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127. 바람 앞의 촛불
명령을 내려야 할 희오는 급변한 사태에 놀라,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역력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진격! 저자를 짓밟고 지나간다!”
위나라 지원군의 지휘관이 마치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는 듯 산하의 군을 움직였다.
“돌격! 우리가 먼저다! 공을 빼앗기지 마라!”
질 수 없다는 듯 정나라 지원군의 지휘관도 직접 북을 때리며 병력을 다그쳤다.
사기가 크게 꺾인 상황이긴 했으나, 한 명의 적 때문에 퇴각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으니, 둘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우리도 뒤처질 수 없다! 돌진하라!”
그렇기에 다른 나라의 지휘관들도 경쟁적으로 돌진 명령을 외칠 수밖에.
하지만.
스걱!
그사이 당도한 탕난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부채를 날렸고, 전방을 가리키며 목청을 높이던 위나라 지휘관의 목을 갈라 전차 밖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시끄럽군요.”
서걱-
“아악!”
순식간에 공중을 날아 접근한 혁련미림이 좌우를 막은 병사들의 머리를 밟고 전차를 지나치며 북을 치던 정나라 지휘관의 팔을 잘랐다.
상군은 단순히 두 지휘관을 잃은 게 아니었다. 상군을 이루는 여러 지원군 중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는 세 세력 중 두 세력의 지휘관을 잃은 것이었다.
게다가.
“저, 저기, 적의 중군이 몰려온다!”
조을이 중행범연합의 중군 보병을 흡수하며 이제는 지원군의 두 배로 늘어난 지한위조연합의 중군이 먼지바람을 뚫고 등장했으니.
둥둥둥!
북을 치고.
뿌우우우-
뿔나팔을 불며.
와와와와-
하늘을 뒤흔들 함성과 함께 일사불란한 진형을 갖추고 진격해 오는 중군의 위세에 상군의 무리는 압도되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승산을 잃었다! 후퇴하라!”
가장 마지막까지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살피던 선우부의 지휘관이 퇴각을 결정했다.
지원군 중 중심 역할을 하는 세 세력 중 마지막 한 세력이고, 규모만 따지면 전체 전력 중 5할에 이르는 선우부의 이탈로, 상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상군까지 와해 되면 중행범연합의 좌우군이 위험해질 것이지만, 본래부터 그들과 하나가 아니었던 지원군들은 실리를 잃을 위기에 빠지게 되자 망설이지 않고 돌아섰다.
“중행 원수에게 돌아간다! 서둘러!”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 지원군에 뒤섞여 도망치려던 희오의 전차가 다른 전차에 얽히고 충돌하면서 바퀴 하나가 부서져 움직이지 못했다.
“멍청한 놈! 바보 같은 놈! 전차 하나 똑바로 조종하질 못하다니!”
희오는 전차에서 뛰어내리며 당황한 어자를 질책했다.
“죄송합니다, 일왕자님.”
“잔말 말고 전차나 고쳐!”
“바퀴는 고칠 수 없습니다. 송구하오나, 말을 타고 가셔야 합니다.”
“그럼, 뭘 멍청히 보고만 있느냐! 어서 말을 전차에서 떼어내고 끌어와서 내 앞에 대령하지 않고!”
“예, 일왕자님!”
어자는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하며 전차에서 뛰어내려, 마차 앞쪽으로 달려가 급히 말 한 마리를 풀고 떼어냈다.
그러나 고삐를 당겨 일왕자에게 끌고 가려던 어자는 그대로 돌처럼 굳어졌다.
왜냐하면.
“일왕자는 내게 맡기고 당신은 그 말을 타고 가도록 해요.”
일왕자는 진천의 발밑에 젖은 짚단처럼 엎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꼼짝도 하지 않아 죽은 줄 알았다. 하지만 등이 조금씩 들썩거리는 게 어떤 이유로든 기절했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
어자가 떠나길 망설이자, 진천은 말했다.
“당신이 이 사람보다 신분과 지위가 낮다는 것이, 이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가 되진 않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게 사적으로 은혜를 입었거나, 의리를 지켜야 할 개인적 사유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겁니까?”
어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가세요. 최소한 나는 당신을 비난할 생각이 없고, 굳이 죽이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자의 시선이 더욱 가까워진 중군의 병력을 향하기에 말했다.
“목숨을 지켜낼 기회란 흔하지 않고, 늘 당신의 편일 거 같은 하늘은 변덕스러우니, 더 늦기 전에 떠나도록 해요.”
어자는 말에 올라탔고.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연합군과 뒤섞여 사라졌다.
진천은 발치의 희오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땅을 향하고 있어서 어자가 홀로 떠난 것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진천은 이제까지 그 누구를 상대할 때보다 단호하게 반말로 말했다.
“너는 천자의 아들인데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받는구나. 만약 그 자리에서 쫓겨나, 더는 왕자가 아니게 되면 천하는 너를 어찌 대우할까.”
어쨌든.
“너는 나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그러니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다.”
전차에서 떼어낸 3마리 중에서 다친 1마리는 풀어주고, 멀쩡한 다른 1마리 등에 희오를 젖은 옷처럼 널어두고, 마지막 1마리에 올라탔다.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짙게 드리웠다. 거센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쳤고. 하지만 그 덕에 먼지가 밀리고 걷히며, 시야가 활짝 열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행범연합의 좌우군이 지한위조연합의 좌군과는 박빙을 이루고, 우군에는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 * *
조을의 지휘를 받은 중군은 흩어지던 지원군 일부를 쫓아 큰 타격을 입힌 뒤, 곧장 우군을 도왔다.
그제야 중군이 무너지고 상군이 와해 되었음을 알게 된 중행범연합의 좌우군은 피해를 감수하고 퇴각하여 도주했다.
원수 중행열과 친위군도 상황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중군장님, 원수 잡아 왔소.”
기마술을 습득하여 전차 이상의 기동력을 갖추게 된 팽찬과 낭인들이 조가현으로 도망치던 친위대를 추적하고 기습하여 막대한 타격을 입힌 끝에 중행열을 사로잡아왔다.
그런데.
“나는 경의 지위에 있는 상대부다. 나와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은 지백요 대부뿐이니, 당장 그에게 안내해라.”
중행열은 전투에서 패했고, 포로가 되었으며, 무릎 꿇려졌음에도 자신만만했다.
귀족이란 이런 자들이었다. 특히 귀족 중의 귀족인 대부, 그중에서도 나라에서 손꼽히는 거대 씨족이자 경의 지위에 오른 상대부는 자기들이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크고 작은 일마다 점을 치며 하늘에 뜻을 묻는 것도, 자기들은 하늘에서 점지해 준 존엄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특권 의식 때문에 백성들은 화만 내고 넘어갈 일에, 귀족들은 나라를 도탄에 빠트리고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전쟁을 일으켜 왔다.
제후국은 주나라를 근원으로 하여 출발했고, 주나라의 지배권이 유명무실해진 뒤에도 제후국 간의 공족과 대부, 귀족들끼리 혼인하여 지배계층을 공고하게 유지해 왔다.
결국, 혈연과 지연으로 엮인 한통속.
가문의 계보를 따지고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피가 섞이고, 연고가 맺어진 관계라는 거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주체이고 당사자인 공경대부 중에 죽는 이는 드물고, 사로잡히더라도 풍요롭고 편안한 포로 생활을 하거나, 돈을 받고 풀려났다.
즉, 공경대부들의 경우엔 참담한 전쟁에서도 죽을 가능성보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은 편.
그러니 전쟁을 벌이는데도 거침이 없을 수밖에.
반면 명령을 따랐을 뿐인 사인(士人) 계급의 장수들과 국인 출신의 병사들 시체는 산처럼 쌓이고, 전쟁에 터전과 식량을 빼앗긴 야인들은 굶어 죽으며, 그들 모두의 피가 바다같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지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고.
중행열의 당당함이란 것도 그 혼자만 이상한 게 아니라, 오랫동안 법과 관습처럼 깔린 주나라의 예와 통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아니, 그들끼리는 그런 줄 믿고, 그게 옳은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이리라.
중행열의 앞에 가부좌하고 앉아 말했다.
“원수는 이곳으로 올 거다.”
“언제?”
“때가 되면.”
“건방지구나. 언행에 예의를 갖춰라.”
“너는 나의 포로다.”
“이놈, 나는 경에 이른 상대부다.”
“진나라의 제후 유공이 너를 반도라 선언했고, 대부의 지위도 발탁했는데 무슨 경이야. 너는 이제 귀족도 아닌 거다.”
“중행씨는 부마의 가문이고, 주나라의 정당한 후계자인 일왕자가 나를 지지하는데, 유공 따위가 뭔데 나의 지위와 신분을 규정한단 말이냐. 그것은 예에서 어긋나니, 들을 가치도 없다.”
“대부는 왕이 아니라, 제후가 뽑는다. 제후가 나라의 경과 대부를 정하도록 한 건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너뜨린 후로 왕이 준 고유 권한이고, 왕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주나라의 예고, 전통이다. 그런데 너는 그 위계의 질서를 부정하면서 예를 따지나.”
“…….”
중행열은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끝내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도망치지 않으니, 오랏줄을 풀어라.”
옆에 있던 팽찬이 비웃었다.
“지랄. 나한테 붙잡힐 때는 산책 중이셨나.”
중행열이 팽찬을 노려보았으나, 할 말은 없었는지 반박은 안 했다.
“풀어줘요.”
팽찬이 오랏줄을 풀자, 중행열도 앉아서 마주 쳐다봤다.
팔짱을 끼고 중행열을 빤히 쳐다보았다.
중행열은 물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느냐?”
“알려줄 것이 있다.”
“무엇이지?”
“나는 희호소 사부님의 제자다.”
“네가 제자라고? 그럴 리가 없다. 희 각주의 제자는…… 죽었다.”
“나는 그 제자와 다르지만, 그분에게 글자를 배우고, 인생의 가르침을 얻은 제자라는 점에선 동일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희호소 사부님의 제자라는 거다.”
“……복수하러 온 거냐?”
“본래 나는 사부님의 유해만을 회수할 생각이었다. 그분은 너와 달리 마음이 넓으시고, 그런 식의 속 좁은 복수를 원치 않으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그분의 시신을 장원 곳곳에 뿌렸더구나.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고, 너는 이렇게 패배하여 굴욕을 당하는 거다.”
“희 각주는 내 아들을 죽였다. 복수의 방법을 정할 권리는 내게 있으니, 네놈이 이를 탓하는 건 옳지 않다.”
“사부님이 돌아가신 날, 너의 복수는 끝난 것이다.”
“나는 야인도 국인도 아닌 상대부이고, 상대부의 아들을 죽인 죄는 죽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만큼 크고 무겁다.”
“복수에도 신분의 급을 나눈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네가 나처럼 상대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그분은 왕족이셨다. 너의 말에 따르면 대부가 왕족을 죽게 했으면 분에 넘치는 복수를 한 거다.”
“방계일 뿐이다.”
“방계는 왕족이 아니냐? 제후국 상대부의 피는 왕족의 피보다 진하고 고귀하다는 거냐? 그것이 네가 추앙하고 따른다는 주나라의 예법에 따른 판단이냐?”
“…….”
“네겐 예가 없다. 너의 모든 행동은 예가 아니었다.”
“헛소리!”
“예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려선 안 되는 것이다. 천년을 한결같이 장엄한 고송처럼 상대의 지위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독한 햇살과 거친 비바람을 막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내가 평생을 지켜온 게 무엇이란 말이냐.”
“의다.”
“의?”
“의는 물과 같아서 상대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흐르는 것을 억지로 막아서 고이게 했고, 썩게 방치하여 악취를 풍기니, 불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절대적이고 불변해야 할 예는 옳음을 추구하기가 편하고 좋았으나, 더는 그 형체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좋든 싫든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의협이 필요하다. 상대에 따라 변하고 달리하는 복잡한 세상에 맞추어 옳은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의를 혁파하는데, 신분과 지위, 과거의 영광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그저 바르게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방해하는 걸림돌일 뿐.”
그리고.
“의지를 세우고, 곧게 나아가려면 걸림돌을 치우는 것만이 답이다.”
손을 들었다.
“우리는 협의를 펼치고 절박한 이를 도우며 곧은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릉이 옆으로 다가와 검을 내밀었고.
“그러니, 걸림돌은 방해하지 말고 그만 비켜나라.”
뽑아서 휘둘렀다.
서걱-
땅에 떨어진 중행열의 머리는 저만치로 굴러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할 도랑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