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54
54화
54. 각오가 서 있었다
“악-!”
양 팔목이 부러진 가진배 전주는 비수를 놓치며 뒷걸음쳤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두려움이 가득했고, 딱 보아도 투지를 상실한 상태.
그러나 진천은 망설임 없이 한 걸음 더 나아가 활짝 펼친 손바닥을 내밀어 복부를 밀어쳤다.
“헉!”
헛바람을 내지르며 주르륵 밀려나 벽에 부딪힌 전주는 배를 움켜잡고 이를 악문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면장의 수법으로 단전을 부순 결과였다.
진천이 평소처럼 점혈로 마무리하여 제압하지 않고, 모질게 손을 쓴 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다.
‘이런 자들을 왜 배려해야 하지?’
돌이켜보면 그동안 적대하며 상대했던 자들은 자기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나를 죽이려고만 했다.’
그렇기에 자기도 이제부터는 그러지 말자고 작심했다.
나쁜 자들 배려하다 인내심이 고갈되어, 정작 배려받아야 할 사람들을 소홀히 대하면 안 되니까.
이런 광범위한 배려는 진 상궁의 가르침을 실천하던 중에 생겨난 오류이기에 수정이 불가피했다.
그런 면에서 이러한 마음가짐을 먹기 전에 마주쳤던 포 조장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더 일찍 했다면, 죽이지는 않았겠으나 다리 하나 다치는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거다.
“……공자, 날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무사할 수 있을 줄 압니까.”
반면에 운이 나빴던 전주는 살기를 담은 시선으로 노려봤다.
가능하기만 하면 찢어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쳐다보는데, 말투는 여전히 공대인 걸 보면 고치기 힘든 습관이거나, 어쨌든 죽기는 싫으니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짐작했다.
그래서 말했다.
“금맹이건 뭐건 간에 난 알아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할 테니까, 당신 걱정이나 해.”
진천은 전주를 살려주기로 확정하고 단전만 파괴한 게 아니라, 생사의 결정 여부를 잠시 미루었을 뿐이다. 계속 반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는지, 전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러나 대답해 줄 이유가 없기에, 질문을 받는 것도 귀찮았기에 마혈을 찍었다.
전주를 등지고 잠시 생각에 잠겨 앞으로 할 일을 고민하고, 정리한 진천은 포 조장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와봐요.”
“예, 공자님.”
얼른 칼을 내려놓고 절뚝거리며 다가온 포 조장은 진천이 새로운 문주라도 된다는 듯 공손한 태도로 서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모아쥔 양손을 내밀며 고개까지 숙였다.
과도하게 예의를 차렸으나, 지적하지 않았다. 자신은 문주가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평천우명교보다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로 흑랑문을 관리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문도들은 모두 장원에 있나요?”
“경비를 서는 문도만 몇 명 남아 있고, 나머지는 사업체에 있거나, 구역을 순찰 중입니다.”
“반 시진을 줄 테니, 흑랑문의 문도를 한 명도 빠짐없이 불러 모아요. 그러나 이렇게 된 사정을 절대 알려주지 마세요.”
“명을 따르겠습니다, 공자님.”
포 조장이 밖으로 나가자, 창가에 앉은 송웅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 형제, 저러고 나가 그대로 줄행랑을 치면 어쩌려고 그러오?”
“자기 마음인데 어찌 막겠습니까. 다만.”
“다만?”
“이전과 다름없이 사는 게 눈에 띈다면 죽일 겁니다.”
“역시 거지들의 대장이 될 재목다운 훌륭한 자세로군.”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 대응하지 않고 시녀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흑랑문의 시녀들은 당신들뿐인가요?”
“예, 공자님.”
“알겠습니다. 문주가 애용하는 방이 어디인가요?”
곧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문주의 침실로 갔다.
* * *
진천은 넓은 방을 쭉 둘러본 후, 코를 킁킁거리면서 돌아다녔다. 시녀들은 왜 저러나 하는 표정이었으나,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여기군.’
읽은 흔적도 없는 간독이 차곡히 꽂혀 있는 장을 붙잡아서 끌어당겼다.
끼이익-
장이 문처럼 열리고, 공간이 나타났다.
커다란 나무 상자가 2개 있었고, 그중 하나를 열자 바닥에 금과 은이 깔려 있었다. 작은 양은 아니었으나, 궁가방에서 찾아낸 금은과 비교하면 1할도 되지 않는 양이었다.
진천이 코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닌 건, 예민한 후각으로 금은 특유의 냄새를 추적했던 거다.
‘이것밖에 없는 걸 보면, 문주가 동허전장에 돈을 빌렸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었군.’
진천은 시녀들을 돌아봤다.
“당신들은 돈을 받고 고용된 건가요?”
“저희는…….”
전쟁으로 고아가 되고, 상인의 소유물이 되었다가, 결국 문주에게 팔린 노예였다.
다른 상자를 뒤져, 시녀들의 노예 증서를 찾았다. 차입증서도 발견해 문주가 동허전장에 돈을 빌린 이유도 알아냈고.
진천은 증서 등을 채운 상자에 금은을 넣고, 노예 증서만 따로 빼서 빈 상자에 옮겼다.
그리고.
화르르-
삼매진화를 일으켜 노예증서를 모두 태웠다. 그리고 시녀들에게 은 1냥의 20배 가치를 지닌 금 1냥씩을 나눠주었다.
얼떨떨해하는 시녀들에게 말했다.
“이 돈은 그동안 수고한 대가입니다. 노예증서도 모두 태웠으니, 이제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마음대로 떠나도 됩니다.”
그러나 시녀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시녀가 다른 시녀들과 무언의 눈빛을 교환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공자님은 흑랑문에 계속 계실 건가요?”
“아니요.”
“아.”
“하지만 흑랑문을 통제 아래 두고 관리할 생각입니다.”
“그럼 저희는 이곳에 남을게요.”
“왜죠?”
“달리 갈 곳도 없고, 여기서 지내는 게 익숙하고, 무엇보다 공자님이 계신다면 괜찮을 거 같아서요.”
다른 시녀들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녀들과 평천우명교의 교도들은 다른 듯하지만, 크게 보면 전혀 다르지 않다고.
그래서 물었다.
“내가 당신들을 지켜줄 거라 기대하는 겁니까?”
“저희를 문도들로부터 보호해 주지 않으실 건가요?”
“보호해 줄 겁니다.”
“아, 역시!”
“하지만 늘 보호해 줄 수는 없습니다. 아니, 거의 보호해 주지 못할 겁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흑랑문 밖으로 나돌 테고, 어느 시점부터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공자님. 이런 큰돈을 들고 나가면, 분명 나쁜 자들의 표적이 될 거예요. 악독한 자들이 우리를 납치해 돈을 뺏고, 해코지할 거예요.”
시녀들은 실망했고, 두려워했고, 앞날을 걱정했다.
진천은 잠시 그녀들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며 공감해 보려고 노력한 다음에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없어도 당신들 스스로 지켜낼 힘을 가지는 건 어떻겠습니까?”
“힘이요?”
“저희가요?”
“연약한 여인에 불과한 저희가 어떻게요?”
“자신을 지키는 데 꼭 큰 힘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당신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흑랑문이 설명하기 좋은 예가 될 수 있겠군요. 생각해 보세요. 문주가 혼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문도의 숫자가 몇 명이나 될까요?”
“열 명이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문…… 아니 죽은 문주가 비무하는 걸 몇 번 보았는데, 상대하던 문도의 숫자가 제일 많았을 때가 열 명이었어요.”
“비무는 문도들이 문주를 상대로 최선을 다해 싸울 수 없다는 점, 실전도 아니라는 점을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문주를 상대해 본 느낌까지 더해서 평가하자면, 실전이었다면 한 번에 감당할 숫자가 다섯 명에서 일곱 명 사이가 고작일 겁니다.”
무인들의 실력과 강약을 가늠할 줄 몰랐던 시녀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은 또 질문했다.
“조장들이 상대할 수 있는 문도의 숫자는 몇 명일까요?”
시녀들은 한참 고민하다가 세 명에서 다섯 명 사이 같다고 답했다.
“평균적으로 그쯤 되겠군요. 그럼 문도가 문도를 상대로는 몇 명까지 가능할까요?”
“한 명 혹은 두 명일 거 같아요.”
“실력에 큰 차이가 없을 테니, 그럴 겁니다. 그러니 당신들이 무공을 배우고, 밤낮을 가리지 않으면서 틈나는 대로 온 힘을 다해서 연마한다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해 안에 일반 장정들만큼은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내공을 감지할 수 있고, 단전을 만들어 심법을 통해 내공이라 쌓는다면 고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문도들만큼 무공 실력이 높아질지도 모르죠. 혹은 그 이상도 가능할 테고요.”
“무공이요?”
“우리가요?”
“어떻게요?”
“간절히 바라고, 수행에 임한다면 못 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시녀들은 생각에 잠겼다.
무공을 익힌 자신이 문도들을 상대로 싸우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진천은 그녀들이 상념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무공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드세요.”
모두 손을 들었다.
“여러분이 무공을 배울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사실 시녀들 모두가 끝까지 지금의 마음을 유지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꼼꼼히 보아도 사람의 마음은 알 길이 없고, 훗날 또한 예측하기 어려워서다.
그러나 중간에 포기하든, 끝까지 포기하지 않든, 용기를 내어 자기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서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렇게 해본 경험이 있게 되면, 무공은 포기하게 될지라도 적성에 맞는 다른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자신감이 생기지 않을까.
‘어느 한 명이 특출나게 강해져서 나머지를 보호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고.’
설사 시녀 중에 단 한 명도 무공의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진천이 타인의 삶을 온전히, 완벽하게 책임진다는 건 불가능한 것이니까.
자기의 삶을 보호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게 진천의 생각이었다.
“또한 앞으로 당신들 중 한 명은 흑랑문의 조장과 동급의 관리자로 고용될 거고, 나머지는 문도들과 같게 될 겁니다.”
시녀들의 지위를 문도들과 같거나 높여주면, 문도들이건 외부인이건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직급에 합당한 급료도 받게 될 겁니다. 물론, 흑랑문을 떠나는 것은 자유이니, 언제든 말해도 됩니다.”
시녀들은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지금 시녀들이 어떤 마음인지는 알 수 없으나, 펑펑 울기 직전인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달리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문도들이 오면 밖이 소란스러워질 거니까, 부를 때까지는 나오지 말아요.”
상자를 집어 들고 서둘러 침실을 나와서 대청으로 향했다.
* * *
대청에 들어서니, 자연스럽게 문주와 조장의 시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꼼짝도 못 하는 상태로 연신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전주의 모습도 보였고.
저들을 통해 알게 된 건, 역시 사람은 쉽사리 변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자기는 변할 수 없는 저들을 상대로 애만 쓰고 시간을 낭비했다.
주서찬각의 간독에서 읽은 이야기가 하나 떠올랐다.
이야기꾼이 만들어낸 일종의 기환설화(奇幻說話)였는데, 어느 미천하고 가난한 나무꾼이 한평생을 살아보고 죽기 직전에 다시 회귀하여 부자가 되고, 고수가 되고, 천하에서 손꼽을 만큼 강력한 제후의 딸과도 결혼해서 제후가 된 뒤, 천하를 제패했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자기도 그 나무꾼처럼 한평생 살아보고 지금에 이르렀다면, 기회를 주어도 문주가, 조장들이, 전주가 자기를 속이고 뒤통수를 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면, 시간 낭비는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미 겪은 삶이라고 해도 기환설화의 내용처럼 똑같이 반복되어, 매번 예측 가능한 상황이 될 거 같진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종잡기 어려울 만큼 변덕스럽고, 그렇게 다양한 감정에 따라 시시때때로 다른 선택을 하며, 문주와 조장 또한 신의를 지키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오히려 이전 생에서 알던 세 사람만 생각하고, 다짜고짜 때려죽였다면 진천만 천하의 죄인, 천하의 악당, 천하의 공적으로 내몰리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제안하고, 기다리고, 기회를 주며, 후회스럽더라도 담담히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전에 저들에 대해서 최대한 많은 걸 알아두면 판단하기 수월하겠지.’
그랬다면 이전의 삶에서 어떠했든 간에 조금 더 빨리, 단호하게 문주와 조장들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이런 상황 자체를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대한 양의 정보를 취합해야 하고, 그러려면 엄청난 인력이 필요하며, 그 인력을 운용하려면 천금도 부족하겠구나.’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도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복잡한 문제였다.
그러나 문득 이 복잡한 문제를 수월하게 풀어낼 방법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송 형씨가 알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송웅의 원대한 꿈이 무엇인지도 대략 짐작이 갔다.
그러나 송웅은 피식 웃으며 부정했다.
“날 도발하여 답을 알아내려는 거 같은데, 절대 안 통하지.”
“이미 답을 아는데 무슨 답을 또 알아내겠습니까.”
진천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다른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
“진 형제가 제법이오. 역시 거지들의 대장이 될 재목다운 훌륭한 심리전이로군.”
대꾸할 이유가 없어 차례로 마당을 채우고 있는 문도들을 바라봤다.
송웅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이야, 많이도 왔네. 아이고, 상판 좀 보소. 다들 성질이 보통이 아니겠어. 하긴 흑도에 뛰어든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진 형제, 저것들 여차하면 자기들의 숫자가 많은 걸 믿고 덤벼들 거 같은데, 각오는 된 거요?”
“송 형씨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마십시오.”
포 조장이 마지막 문도들까지 우르르 데리고서 도착한 걸 보고 밖으로 나갔다.
진천은 포 조장이 공손히 인사하려는 걸 눈짓으로 막고, 계단을 내려가 문도들과 같은 공간에 서며 모든 이목이 자기에게 모여지길 기다렸다.
송웅은 각오가 되었냐고 물었지만, 사실 포 조장에게 문도를 모두 모으라고 할 때부터 이미 각오가 서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각오해야 할 건 문도들이었다.
진천은 불량스러운 표정과 태도로 자신을 노려보는 문도들에게 말했다.
“뭘 쳐다봐,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아.”
심증은 있으나, 실제로 문도들이 쓰레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당장은 문도들을 모두 쓰레기 취급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