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83
83화
83. 막을 수준이 아니다
계가장과 다수의 방위군 병력이 나타난 걸 보고도 멀뚱히 쳐다보는 사람들을 당무독과 함께 집안으로 피신시키고 온 진천은, 현승 공손앙과 각자의 옳고 그름, 신념과 소신 등에 대해 논박을 펼치는 현위 신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 같은 사람이고 표정도 다르지 않은데, 인상이 저렇게 달라 보일 수 있다니.’
역시 말과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부질 없었다.
‘사람의 진짜 속마음은 오직 행동으로만 나타난다.’
그렇기에 저 둘의 대화는 큰 의미가 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공손앙은 노예로 혹사당하는 사람들을 구하려는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신념을 증명했고, 신불은 몰래 계가장과 손을 잡고 광산을 관리하며 돈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소신을 명확히 했기 때문에, 서로 설득되지 않는 평행선만 달릴 뿐이었다.
계가장 장주 계여봉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지루함과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공손앙의 말을 끊었다.
“공손 현승, 길게 말을 할 것도 없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재물을 손에 쥐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소. 원한다면 왕실에 진출하여 중책을 맡을 수 있도록 따로 지원도 해줄 것이오.”
계여봉은 신불을 통해 수집한 공손앙의 사적 사연도 활용했다.
“공손 현승이 승승장구하여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비천한 출신을 핑계로 현승의 모친을 무시하고, 현승이 서자임을 꼬투리 잡아 괴롭히며 내내 앞길을 막은 가문의 어른들과 대부인, 외척에게 복수하는 길이 될 것이오.”
그러나 공손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장주님, 가문에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오. 그러나 성년에 이르러 나의 가치관은 달라졌소.”
더 정확히는 조부의 임종을 지켜본 이후로 심경에 큰 변화가 있었다.
“설사 복수를 염원한다고 해도, 스스로 일어나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계가장의 지원을 받아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어찌 당당할 수 있겠소. 일신의 무위로 근위군에서 명성이 높았고, 패배 한 번으로 자존심이 상해 낙향했다는 장주가 그런 어리석은 제안을 할 줄이야. 내 귀로 직접 듣고도 믿기지 않다 보니, 근위군 시절의 그 명성이란 것도 가문의 돈을 풀어 얻은 허명이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하오.”
듣는 동안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계여봉은 끝내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쳤다.
“공손앙! 네놈이 감히!”
계여봉의 무리도 함께 분노하며 너나 할 것 없이 욕을 쏟아냈다.
이에 공손앙은 진천과 당무독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장주가 흥분하여 판단력이 흔들리고, 무리의 형세도 어지러워지고 있는 지금이 기회요. 일단 포위를 뚫고, 복우산을 벗어나 허현으로 돌아간 후에, 최대로 전력을 끌어모아서 반격합시다.”
당무독이 반발했다.
“저들을 두고 우리만 도망치자는 거요?”
“우리가 당장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저들이 위험해질 거요. 오히려 우리가 도망치면, 저들을 건드리지 않을 거요. 천 명도 넘는 광산의 일꾼을 새로 구하고, 무지독으로 중독시켜 일을 시키는 과정은 긴 시간과 막대한 돈을 낭비케 할 거고, 무엇보다 돈을 앞세우는 저들이 그렇게 할 리가 없지 않겠소.”
“일리가 있기는 한데…….”
당무독의 마음이 흔들리는데, 진천이 반박했다.
“현위에게 저들은 언제든 쓰다 버릴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저들을 두고 가면 죽이지는 않겠지만, 대신 우리의 반격에 맞서 조금이라도 힘을 뺄 요량으로 방패막이처럼 앞세울 겁니다.”
진천 등의 침입 소식을 듣고 일도도 그런 지시를 내렸으니, 신불도 그러지 말란 법이 없었다.
“고통에 무감각해지도록 무지독도 더 많이 복용시키겠죠.”
계가장이 이전 흑도문들을 상대로 유사한 조치를 했었다 하고, 하오문을 상대로도 노예들을 앞세우려고 했으니, 현위가 아니더라도 장주가 무조건 노예들을 희생시키려고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대로 떠날 수 없는 건, 내가 지금 너무 화가 나서, 이 들끓는 분노를 당장 풀지 않고는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공손앙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볼 때, 진천의 표정은 기이할 정도로 담담하고 평온해서다.
그러나 당무독은 간단히 수긍했다.
“진 공자가 화가 났구려. 그렇다면 터뜨려야지. 아무리 멀쩡한 사람도 자꾸 참으면 병이 나는 법이니까.”
공손앙은 당무독까지 동조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차분히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우리 냉정해집시다. 진 문주가 강한 건 알고, 우리 둘만 따져도 질적으로 우세한 게 맞소. 하지만 적의 숫자가 너무 많지 않소이까. 진 문주가 계 장주를 맡으면 나머지는 우리 둘이서 다 막아야 하는데, 방위군까지 모두 합세한 저 많은 인원을 어찌 막는다는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전진을 위한 후퇴만이 답인 거 같소.”
진천은 마치 공손앙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동문서답하듯 물었다.
“방위군을 몰살시켜도 괜찮겠습니까?”
“…….”
“현위와 부장들의 강압에 못 이겨, 거부하면 죽게 될까 봐 어쩔 수 없이 따른 자들도 있을 테니, 한 번 정도는 투항을 권유해 보는 게 어떨까요?”
“……진심이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던가요?”
“그런 적은 없소만, 몰살당하기 싫으면 투항하라는 말이 통하겠소? 비웃음만 살 게 뻔하오.”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한 번 정도는 기회를 줘야 나도 망설이지 않고 가감 없이 분노를 쏟아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당무독도 기회 한 번 준다고 말하는 게 뭐가 어렵냐며,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어서 해보라고 재촉했다.
공손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불과 방위군을 향해 서서 외쳤다.
“방위군은 들어라! 나는 공손앙 현승이다! 그동안의 어려움과 노고를 고려하여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하니, 현위와 부관들의 강압으로 참여한 병사들은 당장 투항하라!”
순간 침묵이 감돌더니.
“현승님, 어이가 없군요. 투항을 논의하는 줄 알고 기다려주었더니, 그 무슨 해괴한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습니까.”
역시나 신불이 조롱의 말로 화답했다.
기다렸다는 듯 방위군의 병사들도 숲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온갖 상스러운 말로 공손앙 등을 욕하고, 노예는 멍청해서 노예가 된 것이라며 조롱했다. 자신들이 광산을 통해 누리는 풍요는 당연한 권리라며, 어느 한 명 투항을 말하는 병사가 없었다.
그러나 한 번이 어려울 뿐, 공손앙은 새삼 당당한 태도, 표정, 말투로, 음성에 공력까지 실어서 방위군에게 호통쳤다.
“너희의 본분은 나라를 지키고, 허현을 보호하며,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방위군임을 잊지 말라! 현령을 대리하는 허현의 최고 책임자로서 이름을 걸고 약속하건대,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이 거듭날 기회를 주려는 것이니,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한다면 당장 투항하라!”
가장 중요한 승리의 요건은 기세라고 했던가.
비웃고 조롱하던 병사들이 말문이 막힌 채로 당황하고, 서로 시선을 교환하면서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이에 신불은 고의로 힘차게 칼을 뽑아 병사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며 소리쳤다.
“더 들어볼 것도 없다. 궁수들!”
후미에 있던 백여 명의 군사들이 우르르 앞으로 나와 좌우로 길게 도열하고, 일제히 시위에 화살을 걸며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이때, 미련이 남은 듯 계여봉이 나섰다.
“공손앙, 저것들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건 개죽음일 뿐이다. 이런 작은 현에서 머무는 게 그대의 포부는 아닐 텐데. 내 부귀영화를 약속할 테니, 우리와 손을 잡고, 더 큰 물로 나아가자.”
꿀을 바른 듯 달콤한 제안이었으나, 공손앙은 양소매 속에서 연검을 꺼내 하나의 검으로 결합했다.
“나의 포부는 일신의 부귀와 영화가 아니오. 아니, 거창하게 포부랄 것도 없소. 그저 당신들처럼 사람을 개돼지로 취급하는 끔찍한 인간은 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일 뿐이오.”
“답답한지고.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 놈이로군. 신 현위, 더 들어볼 것도 없으니, 모두 없애 버리게.”
고개를 끄덕인 신불은 손을 올렸다.
“쏴라.”
궁수들은 일제히 활의 시위를 당겼고.
“진 문주, 오두막으로 들어가 피합시다.”
“진 공자, 화살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만 물러납시다.”
공손앙과 당무독은 당연히 진천이 뒤따라올 거로 믿었고, 경공이 자기들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니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뛰었다.
그러나 진천은 궁수들이 시위를 놓으며 화살을 날리는 걸 보고도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면서 쥐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박고, 대신 그 옆에 떨어져 있던 창을 집어 들었다.
‘내가 이렇게 거대한 분노를 느낄 때마다 선천기를 자극하고, 상단전을 빠져나온 선천기는 화풀이하듯 나를 죽일 듯이 괴롭힌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미 상단전을 빠져나온 선천기가 망나니처럼 날뛰는 중이었다.
이제까지는 이런 경우에 왜 이리 제멋대로일까, 나를 죽일 의도로 주화입마를 일으키려고 하나, 하고 선천기를 원망하기만 했으나, 문득 유일각을 빠져나오던 때를 떠올리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큰 분노를 일으키게 할 정도로 못된 짓을 저지른 자들에게 그만큼 큰 벌을 내리라고, 하늘이 이렇게 거대한 힘을 허락한 게 아닐까. 그 마음을 몰라주니, 선천기가 제발 알아달라고 이런 식으로 호소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디 확인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백여 개의 화살로 채워진 하늘을 향해서, 거대한 선천기의 일부를 억지로 내몰아 켜켜이 쌓아서 불안하게 진동하던 창을 던졌다.
창은 쏜살같이 날아갔고, 대군을 향해 홀로 질주하는 맹장처럼 하늘에 가득한 화살과 마주쳤다.
그 순간 응축된 것처럼 쌓인 선천기를 통제하기 위해서 창과 실처럼 연결해 둔 무형의 줄을 놓았더니, 선천기가 갑자기 폭주하면서 창대가 수십 개의 작은 조각으로 갈라지고, 창날에는 수백 개의 균열이 일어났다.
번쩍-!
창은 빛무리에 휩싸이며 수백 개의 작고 화사한 꽃이 되어 넓게 퍼져 나갔고, 백여 개의 화살을 뒤덮어 모조리 박살을 내더니, 궁수들의 머리 위로 거센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비명도 없이, 그저 무거운 고요함 속에서 온몸에 수많은 구멍이 뚫린 백여 명의 궁수들이 허물어졌다.
“미, 미친.”
진천이 따라오지 않는 걸 알고 돌아보았다가 그 광경을 보게 된 당무독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처럼 자기 눈을 비볐다.
공손앙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말, 말도 안 되는…….”
일순간에 백여 명의 병력을 잃은 신불은 현실을 부정했다.
그러나 확실히 연륜의 무게와 세월의 경험을 통한 정신력은 무시할 수 없었던지, 계여봉이 가장 먼저 평정심을 찾으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의 아들들을 비롯한 계가장의 무사들 오십여 명도 곧장 그의 뒤를 따랐고.
진천은 떨어져 있던 창을 또 줍더니, 다시 선천기를 켜켜이 밀어 넣어서 던졌다.
하늘로 날아간 창은 곧 연결이 끊겼고 빛무리에 휩싸였다가, 수백 개의 조각으로 분산되어 달려오는 계가장의 무리를 향해서 쏟아졌다.
“이따위 파편으로…….”
계여봉은 있는 힘껏 공력을 끌어올려 널찍하게 검기를 발산하고, 막을 치듯 여러 번 정신없이 휘두르는 식으로 조각들을 제거하고, 막아냈다.
그런데도 완벽하지 않아 소매와 어깨의 옷깃이 넝마처럼 변하고 피로 물들었다.
그는 곧 깨달았다.
‘두 번은 못 막는다.’
그리고.
‘애들이 막을 수준이 아니다.’
예상 이상으로 위력이 강했고, 파편도 너무 많아서, 그도 온 힘을 다한 끝에야 간신히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불길함 속에서 뒤를 돌아봤고, 온몸에 생긴 작은 구멍으로 피를 쏟아내며 무너지는 아들들을 보았다.
그리고 비슷하거나 더 심하게 상처 입은 채로 쓰러지는 형제, 조카, 가문의 제자와 무사들의 모습도.
계여봉은 단 한 번의 공격을 받고 가문의 대를 이을 남자들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안 돼-!”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른 계여봉은 또다시 창을 집어 드는 진천을 향해서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진천은 퇴각을 외치는 신불과 방위군의 군사들을 향해서 창을 던졌다.
뒤돌아 도망치다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파편을 얻어맞고, 신불을 포함한 이백여 명의 병사들이 온몸에 생긴 작은 구멍으로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두 번의 공격으로 방위군의 전력 절반이 사라졌고.
“으아-!”
나머지 절반의 병사들은 뛰다가 말고, 비명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주저앉거나 납작 엎드렸다.
“살, 살려주십시오!”
“용, 용서해 주십시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압도적 위력에 놀라고,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해, 이마를 땅에 박은 채로 목숨을 구걸했다.
진천은 병사들이 들을 수도 없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물었다.
“당신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잡혀 노예가 된 사람들을 동정하고, 풀어준 적이 있었나?”
만약 그랬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진천은 남은 선천기를 모두 네 번째 창에 담아서 던졌고, 섬뜩하도록 환하게 빛나는 꽃비를 하늘 가득히 뿌리더니, 그사이에 지척에 이른 계여봉이 내지른 검을 땅에 박은 나무 지팡이를 뽑으며 피했다.
계여봉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각오로, 방어는 도외시한 채 숨도 안 돌리고 계속해서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악에 받친 욕도 내뱉었다.
“잔악한 놈! 끔찍한 놈! 악귀 같은 놈!”
어지럽게 취팔선보를 펼치며 검을 피하고, 지팡이로 쳐내던 진천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큭큭, 악귀만이 당신 같은 자를 죽일 수 있다면, 기꺼이 악귀가 되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