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
159. 거지인 줄
혁련미림은 반나절 만에 돌아왔다.
곧장 수레로 다가갔는데, 탕난이 수레를 세운 뒤에 그녀를 막아서고는, 손짓으로 신호하고 입 모양만으로 따로 이야기하자고 말하며, 수레로부터 십여 걸음 떨어졌다.
“진 방주가 깨어났습니다.”
“아, 정말…….”
“쉿.”
“왜 그래요?”
“막내 아가씨의 예상대로 진 방주의 몸 상태가 유일각에서 함께 지내던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감각도 무디던가요?”
“말하는 것만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나아질 거예요. 진 방주님은 반드시 이전처럼 회복할 거예요.”
“저도 육신의 상태야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막내 아가씨의 바람대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머리입니다.”
“머리카락이야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나는 상관없는데요.”
“머리카락이 아니라, 머릿속을 말한 겁니다.”
“머릿속이 왜요?”
“아무래도 혼마와 격돌하며 머리를 다친 거 같습니다. 생각하는 방식도 그렇고, 어투도 그렇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건데요?”
“뭐랄까.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겸손했던 진 방주가 지금은 매우 건방지고, 자기중심적이기까지 합니다. 제가 볼 때는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과대망상에 빠졌거나, 미쳤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 * *
흐릿한 시야를 채우고 있던 하늘을 가리며 혁련미림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내 시력이 반 맹인 수준으로 약해진 걸 알았는지, 코끝에 숨결이 느껴질 만큼 얼굴을 바짝 붙이고 말했다.
“진 방주님, 방금 돌아왔어요. 무사히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진천의 기억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새삼스럽게 미모에 감탄했다.
“무사하다고? 이런 몸이? 농담이겠지. 정말 농담이라도 재미가 없으니, 앞으로는 자제하도록 해.”
물론, 감정적으로 미혹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극히 사실성에 근거한 객관적인 평가였다.
고개를 돌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탕난과 시선을 교환한 혁련미림이 말했다.
“다행히 농담은 아니랍니다. 원래 같은 사안을 두고도 사람마다 관점과 평가가 제각각이니까요. 제 생각은 그래요. 살았으면 되는 거다. 몸이야 다시 회복하면 되는 거다. 그래서 방주님이 무사히 깨어났다고 보는 거죠.”
그런데 심장이 왜 이리 빨리 뛸까.
‘내가 이 아이에게 첫눈에 반할 리는 없고, 그 녀석이 이 아이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욕칠정이 선천기, 공력과 함께 기경팔맥과 십이경락 안에 금제 된 상태라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없어야 할 텐데 말이다.
‘남자의 본능이란 감정이 아니라 육신에 기원한다는 뜻일까? 뭔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집착하지 않았다.
혁련미림에 대한 심장의 반응과 선천기와 공력을 녹여내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에 대해 고민하는 자체가 시간 낭비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몸의 반응이 정말 중요하고,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고민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그 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겠지.’
어쨌든.
‘전성기의 혼마조차도 미모에서는 이 아이에게 미치지 못하겠군.’
전생에 당시 오군의 일인이었던 천지궁 궁주에게 비무를 신청하기 위해서 천지궁을 방문했다가, 당시 궁주의 아들과 며느리인 혁련미림의 부모를 만난 적이 있었다.
사실 궁주부터 대단한 미남이고, 아들 부부도 천하에서 손꼽을 정도의 미남 미녀였으니, 부모의 장점만을 가져온 듯한 혁련미림의 미모가 천하제일을 다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와 나는 원수 사이였군.’
내가 화산에서 몰살한 천하의 고수 중에는 혁련미림의 친조부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그 일에 대해 따지거나, 천지궁에서 주나라 왕실에 책임을 물었다는 기억이 전혀 없군.’
물론,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셋째 동생 고왕이 부추겼다고 해도 당시 실질적으로 천하의 고수들을 끌어들이고 나를 함정에 빠트린 건 둘째 동생인 사왕이었고, 결과적으로 화산의 생존자는 그 일을 내내 비밀로 간직한 혼마와 서록문사 둘뿐이며, 자신의 개입이 밝혀지는 걸 꺼린 고왕이 당시의 진실을 덮었거나 왜곡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또 다른 이유로 천하의 고수들도 나 하나를 두고 합공한다는 게 자존심 상하고 부끄러웠을 테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거나 입이 무겁고 뒤를 부탁할 소수에게만 말하고 떠나와 화산에 모였을 테니, 설사 진실을 알거나 짐작하는 후인들이 있었을지라도 원수니, 복수니 하며 공론화하고 나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아이에게 원수 취급받는다면 억울할 거 같군.’
그렇다고 무조건 내가 옳고, 날 함정에 빠트려 합공한 자들의 자업자득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었다.
역사가 말해주듯 강호에서도 결국은 강자가 명분을 갖고, 승리자로 기록되는 법이라, 당장 입으로 아무리 떠들어보았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힘으로 증명하고, 결과로 말해야 한다.’
그렇기에 싸움에서 승리하고, 혼마를 굴복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며, 옳고 그름과 진실의 진의를 밝히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선물이 있어요.”
혁련미림은 내 손을 잡아서 손가락 하나하나를 펴주고 선물을 쥐여줬다.
“이건 봉이로군.”
“맞아요. 하지만 지팡이라 생각해도 무방해요. 그때 진 방주님의 다리가 불편하셨기에, 튼튼한 지팡이를 선물로 드릴 생각으로 천지궁 최고의 야공에게 부탁해 만든 거니까요.”
한심스러울 만큼 감각이 무디어지긴 했으나, 봉의 재질이 낯설지 않았다.
“이건 그대가 왕실의 보고에서 훔쳐 간 운철로 만들었군.”
“에이, 나 혼자 훔친 게 아니라 진 방주님과 내가 함께 훔친 거죠. 그리고 진 방주님 외에는 보고의 위치를 몰랐고, 진 방주님이 왕자로서 권리가 있으니, 훔쳤다기보다는 정당한 자격이 있는 진 방주님이 내게 도움을 받는 대가로 합리적인 약속을 통해서 교환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죠.”
보통 아름다운 여인은 말주변이 없기 마련인데, 이 아이는 달랐다.
‘외모는 천하제일급으로 아름답고, 언행도 푸른 산의 맑은 물처럼 막힘이 없으니, 이래서 그 녀석이 좋아했나?’
물론, 그런 이유라도 수긍이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강호에서 활동한 이후 일방적으로 고백을 받았던 경험이야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단 한 번도 먼저 여인을 좋아하고 고백한 적이 없어서다.
혁련미림은 말했다.
“진 방주님, 이건 단순히 운철로 만든 지팡이가 아니에요. 혼원수의 축복을 받아서 목(木)의 기운을 품고 있죠.”
천지궁의 초대 궁주는 공동산에서 오랜 수련을 거듭한 끝에, 천하에서 가장 높이 자라는 부탄송(不丹松) 아래에서 오행의 기운을 받아 혈수마공을 극복하고, 오행기를 터득하였다.
이후 그 부탄송을 혼원수라 명명하고, 천지궁에서는 신성한 나무로 믿고 보호했다. 하지만 혼원수는 단순히 초대 궁주를 기리는 역사의 산물이 아니었다.
대대로 천지궁 궁도는 혼원수 아래에서 재물을 바치고 축복받으며 성인으로 공인받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녔다.
그리고 이때 바친 재물까지도 축복받고, 오행의 기운을 품게 되는 희귀한 사례가 드물게 일어나는데, 운철봉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무기에 남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무림인의 관점으로 평가하자면 운철봉은 매우 진귀하고 탐나는 신병이기라 할 수 있었다.
혁련미림은 잘 때도 품에 안고 자는, 눈에 띄는 문양 하나 없이 담백한 모양의 검을 앞으로 꺼내 들었다.
“이 검의 이름은 수선검(水仙劍)이에요. 운철봉과 마찬가지로 운철로 만들었고, 똑같이 혼원수로부터 축복도 받았죠. 그런데 이건 나와 같은 수의 기운을 품고 있어요. 그래서 추측해 보자면 진 방주님은 목의 기운을 타고났고, 그래서 내가 방주님에게 드릴 마음을 품은 채로 축복받았기에, 운철봉도 목의 기운을 품게 된 것 같아요.”
혁련미림의 말대로인지, 혹은 그냥 우연인지,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봉을 쥐고 있으니, 몸의 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거 같군.”
극적인 변화가 나타난 건 아니지만, 미세하게나마 혁련미림의 얼굴이 더 잘 보이고, 후각을 자극하는 그녀의 체향도 조금 더 진하게 맡아졌다.
“소유자가 같은 기운의 병기를 품에 안고 운기하면 공력의 축적이 더 빠르고 더 정심한 공력을 축적할 수 있어요. 병기를 들고 무공을 펼칠 때는 공력의 수발과 운용도 더 좋아지고요. 그러니 진 방주님이 운철봉을 가까이 두었기 때문에 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것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이 운철봉이 회복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군.”
“도움이 되고 말고요.”
“운철봉에도 이름이 있나?”
“선물로 드릴 생각이어서 따로 이름을 짓지는 않았어요. 이제 진 방주님이 주인이니, 이름도 직접 지으세요.”
“청옥으로 만든 듯 색이 영롱하니, 취옥장(翠玉杖)이 좋겠군.”
“멋진 이름이네요. 곧 천하에 명성을 떨쳐, 취옥장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될 거 같아요.”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손에 쥐어졌으니, 취옥장은 절대 평범한 무기일 수가 없다.”
“…….”
“그렇기에 취옥장이 명성을 얻는 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고 간단한 일이지.”
한 손으로만 하기에는 힘에 부쳐, 오른팔로 취옥장을 잡은 왼손을 받치고, 하늘을 향해서 들어 올렸다.
“취옥장아, 너는 하찮은 병기에 불과하나, 나를 주인으로 섬기게 된 덕에, 하늘의 명을 받은 천기(天機)처럼 그 운명이 태산처럼 무겁게 되었다. 명심하여라. 너의 사명은 나를 도와 혼마를 제압하는 것이다.”
혁련미림이 다시 고개를 돌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탕난을 쳐다봤다.
하지만 혁련미림이 고개를 돌렸기에, 그리고 탕난은 시력이 미치는 거리를 벗어나 있어서 둘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 * *
나는 포기를 몰랐고, 실패를 몰랐고, 좌절을 몰랐다.
이는 무엇이든 잘했고, 매번 성취하며, 싸움에선 늘 승리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전생에서 더 이룰 것이 없을 때 미련 없이 죽음을 선택하고, 혼마에 의해 상상도 못 했을 만큼 허약한 몸으로 현생에서 깨어났지만,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런데 허현으로 돌아오고, 아직 완공되지 않은 하오문의 새로운 터전 구석에 거처를 두고, 폐관 수련을 이유로 보름 동안 그 누구의 방문도 거부한 채 물과 벽곡단만 먹으며 회복에 매진했음에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자, 난생처음으로 끝 모를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오욕칠정을 금제한 영향이라 생각해서 전생에 오욕칠정을 끊어내고, 버린 방법도 써보았지만 통하질 않으니…….’
이는 물에 빠졌는데 아무리 팔과 다리를 저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짙은 안개 때문에 어느 방향이 물가인지, 더욱 깊은 수심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상태와 같았다.
쿵쿵쿵.
“방주님!”
삼 일 전부터 찾아오는 이들의 숫자와 빈도가 급격히 늘어났다.
“지금쯤 물과 벽곡단이 모두 떨어졌을 거라던데, 괜찮으신 거죠?”
실제로는 오 일 전에 고갈되었으나, 지금 나에게 허기와 갈증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천기와 공력을 전혀 녹여내지 못하고, 여전히 취옥장에 의지하지 않고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이대로 굶어 죽는 게 차라리 더 나았다.
하지만 이제는 기력이 없어서, 전생처럼 내 마음대로 고결한 죽음을 맞을 수도 없었다.
“방주님, 오늘은 돌아갈게요.”
그러나.
“내일도 열어주지 않으시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결국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못나 꼴을 보여줄 수밖에 없으리라.
싫다.
아니, 시간이 더 필요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테지만, 누구의 방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밤이 되었고, 문을 열었다.
밖은 캄캄했다. 조용했다.
아니, 오감이 무디니, 주변에 누가 있을지라도, 파악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민할 건 없었다.
고민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었다.
기어서 거처를 빠져나왔다.
때로 취옥장에 의지하여 걷기도 하고, 힘에 부쳐 다시 주저앉았다가, 또 기기도 하며, 마치 거북이처럼 꾸준히 나아갔다.
그러나.
‘잠깐만…….’
쉬자.
‘아주 잠깐만…….’
조금만 눈을 붙이자.
그리고 다시 움직이자.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땡그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