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123. 지휘는 못 해도
“전군, 진격을 멈추라.”
중행씨의 종주이자, 중행범연합의 원수인 중행열의 명령에 참모들과 군장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지시에 따랐다.
그러나 기다려도 다시 진격 명령이 나오지 않자, 중행열의 장남이자 우군장인 중행신의 명을 받은 우군 부장 백인이 전차를 몰고 달려와 말했다.
“중행 원수님, 적병의 선두가 강의 중심에도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도강을 완수하면 전열을 가다듬을 테니, 그 전에 공격하면 간단히 승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행열은 눈살을 찌푸렸다.
“백 부장은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적의 중군이 군자는 막힌 곳에서 사람을 곤란하게 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소리를 말씀하신다면, 진작 듣고 있었습니다만.”
“느껴지는 바가 없는가?”
“송구하지만, 달리 감흥이 일진 않습니다.”
“우군의 부장씩이나 되는 자가 저 말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다니. 통탄스러울 지경이군.”
“제 공부가 짧고 어리석어서 그러니, 부디 원수님께서 깨우침을 주십시오.”
“옛말에 군자는 이미 상처 입은 자를 다시 다치게 하지 않고, 머리가 반백인 자를 사로잡지 않는다고 했네.”
백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마차를 모는 어자가 아니고, 호위를 서는 거우도 아니면서, 함께 타고 있던 사내가 중행열을 거들고 나섰다.
“과연 중행 대부는 주나라에서 오래 유학하여 예법에 통달하셨구려. 옳소. 옛날 싸움의 양상을 보더라도 험한 지세를 이용해서 이기려는 약은 짓은 다들 하지 않았소이다. 그러니 어찌 중행범연합보다 약한 전력으로 정정당당히 맞서겠다며 태연히 강을 건너는 적을 치려고 북을 울릴 수 있겠소.”
백인은 사내, 주나라의 일왕자 희오를 노려봤다.
“일왕자께선 전쟁을 모르십니다.”
희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인은 자기의 주장을 계속 펼쳤다.
“적이 강하든 약하든 곤란한 지형을 만나 형세가 좋지 못한 것은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그런 적을 노리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
백인은 중행열의 말에도 반박했다.
“팔구십 노인이라도 우리의 적이면 잡는 것인데, 나이를 왜 따집니까. 싸움 중에는 적을 죽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상처를 입었다고 불쌍해서 그냥 놓아주라는 겁니까? 그럴 거면 애초에 싸우지도 말고 항복했어야지요.”
그때, 몰래 탈영한 우호법과 제자들을 징벌하겠다며 정예 문도들과 함께 떠나 돌아오지 않은 언감생 대신 중행열이 타는 전차의 거우가 된 복우파 좌호법 비정이 헛기침하며 백인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는 젊을 때부터 백인과 인연이 있었고, 평소에도 자주 만나 함께 술을 마시며 어울렸던 사이다.
그런 백인이 장차 주나라의 왕이 될지도 모를 희오와 전쟁에서 이기면 진나라의 집정(執政)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될 수도 있는 중행열의 미움을 사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아서 끼어든 거다.
그러나 백인은 거침이 없었다.
“삼군을 움직일 때는 유리한 점을 이용해서 공격하고, 북을 치는 것은 기세를 돋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유리한 점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면 적이 곤란에 빠졌을 때 쳐도 되고, 소리와 기세를 올릴 목적이라면 적이 대오를 갖추지 못했을 때 쳐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예의만을 따져 절호의 기회를 놓치려 하십니까. 족히 진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백인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기에, 중행열의 말문을 막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행열을 반성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가 뼈아픈 지적조차 포용할 정도로 대범한 인물이었다면, 애초 지백요가 불만을 품기 전에 희홍 공주를 양보했을 거다.
지금 중행열의 가슴 속에선 자기를 전쟁도 모르는 애송이에, 위선적인 인간이라 폄훼하여 우습게 만든 백인에 대한 분노가 뜨거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취급을 받고 모멸감을 느끼던 희오가 그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
“윗사람에 대한 예를 모르고 말재주만 뛰어난 폐단이 바로 이런 경우요. 나와 한 핏줄이라 믿고 아꼈던 둘째 놈도 그러했소. 손위 형제에 대한 예를 모르고 말재주만 뛰어나니, 천자를 현혹하여 내게 누명을 씌워 죽이려 했소. 가까스로 도망쳐 듣기로, 이를 질책하여 훈계하는 동후님을 궁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가두었다고 하더이다. 친모조차 멸시하는 후레자식이 아니고 뭐겠소. 그러니 말을 잘해서 어디에 쓴단 말이오. 말솜씨로 윗분의 뜻을 어지럽히고, 의지를 막고, 결국 미움이나 받을 뿐인데, 어디에 쓰겠소.”
희오의 말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었다.
감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명을 거역하고, 저리 예의 없이 군다면 후에 몰래 반역을 꾸민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백인이 중행신의 사람이고, 중행신은 중행소가 죽은 후 더욱 노골적으로 종주의 자리를 노린다는 말이 떠도는 만큼, 중행열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들릴 수밖에 없으리라.
“일왕자께서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저는…….”
희오의 주장에 놀란 백인이 해명하려는데.
“중행 대부 저길 보시오.”
옆으로 다가온 그의 전차로부터 신호를 받은 희오가 백인의 말을 끊고 뒤편을 가리켰다.
여러 곳에서 먼지바람이 피어오르고 있으니, 중행범연합의 요청을 받은 주변 제후국에서 보낸 지원군들이었다.
“여러 공들이 저리 많은 병력을 보냈소이다. 그러나 예를 몰랐다면, 일왕자인 내가 중행 대부를 지지하건 말건 신경이나 썼겠소?”
분노한 시선으로 백인을 노려보던 중행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들을 설득하는데 일왕자님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중행 대부, 저들 중엔 백적 선우부도 있소. 진나라와 오랫동안 적대했던 그들인데 제후들보다 더 많은 병력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겠소. 저런 무지몽매한 오랑캐들조차 천자의 장남인 내게 예를 보이는 게 옳다 믿기 때문이 아니겠소.”
“하늘이 일왕자님을 도와 진나라 숙적의 마음까지 움직인 겁니다.”
희오는 자기 전차로 옮겨타며 말을 이었다.
“그렇소. 선우부에서 내가 지원군의 지휘를 맡으면 두말없이 따르겠다고 한 것도 모두 예를 중시하는 하늘의 뜻일 것이오. 그렇게 하늘이 우리에게 압도적인 군세를 만들어주었는데, 예의를 잃고 비굴하게 적의 약점을 노려 승리해야 한단 말이오?”
희오는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는 백인을 노려보았다.
“예를 버리고, 하늘의 뜻을 외면한 자들의 앞날은 보지 않아도 뻔하오. 우릴 도운 제후들이 실망할 거고, 선우부는 비웃을 거요. 다신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전쟁에서 승리해도 곤란합니다.”
“패자는커녕 겁쟁이라 생각할 거요. 소식을 들은 서진과 남초가 좋다고 하고, 지금이 진을 무너트릴 때라 여기며 끊임없이 괴롭히지 않겠소.”
“상상만 해도 마음이 답답해 옵니다.”
“그뿐만이 아니오. 전쟁에서 승리해도 지한위조연합의 귀족들이 진심으로 승복이나 하겠소? 난이 끝나면 한마음으로 힘을 모으고, 성세를 회복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진데, 정당한 승리가 아니었다며 사인들을 선동하여 하루가 멀다고 소란을 피울 거요. 그래서 나는 실리를 찾는다며 예를 외면하는 것은, 군자답지 않고 소인배에 불과한 자의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하오. 무엇보다 군자인 중행 대부가 원수로서 제 역할을 못 했다고 비난받아 소인배 취급을 받으며 곤욕을 치를까 염려될 뿐이오.”
중행열은 난간을 힘차게 두드렸다.
“일왕자님이 이 중행열의 마음을 다시금 굳세게 잡아주셨소. 백 부장은 중군장에게 돌아가 전하라. 나는 옛 선인의 뜻을 따르는 군자이니, 강을 건너느라 전열을 가다듬지도 않은 적을 칠 생각이 없다.”
그리고.
“전군에게 명한다. 적들이 온전히 전투에 임하여, 우리가 당당히 승리할 수 있도록 5리 뒤로 물러날 것이니, 삼군의 군장들은 즉시 병력을 움직여라.”
* * *
주행범연합의 병력이 진격을 멈추고 더 다가오지 않자 의아해하던 지백요와 다른 대부들, 그리고 좌우 군장들은 깜짝 놀랐다.
“대체 저 많은 병력은 어디서 나타난 거냐!”
“위나라와 정나라 외에도 중행범연합을 지원하는 제후들이 더 있었던 모양이오!”
“저 깃발은 제나라의 것이고, 저 깃발은 노나라의 것인데, 헉! 저 깃발은 선우부의 것이잖소! 중행범연합이 백적들과 손을 잡은 거 같소!”
“미친 것들! 집안싸움에 강도를 끌어들인 격이 아닌가!”
“그런데 선우부의 깃발 옆에 주나라 왕실의 깃발이 올라갔소! 아, 일왕자가 선우부를 거느려, 이족을 끌어들인 걸 무마하려는 속셈 같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저들을 다 합치니, 족히 일군은 되겠소! 가뜩이나 우리의 전력이 열세인데, 저리 숫자가 많으면 어찌 상대할 수 있단 말이오!”
“당장 원수께 후퇴를 청해야 하오!”
“도강이고 뭐고, 퇴각합시다!”
“하지만 대장기를 중군이 지니고 있잖소! 중군이 퇴각 신호를 주고 먼저 물러나지 않으면 우리에겐 명분이 없소! 중군장이 이를 빌미로 군법을 적용하면…….”
그런데.
“적들이 물러나고 있잖소!”
“무슨 일이지?”
“설마, 중군이 외친 소리 때문인가?”
중행범연합의 대처는 지원군의 등장보다 지한위조연합의 수장들을 더 놀라게 했다.
후퇴와 전술 변경을 요구하던 조을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고, 황당하기까지 해서 물었다.
“중군장, 저게 뭐냐. 무슨 상황이냐. 이해 안 된다.”
“옛말에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 과거 송나라의 제후가 초나라의 왕에게 주나라의 예법을 보인다며 저와 같은 선택을 했다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관례를 따른 송나라 제후에게는 변명할 거리라도 있으나, 전투의 규칙이 진작에 바뀌었음에도 저런 오판을 저지른 중행 대부는 무슨 할 말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위험이 빤히 보이는데도 도강을 강행한 이유를 알게 된 조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물었다.
“중군장, 저쪽 멍청이가 병신 짓을 할 줄 어떻게 알았나?”
조가현에 송웅을 보낸 것은 새삼 소문을 수집하여 그사이에 바뀐 동태를 살피고, 그 소문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찾아낸 진실 중에는 중행열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중행열은 어릴 때 주나라에서 유학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주나라 예법에 정통한 것에 자부심이 남다르다고 하더군요.”
요시가 아들 중행소를 희홍 공주와 혼인하도록 해서 부마로 만들려 했던 것도, 결국 5살에 불과한 어린 아들 중행창을 희홍과 혼인시켜 부마로 만든 것도, 그런 성향의 중행열이 기뻐하고, 중행창을 후계자로 삼도록 유도하려는 계책이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중이니, 중행열은 평소의 언행이 위선이 아님을 증명하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공세를 취할 수가 없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중군장, 주위의 장수들이 반대하면? 그래서 공격하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쳐다보는 조을을 향해 웃었다.
“큭큭큭, 등 뒤에는 강이 있고, 앞에는 적이 가득하니, 죽을 각오로 싸워야겠죠.”
“…….”
“그러나 조 족장과 같은 뛰어난 장수가 있으니, 우린 죽으려고 하는 만큼 사기가 넘쳐서 살아날 거고, 승리하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조 족장, 벌써 강 끝에 다다랐습니다.”
중행범연합이 갑자기 돌변하여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다는 우려로 중군은 물론이고, 좌우군까지 열심히 이동한 결과였다.
“이제부터 중군의 지휘는 조 족장이 맡아야 하니, 뜻대로 전열을 정비하세요.”
전투에 임할 전술 전략은 병력부터 지원까지, 압도적 우위에 있는 연나라의 군대를 상대로 연전연승하였다는 조을의 의견을 참고하여 구상했다.
전투에서도 표면적으로만 중군장의 역할을 맡고, 실제로 지휘는 조을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휘는 못 해도, 대신 강호의 무인으로서 힘껏 싸워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