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27
27화
27. 화는 나지 않았다
황하의 한 지류가 흐르는 맹진현의 북쪽.
두두두-
다섯 기의 말이 펄펄 내리는 눈발과 사납게 우는 세찬 바람을 뚫고 나타났다.
여가상단을 기습하고 여철당을 납치해 도주한 마적들이었다.
그들은 몇 년 전 전염병이 돌고 아무도 살지 않게 된 어촌마을에 들어섰다.
마적들은 그나마 멀쩡한 지붕이 있어 눈을 막아주는 반쯤 허물어진 집 앞에서 멈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열 명의 마적이 더 있었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 언사현과 공의현 인근에서 활동하던 마적들이었는데, 환공의 토벌대가 낙읍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성도 공략을 시작하고, 모든 이목과 역량이 왕성에 몰리면서 활동하기 좋아진 외곽의 맹진현 인근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안에선 세 개의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중 두 개의 모닥불을 중심으로 각각 다섯 명의 마적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했다.
한 식당 안의 다른 손님들처럼 서로 소가 닭을 쳐다보듯 외면하고 있어서다.
돌아온 다섯 마적도 마찬가지였다.
납치해 온 여철당을 중심에 툭 던져두고, 비어 있던 모닥불에 둘러앉아서는 물을 마시고, 딱딱한 육포를 불에 구워 말랑말랑하게 만든 뒤 말없이 질겅질겅 씹기만 했다.
마치 내키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뭉쳐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마적들은 뭐지?’
여철당으로서는 여러모로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놈들은 보통의 마적들이 아니다.’
바닥에 널브러진 여철당은 밧줄에 묶인 것도 아닌데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상처를 입었는데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그의 의지는 아니었다.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도록 점혈 되었기 때문이니까.
즉.
‘이 마적들은 무공을 정식으로 배운 자들이다.’
물론, 녹림의 도적 중에는 죄를 지었거나 원한을 피해 산으로 도망친 무공의 고수들이 적지 않아, 점혈 수법을 아는 게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마적은 달랐다. 그들은 기마술과 기습, 외공을 주특기로 삼는 단순 무식한 도적이었고, 저희끼리 똘똘 뭉치는 습성 때문에 외인을 잘 받지 않으며, 무공 고수들도 마적이 되기를 꺼렸다.
당연히 점혈 수법을 아는 마적은 가물에 콩이 나듯 매우 드물었다.
게다가 한 무리는 마적답지 않게 검을 병기로 지니고 있었다.
그때였다.
“당무독, 갔다 왔으면 보고를 해라.”
검을 지닌 무리의 구심점인 도도한 눈빛의 사내, 남궁쾌가 툭 내뱉자 여철당을 납치해 온 무리의 구심점인 당무독이 매서운 눈동자를 신경질적으로 치켜떴다.
“네가 뭔데 나한테 보고를 하라 마라야.”
그러자 나머지 무리의 구심점인 서생 같은 인상의 제갈신기가 양쪽을 다 비난했다.
“남궁쾌, 대장도 아닌데 대장 노릇 좀 그만해라. 당무독, 정찰을 나갔으면 상단의 동태 정도는 말해줘야 하잖아.”
물론, 남궁쾌와 당무독도 듣고만 있진 않았다.
“지랄!”
“염병!”
셋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비난하며 욕했다.
그들을 따르는 각각의 무리는 그런 광경이 익숙한 듯 육포만 씹었고.
잠시 조용하다 남궁쾌가 툭 물었다.
“상단의 호위가 많았냐?”
당무독도 툭 대답했다.
“서른 명에 가까웠다.”
제갈신기도 툭 끼어들었다.
“그 정도로 많은 무사를 데리고 온 상단은 처음이군.”
그렇게 대화를 시작한 셋은 살갑지는 않아도 주거니 받거니 논의를 이어갔다.
“우리 소문을 듣고 대비한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아.”
“상단의 주체가 무가인 모양이군.”
“그래서 바로 돌아오지 않고 이목을 끄는 전략을 썼냐?”
“호위들만 때려잡아야 하니까.”
“저놈의 행색은 쟁자수인데, 미끼가 될 가치가 있나?”
“무공을 익혔어. 실력은 그저 그랬지만, 상단에서 쉽게 포기할 리 없어.”
“우리가 찾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 좋군.”
듣고 있던 여철당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 무식한 마적들의 대화 내용이 아니었다.
‘이들이 정말 마적이긴 한 걸까?’
마적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여철당은 생각에 빠져 저도 모르게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저놈의 눈을 보니 할 말이 많아 보이는군.”
남궁쾌가 여철당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당무독이 여철당의 아혈을 걷어찼다.
“악!”
아혈이 하필 다친 상처 옆이라, 여철당은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자 비명부터 질렀다.
제갈신기는 입을 다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여가장의 여철당이다!”
“아, 이번 상단이 여가상단이었군. 하지만 상단의 쟁자수로 일하는 걸 보면 여가장의 직계가 아니라, 방계인가 보지?”
“흥, 무슨 소리! 나는 후에 가문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 바닥부터 배우며 경험을 쌓는 중이다!”
제갈신기는 히죽 웃었다.
“인질로 삼기 딱 좋은 녀석을 데려왔군.”
여철당은 그제야 유도에 걸려들었음을 깨닫고 크게 후회했다.
남궁쾌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상단에 속한 놈이니 이해득실을 따져 목숨부터 애걸하고 몸값이라도 제안할 줄 알았더니, 꽤 기개가 있어. 무공을 익혔으니, 그냥 상인은 아니라는 거냐?”
자책 중이던 여철당은 대꾸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마을 밖을 경계하던 마적이 말했다.
“마을로 접근하는 자가 있습니다!”
여철당은 다시 눈을 떴다.
‘함정이란 걸 알려야 해.’
당연히 부친과 여가장의 일족들이 구하러 왔다고 생각한 여철당은 크게 소리치려고 했으나.
“방해하면 곤란하지.”
당무독이 발로 걷어차며 여철당의 아혈을 찍었다.
“다음 순번은 우리 쪽이군.”
제갈신기가 일어나고, 뒤에 앉아 있던 네 명도 뒤따랐다.
그러나 남궁쾌와 당무독의 무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애초부터 추적해 올 상단의 무리가 많건 적건 다 함께 나설 생각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 제갈신기는 집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내 눈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눈발이 너무 거세서 똑바로 볼 수가 없는 것인지, 한 명밖에 안 보이는데?”
남궁쾌도 마을 밖을 빤히 노려보다가 동의했다.
“한 명이 맞아. 게다가 너무 어린 데다, 사지 멀쩡한 놈도 아니로군. 오른손은 없고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만큼 오른 다리를 절뚝이는 걸 보면, 아무래도 길을 잃은 거지인 모양이야.”
제갈신기와 남궁쾌가 어떻게 된 거냐는 듯 동시에 당무독을 쳐다봤다.
“날 왜 봐. 어린 거지가 폭설에 길 잃은 게 내 탓은 아니잖아.”
틀린 말이 아닌지라 남궁쾌는 고개를 끄덕였고, 제갈신기와 무리는 다시 앉으려고 돌아섰다.
그런데.
“나는 여철당 공자를 데리러 왔습니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공자를 풀어주고, 순순히 항복하길 권합니다!”
들려온 외침에 모두 말문이 막힌 듯 침묵이 감돌았다.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여철당을 구하러 왔다고 하니 얼떨떨할 수밖에.
사실 가장 어리둥절한 건 여철당이다.
‘저 녀석이 여기 왜 나타나?’
아버지와 가문 사람들, 호위무사들까지 함께 있었다면 어이가 없어도 한 사람의 도움도 아쉬워 데려왔나보다 하겠으나, 아무리 봐도 혼자였다.
당무독이 그의 아혈을 풀어주며 물었다.
“저놈은 누구냐?”
“쟁, 쟁자수다.”
여철당이 순순히 대답하는 건 진천의 정체를 밝힌다고 상황이 달라질 게 없어서다.
당무독은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혼자 눈발을 뚫고 찾아와서, 너를 풀어주라고 우릴 협박하는 놈이 상단에서 잡일이나 하는 쟁자수라고? 넌 내가 바보로 보이냐?”
여철당도 자기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았다.
하지만 진실을 말했기에 억울했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설명을 더 보탰다.
“보기에는 저래도 힘이 장사다. 맛있는 죽도 잘 만들고.”
“이 자식이 이젠 나를 놀리네?”
“아니, 나는…….”
순간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님을 자각한 여철당은 급히 소리쳤다.
“인마, 도망쳐! 여긴 함정이다! 어서……!”
퍽!
“컥!”
당무독에게 명치를 맞아 숨을 쉴 수 없었던 여철당의 얼굴이 허옇다 못해 파랗게 질려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무독이 여철당의 아혈을 찍자, 제갈신기가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상단이든 뭐든 한 놈이든 두 놈이든, 우리가 움직였으니 순번을 지킨 거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남궁쾌와 당무독은 즉각 불만을 표했으나, 제갈신기는 싹 무시하고 아우에게 지시했다.
“추도, 붙잡아 와라.”
“예, 형님.”
추도가 즉시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진천의 처음 생각은 상대가 도적이니까 대화고 뭐고 싹 쓸어버리고 여철당을 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추적하는 중에 진 상궁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세상사는 크든 작든 단순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결정을 내리기 전에 조금 더 생각하고, 고민하고, 고심하여, 가능한 후회가 없길 바랄 뿐이에요.’
그래서 이것저것 따져보았다.
‘마적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자들이다.’
‘세 명이 다쳤지만, 죽은 사람은 없다.’
‘아직 물건을 빼앗긴 것도 아니다.’
‘여철당을 납치해갔지만, 무사하다면?’
그렇다면 죽이는 건 과하지 않을까?
아니, 진 상궁의 조언을 곱씹어보면 이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타인의 죽음을 가볍게 생각한다.’
얼마 전까지는 감정의 메마름을 핑계 삼았는데, 감정이 조금 살아나고 보니 그냥 자신의 문제인 거 같았다.
그렇다면 죽이는 것보다 다른 방법을 고민하고 해결하는 걸 습관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항복을 권고했지만, 마적들은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야, 이리와.”
제갈신기의 지시로 달려온 추도는 전혀 경계심 없이 손에 든 칼을 까딱였다.
그래서 얼른 다가갔다.
“새끼, 이럴 거면 처음부터 나대질 말았어야지.”
비웃던 추도의 표정이 변했다.
절뚝이며 다가오는 걸음이 이상할 정도로 빠르고, 겁을 먹은 표정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 야, 천천히 와. 천천히 오라고, 이 새끼야!”
제갈신기는 분명히 잡아 오라고 했으나, 추도는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며 칼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으나.
뻑!
순식간에 다가와 눈으로 좇을 수도 없었던 속도로 찔러온 진천의 왼 주먹에 맞고 무너졌다.
그러나.
“쯧쯧. 방심했군.”
“에휴. 호랑이도 토끼를 잡을 때는 최선을 다하는 법인데.”
예상과 다른 결과에 남궁쾌와 당무독은 진천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기보다 간단히 당한 추도의 안이함을 탓했다.
추도의 모습에 진천의 모습이 가려 어떻게 당했는지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제갈신기를 깔아뭉갤 기회라 생각한 측면도 컸고.
제갈신기는 화가 났다.
아무리 실망스러운 자식이라도 남에게 욕먹는 걸 보고 아무렇지 않을 부모는 없으니까.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어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무리의 다른 아우 산종이 남궁쾌와 당무독을 노려보며 말했다.
“형님, 숫자 셋을 세시는 동안 제가 가서 저놈을 잡아오겠습니다.”
순간 이 상황을 타개할 좋은 생각이 떠오른 제갈신기는 벌떡 일어나 말했다.
“좋아, 이김에 우열을 가려보자.”
“무슨 소리지?”
“갑자기 웬 우열?”
“좋든 싫든 우린 한 무리가 되어 마적질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 언제까지 순번을 따지며 움직여야 하냐. 그냥 명령체계를 확실히 하자. 저 녀석을 죽이지 않고 먼저 잡는 쪽이 이 빌어먹을 마적대의 대장이 되는 거다.”
“흥, 실력으로 안 되니 잔머리를 굴리는군.”
남궁쾌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괜찮은 방법 같은데.”
당무독이 찬성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무공으로는 우열을 정할 수 없긴 하잖아.”
셋은 오래전부터 자기가 강하다고 주장해 왔고, 셀 수도 없이 승부를 겨루었으나, 어느 한 명도 확실한 우세를 보인 적이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닌지라 남궁쾌는 다른 핑계를 댔다.
“나중에 딴소리하면 어쩌고.”
“보고 들은 눈과 귀가 한두 개가 아닌데, 무슨 걱정이야.
“사내대장부는 한 입으로 두말 안 하지.”
지켜보는 아우들의 암묵적 동의를 확인하고, 서로 시선을 교환한 셋은.
“시작!”
동시에 외치며 쓰러진 추도의 앞에서 기다리는 진천을 향해 경쟁적으로 달려갔다.
셋은 비슷한 실력이었던 만큼 경공 수준도 비슷했다.
그러나.
‘무기에서 내가 우위다.’
당무독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단도를 던졌다.
“엇!”
“비겁한!”
그의 단도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는 실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 줄로 진천을 휘감아 끌어당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반만 성공했다.
휘릭-
분명 진천을 노리며 신묘하게 움직이던 단도가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간단히 지팡이에 막히며 엉켜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망하기엔 일렀다.
진천이 고집스럽게 지팡이를 붙잡고 있어서다.
그는 한껏 힘을 주며 줄을 당겼다.
그런데.
‘어라?’
끌려와야 하는데 도리어 끌려가는 게 아닌가.
순간 큰일이다, 하는 위기감이 들었으나, 손목에 감긴 줄을 풀고 자르고 어쩌고 할 틈도 없었다.
뻑!
당무독은 얼굴을 맞고 뒤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추도가 일어나지 못한 게 기절해서가 아니라, 점혈이 되어서구나.’
그렇다고 주먹에 맞은 얼굴이 아프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하하, 넌 탈락!”
“날 대장이라 불러라!”
남궁쾌와 제갈신기가 노골적으로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뻑! 뻑!
오히려 안도했다.
자기가 내기에서 다 이긴 것처럼 큰소리치며 기세 좋게 덮치던 그들도 마찬가지로 한 대씩 맞고 그의 옆으로 나란히 나뒹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