 상황이라, 형식적인 물음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가 밀렸을 때 정면 승부는 무모하니, 수성(守城)합시다.”
윤갈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진천의 말에 뜨거운 분위기가 급격히 식어버렸다.
표정이 굳어진 지백요가 손을 내저었다.
“결전을 앞에 둔 상황에서 그 무슨 겁쟁이 같은 소리인가. 아니 될 말이네.”
진천은 반박했다.
“공성을 위해서는 몇 배 많은 전력이 필요하고, 수성에는 작은 힘으로도 큰 힘을 이겨내는 효과가 있으니,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리를 만들어내자는 것입니다.”
말문이 막힌 지백요는 윤갈에게 눈짓을 보냈다.
윤갈은 말했다.
“반역한 자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토벌함이 마땅한데, 마치 역으로 죄를 지은 것처럼 성을 지키는 데만 힘쓴다면 천하는 우리를 비웃을 것이며, 공께서도 우리가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윤 참모, 전쟁은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고, 토벌은 적을 징벌하는 것이 목적이며, 충성은 공을 지켜내는 것이 목적인데, 타국과 전쟁하는 것도 아니고, 내란을 종결하려는데 외국의 평가를 따지는 게 다 무슨 소용이냐.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근본은 나라의 근간인 국인과 야인이 평화롭게 살도록 국정을 안정시키기 위함인데, 그들의 희생을 전제로 전략을 짜는 것은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 꼴과 같다.”
그러나 윤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성은 오히려 전쟁과 거리를 두고 있던 노인과 아녀자들의 피해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벽은 최후의 방어 수단입니다. 전체 병력은 우리가 뒤처지지만, 전차의 숫자는 박빙을 이루고 있는데, 조가현과 한단 사이에서 싸워보지도 않은 채 수성부터 한다는 건 국인들의 불안감만 가중할 뿐입니다. 그리고 후방에 대한 염려로 병사들의 집중력만 흐트러트릴 것이니, 수성은 불가합니다.”
진천은 윤갈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윤 참모의 말이 옳다. 진 방주, 수성은 불가하다.”
지백요와 윤갈 중 누구도 전략을 수정할 의지가 없고, 다른 참석자들도 윤갈의 뜻에 반대하여 자신에게 동조할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다.
윤갈은 진천의 침묵을 자신의 승리로 받아들인 것처럼 흡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진 방주께서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주장하는 것은 기꺼운 일이나, 이는 말뿐이라 지지를 받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진 방주께서 진정으로 참여할 의지가 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한 가지 중요한 책임을 맡아주시길 청합니다.”
“빙빙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라.”
“진 방주께서 중군을 맡아 주십시오.”
진천은 아무 말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요!”
“그건 좀 아닌 거 같소만!”
“좌군의 지휘를 일임한 것만도 문제인데, 중군을 맡긴다니!”
다른 대부와 군장, 부장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군의 편제상 중군은 실력이 최고라 인정받은 지휘관이 맡는 게 관례이며, 그렇기에 중군의 군장이 된다는 건 매우 큰 명예였다.
또한 이후 승전을 할 경우에는 공로와 권리 등에서 상당한 지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은 전군 원수의 최측근이거나, 수많은 싸움을 치러 경험이 많고 노련한 군장에게 주어지는 자리이다.
그런데 지백요의 최측근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고, 노련한 장수도 아니고, 강호인에 불과한 진천이 중군을 맡는다는 건, 다른 대부와 장수들에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백요가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웠다.
“모두 진정하시오. 윤 참모가 진 방주에게 중군을 권하는 이유를 들어보고 반대해도 늦지 않소.”
윤갈은 감사하든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고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진 방주님께 중군을 맡기는 것은, 기만전술입니다.”
“기만전술?”
“상나라부터 전쟁의 중심은 전차. 그리고 전차전의 기본은 삼군이며, 그중 최강은 중군, 다음으로 우군과 좌군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승리의 관건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적의 우군과 좌군 중에 어느 쪽이 약한지를 알아내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좌는 우든 적의 일군을 무너트리면, 전열이 무너진 나머지 둘을 3군으로 합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중군이 좌군을 맡고, 좌군이 중군을 맡는다면 어찌 될까요?”
좌군은 방어에 치중하여 시간을 끌고, 그 사이 본래 중군이었던 좌군이 적의 좌군을 빠르게 무너트리고, 중군 혹은 우군의 후방을 막고 전방의 아군과 합을 맞추어 앞뒤로 공격할 수 있으리라.
“아! 적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겠소!”
“귀신도 놀랄 전략이오!”
“내 평생 이토록 뛰어난 전술은 처음이오!”
방금까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반대하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탄성을 터트리고, 윤갈을 칭찬했다.
그런데.
“진 방주님, 제 귀가 문제일까요? 저는 방주님이 승낙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걸 듣지 못했는데, 왜 이미 승낙하기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일까요?”
혁련미림은 진천에게 작게 속삭였지만, 이상하게도 모두에게 들리며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어머나, 분위기가 왜 이럴까. 제 말이 들렸나요? 저는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거고, 왜 다들 확실히 결정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즐거워하실까 의아해서 물은 건데, 혹시라도 기분이 나쁘신 분이 계신다면 사과드릴게요.”
그러나 누구도 혁련미림의 말을 지적하지 못하고, 뭔가 크게 잘못 씹은 듯한 표정만 지었다.
진천은 웃었다.
“큭큭큭.”
혈정이 제거되니, 본래의 밝고 영악하고 활기찼던 혁련미림으로 돌아와서 기뻤던 거다.
물론, 혁련미림을 제외하면 웃음에 담긴 의미를 아무도 몰라 다들 비웃음당한 거로 오해하고, 기분 나빠했지만.
그때, 떨떠름한 표정의 지백요가 검후를 편들고 나섰다.
“사실 검후의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진천까지 편들 의도는 없었다.
“진 방주, 전술적인 선택이라고 해도 중군의 장이 된다는 건 매우 명예로운 일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윤갈이 말을 보탰다.
“조금 전에 진 방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리를 만들어내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설마, 중군을 맡는 게 두려워서 못하시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그 순간 진천이 윤갈의 뺨을 때렸다.
철썩!
“전쟁에 나서고자 스스로 일군의 장을 자처한 나에게 그 무슨 망발이냐.”
넋이 나간 윤갈은 터진 입술에서 흘러내린 핏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진천을 바라봤다.
“저, 저…….”
“무, 무슨 짓을…….”
다른 이들도 놀라긴 마찬가지.
지백요의 뒤에 서 있던 호위병들이 반사적으로 칼의 손잡이를 잡았으나.
“칼날이라도 보이면 손모가지가 날아갈 줄 알아요.”
혁련미림의 경고와 그녀가 발산하는 섬뜩한 기세에 눌려 꼼짝하지 못했다.
그리고 반대편에 앉아 있던 지창운과 그의 뒤로 시립 한 혈부쌍사는 지백요의 지시를 기다렸으나.
“사과 안 해? 또 맞아봐야 잘못인 줄 알 테냐?”
진천이 다시 때릴 것처럼 손을 들었고, 윤갈은 반사적으로 양팔로 얼굴을 가리며 일어났다가,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을 뒤늦게 인식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으나.
“죄송합니다. 마음이 앞서 말이 헛나왔습니다.”
결국 사과했다.
“좋다, 이번만 용서하고 넘어가겠다.”
진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노려보는 지백요의 시선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오히려 눈싸움을 벌이며 말했다.
“원수님, 윤 참모의 전략을 수용하여 우리 군이 중군을 맡겠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보유한 전차로는 적들을 속일 수 없으니, 전차 50대를 지원해 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병기와 갑옷도 필요합니다. 지한위조연합의 중군으로 보여야 할 우리 군의 몰골이 초라할 수는 없으니까요. 당장 결정을 하십시오. 참고로 지원이 안 되면 중군은 맡지 않겠습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으나.
“지원해 주겠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기꺼이 중군을 맡겠습니다.
진천은 일어났다.
“윤 참모, 나에게 할 말이 더 있나?”
끓어오르는 울분을 억누르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있던 윤갈은 한숨을 토하듯 말했다.
“없습니다.”
“그렇다면 원수님, 나는 돌아가 병사들과 출진 준비를 하겠습니다.”
진천은 포권을 하고 혁련미림과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막 나가려는데, 지백요가 불렀다.
“진 방주.”
진천이 멈춰 서서 돌아보자.
“전략 차원에서 그대에게 중군의 자리를 주었으나, 나는 그대가 중군의 역할을 잘 수행하리라 믿고 있다.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열심히 싸우도록 해.”
“쓸데없는 기대를 하시는군요.”
“……?”
“전략이 아니라도 중군은 본래 우리여야 했습니다. 지한위조연합 최고의 고수는 나고, 최고의 군단은 나의 군단이니까요. 그러니 기대 같은 건 하지 마십시오. 그런 바람이 아니라도, 나와 나의 군단은 최고의 활약을 할 겁니다.”
진천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뒤로하고 혁련미림과 막사를 나와, 병력이 대기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진 방주님.”
막사를 나온 예양이 급히 뒤따라왔다.
진천은 웃음을 지으며 그와 마주했다.
“예 대협. 경황이 없어 인사도 못 했네요. 소식은 들었습니다. 사장으로 임명되었다지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하오. 다 방주님 덕분이지요. 그보다 방금 윗전에 진 방주님의 군단으로 가게 해달라고 청하고 오는 길이오.”
“우리 군으로요?”
“진 방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부장으로서 전차군을 이끌고 싶소이다.”
전차군을 지휘하는 경험이 많은 통술이 죽고, 조을은 보병 지휘에 더 능숙하니, 예양이 전차군을 맡아준다면 큰 전력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뜻은 고마우나, 거절합니다.”
“혹시 나를 믿지 못하시오?”
“당연히 믿습니다. 그러나 예 대협은 지 대부님을 주군으로 모시기로 약속했습니다. 아닙니까?”
“맞소. 내 목숨을 다해 지 대부님을 보필하기로 하늘에 맹세했소.”
“그렇다면 계속 그 길로 가야지요.”
“하지만 내가 진 방주님을 돕는 것이 낫지 않겠소?”
“낫지요. 하지만 나는 염려하지 마시고, 예 대협의 길을 가십시오. 그것이 내가 예 대협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나의 길이 있듯이 진 방주님의 길도 있다는 뜻인 게요?”
진천은 대답 없이 미소 지었고, 예양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소. 내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진 방주님을 응원하리다.”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포권을 하고 돌아서려던 예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진 방주님, 조심하시오. 윤 참모는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라, 분명 뒤로 계략을 꾸미고 있을게요.”
“예, 유념하겠습니다.”
예양이 떠나고, 혁련미림은 말했다.
“좋은 사람이네요.”
“좋은 사람이지요.”
“옆에 두시지 그랬어요?”
“그의 성향은 강호의 삶에는 맞지 않습니다. 군의 지휘관으로 남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사장쯤 되면 정치의 경계 안으로 들어섰다고 봐야 해요. 좋은 사람이 정치를 할 수 있을까요?”
진천은 답을 고민해 보았으나,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진나라의 정치를 잘 안다고 해도, 예양의 성향을 깊이 이해한다고 해도, 아무리 온갖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사람의 앞날이란 건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진천은 그저 바랄 뿐이다.
예양이 이번 전쟁에서 살아남고, 스스로 원하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