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58
158화
158. 전혀 괜찮지 않아
나는 무의식의 어둠 속으로 침몰하듯 잠겨 들어갔으나, 의식이 없는 게 아니었다.
깨어나진 않았으나, 별궁을 벗어나 성주를 탈출하고, 가까스로 구한 수레에 실려 남쪽으로 이동하는 걸 알 만큼 주변을 인식했다.
다만.
‘나는 진천입니다.’
진천이란 의식이 튀어나와, 어리석게도 별개의 존재처럼 육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조용히 타일렀다.
‘이제부터 내게 맡기고, 너는 물러나 있어라.’
그러나.
‘당신과 나는 다르지 않습니다.’
이 주제넘은 애송이는 쓸데없이 고집이 셌다.
‘함께 힘을 합해야 할 때인데, 왜 나를 밀어내려고 하나요?’
‘지금의 상황을 보아라. 너는 심신 모두에서 약했고, 명백하게 패배했다. 오히려 방해만 될 뿐, 진정 혼마를 이기고 싶다면 내게 맡겨야 한다.’
‘내가 부족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혼자서는 혼마를 이길 수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내 기억을 통해 전생의 삶을 보아라. 나는 천하제일이었다. 천하의 고수들을 몰살시키기 이전에 이미 천마를 굴복시켰다. 천마가 왜 제자들을 이용하면서까지 천마귀공의 완성에 집착했겠느냐. 나를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천마의 패배를 목격하고 감히 맞설 용기도 없어서 잠적했던 혼마는 내가 죽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혼마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음흉한 수법으로 나를 흡수한 뒤에야 강해졌음을 알고 있지 않으냐. 그렇기에 혼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내 욕망도 담아낼 수 없어 수십 년을 움츠려 있었고, 가까스로 내 욕망을 밀어내고도 불안하여 가장 약해진 순간에 이 육신을 죽이려 하고, 이조차도 내가 마음을 달리 먹자마자 실패한 것이 그 증거다.’
‘당신은 오만하군요.’
‘천하제일인을 오만하다고 헐뜯는 것은 최고가 되지 못한 약자의 질투심일 뿐이다. 그렇기에 네가 아닌 내가 혼마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고.’
‘당신이 나를 밀어내고 있는 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려워한다고? 천하제일인인 내가, 그저 살아남기 급급했던 너 때문에 혼란스러워한다는 거냐?’
‘나는 혼마로부터 욕망을 되찾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당신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감추고 싶은 면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걸. 내면의 진실을 마주한 인간이 그러하듯, 나를 마주한 당신은 혼란스럽고 두려운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죠. 자신의 약하고 여린 마음을 외면하고, 평생 두려움을 억누르며 살아왔음을 받아들이기 싫겠죠. 하지만 이 또한 혼마가 의도한 계획일 겁니다. 당신과 내가 반목하고, 분리되길 원하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또다시 약해져 스스로든, 혼마에게든 죽길 바라니까요.’
‘나는 약하지 않다. 더 이상 강해질 수 없고, 더 이상 싸워 이길 상대가 없어 미련 없이 떠났을 뿐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당신은 듣지 않는군요. 알겠습니다.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후회하게 될 겁니다.’
‘후회는 인생을 낭비한 패배자나 할 소리지, 내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대꾸는 없었다.
반박할 수 없으니, 숨어버린 것이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 * *
나는 희거질인가, 진천인가.
‘혼란? 그것이 혼마가 노린 거라고?’
그렇다면 완전한 실패다.
혼란은 없었고, 진천은 간단히 굴복시켰으니까.
‘희천이든 진천이든, 나의 본질은 희거질인데, 혼란이 생길 게 무엇인가.’
그 이상의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고민도 없이 이 상황을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니었다.
혼마와 싸워야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몸으로 혼마와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이 육신은 환골탈태하기 전으로 돌아갔다. 아니, 그보다 못했다. 그나마 멀쩡했던 왼손이 어릴 때처럼 마르고 뒤틀렸다. 혼자서는 제대로 설 수도 없을 만큼 다리에 힘이 없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진물이 날 정도로 피부 상태가 심각했고, 머리카락도 모두 빠졌으며, 시시각각 일어나는 지독한 통증에 시달려 정신을 똑바로 유지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당연히 오감도 무디어지며, 정상적인 생활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에 숨어서 기혈을 막고 있는 선천기와 중하단전의 공력을 녹여내면 된다.’
하지만 무상제일공을 운용해 보아도 선천기와 공력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왜지?’
무상제일공 외에도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고, 온갖 지식을 떠올렸으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혼마와 싸우기는커녕 손짓 한 번에 목이 떨어지겠군.’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울분에 찬 고함이라도 질러야 정상이겠지만, 감정이 억눌려 있다 보니 소리를 질러 분노를 터트릴 최소한의 흥도 생기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끔찍한 고통과 답답함도 감정이 없어서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내게 포기란 없다. 나는 진천이 아니라, 일존 무명자 희거질이니까.’
무엇이 문제일까.
왜 선천기가 반응하지 않을까.
공력조차 요지부동인 건 무엇 때문일까.
당연히 현생의 문제겠지만, 혹시 모르니 전생부터 복기하여 꼼꼼하게 살펴보기로 했다.
* * *
‘나는 어릴 때부터 무림을 동경했다.’
왕궁을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한 삶 속에서, 주서찬각의 간독을 모두 읽으며 세상을 글로 배우다 보니, 자연스레 가장 자유로운 세상에서의 삶을 꿈꾸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천하제일(天下第一)을 목표로 세웠다.’
뜻한 바를 행하고자 왕성에서 무공이 뛰어난 장수들을 설득하고, 참을성을 다지면서 무공을 배우고, 결국 속박받지 않은 채로 무공을 해석한 끝에 그들 모두를 굴복시켜 더는 적수를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입신지경(入神之境)을 꿈꾸었다.’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경험하게 된 강호에는 기인이사가 장강의 모래알처럼 많았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마흔다섯 명의 고수를 모두 이겨 천하제일이 되기 위해서는 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오랜 세월을 오직 최강의 고수가 되고자 몸을 단련하고, 기의 운용에 몰입하고, 일상적인 삶을 외면한 채 무공에만 매진했다.’
그래도 부족함을 느껴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미움, 사랑을 버렸고, 끝끝내 놓을 수 없었던 욕망까지 버렸다.
그렇게 바람대로 하늘 아래 최강의 고수가 되었는데, 마지막 남은 감정까지 버리게 되니, 더는 이룰 것이 없게 되었다.
이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죽음의 상태와 다름없으니, 미련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그랬는데.
‘혼마에 의해 환생했다.’
물론, 혼마가 나를 위한다고 오대성명교에서도 금지된 마도의 술법까지 쓴 건 아니었다.
나를 위한다면 저주받은 것과 다름없는 아이로 태어나게 하지도 않았을 테지.
나의 감정이 나의 기운을 머금고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에 갇혀 있지 않았다면, 진천이란 애송이는 진작에 죽고 말았으리라.
그렇다면 나를 환생시킨 혼마의 의도는 무엇이었나.
본래는 나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나의 모든 걸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음험한 계획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걸 얻었고, 한 몸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였음에도 힘에서는 한 수 위에 있던 천마를 이길 자신이 생겼을 만큼, 실제로 이기기도 했을 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양면이 존재하기 마련.
혼마는 나라는 존재를 얻는 대신, 나라는 존재에게 짓눌리기 시작했다.
혼마의 심신이 빠르게 흔들리고, 혼마로서의 정체성도 무너지게 되고, 혼마로서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그래서 혼마는 고민했고, 방법을 구상하고, 실행했다.
일단 진작에 천마의 제자로 심어둔 붕마를 통해 천마를 굴복시킬 기회를 포착했고, 천마의 마정을 빼앗았다.
하지만 혼마는 천마의 마정을 흡수하고도 충분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성장 중인 제자들의 마정까지 흡수해도 나의 존재를 육신으로부터 완전히 배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걸 알고 더욱 실망했다.
한편으로 혼마는 나에 대해 분노했고,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었다.
‘지금 나는 일존보다 강해졌을까?’
‘얼마나 더 강해져야 일존보다 강할까?’
‘일존보다 강해진 걸 어떤 식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혼마는 다시 고민하고, 계획을 세웠고, 실행했다.
천마의 제자들이 도망치도록 순순히 보내주었고, 낙읍으로 가서 고왕을 유혹하고, 마도의 술법을 통해 삼왕자를 잉태하여 나라는 존재의 대부분을 배출하는 데도 성공했다.
우려했던 대로 욕망까지 배출할 수는 없었기에, 새삼 더 강해져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혼마는 이후로도 나의 욕망에 억눌려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고, 붕마를 통해 감시 관찰하고, 육신의 노쇠를 염려하여 이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웅사여를 제자로 삼고, 철탕웅패에게 감시하고 지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진천이 충분히 자라고, 무공이 경지에 이르고, 희거질이었던 내가 천하의 고수 마흔다섯 명과 병사 수천을 홀로 죽임으로써 마도의 술법을 펼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했듯이, 진천 역시 성주의 별궁으로 끌어들여 수많을 이들을 죽이게 하면서 또다시 술법을 펼칠 조건을 갖추고 나의 욕망까지 배출하면서, 결국 내게서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양면이 존재했으니, 나의 욕망은 오랜 세월을 혼마와 함께하며 많은 기억을 각인한 채로 내 몸으로 돌아왔고, 그 덕분에 그동안의 음모와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이제 혼마를 막는 것은 나의 사명이다.’
어쩌면 하늘은 혼마를 막으라고 나를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이유 여하를 떠나 기꺼이 사명을 받아들일 생각이지만, 이런 몸으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 * *
“진 방주님, 잠시 다녀올게요.”
어딘지 모를 곳에서 혁련미림이 떠나고, 탕난하고만 남았다.
짐짝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수레에 누워 있던 나는 딱히 할 말도 없었기에, 하늘만 바라보았다.
시력이 떨어져 초저녁처럼 흐릿해진 하늘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마부석도 없는 작은 수레라서, 나귀의 고삐를 잡고 걷던 탕난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응? 진 방주, 깨어난 건가?”
“호들갑 떨지 말게. 천하의 고수라는 자가 내가 깨어난 줄도 몰랐을 만큼 감각이 무디다는 것에, 나야말로 충격을 받았으니까.”
탕난은 괜히 헛기침을 터트렸다.
“깨어나자마자 말로 사람을 패서야 쓰나.”
그리고 물었다.
“진 방주, 내가 조언해도 될까?”
“조언? 진심인가? 그대에게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자네, 언행이 많이 달라졌군.”
자존심도 없이 어린애한테도 존대하던 폐해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탕난. 그대는 내가 주나라의 삼왕자임을 잊은 건 아니겠지? 이 말투가 정상인 거고, 이전의 말투가 정상이 아니었던 거네. 익숙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이도록 해.”
“……그렇게 하지.”
“하지만 그대의 명성과 천지궁 내의 지위를 고려해서 내게 존대하라고 요구하진 않을 테니, 안심하도록 해.”
“……고맙군.”
“그래서 내게 무엇을 조언하겠다는 거지?”
탕난은 왜인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일단은 허현으로 가고 있었지만, 지금이라도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천지궁으로 가는 건 어떤가. 막내 아가씨와 내가 함께하면 천지궁에서는 진 방주를 귀빈으로 대우할 걸세. 당연히 진 방주가 치료받을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울 거고. 무엇보다 천지궁에 몸을 의탁한다면 혼마도 감히 진 방주를 위협할 수 없을 걸세. 설사 주나라의 이름을 내세워 개입하려고 해도 진(秦)의 호족들은 천지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진 방주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거네.”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만, 천지궁을 포함해 어디서든 나를 치료할 방법은 없어. 나를 치유하는 건 나만이 가능하지. 그리고 그대는 혼마를 너무 모르는군.”
“무엇을 모른다는 건가?”
“혼마는 나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야. 허현을 공격할 거고, 허현의 백성을 몰살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을 테지. 그렇기에 나는 천지궁에 숨어서도 안 되고, 다른 어딘가로 도망칠 수도 없어. 물론,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러지 않겠지만. 천하제일의 고수인 내가 도망을 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용납할 수 없네.”
“……진 방주, 자네 정말 괜찮은가?”
“딱 보면 모르나. 전혀 괜찮지 않아.”
“…….”
“어쨌든, 나는 허현에서 혼마를 기다릴 생각이야.”
“혼마가 허현으로 찾아올까?”
“내가 살아 있으면 두 발을 뻗고 잘 수 없을 테니, 찾아올 수밖에.”
“……찾아온다 치고. 혼마와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싸워야지.”
“단시간에 회복하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그런 몸으로 어찌 싸우려고? 설마, 싸움에 패해 스스로 목숨을 내주는 식으로 허현의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혼마의 분노를 차단하려는 건가?”
“패하면 죽을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패하지 않아.”
“패하지 않는다고?”
탕 선배는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진 방주, 막내 아가씨도 없으니, 우리 사내답게 탁 터놓고 이야기하자고. 지금 진 방주의 몸으로 혼마를 이기는 건 불가능해.”
“그대에겐 불가능하겠지만, 내게는 아니야.”
“왜 그리 자신하나?”
“자신할 수밖에.”
“……?”
“나는 한평생 패배를 모르고 연전연승했던 천하제일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