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47
47화
47. 이리 엉망이었나?
“진 공자, 서허전장의 일은 내게 맡겨주시오.”
전장으로 돌아왔더니 남궁쾌가 전장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자처했다.
“별생각 없이 점원들을 도왔는데, 전장의 일이 내 성향에 잘 맞는 거 같고, 더 배우고 익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소.”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점원들의 사정을 들어보니, 먹고사는 문제로 어쩔 수 없이 협조했다고 하더이다. 크게 반성하여 지난 잘못을 고치는 데 적극 협조 중이니, 이를 고려해서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바라오.”
구태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두려운 표정으로 바들바들 떨던 점원들이 일제히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공자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아량을 베풀어주신다면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옳은 일만 하며 살겠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되어 옳지 못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살겠습니다!”
점원들이 절박한 만큼 쉽게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남궁 형씨를 잘 도와줘요.”
남궁쾌와 아우들을 남겨두고 진 형님 등과 집으로 돌아온 진천은 곧장 해독제를 만드는 데 열중했다.
제갈신기는 따로 아우들에게 강론할 만큼 왕후비론을 공부하는 것에 빠졌기 때문에, 당무독과 그의 아우들만 진천과 함께했다.
아우들이 글을 거의 모르고 이제 배우기 시작해서, 실제로는 당무독만 도움이 되었지만.
“이것 같군요.”
다행히 이틀 만에 남궁쾌 등을 중독시킨 독을 찾았고.
“다행히 심각한 독은 아니네요.”
“생각해 보니 심각한 독이었다면 우리가 몇 달 동안 멀쩡할 수는 없었을 거 같소.”
중독시킨 자들도 약한 독이어야 해독에 어려움이 없을 테고.
“젠장할, 고작 이딴 독 때문에 겁을 먹었다니.”
당무독은 분하고 억울해하며 이를 갈더니, 앞으로 다시는 독에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진 공자, 다녀오리다.”
직접 해독제를 만들 재료를 찾겠다며 아우들과 함께 약초꾼들이 자주 찾는다는 인근의 평정산(平頂山)으로 떠났다.
* * *
진천은 침상에 앉았다.
이틀 동안은 해독제 문제에 집중하느라 괜찮았는데, 할 일이 없어져서인지 마음이 심란했다.
눈을 감았다.
‘우주 만물은 다 실체가 없이 공허한 것이지만, 인연의 상관관계에 의해 그대로 제각기 별개의 존재로서 존재하느니…….’
무상제일공의 구결을 떠올리며 운기에 들어갔다.
임맥과 독맥을 관통하는 소주천을 먼저 이루고, 이후 임맥, 독맥, 충맥, 대맥, 음유맥 등의 기경팔맥을 관통하는 대주천을 마치며, 일주천을 끝냈다.
머리가 맑아졌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진천은 지팡이를 집어 들고 방을 나와 지붕에 올라섰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밤하늘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캄캄했으나, 그렇기에 달과 별은 더욱 밝게 빛났다.
‘진 상궁, 지금 만나러 갈게.’
평천우명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알아두었던 진 상궁의 무덤이 있는 곳을 향해서 비천무영신법을 펼치며 날아올랐다.
크고 작은 건물을 발판 삼아 뛰어넘고, 왁자지껄하게 화려한 대로와 죽은 듯 고요하고 어둑한 골목을 발아래로 흘려보내며 마을을 벗어나, 대지를 질주했다.
한참을 달려 거대한 물길을 저 멀리 뒤에 두고, 삐죽삐죽 드높게 솟아난 산자락을 옆에 두어 펼쳐진 평야 중심에 외로이 자리한 동산에 이르렀다.
동산 위에는 조성된 지 얼마 안 된 무덤이 있었다.
동산을 올라가, 무덤 앞에 서자, 다리에 힘이 풀려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무덤에 기대었다.
그럴 리 없지만, 진 상궁의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했다.
“보고 싶었어…….”
진천은 눈물을 흘리며 읊조렸다.
“마 상궁 기억해? 진 상궁이 떠나고 난 후에…….”
진 상궁과 헤어지고 이어진 인연들과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다 끝내고 나니, 가슴 저 밑에서 격한 울음이 솟구쳤다. 땅을 치고, 하늘에 울부짖으며 숨이 끊기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울었다.
감정에 반응하여 기혈을 단단히 막고 있던 기운이 흔들리고, 상단전의 선천기가 용트림을 하였으나, 진천의 울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렇게 울고, 또 우는 사이 밤이 지나 새벽이 오고, 노을이 떠오르며 차가운 기운을 붉게 물들였다.
멍하니 앉아 있던 진천은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렇게 끝이던가.
이렇게 진 상궁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인가.
허탈했다.
미안했다.
하지만 마음이 차분하여 당황스러웠다.
그때.
“오셨군요.”
동산 밑에서 한 남자가 올라왔다.
진천은 놀랐다. 남자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총순검?”
단박에 총순검 황보호한이라 단정하지 못한 건,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일단 의복이 정갈한 관복이 아니라 헤지고 찢겨 거지꼴이고, 머리는 봉두난발에, 얼굴이 검게 타 거칠거칠했고, 건장했던 체구도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것처럼 말라 있었다.
진천은 짐작되는 바가 있어 물었다.
“관직에서 떠난 겁니까?”
“제 길이 아닌 듯하여 삼왕자님을 뵙고 나오는 길로 그만두었습니다.”
“그랬군요.”
진천이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황보호한은 물었다.
“제가 원망스럽지 않으십니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건 진 상궁의 부탁 때문이었을 거다.
그리고.
‘진 상궁은 날 위해 감춰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혼자서도 꿋꿋하게 인내하고 생존하려면, 유일각을 빠져나가겠다는 의지와 각오를 잃지 않으려면, 살아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기에.
“그때도 같은 질문을 했었죠. 지금 내 마음가짐은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솔직히 마음이 완전하게 평온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 불편한 감정이 원망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황보호한은 말했다.
“저를 탓하셔도 됩니다.”
황보호한은 원망을 듣고, 분풀이 당하길 바라고 있다. 아무리 진 상궁의 부탁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그래야 거짓말을 해서 속인 죄책감을 털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진천은 그럴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어쩌면 밤새 온갖 감정들을 쏟아내며 원망하고 화를 낼 의지가 사라진 것인지도.
단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물었다.
“총순검이…… 아니, 이제는 황보 형씨라 불러야겠군요.”
“삼왕자님께서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황보 형씨도 나를 진 공자라 불러주십시오.”
“진 상궁님의 성을 따르기로 하셨습니까?”
“진 상궁은 나의 유일한 보호자였으니까요.”
“이해가 갑니다.”
“황보 형씨가 이 땅을 차지하려던 서허전장을 막았던 겁니까?”
구태길은 나름의 계획이 있어서 이 땅을 개간하고, 건물을 지으려고 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무림인이 아무것도 못 하게 방해하기 전까지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 무림인은 여러 명의 낭인을 투입해도 소용이 없을 만큼 무공이 고강하고, 신출귀몰한 재주까지 있어서 잡을 수가 없었는데, 어느 날 찾아와서는 제대로 된 땅문서를 가져오면 순순히 사라져주겠다고 했다나.
황보호한은 품에서 둘둘 말려 있는 죽간 3개를 꺼냈다.
“진짜 땅문서는 제게 있었습니다. 진 상궁님이 삼왕…… 진 공자님이 오시면 전해드리라 했습니다.”
그는 애초부터 분명한 목적을 가진 채 무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길에게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다.
그리고 구태길의 설명이 짧고 간단했을 뿐, 약속을 지키기 위한 황보호한의 고생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심했으니, 추레한 몰골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보호한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죽간에 관해 설명했다.
“두루마리 2개는 허현에 있는 집과 이 땅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이고, 1개는 유서라 하였습니다.”
땅문서는 풀어보지도 않은 채 내려놓고, 유언을 담은 죽간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살아서 만날 수 없었던 이유를 남긴 걸까?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유념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가르침을 기록했을까?
걱정하고 염려하고 안타깝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쓰여 있을지도.
진천은 줄을 풀어서 죽간을 펼쳤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한참을 침묵하다가 그대로 동산을 떠났다.
* * *
황보호한은 풀어보지도 않은 땅문서 2개를 챙기고, 그 옆으로 떨어져 있는 유서를 집어 들어서 읽었다.
그도 보관만 했었지, 유서의 내용은 처음 읽게 되었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진 상궁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전해드리라 했던 겁니까.”
황보호한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다시 유서를 읽었다.
[삼왕자님, 세상 물정 모르고 착하기만 한 조카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리려는 손녀가 걱정이에요. 삼왕자님이 챙겨주세요.]몇 번을 반복해 읽어도 분량은 짧고, 호칭만 두 번 들어갔을 뿐, 진천에 관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것 참…….”
진 상궁이 진천의 반응이 이러할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마시라, 믿음을 갖고 기다리라 미리 당부하고 조언하지 않았다면, 아마 황보호한도 진 상궁의 마음을 오해하고 실망했을 게 분명했다.
황보호한은 무덤을 향해 말했다.
“참 답답하게도, 나 같은 사내는 진 상궁님처럼 현명한 여인의 의중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부질없는 질문이었기에, 황보호한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숙이고, 진천이 두고 간 나무 지팡이를 챙겨서 동산을 내려갔다.
* * *
절뚝절뚝.
진천은 멍하니 걸었다.
“속상해할 일이 아닌데…….”
급하게 동산을 내려온 건, 진 상궁의 무덤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고, 황보호한에게도 얼굴을 보일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천아, 천아, 혈육을 챙기는 것이 당연한 순리인 것을, 어찌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질투한단 말이냐.”
알면서도 시기하게 되고, 원망하게 되고, 그래서 부끄러움은 더욱 커지게 되니, 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감정이 풍부해지면 마냥 좋을 줄 알았더니, 기쁜 만큼 더욱 괴롭고, 즐거운 만큼 한층 슬프구나.”
시야는 유일각에 갇혀 있을 때보다 좁아지고, 생각의 크기 역시 작아진 것만 같았다.
“싫다. 싫어…….”
자책이 들고, 감정 따위 없어, 아무것도 모를 때가 하염없이 그리울 따름이다.
생각이 삐뚤어지니, 따라서 몸도 기울어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지팡이를 챙겨오지 않았구나…… 크크…….”
어이가 없어 웃었다.
모든 게 엉망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몸을 가누어 일어나 앉고, 잠시 기어가다가 이게 무슨 짓이냐, 하며 일어났다. 그렇게 다시 걸었다. 직선으로 곡선으로 절뚝절뚝 걷다가 비틀비틀하며 쓰러지길 반복했다.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같은 자리를 빙빙 돌기도 하고, 이리저리 시선이 가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이 원하는 대로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노을이 질 때 동산을 떠났는데, 다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
돌아가는 길을 몸이 기억했던 모양이다. 건물이 나타나고, 사람이 보였다. 허현으로 돌아온 거다. 마을의 풍경이 낯선 게, 집이 있는 서현은 아니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마을의 서쪽으로 걸어가다 멈춰 섰다.
‘무슨 낯으로 진 형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진서정과 말을 섞는단 말인가.’
마치 자기만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듯 지적하고 훈계하고 궁지로 몰아 다그쳤던 남궁쾌 등에게도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방 누님과 탁 형님에겐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도 질투, 원망을 떨치질 못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마음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대로는 집으로 갈 수가 없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건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이 마음과 감정을 훌훌 털어낼 때까지, 진 형님 등과 마주할 자신이 생길 때까지 밖에서 떠돌 생각이었다.
그런데.
‘노숙하겠다 작정하니, 어디서 머물지부터 고민스럽구나.’
주인 없는 평야와 산천을 지나올 때는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자도 되었는데, 온통 주인이 있는 땅과 집이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이 사방에 가득하니, 어디에 있든 눈치가 보이고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이리저리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다녔다.
“아, 우물이다.”
마침 목이 마른 참이었는데, 우물이 눈에 들어오기에 급하게 걸음을 움직였다.
벌컥벌컥.
진천은 바가지에 담긴 물을 쉼 없이 들이켰다.
벌써 세 번째 마시는데도 마치 처음 마신 것처럼 참 맛있게도 마셨다.
“후~.”
바가지를 입에서 떼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물로 허기를 채운 결과였다.
하지만 배는 부른데 만족감이 없어서, 한 바가지를 더 퍼 올렸다.
그러나 마시지 않고 빤히 바라만 보았다. 바가지에 담긴 물은 너무도 맑고 고요하여 푸른 하늘을 그대로 담았다. 그 푸른 하늘에는 자기 얼굴이 비쳤고.
‘내 몰골이 이리 엉망이었나?’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진 데다, 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은 민망할 만큼 지저분했다.
본래 허름한 데다, 더럽혀지기까지 했을 옷차림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영락없는 거지로군.’
남궁쾌 등도 처음 거지꼴이 된 걸 확인했을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물에 비친 얼굴을 보며 먼지를 닦아내고, 머리도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그러나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말끔해지긴 했어도 거지의 인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괜히 신경질이 나서 바가지의 물을 머리 위로 부어버렸다.
촥!
깨끗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좋아, 다시 물을 퍼서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개운했다.
그래서 좀 나아졌나 싶었지만, 유서의 내용을 떠올리자 마음이 다시 어지러워졌다. 진 형님을 생각하자 원망을 넘어서 밉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멀었다, 멀었어.’
한숨을 쉬며 젖은 땅 위로 철퍼덕 주저앉아 힘없이 우물에 등을 기댔다.
문득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는 것도,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먼지도, 흙이 묻어 더러운 손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괜스레 눈물이 난다.
‘바보같이.’
손으로 눈을 문질러 닦고 하늘을 보았다.
‘참, 맑고도 푸르구나.’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니, 뜬금없이 기분 좋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인생이란 게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데, 왕자의 팔자나 거지 팔자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런 거지의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에 취하다 보니, 시가 떠올라서 하소연하듯 중얼거렸다.
지나간 날들, 얼마나 아득한가.
생각하면 한마당 꿈속의 일.
위로는 복사꽃 자두꽃 길.
아래로는 난초와 창포 심은 물가.
거기다가 또 아름다운 사람 있어, 집안에서는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서로 만나 불러보고 싶어, 애태워 그리워할 뿐 말 한마디 못 한다.
희호소 사부와 시를 주고받던 때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희 사부님을 되찾아 장사도 지내드려야 하는데…….’
새삼 그립고 죄송하고, 어서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은 이 마음은 뭔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응?’
진천은 웬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항아리에 물을 담으러 온 젊은 여인이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여인이 다가왔다.
“이거 받아요.”
여인은 봉숭아꽃처럼 얼굴을 붉히며 다짜고짜 무릎 위에 2문을 내려놓았다.
처음 보는 여인이 왜 돈을 주는 걸까?
2문을 집어 든 진천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내려고 애썼다.
“제 눈에는 이러고 사실 분은 아닌 것 같아요.”
이러고 산다니?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에요?”
잠시 망설였으나, 나이 말해주는 게 큰일도 아니다 싶어서 대답했다.
“……열여섯입니다.”
“조금 전에는 시도 읊었죠? 배움도 깊고, 외모도 범상치 않고…….”
여인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괜히 고생하며 구걸하지 말고, 나를 따라와요.”
구걸이라니.
‘나는 돈을 달라한 적도 없는데?’
이래서 생각이 씨가 된다고 했던 모양이다. 자괴와 자책의 심정으로 거지꼴이라 깎아내렸던 건데, 남의 눈에도 거지로 보일 줄이야.
“우리 집에 빈방이 하나 있거든요. 방이라기보다 창고에 가깝지만 청소하면 돼요. 그게 길거리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그것도 싫으면 우리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방법을 찾아봐요.”
거지로 보고 있긴 한데, 뭔가 다른 의도가 느껴져, 일단 오해부터 풀어야 했다.
“난 거지가 아닙니다.”
“원래부터 거지는 아니었겠죠.”
“지금도 거지가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마음이 멋지네요.”
마치 벽 앞에서 말하는 기분이라, 더 강하게 주장했다.
“내 나름의 사정이 있어 자세한 설명은 못 하지만, 정말로 거지가 아닙니다. 설사 거지였다고 해도 소저의 뜻을 받아들이진 않았을 겁니다. 나를 도와주려는 뜻은 참으로 고마우나, 나는 따로 목표한 게 있어서,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한데에서 먹고 잘 생각입니다. 그러니 이 돈은 도로 가져가십시오.”
여인은 화들짝 놀라면 손사래를 쳤다.
“미, 미안해요. 돈은 그냥 가지세요.”
여인은 얼른 물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왔던 길로 빠르게 걸어갔다. 몇 번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기도 했지만, 곧 멀리 사라졌다.
“이런…….”
얼떨떨해진 진천은 여인이 사라진 방향과 손에 있는 동전을 번갈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