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56
56화
56. 표현할 수 없었던 잔혹함
동허전장은 동허구에 있었지만, 투기장은 북허구와 남허구 사이에 있었다.
황하의 줄기와 이어져 허현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넓은 물길을 따라 오랫동안 흘러내린 토사가 쌓이고 굳어져 작은 섬처럼 형성된 곳이다.
섬의 모서리로 높다란 목책을 두르기까지 해서, 투기장은 해자에 둘러싸인 작은 성처럼 완고해 보였다.
휘영청 밝은 달만 아니었다면, 어둠이 드리운 작은 동산으로 착각했을지도.
사실 음지에서 은밀히 운영해도 부족할 판에 이런 거대하고 비밀스럽고 독자적인 방어망을 구축한 형태의 투기장 건물이 허현 중심에 세워져 있다는 건 말이 안 되기에, 동허전장이 현령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투기장으로 들어가려면 나무다리로 연결된 입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다리의 폭은 두 사람이 나란히 들어가기에는 조금 빠듯했고.
게다가 입구를 무사 3명이 막고 있었다. 침입자가 있을 시에 2명이 시간을 끄는 사이에 1명이 안으로 뛰어가 알린다는 경계 체계인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투기장의 규모에 비해 경비 무사들의 숫자가 너무 적다 싶었지만.
걸음을 늦추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천은 다리를 저 앞에 두고, 가진배 전주를 송웅에게 넘겼다.
“전주를 부축해서 따라와요.”
“음, 그거 좋은 생각이오.”
송웅은 진천의 의도를 알아채고 취객을 부축한 것처럼 전주와 어깨동무하여 뒤따랐다.
“멈춰라. 여긴 어중이떠중이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더러운 거지새끼들.”
“달밤에 뒈지고 싶지 않으면, 썩 물러가!”
다리를 막고 있던 무사들의 눈에 진천과 송웅은 거지고, 양팔이 축 늘어져서 기대어 있던 전주는 취객으로 보일 테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저지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진천은 계속 걸어가며 말했다
“그럼 전주님을 어디도 데려가야 합니까?”
계속 뒤따르던 송웅이 전주의 고개를 잡아 살짝 올려서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헉! 전주님!”
놀란 무사들이 사정을 캐묻기도 전에 송웅이 선수를 쳤다.
“우린 주로 동허구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쓰러져 계시길래 어디 사는 누구냐 물었더니, 동허전장의 전주이시고, 만취하여 꼼짝을 못 하겠으니 여기로 데려다 달라고 하시기에 부축해 온 겁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거짓이라는 걸 알아챌 만큼 개연성 떨어지고, 허술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무사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설마 허현에서 전주를 때려눕히고 제압해서 투기장에 침투하려는 자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주가 눈으로 도와달라고, 자기는 만취하지 않았으며, 이놈들은 자신의 부탁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고 외치는 중이었다.
그러나 직접 말을 해주지 않으면 수십 년이나 살을 부대끼며 살아온 부인의 속도 몰라 구박받는 게 남자란 족속인데, 무사들이 손도 못 잡아본 전주의 눈빛을 읽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멈춰 선 송웅이 슬며시 어깨동무를 풀며 물었다.
“여기에 내려놓으면 됩니까?”
“미친놈아, 기다려!”
“우리가 전주님을 부축하겠다!”
“꼼짝 말고 있으라고!”
무사들은 경계 체계건 뭐건 싹 무시한 채 우르르 달려왔고, 진천은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가 무사들이 지나칠 때 번개처럼 손을 뻗어 마혈을 찔렀다.
“……!”
진천은 굳어버린 무사들을 질질 끌고 가서 본래 자리에 석상처럼 세워두고 다리로 진입했다.
“강호를 떠돌며 여러 무인이 싸우는 걸 보았지만, 진 형제만큼 손이 빠르고, 정확히 점혈할 만큼 뛰어난 무인은 열을 넘지 않았소.”
송웅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이다.
“후기지수들만 따지면 가히 독보적일 거요.”
진천은 칭찬을 받았다고 특별히 기뻐하는 성정이 아니고, 송웅의 식견이 넓다고 해도 천하의 모든 강호인을 아우른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서, 동문서답하든 떠오르는 궁금증을 이야기했다.
“다리를 지키는 건 셋뿐이고, 다리 너머에서도 이쪽을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내부 사정까진 알 수 없지만, 경계가 너무 허술한 거 같습니다.”
“광풍회와 철혈방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동허전장의 투기장이잖소. 팔이 부러진 전주를 우리 둘이서만 데리고 들어가는 걸 허현의 백성들이 알았다면 무조건 미쳤다고 욕을 할 거요.”
“광풍회와 철혈방은 어떤 곳입니까?”
“광풍회는 북허구를, 철혈방은 남허구를 지배하는 흑도문이오. 광풍회는 전대까지만 해도 허현을 통째로 지배할 만큼 강성했었지. 허현의 크기가 지금보다 훨씬 작기도 했고. 그러나 허현의 규모가 커지고, 후계가 이리저리 꼬이고 내분으로 정신이 없던 틈에 다른 흑도문에 야금야금 뜯어 먹혀 지금에 이르렀소.”
“현 광풍회 회주는 냉혹한 사람이지만, 허현 최고 고수가 아니겠군요.”
“진 형제가 그걸 어찌 아오?”
“내분이란 주로 혈족끼리의 싸움일 테고, 그렇게 경쟁하던 가족과 친지를 처리하고 정점에 올랐다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성질이 보통은 아닐 테니까요. 그런 성정인데 당연히 이전의 성세를 회복할 마음이 차고 넘치겠죠. 하지만 다른 흑도문의 수장들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전면전을 자중하는 거고, 그래서 북허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야, 대단하오. 진 형제의 심기가 참으로 날카롭소. 만약 회주가 무공 실력만 더 높았다면, 철혈방이고 흑랑문이고 뭐고 간에 싹 다 몰살되었을 거요. 그래서 은밀히 힘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소. 개인의 능력은 원하고 노력한다고 무조건 높아질 수 없지만, 세력의 힘을 키우는 건 가능하니까.”
그래서 광풍회가 동허전장의 눈치를 보는 걸 수도 있었다. 세력을 키우려면 무조건 돈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철혈방은 군부의 장수였던 현 방주의 부친이 허현에 자리 잡으며 만든 세력이오. 처음엔 광풍회의 횡포에 맞선다는 포부로 지지를 받았는데, 결국 두 개의 광풍회가 생긴 꼴이 되었으니, 우린 철혈방을 교훈 삼아 궁가방을 운영해야 할 거요.”
그저 조건부로 돕는다고 했을 뿐인데, 송웅은 동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따지지 않았다. 송웅만의 생각일 뿐이고, 그냥 무시한 채 약속한 대로만 도우면 될 일이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문을 두드렸으나 반응이 없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도 제지하는 이가 보이지 않았다.
짝짝짝!
하하하!
고의로 횃불과 등불을 켜두지 않아 밤하늘보다 어두운 공간 여기저기서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론, 환골탈태 이후 웬만한 어둠 정도는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볼 수 있었던 진천에게는 속속들이 모두 보였다.
어쨌든, 진천과 송웅이 전주를 데리고 있는 걸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건, 답답하고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쁘게 짙은 어둠이 투기장을 틈 없이 포위한 덕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경계가 허술해도 너무 허술해서 어리둥절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입구와 같은 높이부터 계단형으로 내려가며 관람석을 만들고, 그 아래로 두꺼운 창살을 이용해 벽을 세운 직사각형의 투기장에는 치열했던 싸움이 막 끝을 맺고 있었는데, 경계를 서야 했던 무사들도 조금 내려가 입구를 등진 채로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거다.
혹시 무사들도 도박꾼들처럼 승부에 돈을 건 걸까?
진천은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투기장은 허현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불가침영역이구나.
다리 입구를 지키던 무사들과 투기장 입구를 지켜야 할 무사들의 안이한 경계심은 그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런, 이런. 도박꾼들이 이렇게나 많았군.”
송웅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박수와 웃음소리로 어림짐작하는 걸까.
“진 형제, 사람이 죽어가는 투기장의 인기가 내가 알고 있던 것 이상인 거 같소. 허현뿐만 아니라, 외지의 도박꾼들까지 잔뜩 몰려온 모양이오.”
송웅은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진천은 표정 대신 말로 속내를 드러냈다.
“화가 나네요.”
송웅은 진천을 빤히 쳐다봤다. 말의 의미와 달리 어투와 표정이 무척 담담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진천은 매우 화난 상태가 맞았고, 분노의 근원지는 투기장이었다.
정확히는 그 안에 피투성이로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이들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앉아 있는 남자는 승자이자 생존자.
누워 있는 남자는 패자이자 사망자.
그러나 승자의 얼굴은 패자만큼이나 생기가 없었다. 사망자를 바라보는 생존자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넋이 빠져나간 듯했고.
‘나는 글로 세상을 배웠지.’
강호도 마찬가지.
간독에 쓰여 있길 무인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곳이라고 했지만, 미사여구로 표현되다 보니 강호는 한껏 꾸민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했다.
그런데 현실은, 진짜 세상은, 강호라는 곳은 글과 그림으로는 표현하지 못한, 표현할 수 없었던 잔혹함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저 생존자의 얼굴처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원한, 복수, 승부, 방어, 생존 등등.
그러나 진천의 생각에 이유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되는 몇 가지 이유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재미다.
아무리 돈이 걸렸어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데, 웃고 즐거워하며 손뼉을 친다니.
이는 관람석의 도박꾼들이 투기장으로 내몰아 싸우도록 떠민 두 남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진천의 눈에는 도박꾼들이 사람처럼 안 보였다.
진천은 송웅과 어깨동무 중인 전주에게 가까이 붙으며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 겁니까?”
그러나 전주는 혈도가 잡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계속 물었다.
“왜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사람들이 저리 치열하게 생사를 걸고 싸웠던 겁니까?”
승리한 생존자는 문을 열고 나온 적의의 무사들에게 짐짝처럼 끌려갔다.
생존자의 모습이나, 그를 대하는 무사들의 태도를 보아도 생존자가 본인 의지로 투기장에 나선 것 같지는 않았다.
패배한 사망자 역시 반대편의 또 다른 문을 열고 나온 흑의의 무사들에게 다리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고의인지 바닥이 평탄하지 않고, 간간이 툭툭 튀어나온 돌부리에 부딪힌 사망자의 깨진 머리가 뇌수를 흘리며 덜그럭거렸다.
존중하는 태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 흑의 무사들이 사망자와 동료일 리 없었다.
세 번째 다른 문에서 나와 도살장처럼 피와 살, 뼈와 뇌수 등으로 흥건한 바닥에 흙을 뿌리며 어지럽혀진 투기장을 정리하는 건 회색빛 옷을 걸친 무사들이었다.
일 처리하는 것만 봐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투기장 소속인 모양이었다.
전주의 눈동자는 대답할 테니, 제발 아혈을 풀어달라고 말하는 듯했다.
“흥, 어디서 개수작이야. 진 형제, 풀어주지 마시오. 아혈을 풀어주는 즉시 소리를 지를 놈이니까.”
그래도 진천은 전주의 아혈을 풀어주려고 했다. 전주에게 정확한 내막을 들어야 했다. 자기의 추정이 맞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일말의 의심과 후회 없이, 기꺼이 전주를 죽일 수 있을 테니까.
진천의 손가락이 혈도 쪽으로 움직이자, 전주의 눈동자가 희망의 빛으로 물들었다.
그때, 관람석 중간 지점에 널찍한 공간을 두고 앉아 있던 염소수염의 중년인이 일어났다.
거의 동시에 관람석을 오가며 도박꾼들에게 배당금을 나눠주던 투기장 소속의 무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이러쿵저러쿵 소란스럽게 떠들던 도박꾼들도 입을 다문 채 중년인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송웅이 중년인의 정체를 알려줬다.
“동허전장의 총관 항원이오. 전주가 돌아오지 않으니, 총관이 투기를 주재하는 거 같소.”
항원은 관람석을 둘러보고 말했다.
“하하하, 장인은 칼을 잘 다루었으나, 농부의 지구력을 이겨내지 못했군요. 언제 한 번 특별히 날을 잡아, 장인 출신과 농부 출신들로만 모아 놓고 누가 더 오래 방사할 수 있는지 겨루게 해서 농부가 이기는 쪽에 돈을 걸어야겠습니다.”
웃긴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여기저기서 웃음과 박수가 들렸다.
“자, 다음 투기는 더욱 흥미로운 대결이 예상되는데, 시작해 보겠습니다! 양 진영은 투사들을 내보내 주세요!”
진천은 당장 투기장으로 뛰어내려 그만두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진 형제, 잠깐만. 무턱대고 움직일 상황이 아닌 거 같소.”
“왜요?”
“시야가 어두워서 이제야 알아봤는데, 저기 관람석 양측에서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앉아 있는 이들이 광풍회의 회주와 철혈방의 방주요.”
두 수장도 만만치 않은 고수지만, 양측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의 측근들이 뒤에 병풍처럼 포진해 있었다.
또한 총관의 뒤쪽에 두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자는 허현의 현령이었다.
현령의 뒤에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호위가 두 명 있었고.
“아무래도 모두가 투기장의 후원자들인 모양이오.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군.”
진천은 송웅의 말을 듣고는 있었으나, 귀에 담기진 않았다. 총관의 외침에 이어 각기 다른 문에서 나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마 상궁?’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진천을 삼문협의 어느 이름 모를 숲에 숨겨두고 사라졌던 상궁 마난경이 투기장 안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