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132. 답답하고 못난 제자
돌이켜보면 희오를 등장시킨 후로 임하송은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살기를 풀풀 풍기고, 검기까지 일으키며 무슨 말을 하려고는 했었는데, 희오를 죽이겠다는 뻔한 각오의 말이겠지, 지레짐작하고 말문을 막았다.
그런데 지창운에게 화를 내며 공격하는 걸 보니, 희오를 향한 분노와 살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
정황상 원수이자 적이었던 희오가 사죄하고, 가족을 살려달라고 호소까지 했음에도 희오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의미다.
왜 희오도 아닌 자가 자기에게 사과하고, 그 가족의 목숨을 구걸하고, 왜 저런 자를 데려왔냐고 항의하고 너무 분노하여 살기를 내뿜었던 거다.
솔직히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창운의 얼굴을 알고 있을 텐데도 옷차림 때문에 중행범연합의 무리로 오해한 걸로 볼 때, 희오 역시 지한위조연합의 병사 복장인 게 영향을 미친 걸로 추정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임하송의 언행에서 나타나는 혼란과 오해가 선택적이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둘의 소속을 역으로 착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자기 행동이 잘못된 걸 깨닫고 설득된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하고, 변심한 것이 부끄러운데, 내세울 명분이 마땅하지 않아서 제정신이 아닌 걸 핑계로 삼은 걸까.
혹은.
‘정말로 착각하는 것일지도.’
아무리 과거보다 사람의 표정과 내심을 잘 읽게 되었다고 해도, 온전한 이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어려운데, 제정신이 아닌 이의 머릿속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기란 더 힘들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이유였든 상관은 없다.’
어쨌든, 임하송이 문도들을 아끼는 사람이라는 걸 명확히 확인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임 문주는 이곳에서, 지창운과 같은 자에게 죽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송웅에게 다시 지시했다.
“송 장로. 백의개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 있어요.”
지창운과 공방을 주고받자마자 순식간에 포위된 임하송을 도우러 뛰어나갔다.
하지만.
“방주님 말씀 들었지? 쓸데없이 가까이 있다가 뒈지지 말고 멀찍이 물러나서, 활짝 열린 마음으로 보고 배워라.”
송웅은 말을 듣지 않고, 한단에서부터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를 들고 뒤따라왔다.
앞을 막아서는 만목장 문도 셋을 연달아 때려눕히며 말했다.
“송 장로, 나는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고 했습니다만?”
“방주님은 한 입으로 두말을 하시렵니까? 설사 오군이 모두 몰려와 굴복을 강요하더라도, 의지를 굳건하게 세워서 굴복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개방의 법개여야 한다면서요? 지금이 딱 그 상황이잖습니까.”
마침 지창운과 임하송이 오군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어, 반박하기 힘들었다.
송웅의 언변이 좋아진 게 이럴 때 양날의 칼로 작용할 줄이야.
“그리고 제가 사지가 뜯기고, 머리통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함부로 머리를 숙이지 않고, 올곧게 절개를 지키겠다고 약속드렸는데, 약함을 이유로 약속을 파기하면 개방의 후개요, 법개로서 어찌 백의개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단 말입니까.”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잔소리한 게 미안해졌다.
말싸움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라, 도망치라고 가르친 연쌍비를 적절히 사용하여 만목장 문도들과 공방을 주고받는 송웅의 솜씨가 제법 괜찮아서다.
‘재능에 노력이 더해진 걸까?’
문도들의 칼을 쳐낼 때마다 생겨나는 소리와 지팡이의 울림을 들어볼 때, 신강룡신공을 열심히 연공하여 쌓은 공력을 병기에 담아 강화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흡족한 건, 지팡이를 휘두를 때 삼재권법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고의로 의도하여 펼칠 때도 있고, 반복된 수련으로 몸에 익어서 자연스럽게 펼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송웅이 싸우는 걸 보고 있자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이래서 제자를 거두어 무공을 가르치는가 보다.’
앞으로는 무공이든 싸움이든 다른 무엇이든 잔소리하지 않기로 했다.
이는 송웅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도, 인연이 닿아 무공을 전수해 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물고기를 잡아줄 것이 아니면, 잡는 방법을 알려주고 믿고 맡겨야 스스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성장하여 진정한 어부가 된다는 이치랄까.
그리고 말을 듣지 않는 건, 송웅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문주님, 저희도 싸우겠습니다!”
희오와 희송, 요시의 무리를 포위하고 있던 벽한파의 문도들은 임하송이 위기에 빠진 걸 보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뛰어나와 만목장의 문도들을 공격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이론적으로 알고 있던 병법의 이치가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닿았다.
[실익을 따져 싸움에 나서는 것과 의로서 싸움에 임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만목장의 무리와 벽한파의 무리가 딱 그와 같았다.
방파에 이득이 있어 윤갈과 야합하여 암살행에 오른 만목장의 문도들은 세 배 가까이 많았고, 정예들인 만큼 벽한파의 문도들보다 평균적으로 무공의 실력이 더 앞섰다.
그런데도 동료의 복수를 위해 나섰고, 솔선하는 문주에게 감복하여 함께 싸우고자 하는 벽한파 문도들보다 투지가 한참 밑돌았다.
왜냐하면 투지란 것은 인원의 많음이 아니라, 죽을 각오가 섰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싸움의 목적과 명분이 미약했던 만목장 문도들은 금방 전의를 잃고 싸움을 그만둘 생각밖에 하지 않게 되다 보니, 지창운과 장로들을 보조해야 할 진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정신 차려라!”
“물러나지 말고, 틈을 메워 손발을 맞추란 말이다!”
“물러나는 놈은 목을 칠 것이다!”
혈부쌍사와 장로들이 호통을 치고, 협박하며 다그치기도 했으나, 때를 놓치고 무너진 제방에서 쏟아지는 물은 걷잡을 수가 없게 되듯, 진형이 와해 되는 걸 저지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애꿎은 부하들 사지로 떠밀지 말고, 댁들이나 죽어.”
퍼석!
임하송과 싸우느라 주도할 여유가 없었던 지창운 대신 문도들을 이끌던 장로들을 연이어 죽이고.
“네놈이……!”
콰직!
“지난번의 굴욕을……!”
와득!
혈부쌍사까지 연달아 머리를 깨트리고 목을 부러트려 죽이자, 만목장의 문도들은 놀랍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에 빠져 경쟁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누구의 도움도 못 받고, 홀로 고립된 지창운은 임하송이 다치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물불을 안 가리며 맹공을 펼치는 공세에 정신없이 밀려났다.
그리고.
“윽!”
왼 팔뚝을 깊이 베이며 자세가 흐트러졌고, 임하송은 결정을 짓겠다는 듯 절초를 펼쳤다.
그런데.
훙-
검을 휘두르는 동작이 컸던 절초는 공력을 한껏 주입해야 해서 움직이는 속도도 조금 느릴 수밖에 없었고, 그 순간 지창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세를 바로잡으며 도끼를 휘둘렀다.
짐짓 밀리는 척 왼팔을 내주고, 절초를 쓰도록 유인하여 반격할 틈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캉-
임하송은 내상을 각오하며 무리해서 공력을 끌어올려 팔에 주입하고, 근력을 급히 강화하여 검을 움직인 덕에 도끼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무리한 덕에 기력이 순식간에 소모되고, 근력도 빠르게 약화 되면서 길게 버티지 못했고, 검이 크게 휘청이며 옆으로 밀려났다.
하나, 그에게는 다행히도 지창운의 도끼 역시 벽에 막힌 것처럼 튕겨 나온 상황.
지창운은 유인책을 쓰느라 왼팔에 큰 상처를 입었고, 임하송은 내상을 입었으니, 어느 쪽이 더 유리해졌다고 할 수 없었다.
물론, 임하송의 무리는 피해가 적고, 지창운의 무리는 와해 되었으니, 결국 임하송이 우위를 점했다고 볼 수는 있었다.
그런데 지창운이 튕겨 나오는 도끼를 그대로 놓아버리는 게 아닌가.
그리고.
펑-
그대로 오른 손바닥을 불쑥 내질러 열린 임하송의 가슴에 장력을 적중시켰다.
“컥!”
피를 울컥 뿜어내며 뒷걸음치는 임하송.
“하하하, 꼴 좋구나!”
지창운은 바로 따라붙으며 재차 장력을 날리려고 했으나.
“쳇!”
코웃음을 치며 물러났고, 그대로 담장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바로 쫓아가면 잡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를 잡아서 죽이는 것보다, 내상을 크게 입은 임하송을 치료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개새끼. 제 목숨만 귀한 줄 아는 게 무슨 문주라고.”
송웅은 지창운이 사라진 쪽으로 침을 뱉으며 욕을 하더니.
“이 한심한 놈들아, 너희 문주 도망갔다!”
벽한파 문도들에게도 그만하자고 손짓을 하고.
“불쌍해서 죽일 생각도 없으니까, 너희도 그만 사라져라.”
얼마 남지 않은 만목장 문도들에게 길을 열어 주어 떠나도록 했다.
* * *
가부좌한 임하송의 등에서 손을 뗐다.
내상이 완전히 치유된 건 아니지만,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는 넘긴 상태.
임하송은 부축을 받고 일어나더니.
“도와주어 고맙소, 진 방주.”
양손을 모아 감사를 표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걸까?
그러나 처자식과 희홍 등과 상봉하여 긴장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는 희오를 스쳐 가는 시선에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아직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하송은 주위에 모여 있는 문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이곳에 있기 싫구나. 진나라 밖으로 떠날 생각이다.”
문도들이 희오와 그 무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복수는 하지 않으십니까?”
임하송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 욕심으로 죽게 했는데, 누구에게 복수하겠느냐.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희오와 그 무리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진천을 보며 말했다.
“난 살아 있는 너희들이 더 중요하다.”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으나, 중요한 건 임하송이 한층 성장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정신에 문제가 생긴 영향이라고 해도, 아직 그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라고 해도, 어쨌든 임하송의 앞날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너희들에게 나와 같이 가자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노자와 정착금을 충분히 챙겨줄 것이니 너희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해라.”
“전 문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저도요.”
문도들 모두 임하송과 동행을 선택했다.
그러면서도 궁금하긴 했는지 물었다.
“목적지는 정하셨습니까?”
“정하지 않았다. 다만…….”
임하송은 진천을 보고 물었다.
“진 방주, 사매는 어디로 갔는가?”
“그걸 왜 묻습니까?”
“사매는 늘 현명했지. 그런 사매가 머물 곳으로 정했다면, 나와 문도들에게도 지내기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다른 걱정은 말게. 사과라면 모를까, 내가 무슨 면목이 있어 무슨 자격으로 사매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겠는가.”
“그들과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까?”
“약속하겠네.”
임하송의 말도 믿지만, 남익과 자분의 강함과 슬기로움에 대한 확신도 있었다.
“일단은 서쪽으로 가본다고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듣기로 서쪽 끝자락에 드넓고 기름진 땅이 있는데, 새도 넘기 힘들 만큼 높고 험한 산에 둘러싸여 있어 탐욕스러운 제후들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곳이라더군요.”
“산 좋고, 물 좋고, 인적도 드물겠군.”
“저도 설명을 듣고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에게도 그런 곳이 절실하네.”
“남 선배도 같은 말을 하더군요.”
남익처럼, 임하송도 그를 이해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기에, 그곳에서 다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좋을 것이다.
“목적지가 정해지니, 마음이 급해지는군.”
임하송은 그를 부축한 문도 중 한 명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 문도는 다른 한 문도와 함께 희오 쪽으로 걸어왔다.
희오와 무리는 긴장했다.
하지만 진천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임하송이 문도들에게 속삭인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문도들은 진천을 지나쳐, 무리 속으로 들어가 요시를 끌어냈다.
임하송은 말했다.
“요 사매는 나와 함께 가자. 너를 죽일 수는 없으나, 이곳에 남겨 두는 것도 못 할 짓이야.”
요시는 거부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아혈 등이 점혈 되어 반박하지 못하고, 저항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주위에서 대신 막아보고자 하는 이도 없었다. 특히 모친이 떠나는 데도 희홍의 품에 안긴 채 멀뚱히 쳐다만 보는 게 인상적이었다.
“진 방주, 우린 가겠네.”
임하송은 손을 흔들었고, 희오 등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무리와 함께 떠났다.
그리고.
화르르-
진천은 화양공의 기운을 일으켜 거치는 전각마다 불을 붙이며 송웅과 희오 등을 비롯한 무리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사부님, 이렇게밖에 보내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곳곳에 뿌려져 시신을 거둘 수가 없으니, 장원을 통째로 불태우는 화장으로 대신 장례를 치른 것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원을 바라보고 있으니, 희호소 사부님이 좋아하던 시가 떠올랐고, 입이 절로 열렸다.
“기쁜 소리로 사슴이 소리 내며, 들판의 쑥을 먹네.
내 반가운 손님 있어, 거문고 타고 생황을 부네.
생황 불며, 폐백 담은 광주리 받들어 바치네.
그분 나를 좋아하니, 나에게 큰길 열어 주시네.
기쁜 소리로 사슴이 소리 내며, 들판의 다북쑥을 먹네.
내 반가운 손님 있어, 좋은 말씀 너무나 밝아서.
백성에게 후박한 마음을 보여주신다, 군자들도 본받고 우러르니, 내 맛있는 술 있어, 반가운 손님이 잔치하며 즐기네.
기쁜 소리로 사슴이 소리 내며, 들판의 금풀을 뜯네.
내 반가운 손님 있어, 거문고 타고 생황을 분다.
거문고 타고 생황 불며, 기쁘게 즐기네.
내 맛있는 술 있어, 잔치 베풀어 반가운 손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네.”
희호소 사부님이 너무도 그리워 눈물이 흐르는데, 웃음이 났다.
“사부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슬픔은 나쁜 게 아니네요. 눈물은 부끄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슬픔도 알고, 눈물도 알아야 진정 기쁨도 안다고 하시더니, 답답하고 못난 제자가 이렇게 웃음도 짓게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