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157. 다시 천하의 주인
혼마는 저들에게 그냥 무지독만 먹인 게 아닌 모양이었다.
혹은 애초부터 무지독이란 건 이런 식으로 써먹기 위해 만들어진 건지도.
어쨌든, 미쳐 날뛰며 덤빈다고 해서 무턱대고 죽일 수는 없었다.
“본인들의 의지로 저러는 게 아니니, 가능한 죽이지 말고 제압하세요.”
광기에 휩싸였어도, 상식 밖의 괴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실력의 차이가 너무 커서 혁련미림과 탕난이면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달려드는 족족 요혈을 얻어맞고, 점혈 되어 나뒹굴었다.
병사가 떨어트린 창을 챙겨서 타구봉법을 펼치는 진천에게 맞고 기절하는 숫자는 그보다 더 많았다.
그런데.
“마자부트 치즌 캄조르 치즌 코 차낙르 아우르 마자부트 호테 하인!”
붕마가 이족의 말을 길게 내뱉었다.
직역하자면, 강한 것은 약한 것을 걸러내고 더 강해지라는 거다.
그러자 갑자기 서로 뒤엉켜 목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자기들끼리 싸우죠?”
“막내 아가씨, 저들이 서로 피를 빨아먹고 있어요!”
그렇게 순식간에 절반이 죽었고.
“마르!”
입에 피칠을 한 나머지 절반은 열 배는 더 흉포해져서 달려들었다.
‘이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런데 왜 저들에게 화가 나는 걸까.
‘이들의 의지가 아니다.’
하지만 왜 이들이 인간이 아닌 괴물로 보이고, 살심이 차오르는 걸까.
‘어쨌든 싸워야 하고, 수많은 이들이 죽은 것을 나와 동료들의 탓으로 돌릴 수 없으니, 원망할 대상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어쨌든, 적당히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진 방주님, 피를 마셨다고 움직임이 몇 배나 빨라지는 게 말이 돼요!”
“진 방주, 힘도 수배나 강해졌네! 아무래도 마도의 사술을 쓴 모양이야!”
그렇다고 혁련미림과 탕난이 감당할 수 없게 된 건 아니었지만.
“혁련 소저, 탕 선배, 아까 내 말은 무시해요!”
이전처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식으로 싸울 수는 없었다.
요혈을 때려도 점혈이 되지 않고, 근육이 상하고 뼈가 부러지고, 비명이 나와야 정상일 만큼 강하게 때려도, 심지어 팔다리를 잘랐는데도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으니까.
‘죽어도 어쩔 수 없다.’
적당히 때릴 수 없다 보니, 죽일 만큼 힘을 쓰게 되고, 죽일수록 폭력성은 격해지고, 살의는 차곡차곡 쌓여 기세가 더해지니, 손속까지 독하고, 잔인해졌다.
문제는 그러한 자신의 행태를 인식하면서도 몰입하고 있다는 것.
두 명의 머리를 부수고 돌아서다가, 피와 살로 더럽혀지고 있는 혁련미림과 탕난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덮이는 걸 보았다.
‘내 잘못이다.’
후회와 자책, 한편으로 책임감도 느꼈다.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일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
자신이 홀로 짊어져야 할 짐을 억지로 떠넘긴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더 앞장서서, 더 열심히 싸우고, 어쩔 수가 없다면서 더욱 몰입했다.
한편으로 혼마를 처리하면, 붕마를 제압하면, 이들을 통제할 수 있고, 죽일 일도 없어질 거란 믿음으로 전진했다.
그런데.
“보고 있기만 하니, 지루하네.”
좌우로 오가던 혼마가 동후의 머리채를 잡아 단상 끝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삼왕자, 이년이 미웠지?”
미웠다.
“내가 대신 복수해 줄게.”
뭐?
“당신이 왜!”
혼마는 진천의 외침을 무시하고 동후의 귓가에 속삭였고.
“살, 사려줘!”
동후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비명 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그리고 혼마가 다시 속삭이자, 눈물을 펑펑 흘리며 진천에게 말했다.
“용서해 줘! 내가 잘못했어! 삼왕자, 나 좀 살려다오!”
혼마는 진천에게 물었다.
“살려줄까?”
하지만 진천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안개에 휩싸인 손으로 동후의 목을 쳤다.
서걱!
잘린 머리가 단상 아래로 굴러갔다.
감기지도 않은 동후의 눈이 빙글빙글 돌며 왜 자신을 죽게 놔두었냐고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혼마는 잘린 단면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동후의 축 처진 몸뚱이를 밑으로 던지며 말했다.
“대답하지 않았으니, 삼왕자가 죽인 거야.”
말도 안 된다.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았잖아!”
혼마는 또 무시하고 희상의 아내 금 씨를 잡아서 끌어냈다.
“이 년도 네가 고통받는 데 일조했지?”
그리고 동후가 그러했던 것처럼 정신을 차린 금 씨도 살려달라 애걸하고, 용서를 빌었다.
“살려줄까?”
혼마가 묻는 와중 수많은 창과 칼이 동시에 찔러왔고, 이를 피하고 막고 반격하느라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보았자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늦어.”
서걱!
혼마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금 씨의 잘린 머리가 떨어지고, 그 육신도 쓰레기처럼 단상 아래로 던져졌다.
“혼마! 그만둬!”
분명 미웠다.
저들 중 일부는 죽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누구의 죽음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까 살려줘! 모두 살려줘라! 나에게 화났잖아! 네 계획을 방해한 건 나잖아! 딴 사람에게 분풀이하지 말고, 나와 싸우자!”
그러나.
“재미없네.”
혼마는 안개에 휩싸인 손을 뻗었고, 그대로 몇 번 휘두르자 칼날 같은 기운이 연이어 뻗어나가 고왕의 좌측, 희상을 제외한 이들의 머리가 우수수 잘리며 단상 아래로 떨어졌다.
“너!”
순간 이성을 잇고 있던 끈이 끊어진 것만 같았다.
혼마를 막아야 한다고,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제심 없이 타구봉법을 펼쳤고, 앞을 막으면 반사적으로 항룡장, 무영각, 소수신공, 가리지 않고 내질렀다.
혁련미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탕난의 말도 들렸으나,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앞을 막는 모든 걸 자르고, 부수고, 박살 냈다.
그 처절하게 끔찍한 여정은 피범벅이 된 채로 단상 앞에 선 순간에 멈췄다. 덤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으며 잃었던 이성이 흐릿하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
말라죽은 다른 사형제들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붕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뒤로 선 혼마가 안개에 휩싸인 두 손으로 붕마의 머리를 감싸 잡았다.
혼마가 붕마의 마정을 흡수하려 하고, 붕마는 기꺼이 죽으려 한다는 걸 알았다.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 목숨을 쉽게 저버리려 하냐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주인님, 대업을 이루소서!”
그럴 틈도 없이 붕마는 마정을 빼앗겼고,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칠공에서도 검은 피가 흘렀고,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고개를 들어 혼마를 쳐다봤다.
안개가 격렬히 흔들리며,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혁련미림과 탕난이 위험하다고 외치는 소리가, 빠르게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혼마가 안개에 싸인 양손을 들었고, 그 끝에서 전광지와 한빙탄이 동시에 쏘아져 진천의 좌우로 지나가고, 혁련미림과 탕난의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혼마에게서 붕마와 다른 사형제들의 힘이 하나로 합쳐진 것만큼 막대한 기파가 강풍처럼 뿜어지며, 전신을 휩싸고 있던 안개가 흩어지고 드러난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자신을 낳다가 죽었다는 모친이, 고왕이 조각했던 모습에서 조금도 늙지 않은, 그때 그 시절의 아름다움과 젊음의 생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왕좌에 앉아 있던 고왕이 벌떡 일어나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혼마를 바라보며 외쳤다.
“초요! 초빈! 나의 사랑! 돌아왔구려!”
진천이 혼마와 말을 주고받으며, 사실은 자신의 세 번째 아들인 걸 알았을 텐데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것과 확연하게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혼마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래요, 돌아왔어요.”
고왕이 달려와 손을 잡자, 혼마는 진천에게도 손을 뻗었다.
“내게 오렴, 나의 아들아.”
홀린 듯 단상으로 올라가며 물었다.
“정말 어머니세요?”
혼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천의 손을 잡았고, 끌어당기며 안았다.
혼마의 품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너무나 그리운 냄새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하며 눈물이 흘렀다.
혼마가 더 그럴 수 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귓가에 속삭였다.
“드디어, 나는 당신을 넘어서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
혼마의 이어지는 속삭임에 말문이 막혔다.
“샤르트 푸리 후이 하이.”
갑자기 반대편에 서 있던 고왕의 전신이 거대한 바위에 압사되듯 터져버렸다.
동시에 태산 같은 기운이 대전을 가득 채우고, 대전에 깔린 핏물이 검은빛을 내뿜으며 단상으로 급격히 밀려와 역행하듯 치솟아 올랐고, 곧장 거대한 회오리가 되어 진천을 휘감았다.
어딘가에서 혁련미림과 탕난의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대꾸는커녕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고,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마공에 걸려 주화입마에 빠진 걸까?
혼마는?
바로 지척에 있었으나, 눈을 뜨고 있음에도 칠흑 같은 빛에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테라 치자 레 자.”
바로 앞에 있는 듯, 저 멀리 떨어진 듯, 혼마의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혼마에게 잡혀 있던 왼손을 타고 뇌기가 흘러들어왔다.
전광지의 뇌기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소름 끼치면서, 친숙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뇌기는 아니었다.
더 근원적이고, 강력한 힘에 가까웠다.
갑자기 미간에 화살이 박힌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 끔찍한 두통이 시작됐다.
상단전의 선천기가, 중단전과 하단전의 공력도 몸부림쳤다.
평생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있었던가.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아직 막힌 기혈에서 풀어내지 못했고, 그래서 정확히 자신에게는 없는 줄 알았던 욕심과 함께 온갖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때렸다.
마음속 무의식을 막아서고 있던 벽에 균열이 일어나고, 무너지며 수많은 기억이 흘러내렸다.
진천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는 진천이기 이전에, 희천이기 이전에, 초요의 몸에서 태어나기 이전의 나는……
‘희거질이다.’
정정왕의 장자, 애왕.
그렇기에 나는……
‘일존 무명자다.’
전생에 일존이었음을 자각한 순간, 심신이 함께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감정을 가진다는 게 이렇게나 괴롭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욕심이 다른 감정들을 부추기고, 이끌기라도 하는 듯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 계속해서 밀려와 괴롭혔다.
싫다.
다 싫다.
이런 감정이라면 가지지 않겠다.
극심한 거부감에 몸서리치며,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상제일공을 떠올렸다.
‘우주 만물은 다 실체가 없이 공허한 것이지만, 인연의 상관관계에 의해 그대로 제각기 별개의 존재로서 존재하느니…….’
선천기가 상단전을 빠져나와 중하단전의 공력을 집어삼키고, 마치 환골탈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듯이,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으로 숨어들며, 두려움에 떠는 아이처럼 바싹 웅크렸다.
그때 다시 혼마의 음성이 들렸다.
“죽어.”
따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강제력이 담긴 음성이었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살고자 하는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어.’
붕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니, 지금은 기분이란 걸 느끼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문득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지만,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죽으면, 사라지면, 그렇게 자신이란 존재감을 잃으면, 안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도 다 부질없으니까.
거대한 압력이 밀려왔다.
자신을 단번에 먼지로 만들어버릴 거대한 파괴의 힘이.
‘애초 있지 않았던 것처럼 없어지자.’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진 방주!”
“진 방주님!”
혁련미림과 탕난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동시에 들려왔다.
그 순간.
‘죽을 수 없다.’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에 숨은 선천기와 중하단전의 공력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에 막무가내로 양손을 내질러 밀려오는 압력을 맞받아쳤다.
광-
본래 양손은 짓이겨지고, 온몸은 피떡이 되면서 날아가 형체조차 남길 수 없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혈도 곳곳에 흔적처럼 남은 공력이 일제히 반응했고, 순식간에 양손으로 흘러들어 장력을 형성해 막을 쳤다.
광-
온몸이 바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정신은 무의식 속으로 떨어지고, 완벽한 어둠에 잠겼다.
* * *
바닥부터 천장까지, 깨진 단상부터 부서지고 쓰러진 문까지, 온통 죽은 자들의 뼈, 살점, 핏물로 칠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상 끝에 선 혼마는 작은 언덕 위에서 활짝 펼쳐진 붉디붉은 가을 숲을 내려다보듯이 태연하기만 했다.
웅사여가 옆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사부님, 쫓을까요?”
“쫓을 것이었다면, 도망치게 놔두지도 않았다. 게다가 궁금하기도 하니, 기다려보련다.”
웅사여는 혼마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야 철탑웅패가 혼마의 사람이고, 삼왕자가 혼마의 아들이며, 그리고 자신이 삼왕자를 죽이려 했음에도 전혀 문제 삼지 않은 걸 알고 머리가 복잡해졌음에도 감히 혼마에게 따질 용기가 생기지 않아 침묵했던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여야.”
“예, 사부님.”
“너의 아름다움과 젊음이 탐나는구나.”
웅사여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혼마는 자신보다 더 젊고 아름다웠으니까.
그런데.
‘아.’
혼마의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 순간적으로 생기를 잃은 장년의 미부로 보였다가 본래대로 돌아갔다.
“그러나 내 모습에 만족하기로 했다.”
착각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혼마도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잠시라도 괜히 보여준 게 아닐 것이다.
웅사여는 더 생각하지 않았고, 고왕이 폭사하여 더럽혀진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부님. 제자는 앞으로 남은 목숨을 다하여 사부님께 충성하겠습니다.”
“네 능력이 그 마음에 부합할 수 있는지 보자꾸나.”
“……?”
“너는 네 아비를 비롯하여 천하의 모든 제후가 내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만들어라.”
웅사여는 어떻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설득하겠습니다.”
“가거라. 철탑웅패.”
“예, 주인님.”
“늘 그래왔듯 여를 보필해야지.”
웅사여는 보필이 아니라, 감시겠지요, 하는 말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되삼켰다.
“가거라.”
“예, 사부님.”
웅사여와 철탑웅패가 대전을 떠나고.
“이왕자.”
홀로 남은 희성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그의 옆으로 와서 손을 잡은 혼마는 왕좌로 이끌어 앉혔다.
“희성, 이제 당신이 주나라의 왕이에요.”
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왕이오.”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세상의 왕이라는 의미로 효란왕(淆亂王)이라 부르는 게 좋겠어요.”
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효란왕이오.”
“질서를 바로잡는 첫걸음으로 공석이 된 왕비의 자리를 채워야겠어요. 비록 당신은 멍청하고, 약하지만, 내가 당신의 왕비가 되어주겠어요. 혼후(混后)라고 부르도록 해요. ”
“혼후. 나의 왕비. 잘 부탁하오.”
혼마는 문을 바라보며 손뼉을 쳤고, 그 소리의 파장은 대전 전체를 울리고, 별궁 전체로 퍼져나갔다.
곧 여러 경과 대부, 중하급 신하들이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피범벅이 된 대전의 풍경에 놀란 그들은 완전히 겁을 먹어 낯빛이 파랗게 질렸고.
“주나라의 새로운 왕과 왕비님께 예의를 갖추어라.”
혼마의 명령만을 받는 병사들의 겁박에, 두려움에 떨던 신하들은 바닥에 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머리를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외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우리 천자님 만세! 저희의 위대하신 천자님, 영광과 건강함을 빕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혼마는 신하들을 멍하니 바라만 보는 효란왕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효란왕이여, 나를 믿나요?”
“왕비를 믿소.”
혼마는 신하 중에 나이가 가장 많고, 신분도 높은 다섯 명을 지목했다.
“저 다섯 명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게 들리네요. 이는 당신이 왕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받아들일 수 없어서 무시하기 때문이에요. 당장 목을 치라고 명령해요.”
“저자들의 목을 쳐라.”
지목받은 신하들이 놀라며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명령받은 병사들은 즉시 그들을 단상 밑으로 끌어내 목을 쳤다.
혼마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주나라는 다시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에요. 나는 지금껏 마음에 뜻을 품고 이루지 못한 적이 없으니, 당신은 나만 믿고, 내 말만 잘 들으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