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nt’s Youngest Son is a Warlock RAW novel - Chapter (294)
외전 – 스승과 제자(5)
* * *
“…으윽!”
러쉘은 차원의 이끌림을 감당하지 못하고 토악질을 내뱉다 사라진 왼쪽 손의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왼쪽 손이 축 늘어진 와중에 유령처럼 투명한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러쉘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떠안은 대가 중 자신을 갉아먹는 가장 큰 저주를 자신의 생명으로 막아냈다.
‘내 목숨을 바치나이다.’
러쉘은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루시온을 찾아야 해. 루시온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두가 우산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퍼억!
그때, 오른쪽에서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덩달아 러쉘의 고개가 돌아갔다.
놈의 세계가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남자의 머리에 어둠으로 된 흐릿한 왕관이 보였다.
안녕!
자신의 어둠이 반가움에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뭐라고 해도 루시온이었다.
“…루시온? 루시온…!”
러쉘은 달려갔다.
떨어지는 물건에 세게 맞았는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 이 바보야! 그걸 왜 피하지 못해서 얻어맞냐고! 피했어야지!”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안타까움에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내가 검도 가르쳐줬잖아!”
7 : 3 비율로 7이 카슨이고 자신이 3이지만, 가르친 건 사실이었다.
이걸 왜 따지고 있는지 몰라도 화가 나니 막말이 나온다는 걸 처음으로 알아버렸다.
저걸 왜 못 피하지?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러쉘은 벌벌 떨고 있는 루시온이 안쓰러워 그가 놓친 우산을 씌워주었다.
루시온의 이 죽음은 자신이 깰 수 없었고, 이곳 세계가 자신을 가만히 둘 리도 없었다.
“이게 뭐야.”
반가움 마음이 싹 가셨다.
“말이라도 섞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쪽도, 이쪽도 그렇고 왜 이렇게 허탈하게 죽는지.
마지막 작별 인사는 정말 어렵다는 걸 자꾸만 느꼈다.
“이렇게 죽었던 거야? 이렇게… 쓸쓸하게 죽어버렸던 거야?”
가뜩이나 비가 오는데.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이 멍청아……. 너는 진짜 어떻게 된 게 변하질 않아. 멍청한 게 왜 달라지질 않아.”
처음 만난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것도 알면서도 루시온은 멍청하게 자신을 따라오지 않았던가.
“나 봐봐. 루시온.”
러쉘은 쪼그려 앉아 피가 새어 나오는 루시온의 머리를 매만지며 그에게 주고자 했던 흑마법을 사용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냥 마음이 쓰라려 안아주고 싶었다.
“너를… 이대로 구하면 루시온이 되지 않는 걸까.”
한순간, 러쉘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미안해, 루시온.”
러쉘의 숨소리가 빨라졌다.
“아무래도 세계가 화가 난 모양이야. 미안해, 루시온.”
그렇지 않아도 자신을 주목하던 세계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어서 꺼지라고.
그런 경고가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자 러쉘은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세계는 자신을 바로 쫓아내지 않았다.
‘…너는 상냥한 세계에서 태어났구나.’
러쉘은 세계를 향해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 내가 정말 발버둥을 쳐도, 너를 만나러 와서 이 힘을 전해주는 것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 내 힘이 여기까지밖에 닿질 않네.”
처음에는 세계를 몇 번이나 반복하면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는 그놈이 지배하고 있었다.
세계를 부수지 않는 이상, 이전처럼 놈에게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네가 태어날 곳에 어둠이 ‘그놈’이라고 불리는 개새끼가 있는데, 그 개새끼를 죽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대. 위대한 자를 담을 수 있는 진짜 그릇. 그 그릇만이 놈을 없앨 수 있다네.”
러쉘의 목소리에 미안함이 스며들었다.
“그래서 네가 그릇이 되어야 해. 아니지. 내가 너를 만나러 갈 때, 너는 이미 그릇이겠네.”
러쉘은 잠깐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도, 루시온도 무얼 전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나는 러쉘이야. 러쉘 폴.”
러쉘은 처음 루시온을 만났을 때처럼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지금까지 쭉 네 스승이었던 사람.”
루시온이 그렇게나 부르고 싶었던 그 말을 처음으로 자신이 꺼냈다.
“네가 몇 번, 몇십 번이고 살렸던 사람.”
루시온을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쭉 자신을 구원해주지 않았던가.
아름답다는 게 뭔지, 맛있다는 게 뭔지를 알게 해주지 않았던가.
흑백으로 가득하던 세상에서 색을 전해주었기에 자신의 진짜 삶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너를 살릴 사람.”
금방이라도 꺼질 생명을 부여잡으며 루시온은 자신을 보았다.
러쉘은 잠깐 움찔거리다 곧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안쓰러움에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만나서 반가웠다. 나중에 봐. 내가 널 찾아갈 테니까.”
루시온의 눈동자에 빛이 꺼졌다.
러쉘은 금세 차가워진 루시온의 손을 잡고는 이마를 맞댔다.
죽음은 언제나 애달팠다.
“…살아.”
목소리가 눈물에 잠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찾아갈 테니까, 꼭 살아남아야 해.”
세계가 시간이 다 되었다며 속삭였다.
서서히 자신의 몸이 지워졌다.
러쉘은 마지막까지 루시온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제발…….”
* * *
“…커헉!”
러쉘은 피를 토했다.
너무도 붉은 피였다.
‘여기는… 변경이다. 성벽과 가까워.’
러쉘은 옆에 나무를 붙잡고 간신히 일어났다.
피가 빠져나가고, 생명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지트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버틸 수 있을까.’
러쉘?
어둠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러쉘이네?
얼마나 찾아다녔… 아니, 이건 뭐야?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많은 대가가 네 몸에 붙어 있는 거야?
러쉘은 어둠을 붙잡았다.
가장 먼저 이 기억을 알아야 할 존재였으니.
왜, 왜 그래?
이런 장난은 싫은…….
어둠은 천천히 흘러오는 러쉘의 어둠에 섞인 기억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어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스며드는 기억 속에 한 아이가 보였다.
괴로움에 울부짖으며 자신들에게 손을 뻗었던 그 아이.
우리가 그곳에서 보았던 그 아이가… 루시온이었어.
가장 소중한 우리의 친구, 루시온.
당장 죽을 것 같았던 그 가여운 아이가 루시온이었고, 위대한 어둠의 왕이 될 그릇이었다.
그래서… 루시온이 죽었던 거야.
그래서…….
베로니아가 세계를 가두고, 위태로운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만든 흑마법이 루시온을 죽였다.
어둠은 쓰러지는 러쉘을 다급히 잡았다.
러쉘이 애달프고, 안쓰럽고.
가장 소중한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자신들이 원망스러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대가는.
어둠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러쉘의 저주가 온몸을 뒤덮었다.
그 저주를 최대한 막고자 자신의 생명을 마지막 불꽃처럼 대가로 쓰고 있었다.
저 대가는 우리가 늦춰줄게. 생명을 대가로 쓰는 건 그만둬.
“하지만 놈이…….”
이 정도는 괜찮아. 이 정도는 놈도 쳐다보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나중에 봐야 하잖아. 웃으면서.
“…그래.”
러쉘은 비틀거리며 웃었다.
“웃으며 만나야지.”
고마워, 러쉘.
어둠이 러쉘을 꼭 안아주었다.
너는 성공했어!
“아니. 아직 절반이야. 루시온이 죽지 않아야 하니… 잠깐, 그것보다 얼마나 지났어?”
우리한테는 잠깐이지만, 너한테 있어서 많이.
벌써 10년이 넘었거든.
“10년…?”
러쉘은 놀란 눈으로 어둠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자신의 대가를 짊어지자 점차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루시온은… 너도 그리고 우리도 아는 루시온이 아닐 거야.
“왜?”
러쉘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어, 어서 가자! 해야 할 일이 많잖아.
어둠은 애써 말을 돌렸고, 러쉘은 멀리서도 잘 보이는 크로니아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 * *
그만둬, 브로슨!
어둠이 브로슨을 향해 소리쳤다.
[아, 깜짝아.]브로슨은 미적지근한 얼굴로 목소리를 꺼냈다.
안 놀랐으면서.
[얜 뭔데? 흑마법사를 모조리 죽이는 건 내 역할이라고. 그새 잊었어?]브로슨은 잘 벼려진 검을 들어 러쉘에게 겨눴다.
[흑마법사가 변경으로 넘어오지 못해야 안전하단…….]콰득.
러쉘은 단숨에 자신의 어둠으로 브로슨의 목을 잡고는 수십 개의 창의 형태를 띤 어둠을 브로슨에게 겨눴다.
“내가 이 모양이라도 네놈 하나는 금방 사라지게 할 수 있어.”
깜박깜박.
브로슨은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와…….]러쉘은 강해, 이 바보야!
그래서 그만두라고 했잖아.
‘…이전에도 느꼈는데 역시 노비오하고 닮았어.’
러쉘은 브로슨을 죽이려 했지만, 노비오와 닮았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곯아버린 그 냄새가 다시금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러쉘. 브로슨이 이래도 믿을 수 있어.
알잖아? 가장 오래 살아남은 죽음의 기사라는 걸.
“알아.”
몇 번째 세계인지 몰라도 브로슨은 그때도 지금처럼 자신에게 혼쭐이 났었다.
그러니까 전할 말이 있으면 브로슨에게 말해놔.
‘…무얼 말해야 할까.’
러쉘은 잠깐 고민했다.
브로슨이라는 죽음의 기사는 자신의 아지트에서 오가며 봤을 뿐, 얼마나 입이 가벼운지 믿을 만한 존재인지는 불확실했다.
“만약에 내가 기억을 잃었다면, 나중에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해줘.”
[사람, 아니, 유령을 쳐놓고 그 말이 나와?]“나는 성공했어. 비록 반쪽뿐이지만.”
[그러니까… 부탁을 하려면 좀 공손하게 해야지.]러쉘이 손바닥에서 어둠을 드러내자 브로슨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지만 초면이고 어둠도 잘 아는 것 같으니 내 넓은 아량으로 들어줄게.]“이제 남은 건 지켜보는 일뿐이야.”
러쉘은 뒤이어 ‘루시온’이라는 말을 희미하게 꺼냈다.
“부탁할게, 브로슨.”
그대로 등을 돌렸다.
* * *
러쉘은 비틀거리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차원을 이동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새겨진 대가가 자꾸만 자신의 육체와 혼을 분리하려고 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기를 반복하며 러쉘은 마지막을 준비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어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쩌면… 우리가 실패할 수도 있어.”
그런 말은 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우리도 놈에게서 힘을 빼 올 테니까.
“과거를 보는 힘이 루시온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어.”
너 왜 이래, 러쉘?
매일매일 자신을 천재라고 자랑하더니 갑자기 겁쟁이가 됐잖아!
“그러게. 겁이 좀 나네.”
러쉘은 잠깐 정신을 잃다 다시 눈을 떴다.
“두렵고, 무서워.”
괜찮아. 넌 우리가 봐도 천재가 맞으니까.
“가장 두려운 게 뭔지 알아?”
어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시온이… 나를 원망하는 거야.”
루시온이 왜 널 원망해?
“자신이 이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 텐데. 그게 얼마나 두렵겠어. 얼마나… 버거울까.”
자신이 준 흑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결국 루시온이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루시온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다 못해 숨통을 세게 쥐어버리는 건 아닐까.”
러쉘…….
“알아. 그게 최선이었다는 걸. 하지만 우리는 결국, 가장 힘든 몫을 루시온에게 넘겨버린 거야.”
러쉘은 자신을 비웃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힘을 우리가 줬다는 걸 나중에라도 알게 돼서, 루시온이 이곳으로 찾아오고, 나를 구해준 뒤에 원망한다면…….”
러쉘은 숨을 몰아쉬었다.
천천히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도 좋네.”
응. 우리를 원망해도 좋아.
어둠도 배시시 웃었다.
“루시온이 종착점까지 살아왔다는 거잖아?”
러쉘은 키득거리며 아이처럼 웃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펑펑 울어버릴 것 같아.
미안하다고 사과도 해야 하고.
그리고 안아줄 거야! 꼭!
“…뭐가 됐든 부탁해. 나는 어쩌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빛과 어둠의 공명이라니.
자신이 제약을 걸었지만, 퍽이나 우스웠다.
어둠의 축복을 받은 루시온이 어떻게 빛을 소유하겠는가.
루시온이 널 꼭 구해줄 거야.
천재인 너의 제자니까.
“고맙다. 진심으로.”
러쉘은 어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천천히 희미해졌다.
* * *
‘…….’
러쉘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든 것처럼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죽었나?’
투명해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의자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났다.
‘자연사인가?’
러쉘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미련도 없는 인생이었다.
오히려 묘한 해방감이 들어 미소가 절로 나왔다.
러쉘은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다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뭐지?’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을 끌어들이는, 낯설지만, 익숙한 감각이 저쪽에서 들었다.
러쉘은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녔다.
변경에는 또 뉴브라 병사들과 크로니아 기사들이 싸우고 있었고, 저 멀리 죽음의 기사가 보였다.
러쉘은 죄다 무시하며 크로니아의 저택 앞에 섰다.
[…아. 진짜 행복하단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빨리 죽어버리는 건데.] [내 말이. 맨날 귀족들에게 납작 엎드리기 바빴는데, 이 분노를 풀 상대가 있으니 얼마나 기뻐?] [순서가 있는 게 짜증 나지.] [뭐 어때? 구경만 해도 재미있는데.]낄낄거리며 누군가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유령들의 얼굴은 밝았다.
[그나저나 용케도 버티네. 벌써 10년이 넘었나?] [독종이지. 그걸 버티고 있다니.] [안 버티면 어쩔 건데? 애초에 우리라도 있으니 저렇게 살아 있는 거잖아. 이미 미쳤다고 소문이 쫙 나서 주변에 아무도 없잖아.] [하긴. 우리가 살렸네? 우리한테 고마워해야지.]‘유령도 더럽게 많고, 말도 더럽게 많네.’
러쉘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도 유령이지만, 불쾌감이 넘실거렸다.
[꺼져.]러쉘은 주변의 어둠을 움직여 대화를 나누던 유령들을 옆으로 길게 베어냈다.
어둠으로 가득 찬 그들은 고통스러워하며 사라졌지만, 러쉘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꼴 좋네.’
러쉘은 저택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멋대로 발이 움직였다.
정문을 통과하고.
오른쪽으로 쭉 돌아 계단을 올라 3층으로 향했다.
“이 미친 새끼들이!”
누군가 악에 받친 소리를 냈다.
하지만 러쉘은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안쓰러웠다.
주변에 지나가던 사용인들은 러쉘과 같은 눈으로 방을 바라보다 조용히 움직였다.
[워후. 오늘도 목청이 좋아.] [아침에도 그렇게 힘을 뺐는데 오늘도 그래? 뭐, 작은 새가 발악하는 것 같아 재밌지만.]러쉘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그 소리에 들끓는 분노를 느끼며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만 순서를…….]눈치도 없이 말을 걸어오는 유령의 멱살을 잡고 밀쳐서는 그들에게 둘러싸인 소년을 바라보았다.
여름이 다가오는 날, 마치 자신을 보호하고자 이불로 꽁꽁 싸맨 소년은 상처 입은 들짐승 같았다.
사납고, 가시처럼 삐죽했지만, 러쉘 눈에는 작고 여려 보였다.
얼마나 잠을 못 잤는지 눈 밑에 짙은 그림자가 가득했고, 검은 커튼으로 햇볕조차 거부해 소년의 피부는 너무도 창백했다.
“지랄하고 있네.”
소년은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며 피식 웃었다.
발악하는 것 같았다.
“너희가 아무리 지랄을 떨어도 난 살아 있거든. 뒈졌으면 이만 꺼져. 병신들이.”
비아냥거리며 유령들의 말을 받아치는 모습조차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다.
메말라 떨어질 낙엽 같았지만, 소년은 부들거리며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허세인 거 알아, 루시온.]‘…루시온.’
러쉘은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낯익은 이름이었다.
[오늘 밤에도 우리랑 같이 이렇게 재미있게 말을 나누면 되겠다? 그렇지?]유령들이 키득거렸다.
어둠의 축복을 받았기에 유령들이 루시온을 만질 수 있음에도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누가 저 유령들에게 겁을 준 걸까?’
러쉘이 의문을 느끼던 차에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순간, 러쉘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리움이 밀려왔다.
당장 ‘아’하고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깊고 짙은 그리움이.
[저런, 곤란해 보이네.]그래서였을까,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나는 다 쫓아 내줄 수 있는데.]조금 전까지 어떤 미련도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저만한 정신력을 가졌다면 흑마법사가 되기에 충분했다.
“…개소리 그만 지껄여. 내가 그딴 거짓말을 믿을 것 같아?”
이미 여러 번 당해왔는지 루시온은 어떤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순서를 지키라고.]러쉘은 들려오는 유령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루시온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유령인데.
분명 유령인데 왜 자신을 바라보며 저렇게 다정하게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거짓말쟁이라고? 내가?]러쉘은 코웃음을 쳤다.
가뜩이나 시끄러웠던 참에 잘됐다 싶었다.
[이 새끼가 지금 내 말이 안…….]러쉘은 자신에게 다가온 유령의 멱살을 잡고는 그대로 땅으로 내리찍으며 씩 웃었다.
[봐봐.]딱.
러쉘이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에 어둠이 퍼져나갔다.
화르륵 타오르는 어둠에 유령들은 비명을 터트리며 방을 벗어났다.
주르륵.
꼭 쥔 루시온의 이불이 흘러내렸다.
푸석푸석한 그의 머리카락이 덩달아 어깨 안으로 내려왔다.
“왜…….”
루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러쉘을 바라보았다.
“도와준 건데?”
[도와준 이유는 별거 없어. 내가 사라지기 전에 제자 하나를 둘까 하거든.]“제자라고?”
루시온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물었다.
[네가 마음에 들어. 내가 보는 눈이 완전 높은데, 이상하게 네가 눈에 들어오더라고. 그럼 잘 보여야지.]‘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루시온은 이불을 꼭 쥐었다.
마음에 든다니. 잘 보인다니.
‘또 새로운 괴롭힘이 시작된 건가?’
[어쨌든, 제법 멋졌지? 유령은 이렇게 내가 책임지고 다 쫓아줄 테니까, 너는 내 제자가 되기만 하면 돼.]“…뭐?”
루시온은 손을 앞으로 짚으며 러쉘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저 새끼들은 내가 책임지고 쫓아준다고. 방금처럼.]“무슨 수작이야? 또 날 괴롭히려는 거야?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내가 뭘 했는데? 내가…!”
딱.
러쉘이 손가락을 튕기자 루시온은 그 소리에 움찔거렸다.
[난 저놈들과 달라. 어떤 수작질도 하지 않아.]“개소리하지 마! 이래놓고 내 뒤통수를 때릴 거지? 모두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 개병신으로 만들 셈이잖아? 그렇지?”
루시온은 부들거리며 러쉘을 비웃었다.
[아니. 내 제자한테 맹세코 그런 짓은 안 해.]러쉘은 루시온에게 다가가 씩 웃다 딱밤을 때렸다.
“…읏!”
[아, 내가 누구냐고?]“물은 적 없어.”
루시온은 이마를 매만지며 러쉘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러쉘은 키득거렸다.
이마를 만지던 루시온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촤르륵.
커튼이 갑자기 걷어지며 안으로 빛이 들어왔다.
루시온은 정말 오랜만에 맛본 빛에 눈살을 찌푸리다 천천히 떴다.
[나는 러쉘 폴.]비로소 저 유령의 모습이 보였다.
그 어떤 유령들도 보여주지 않았던 아주 환한 미소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비운의 천재 흑마법사지.]《백작가 도련님은 흑마법사》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