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33
133화
133. 잡아먹히는 세상
지백요로부터 병력 절반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윤갈은 범씨의 중진 범고이를 추적했다.
중행가의 무리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이동 중이던 범고이는 꼬리가 잡혀 일차로 패했고, 연이어 퇴각한 끝에 식읍이자 주요 근거지인 진양현으로 들어가 공성하였는데, 윤갈로부터 은밀히 사면을 약속받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했다.
“하하하!”
진양현을 빼앗고 점령한 후, 범고이의 장원에 자리 잡은 윤갈은 600명 이상을 지휘하는 여장들만 불러 술과 음식을 베풀었다.
“영웅은 호색이라는데, 여장들의 옆이 허전하구나. 앞으로 나를 도와서 지백요 대부님을 보필하며 크게 활약할 호걸들인데, 대접이 이리 소홀해서야 쓰나.”
윤갈은 호위병들에게 사로잡은 범고이 일가의 처자들을 데려오도록 명령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문이 열렸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온 건 호위병들도, 여자들도 아니었다.
“지 문주?”
지창운은 먼 길을 달려와 전신이 땀과 먼지로 더럽혀지고, 다친 왼 팔뚝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윤갈은 지창운의 엉망인 몰골과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 혼자 나타난 정황을 통해 기대하고 있던 말을 듣지 못 하리라 예감했다.
그래서.
“허허, 지 문주. 어디서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 꼴이 말이 아니구려. 내 머물 거처를 마련하라 지시할 테니, 사정이 어찌 된 것인지는 일단 씻고, 옷도 갈아입고, 부상도 치료한 후에 듣도록 합시다.”
일단은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지창운에게 진천 등을 암살하도록 사주한 것은 부끄러울 게 없으나, 승전을 축하하며 주요 장수들과 관계를 단단히 다지고자 하는 좋은 자리에서 실패를 논하고 싶지 않아서다.
지창운의 실패가 그의 실패로 인식되어, 장수들에게 무능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었고.
그러나.
“실패했소.”
자기 코가 석자인 지창운은 윤갈의 사정을 신경 쓰고 배려할 상태가 아니었다.
“문도들이 많이 죽었소. 살아남은 자들도 몇 되지 않고, 다들 어디로 갔는지…… 뿔뿔이 흩어져 도주한 문도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만목장은 이전 전력의 절반만큼도 되돌릴 수가 없을 거요. 하지만 이대로 끝날 내가 아니오. 반드시 복수할 거요. 하지만 복수를 하려면 이전의 세를 회복해야 하는데, 윤 참모의 지원이 필요하오. 그리고 당장은 놈의 눈에 띌 수가 없으니, 윤 참모가 나를 보호해주셔야 하겠소.”
윤갈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 문주, 그자가 어디까지 눈치챈 거요?”
“어디까지라고 할 게 있겠소. 다 알고 있더이다.”
윤갈은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 어찌 일을 그리 허술하게 한단 말이오!”
지창운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내가 그놈에게 내보인 분노는 작은 우물 정도지만, 윤 참모가 그놈과 맺은 원한은 큰 호수와 같소. 내가 아니라, 그 누가 놈을 노리고 갔어도 놈은 배후에 윤 참모가 있다고 의심했을 거요.”
윤갈은 움찔하며 장수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창운이 진천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자기가 진천을 암살하도록 사주했음을 암시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윤갈은 자신의 언행이 성급했고, 지창운을 질책할 때가 아님을 깨닫자마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마음이 답답하여, 지 문주에게 말실수를 했소. 지 문주의 속도 편치 않을 텐데, 지금은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안정시켜 요양하는 게 우선 아니겠소. 아까 말했듯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가서 쉬도록 하시오.”
윤갈은 다른 호위병들에게 장원에서 제일 좋은 별관으로 지창운을 안내하고, 의원과 시녀들을 붙여서 정심을 다해 간호하도록 지시했다.
“내 금방 찾아가겠소.”
지창운이 호위병들과 함께 나가자, 윤갈은 남은 호위병들에게 모두 밖으로 나가서 아무도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라고 명령했다.
호위병들 모두가 방을 나가고, 윤갈과 장수들만 남게 되자, 가까이 앉아 있던 장수가 물었다.
“총창모님, 혹시 지 문주가 진 중군장을 암살하러 갔다가 실패한 겁니까?”
눈치가 빠른 장수였다.
하지만 다른 장수들도 대략 짐작하고 있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래서 지창운의 말을 듣고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그놈에게 굴욕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고, 뺨까지 맞았으니, 내가 놈에게 원함을 품고 있음을 모를 수가 없겠지.’
비밀 아닌 비밀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래서.
“다들 나처럼 생각하리라 믿소만, 나는 진 중군장의 방자하고 교만한 태도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소. 이는 지백요 대부님의 위신에 해를 끼치는 것과 같으니…….”
내막을 털어놓았다. 비밀을 공유하고, 그래서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이를 빌미로 장수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혁련미림과 탕난까지 제거하려고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는 지백요의 분노와 불신을 살 수도 있는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장수들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걱정과 우려를 숨기지 않았다.
“지 문주의 말을 들어보니, 진 중군장이 총참모님이 배후임을 알고 있다고 하는데, 그가 총참모님께 책임을 묻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진 중군장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의 무공은 측정이 안 될 정도이며, 그의 병력 또한 두 개의 군단을 합친 것만큼 많은데, 지창운 문주를 보호할 복안이 따로 있으십니까?”
“내가 여장들을 믿고, 또 앞으로 함께 대업을 이룰 형제들이라 생각하니, 탁 터놓고 말하겠소. 나는 그자가 혼자만 잘났다며 승리에 취하고, 우리의 수고는 모른 채 홀로 오만방자한 때를 노렸던 것이오. 방심하니, 절호의 기회라 보았지. 하지만 지금 그자와 맞서는 건 공연히 문제를 일으켜 화를 자초하는 것과 같고, 호랑이 굴에 스스로 뛰어드는 격일 뿐이오.”
간단히 말하면 진천이 무서워서 싸우지 않겠다는 뜻인지라 장수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진 중군중은 총참모님을 찾아와 따질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총참모님의 위치를 파악하여 군을 이끌고 오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와 맞서지 않고, 지 문주를 보호할 수 있습니까?”
윤갈은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교활한 여우가 잡히고 나면 충실했던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잡아먹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요. 그런데 여우도 못 잡을 만큼 하등 쓸모없는 사냥개야 말할 가치도 없지 않겠소.”
그 의미를 알아챈 장수들은 윤갈의 냉정함에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도 공감했다. 오히려 지백요의 친족임을 이유로 지창운을 옹호하고, 진천과 적대하지 않는 걸 높이 평가했다.
이런 윤갈이 참모로 보필한다면, 지백요가 다른 상대부들을 물리치고 진나라의 패자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에 기뻐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여장들에게 부탁할 게 있소. 아니, 지 대부님을 위해서라도 여장들이 반드시 해줘야 하오.”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지창운에게 반역의 죄를 물어 죽이고, 입을 막으라는 요청을 거부감도 없이 받아들였다.
또한.
“이번에 범고이를 배반하고 우리에게 넘어온 측근들도 소란을 틈타서 함께 처리하시오. 이미 한 번 배반했는데, 두 번이 어렵겠소. 나는 여장들을 믿지만, 그들은 믿지 않소. 옆에 두는 것도 편치 않은데, 앞으로 세 대부와 진나라의 패권을 두고 다툴 때 어찌 그들을 쓰면서 안심할 수 있겠소.”
그들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범고이를 죽이고, 손쉽게 진양을 얻었기에 조금 꺼림칙했던 여장이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그들을 멀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적족과 자주 다투는 태행산맥의 북쪽으로 파견해도 좋을 것입니다.”
윤갈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그들을 멀리한다고 될 일이 아니오. 만약 그들이 범고이를 구슬리듯 지 대부님을 구슬릴 수도 있지 않겠소. 그리고 역으로 여기 여장들을 멀리하게 만든다면, 일개 참모에 불과한 나로서도 달리 방도가 없다오. 태행산맥의 북쪽으로 보내는 것도 불가하오. 적족을 제어하라고 보냈는데, 그들과 마음이 맞아서 창날을 우리 쪽으로 돌릴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소이다.”
“그렇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 미리 썩은 살을 도려내어 뼈를 상하지 않게 하겠다는 심정으로 그들을 처리하자는 거요. 물론, 여장들이 내키지 않는다면, 강요는 하지 않으리다.”
그러나 자기들의 안위에도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이야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은 여장들은 경쟁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총참모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작은 도리를 챙기려다가 큰 도리를 잃어서는 아니 되지요!”
“여기 따듯한 술 한 잔 받으십시오. 이 술이 식기 전에 마무리 짓고 오겠습니다.”
여장들은 화로에 올려둔 술병을 들어 윤갈의 잔과 자기들 잔에 따르고.
“뭐라 해도 그는 천하의 고수요. 혼자라고 만만히 보았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가 있으니, 각자 정예병을 이끌고 가야 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공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은 병사들만 골라 데려갈 것입니다.”
무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내내 심각한 표정이었던 윤갈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더는 예와 의를 따지는 세상이 아니다. 생존과 실리를 우선으로 두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세상이란 말이야.”
그렇기에 고리타분한 예와 의리의 가치를 주장하지 않는 여장들이 마음에 들었다.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따라주어 매우 흡족했고.
하지만.
“총참모님, 지창운이 도망쳤습니다.”
그 사이 갑옷과 칼이 피로 얼룩진 여장이 급히 뛰어 들어와 보고하는 말에 좋았던 윤갈의 기분이 훨훨 날아가 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아무리 오군의 일인으로 꼽히는 천하의 고수였지만, 팔에 깊은 상처를 입고, 먼 길을 달려와 기력까지 떨어진 상태가 아닌가.
“……어떻게 그를 놓칠 수가 있단 말이오?”
게다가 군부 출신이라도 다들 무공이 뛰어난 여장들이, 수백의 정예 병사를 이끌고 가서도 죽이지를 못하다니.
“사실은 거리가 가까운 범고이의 측근들 먼저 처단한다고 조금 소란이 일었는데, 별관까지 전해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별관을 포위했을 때는 이미 도주를…….”
아뿔싸.
그들을 죽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려다가, 여장들의 불안감을 너무 자극해버린 모양이다.
여장들 입장에선 지창운보다 경쟁자가 될 자들에 대한 우려가 더 클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후회해도 늦은 상황.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부상에, 기력도 떨어지고, 말과 전차를 구하지 못해 두 다리만 의지해야 하니, 아무리 경공이 뛰어난 고수라도 멀리 도망치진 못했을 거요. 전차 100대를 내줄 테니, 어서 추적하시오. 다만, 명심할 것은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하는 만큼, 물고기 잡는 그물처럼 틈 없이 펼쳐져 추적하고, 병사들을 통해 괜한 말이 흘러나와 소문이 퍼지지 않게 찾아내는 즉시 죽여야 하오.”
“명심하겠습니다.”
여장은 칼을 거꾸로 잡아 양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에 밖으로 뛰어나갔다.
윤갈은 마치 총지휘관에게 하듯 예를 취한 여장의 태도에 조금 마음이 풀렸고, 의자에 앉아서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술이 넘어가나?”
분노에 물들어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과 함께 등 뒤에서 다가온 칼이 윤갈의 어깨에 올려져 닿을 듯 말 듯 목을 겨누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설마 도망치는 척하며 이곳으로 숨어들 줄이야…….’
윤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싶을 만큼 깜짝 놀랐지만,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지 문주,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오?”
“나를 죽이려고 여장들을 보냈더군.”
윤갈은 그제야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허허, 지 문주를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서 여장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내 의도와는 다른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이것 참, 사람이 작심해도 하늘이 받아주지 않으면 뜻한 대로 흐르지 않는다더니, 지금이 딱 그 꼴이군요. 미안합니다. 내가 지금 당장 여장들을 질책하고, 단단히 일러서 바로잡겠습니다. 그러니 이 칼부터 좀…….”
“이제야 임하송이 중행범연합에 대해 이를 갈고, 광분했던 이유를 알겠다.”
“……?”
“진 방주가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나를 설득하려 했던 걸 비웃었는데, 그가 지금 내 처지를 알고 비웃는다고 해도 부끄러워 눈도 마주칠 수 없게 되었으니, 사람의 앞날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구나.”
“지 문주, 잠시 내 말을…….”
“구차하다.”
지창운은 칼을 휘둘렀고.
서걱!
윤갈의 몸과 머리는 분리되어 허물어졌다.
지창운은 바닥을 적시고, 그의 가죽 신발까지 물들이며 넓게 번져가는 핏물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허무하다.”
그리고.
“이제 진나라에서는 믿을 자가 하나 없고, 몸 하나 누일 땅 한 구석이 떠오르질 않는구나.”
칼을 들어 윤갈에게 그러했듯 자기 어깨에 올렸다.
하지만.
“흐흐흐, 이런데도 삶에 미련이 남아 죽지 못하니, 나는 천하의 고수가 아니라 천하의 겁쟁이가 아닌가.”
칼을 옆으로 던져버린 지창운은 창문을 통해 지붕에 올라섰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부끄럽게 되었으니,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야겠다.”
한숨을 내쉬며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서쪽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