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50
50화
50. 눈이 높아졌기 때문에
의원의 치료를 받은 아이들은 무사히 의식을 되찾았고, 의방으로 가서 회복될 때까지 머무르기로 했다.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어버린 아기들도 잠시 의방에서 맡기로 했고.
의녀들이 아이들과 아기들을 마차로 옮기는 사이, 의원이 우르르 꿇어앉은 거지들을 힐끔거리며 다가와 말했다.
“저…… 공자님, 선금을 얼마라도 주셔야 합니다만…….”
의원과는 통성명이 없었고, 딱히 호칭을 지적하지도 않았는데, 용케 공자라 불러주었다.
어려 보이고 외견은 남루한데, 아무렇게나 부를 상황이 아니어서 그런 모양이다.
“잠시 기다리세요.”
방주의 방으로 가서 이곳저곳 둘러보고 뒤져본 끝에, 커다란 상자를 찾아냈다.
열쇠를 찾는 시간이 아까워 자물쇠를 통째로 뜯어내고 열어보니, 금맹과 전장의 표식이 새겨진 돈이 가득하고, 여러 자산을 보증하는 비단 증서까지 있었다.
방주는 확실히 허울뿐인 거지였다.
진천은 그중 은 5냥만 챙겨서 의원에게 가져다주었다.
“아이쿠, 너무 많이 주셨습니다.”
“돈 신경 쓰지 말고 아이들과 아기들을 잘 돌봐달라는 뜻입니다.”
“예, 공자님. 열심히 돌보겠습니다.”
“가까운 시일에 찾아가겠습니다.”
의원을 배웅하고 돌아와 꿇어앉아 있는 거지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중엔 진천을 이곳으로 데려온 세 거지도 있었는데, 시선을 받자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심하게 떨었다.
여하튼, 거지들은 몸이 아픈데도 진천의 눈치를 보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대청의 분위기는 거대한 바위가 얹어진 듯 무거웠다.
‘이들을 어찌해야 하나.’
거지 같지도 않은 거지들이지만, 죽을 짓을 저지른 건 아니기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부서진 벽에서 방주를 끄집어내 바닥에 눕혀두고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던 송웅의 말이 들렸다.
“추 사형, 깨어난 걸 눈치챘으니, 아닌 척은 그만하고 눈을 뜨시오.”
“크흠.”
“추 사형, 몸이 말이 아니오. 의원의 말에 따르면 무공을 잃은 데다가, 허리 아래로는 말을 듣지 않을 거라 하더이다. 똥오줌도 가리기 힘들다고 했소. 두 팔에 의지하여 평생을 기어 다녀야 한다는 거요.”
충격을 받았는지 조용하던 방주가 갑자기 흐느껴 울면서 대청은 더욱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송웅은 놀리는지 위로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허리 위로는 움직일 수 있으니, 젓가락질을 못 해서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요. 어쨌든, 목숨을 부지하려면 빌어먹고 살 수밖에 없으니, 이제야 거지답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사부님이 흐뭇해하실 테니, 그거 하난 잘된 거 같소. 사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 사부님의 손을 잡고 허현에 와서 사형과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오.”
송웅은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했고, 그 덕에 작고한 송웅의 사부에 대해서, 방주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 그리고 이 거지들로 이루어진 궁가방에 대해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내가 후회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사부님이 내게 방주의 자리를 넘긴다고 했던 날에 몰래 도망친 것이오. 그때는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고 싶다, 사형도 충분히 잘 해낼 것이다, 하는 마음이었소. 그런데 수년 만에 돌아와 궁가방의 반도로 몰려 죽게 될 상황에서 돌이켜보니, 사실은 궁가방을 이끌어가는 게 싫었던 것이었소. 책임을 지는 게 두려웠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송웅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더니, 엉엉 울었다.
“그때, 내가 사부님의 말을 들었다면, 사형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우리가 이런 꼴로 마주 보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오.”
내내 듣고만 있던 방주는 말했다.
“아니야. 과정은 달랐을지라도 결국 나와 너는 이런 꼴로 마주 보았을 것이다. 나라는 놈은 어찌 되었든 너를 질투하고, 원망하고, 죽이려고 했을, 그런 놈이니까.”
송웅은 눈물을 닦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방주는 말했다.
“사제. 옛정을 생각해서 나를 사부님이 있는 곳으로 보내다오.”
“거지로 빌어먹고 사는 게 그리 싫소?”
“싫지. 두 팔로 기어 다니는 것도 싫고, 똥오줌 못 가리는 것도 싫고, 남을 올려다봐야 하는 것도 싫고, 진짜 거지다운 거지가 되어서는 못 살겠다. 돌이켜 보니, 난 한 번도 나를 거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방주의 고백은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일까, 바닥까지 떨어진 끝에야 무의식에 깔린 진심을 낚아 올려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송웅은 진천을 돌아봤다.
“소형제, 사형을 내 뜻대로 해도 되겠소?”
“그러세요.”
“고맙소.”
송웅은 다시 방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사형은 오늘 나를 직접 죽이려고 했소?”
“이유는 다르지만, 그러려고 했지.”
“그렇다면 나도 직접 손을 쓰리다.”
송웅은 옆에 두었던 칼을 집어 들었고.
“잘 가시오, 사형.”
“잘 있게, 사제.”
사형제는 짧은 인사와 함께 칼로 이어지며 작별하였다.
* * *
웅성웅성.
진천이 송웅의 부탁을 받아들여 앞마당에 땅 파는 걸 돕고, 각각 죽은 여인들과 방주를 묻을 때쯤 해가 지고 날이 어둑해졌다.
그리고 하나둘 거지들이 돌아왔다.
“어?”
본래 나무에 거꾸로 묶여 있어야 할 송웅이 내려와 있는 걸 보고 거지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으니, 늘 기세등등했던 건장한 거지들이 송웅의 뒤에서 비 맞은 똥개처럼 잔뜩 풀이 죽은 채로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전에 무언가를 묻어버린 흔적이 마당 중심에 있었기에.
‘방주가 안 보이는데, 설마 저기 묻혔나?’
누구도 감히 입을 열기 힘들었다.
마당이 거지들로 가득해졌을 때, 송웅이 속삭였다.
“소형제의 이름이 무엇이오?”
“진천입니다.”
“멋진 이름이오. 진 형제라 부르리다.”
“나는 송 형씨라 부르겠습니다.”
“송 형님이라 불러도 무방하오.”
“…….”
“하긴 아직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지. 진 형제는 신중하면서 관계를 엄격하게 구분 짓는 성정인 거 같으니, 앞으로 나이를 핑계로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리다.”
스스로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인 송웅이 눈에 힘을 주어 숙덕이는 거지들을 둘러보자, 예외 없이 모두 입을 다물며 송웅을 주목했다.
“두 번 이야기 하지 않을 테니, 방도들은 잘 들으시오. 방주는 여기에 있는 진 대협이 제압하였소.”
진 형제라고 한다더니, 대협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호칭을 들을 만한 일도 안 했고, 자기와는 어울리지 않으며, 민망스러워서 감당하지도 못할 호칭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죽은 방주가 허락받지 않고 당호로를 먹었다는 이유로 고진, 고감, 고래를 멍석으로 말아서 매질하였는데, 그 당호로를 진 대협이 사준 것이라 하더이다.”
송웅은 의원이 한창 아이들을 치료할 때 들은 진천과 아이들의 사연, 진천이 방주를 비롯한 거지들을 제압했던 상황까지 생동감 넘치게 풀어냈다.
신기한 건 진천은 말해준 적이 없는 싸움의 세세한 과정까지 직접 지켜본 것처럼 말하는데, 거슬릴 정도의 거짓과 과장 없이 제법 그럴듯하게 사실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송웅은 사소한 부분과 지루할 수 있는 부분을 잘 엮어서 재미난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으니.
“그러나 지난 정리를 따져 방주의 목숨은 내 손으로 거두었소. 그리고 모두에게 교훈을 남기고자 이 땅에 묻었소.”
본인의 존재감을 잘 살리고 마무리하는 것까지 군더더기가 없어, 어디에 내놔도 전혀 뒤지지 않을 만큼 매우 뛰어난 이야기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
설마설마하던 게 진실로 밝혀지자 놀라움, 기쁨, 두려움, 경계심, 기대감 등등의 다양한 반응이 거지들의 얼굴에 나타났다.
그러나 슬픔이나 안타까움 등의 감정을 보이는 거지는 아무도 없었다.
‘죽은 방주가 인심을 잃은 건 분명하군.’
그렇다고 송웅에게 지지를 보내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송웅이 오래전에 허현을 떠나서 접점이 있는 거지가 드물거나, 기억한다고 해도 당시에는 기대를 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수년간 세상을 떠돌았던 송 형씨는 어떤 거지가 되었을까.’
알게 된 시간은 짧고, 많은 대화를 나눠 본 것도 아니니,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주가 좋다고 하는 정도뿐이지, 정확히 어떤 거지라고 단정 지을 게 없었다.
하지만 욕심이 많고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형과 척졌고,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사형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머리를 숙이지 않은 것만 본다면, 나쁜 거지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사부님께서 허현에 자리 잡고 궁가방을 만든 건, 가장 밑바닥에서 고군분투하는 거지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자 하는 목적이었소. 그런데 첫째 제자는 도움은커녕 방도들을 착취하여 욕심을 채웠소. 둘째 제자는 자기만 생각하느라 허현 밖으로 도망치고 홀로 만사태평으로 즐겼소. 배은망덕하게도 제자들이 사부님의 숭고했던 노력과 희생에 똥물을 뿌린 것이오.”
송웅은 갑자기 거지들을 향해서 무릎을 꿇었고, 땅에 이마를 박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미안하오. 죄송하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소이다.”
평생 사과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던 거지들은 당황했고,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래도 용서를 청하고, 부탁을 드리겠소. 나 송웅에게 부디 기회를 주시오. 궁가방을 진정 거지들을 위한 방파로 탈바꿈시킬 것이니, 여러분이 나를 좀 도와주시오.”
한편으로 의심하는 거지들도 적지 않았다.
송웅은 죽은 방주와 한 사부 밑에서 배우고 자란 사형제가 아닌가.
시간이 흘러 초심을 잃고 악덕하게 변했던 사형처럼 송웅도 방도들을, 거지들을 함부로 대하며 개돼지 취급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서로 눈치만 볼 뿐, 어떤 거지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송웅은 거지들의 마음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사형처럼 권력과 욕심에 취하게 될까 두렵소. 또한 고수가 나타나 궁가방을 빼앗으려 할까 봐 두렵기도 하오. 나의 무공 실력은 무림에서 이류에 불과해, 버티려고 해도 개죽음만 당할 게 뻔하기 때문이오. 그렇기에 내가 궁가방으로 욕심을 채울 수 없고, 감히 권력을 휘두를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강하면서, 넘치는 의협심으로 궁가방을 든든히 지켜줄 분을 새로운 방주로 추대하겠소.”
자기와 상관없는 전개라고 생각해 조용히 대청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진천은 불길함을 느끼며 송웅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그러나 보란 듯 몸을 돌려 무릎을 꿇은 채로 허리를 곧게 편 송웅은, 진천의 날카로운 시선을 꿋꿋하게 받아내면서 양손을 모아 내밀었다.
“진 대협, 부디 궁가방의 방주가 되어 우리 거지들을 이끌어 주시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더니.
“큭큭…….”
저도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흘린 진천은 말했다.
“지랄하지 마세요.”
이 상황에서, 이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노골적인 거부권을 행사한 진천은 그대로 돌아서서 대청으로 향했다.
다른 거지들은 생각지도 못한 반응과 어투에 놀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돌처럼 굳었는데, 정작 원인을 제공한 송웅은 쉴새 없이 떠들며 대청 안까지 뒤따라왔다.
“진 대협, 내게는 원대한 꿈이 있소.”
“진 형제라면서요.”
“그냥 아는 사이라면 그리 불러야겠지만, 궁가방의 방주로 모시고자 하니, 대협이 되셔야지.”
“난 대협이 아닙니다.”
대협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누가 때리면 나도 때리자. 내가 아끼는 사람은 무조건 보호하자, 잘못이 없는 데도 힘이 없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보이면 가능한 성심을 다해서 돕자, 정도였다.
“송 형씨의 개차반 같은 사형이 나를 때리려 해서 때렸고, 불쌍한 아이들이 억울하게 맞아 다쳤으니, 구해서 치료했을 뿐입니다.”
평천우명교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서정을 구하는 와중에 기존 가치관에 부합하여 자연스럽게 대응했던 것뿐.
그런데 송웅은 사정도 모르면서 원하지도 않는 책임을 짊어지라고 권하다니.
“명확한 의도가 없었어도 자연스럽게 옳음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의협이고, 그렇기에 진 형제가 대협이라 할 수 있는 거요. 말했다시피 내게는 원대한 꿈이 있소. 하지만 문제가 있소. 생각은 있는데,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오. 그냥 힘도 의미 없소. 아주 아주 강한 힘이 아니면 아무리 애써 쌓아 올려도 결국 무너지게 될 테니까.”
“내게 그런 힘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있으니 방주로 모시고자 하는 게 아니겠소.”
문득 고검치 노인장이 떠올랐다.
“중간에 정신을 차린 놈이 말하길, 사형이 진 대협에게 손도 못 대고 일격에 나가떨어졌다고 하더이다. 나머지 놈들은 처음 보는 금나수 수법으로 한 수에 제압되었고. 저 포 조장이란 자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다 붙잡혔고. 이를 종합하면 진 대협의 실력은 일류에 부합하오.”
고검치 노인장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가 무공은 높지 않아도, 세상을 떠돌며 보는 눈이 높아졌기 때문에, 진 대협의 경지를 가늠해 보고자 대청의 흔적을 살펴보았소. 진각을 펼친 흔적이 하나도 없더이다. 이는 온 힘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니, 그렇다면 진 대협이 최소 절정의 고수라는 것이 아니겠소.”
듣기 싫은데도 계속 들어야 하니, 주화입마가 올 만큼 속이 뒤집힌 것일까.
“물론, 내게도 한계가 있어서 진 대협이 그 이상 어떤 경지의 고수일지는 더 알아낼 수 없었소. 하지만 진 대협의 연령을 고려하면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가 사부이거나, 그런 사부가 아니라도 진 대협 스스로 일대종사로 성장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천재라는 뜻일 게요. 그렇기에 진 대협이 궁가방의 방주가 되어만 준다면…….”
진천은 이제야 고검치 노인장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으나, 그처럼 주화입마에 걸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칼이 찔린 다리를 의원에게 치료받은 후 다시 점혈 되어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흑의인을 어깨에 메고.
“난 갑니다.”
바로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진 대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