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37
제 8 장 얽힌 인연
“허허! 허허허!”
당사등은 웃었다.
미친 듯이 웃었다. 웃고 또 웃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났고, 눈물이 흐르다 못해 심장이 찢어질 지경이 될 때까지 웃었다.
그건 웃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는 것에 더 가까웠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놈이 정작 본인은 편안하게 과거를 잊고 있다고? 허허허!”
굉목은 그를 가만히 보며 말했다.
“아시겠소? 아무리 당신이 과거의 원한이니 복수니 한다 해도 결국 그것은 당신 혼자만의 메아리일 뿐,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뚝.
당사등이 웃음을 그쳤다.
스물스물.
두 눈이 녹빛으로 물들며 독기가 피어오른다.
“세 치 짧은 혀로 나를 우롱하려 드는가!”
곁에 있던 당예는 온몸을 옭죄어 오는 당사등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어깨를 떨어댔다. 여차하면 당사등이 손을 쓸 작정이라는 걸 누가 봐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굉목은 못 박힌 듯 자리에 서서 입을 열었다.
“사실이오.”
백 번의 변명이나 설명보다 그 한 마디가 더 묵직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당사등은 굉목의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당사등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이라 치지. 하지만 내가 너를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면 어찌할 텐가?”
굉목은 동요하지 않았다.
“사부에게 당한 사람이 당신 혼자라 생각하지 마시오. 불행한 이가 당신 혼자라 생각하지 마시오.”
그 말에 당사등은 굉목을 쳐다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거짓도 없는 눈이다.
분노.
굉목의 눈에 서린 분노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다. 소림을, 그리고 그의 사부를 향한 것이었다.
당사등은 그것을 깨닫자, 모든 것이 부질없어졌다.
기세를 푼 당사등이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그랬군. 홍오 그놈은 사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놈이었어. 자신의 직전 제자가 의절하겠다며 이렇듯 한을 품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하니 죽을 때까지 해결하지도 못하며 살 게 아닌가.”
당사등은 눈을 감았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받아들이려면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수십 년 세월 묻어둔 한을 한순간에 푼다는 건 정말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나라밀대금침(헳羅密大金針)이 홍오 그놈의 머리에 박혀 있다니, 허허…….”
굉목은 당사등의 한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역시 처음에는 당사등과 같은 탄식을 했었다.
과거, 홍오에게 크게 실망한 굉목은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굉목은 문각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손이었다. 문각이 홍오의 방종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 크게 마음을 먹은 것도 그때였다.
문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홍오를 본산으로 불러들인 것이었고 두 번째로 한 일은 각 파를 돌며 홍오의 행동을 대신 사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전 중원을 돈 문각은 굉목을 찾아와 말했다.
홍오를 용서하라고.
굉목은 하늘같은 사조의 부탁에도 홍오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할 수 있다 하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문각이 홍오를 위해 타 문파에 가 무릎을 꿇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굉목은 그래도 홍오를 용서하기가 힘들었다.
친할아버지보다도 자신을 잘 대해 주었던 사조 문각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더욱 괴로웠다.
엉엉 우는 굉목에게 문각이 말했다.
“홍오를 용서하거라. 그래도 홍오는 네 사부이며 내게는 하나뿐인 제자이질 않으냐. 불쌍한 아이다. 원망하려면 홍오를 잘못 가르친 나를 원망하거라.”
그래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굉목을 보며 문각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굉목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했다.
“홍오에게 서장 밀교의 수법인 나라밀대금침술을 시전했다. 홍오는 이제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홍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거라.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그리고 얼마 뒤, 문각은 입적했다.
문각의 말대로 홍오는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굉목에게 저질렀던 일까지도 깡그리 잊었다.
더욱이 굉목은 소림에서 그 일을 알고 있는 것이 자신 혼자뿐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나라밀대금침술은 한 뼘 가량의 장침을 머리에 심는 방법이다. 한 번 심어지면 다시 제거한다는 건 태산을 엎는 것보다도 어려웠다.
그때만큼 허무하고 허탈한 적은 없었다. 이제 굉목은 화를 낼 대상조차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딱히 비밀로 해야 할 일도 아니었건만 굉목은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지금 그때의 자신처럼 당사등은 허무해하고 있었다.
굉목이 말했다.
“내 말을 믿기 힘들다는 것 아오. 사부를 만나 확인해 보시오. 어디까지 기억하고 어디서부터 기억하지 못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오.”
당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저런 얘기로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소림으로 큰할아버지를 끌어들이려 하다니.
당사등은 허탈해하면서도 신중한 태도로 물었다.
“거래치고는 내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지 않은가?”
“그건 거래가 아니오. 내가 거래하고 싶었던 것은 독공을 가르쳐 달란 것이었소.”
“본가의 천지원양공은 외인(外人)에게 전수할 수 없네. 가문의 금칙은 나라고 해도 어길 수 없지.”
“천지원양공을 전수해 달라 하지 않았소. 당신이 중독시켰던 아이를 당신이 책임지란 뜻이오!”
굉목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어떤 독공이든 상관없으니 그 아이에게 독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2년 안에 전해 주시오. 그리고 포기하시오. 그것이 거래의 대가요.”
“허!”
당사등은 무언가 깨닫고는 탄성을 냈다.
“아시겠지만 이것은 나와의 개인적인 거래요.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를 따라간다 하더라도 소림에서 일어날 일들은 책임질 수 없소. 다만 당신이 환자들을 돌보는 동안, 소림은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울 것이오.”
굉목은 당사등을 노려보다시피 하다가 몸을 돌렸다.
“객잔 밖에서 기다리겠소.”
굉목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가 버렸다.
둘의 대화를 당예는 이해할 수 없었다.
“큰할아버지. 이건 아니에요. 이런 어이없는 거래로 큰할아버지를 소림에 보낼 수는 없어요. 우리가 왜 저 스님의 말을 따라야 하죠? 차라리 소림에 선전포고를 해요. 그래도 큰할아버지께 뭐라 할 사람은 본가에 아무도 없어요.”
“당예야.”
당사등의 눈빛이 살아나고 있었다!
“네, 큰할아버지.”
“독공을 알려줘야 한다지 않았느냐. 본가의 천지원양공이나 심법이 아니라 그냥 독을 다룰 수 있는 독공을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느냐?”
당예는 총명한 편이나 지금의 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당사등의 이어진 한마디에 당예는 방금의 당사등처럼 탄성을 냈다.
“내가 소림에서 중독시켰던 아이가 독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모양이구나.”
“아!”
“알겠느냐? 홍오의 제자인 저 중은 그 아이를 위해 온 게다. 그 아이가 독을 품었으니 내게 독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거다.”
“본가의 정식 무공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건 달리 말해서 그 애를 본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군요?”
“그렇지. 그 애는 속가 제자였다. 아마도 2년 뒤에는 소림에서 내보내고 싶은 모양이구나. 사실 단전에 독을 품었어도 해독만 완전히 했다면 십 년 내에 소림의 내공으로 완전히 해소시킬 수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건 할아버지의 독정이잖아요.”
“그러니 포기하라 내게 거래를 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래도 저는 믿을 수가 없어요.”
“뭐가 말이냐?”
“속가 제자 한 명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비밀을 토로하면서까지 큰할아버지를 찾아온 거죠?”
“그건 나도 알 수가 없다.”
당사등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알아보러 갈 수밖에.”
“정말 가실 거예요?”
“그래. 소림이 대환단까지 풀었다고는 하나 내가 가지 않으면 반은 죽게 될 거다. 애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 수도 없고, 이번 일로 본가에 피해를 줄 수도 없지 않으냐. 가주에게는 네가 잘 말하도록 해라, 소림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당예는 앙증맞도록 작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저도 갈래요.”
“아서라. 쉬운 길이 아니다. 소림에 가면 모두가 우리의 적이니라.”
“우리가 왜 적인가요? 우리는 아픈 사람들을 돌보러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아이에게 무공을 가르치러 가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당예의 당찬 말에 당사등은 모처럼 ‘허허’ 웃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구나.”
다소 뻔뻔하지만 당예의 재치 있는 말이 당사등에게 기운이 나게 해주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꾸나. 가기 전에 본가에 전서구를 날리는 것도 잊지 말고.”
“예!”
당예는 눈을 빛내며 힘차게 대답했다.
당사등을 혼자 보낼 수 없어 한 말이지만, 사실 조금은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굉목의 무뚝뚝한 태도와 말투에서 당예는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부모의 마음을 얼핏 엿볼 수 있었다.
‘어떤 아이길래 이토록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
당사등의 말로는 또래라고 했다. 당사등의 의도대로만 일이 잘 풀렸었다면, 어쩌면 자신의 남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아이였다.
자신의 남편감은 자신이 찾겠다며 당가에서부터 당사등을 쫓아올 정도로 주체적인 의식이 확고한 당예다.
당예는 자기 눈으로 그 아이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 ☆ ☆
굉목은 당사등이 객잔을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표정으로 보건대 소림으로 갈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당사등으로서는 이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최소한 자신이 책임을 뒤집어쓴다면 당가에 피해를 주지 않을 수도 있고, 소림으로서는 중독된 이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하나 정작 굉목의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다.
‘독선이 건이에게 독공을 가르친다면 본산에서는 건이가 차후에 당가로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할 거다. 그러면 방장 사형도 사부도 더 이상은 건이에게 손을 대지 못하겠지.’
장건이 내공에 독을 품은 것은 곧 모두가 알게 될 일이다. 독선이 독공을 가르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가의 무공이 외인부전(外人不傳)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 결국 장건이 소림을 나가게 되면 당가로 갈 수밖에 없다고 여길 것이다.
어차피 속가 제자이니 큰 무리도 없는 일이거니와 소림이 당가와 일종의 연을 맺게 되는 것이므로 독선의 안위 또한 어느 정도 보장이 된다.
대신 굉목은 당사등에게 2년 후에 장건을 포기하라 했다. 당가의 비전 무공을 가르치지 않고 남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셈이다.
어차피 당가의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소림에서도 장건을 포기할 수밖에 없겠지, 하는 것이 바로 굉목의 생각이다.
굉목은 장건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 외의 다른 생각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일은 늘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법이다.
당사등과의 일을 해결함으로써 모든 우환이 사라질 거라 판단했던 굉목의 생각은 곧 어긋나고 말았다.
그것은 굉목과 당사등, 그리고 당예가 소림의 산문 앞에 도착하면서였다.
☆ ☆ ☆
한 명의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도장과 그보다는 젊은 중년의 도장 한 명이 길을 걷고 있었다. 둘 다 허리에는 검을 찼는데 머리에는 도관을 쓴 무인들이다.
중년의 도장이 노도장의 앞을 가로막고 애원한다.
“사부님. 제발 가지 마십시오. 제가 이렇게 애원합니다.”
중년의 도장은 무릎을 꿇고 앞에 엎드렸다.
그러나 중년의 도장을 보는 노도장의 눈은 싸늘하다.
“비켜라. 소림이 머지않았다. 이제 와서 내 발길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실로 큰 오산이다. 여기서 돌아갈 거였다면 나는 청성의 문턱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안 됩니다. 지금 소림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아시잖습니까. 사부님께서 지금 소림에 가신다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일뿐입니다.”
“그래서?”
“사부님!”
“나는 오늘을 위해 일갑자의 세월을 기다려왔다. 그 바보 같은 당가 놈이 나보다 먼저 선수를 칠 걸 알았다면 그 이전에 달려왔을 거다. 멍청한 놈.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고를 쳐? 그놈은 예전부터 정신머리가 없었어!”
노도장의 말투는 뼈와 가죽만 남은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처럼 생김만큼이나 꼬장꼬장하다.
“지금 소림에 전 중원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걸 아시잖습니까. 거기에 청성의 검이 와 피를 보았다 해보십시오. 세상이 청성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거였느냐? 그렇다면 내 이미 답을 주었을 터!”
노도장은 왼손으로 도관을 벗었다. 노도장의 오른팔 소매는 덜렁거린다. 노도장은 외팔이였던 것이다.
도관을 벗자 단정히 꼬아 틀었던 상투가 함께 풀렸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흰 머리가 길게 나풀거린다.
노도장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도관을 중년의 도장에게 건넸다.
“자. 나는 이제 청성의 무인이 아니다.”
중년의 도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사부님!”
“난 네 사부도 아니고 도인도 아니다. 그저 풍진이라는 도명을 가졌던 한 명의 무인이다. 알겠으면 비켜라.”
“사부님! 그 옛날의 원한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것이 청성보다 소중합니까? 저보다도 더 소중합니까!”
노도장이 펄럭하고 빈 소매를 떨쳤다.
“나는 무인이다. 청성의 무인이기 이전에, 네 사부이기 이전에 한 명의 무인이다. 나는 무인으로서 못 다한 약속을 지키러 가는 것이다. 그 길을 네가 왜 막느냐!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막느냐!”
노도장의 도복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노옴! 비키거라! 비키지 않으면 내 너를 베고 갈 것이야!”
중년의 도장은 오열했다.
그의 사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면 설사 그것이 누구든 반드시 베고 만다.
그는 능히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며, 또한 그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우내십존의 일 인이며 청성의 검으로 알려진 풍진.
그의 사부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사부니―임!”
중년 도장의 흐느낌을 뒤로한 채 청성일검 풍진은 걸음을 옮겼다.
소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소림의 수뇌부가 모였던 대전의 회의는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굉목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생겨나면서 모든 상황에 대처할 방법을 강구해야 했던 까닭이다.
독선이 올 것인가. 온다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책임을 물을 것인가. 책임을 묻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물을 것인가.
그렇게 끝이 없을 것 같던 회의는 오후가 되어서야 파했다. 굉목이 독선을 데려오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 때문에라도 준비를 해두어야 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원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장건에게 갔다.
장건은 뒹굴거리다가 원호를 보고 일어나 합장을 했다.
“안녕하세요.”
보는 순간, 원호는 알 수 있었다.
장건은 멀쩡했다. 거의 다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예 나은 것 같았다. 더 이상 독기도 뿜지 않는다.
“이…… 이…….”
장건은 찔끔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이 스님은 왜 만날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시지? 아니지? 난 잘못한 게 없잖아.’
장건은 다시 어깨를 폈다.
원호가 마음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어떠냐?”
“이젠 괜찮은 거 같아요. 배고픈 거만 빼면요.”
굉목이 주먹밥을 놓고 갔지만 그건 이미 소화가 된 지 오래였다.
원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배고프다는 말을 빼면 대체 네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뭐가 있느냐!”
“배고프다 말 하면 안 돼요?”
“하지 마라!”
“네.”
장건은 순순히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뻘쭘해진 것은 원호였다.
원호는 ‘끙’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
“다 나은 건 나은 건데, 왜 굉목 사숙이 독선을 찾아갔지? 그렇게 화를 낸 이유가 뭐지?”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인데 장건은 귀가 번쩍 뜨였다.
“네? 노사님이 누굴 찾아가셨다구요?”
“넌 신경 쓸 것 없다.”
“그것도 화내시면서요?”
“신경 쓰지 말라니까.”
하지만 장건은 몸이 달았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당 씨 할아버지 때문에 아프다고 생각하시고 화내러 가신 거예요.”
“뭐?”
“제가 잘못한 거지 그 할아버지 잘못이 아니에요. 말려야 돼요!”
아이의 순진한 생각을 비웃어주고 싶은 원호였지만, 그 순간 무언가 그의 머리를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원호는 짧은 시간에 굉장히 많은 생각을 했다.
독선이라는 태풍을 지나도 그 다음에는 청성일검이라는 먹구름이 온다. 더구나 우내십존 모두와 악연을 가졌기 때문에 그 뒤는 어떻게 될지 예상조차 할 수가 없다.
만약 소림이 모든 고난을 겪고 이겨낸다 하더라도 끔찍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말이다.
장건만, 이 장건이란 아이만 없다면 그 막대한 피해들을 모두 비켜갈 수 있다.
장건이 딱히 잘못한 게 있어서는 아니다. 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원호는 마음을 정했다.
“흠. 그렇다 이거지?”
원호의 말에 장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호는 갑자기 밖을 지키고 있는 나한승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아이가 배가 고프다 하니 밥을 좀 가져다 주어라.”
“예.”
나한승이 자리를 비운 사이, 원호가 말했다.
“네가 직접 굉목 사숙을 찾아가 말리는 것이 좋겠구나. 몸도 좋아졌으니.”
장건이 눈을 똘망하게 뜨고 되물었다.
“밥은요? 지금 밥 가지러 가신 거 아닌가요?”
원호는 하마터면 장건을 때릴 뻔했다.
눈치도 없긴!
“생각해 보니 굉목 사숙이 나간 지가 좀 되었다. 지금 따라가지 않으면…….”
“갈게요! 고맙습니다.”
장건이 급하게 나가려다가 뒤를 돌아보고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셨어요?”
“이천의 평요객잔이라고 하더구나.”
“전 소림사를 나간 적이 없어서 길을 잘 모르는데요.”
원호는 귀찮았지만 친절하고 상세하게 길을 설명했다. 사실 일이 제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굉목은 오는 중일 것이고 지체되었다면 평요객잔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장건은 연거푸 감사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뛰어 나갔다.
일이 자신의 생각대로 되었음에도 원호는 웃지 않았다.
‘이것이 소림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 독선이 장건을 보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일의 성패가 결정된다.
하나 원호는 독선이 눈앞에 던져진 떡을 마다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독선은 필히 장건을 수중에 넣을 것이고, 그에 대한 대가로 원호는 소림에 퍼진 독의 해약과 당가의 협조를 요청할 작정이다.
당장 소림의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장건이란 우환을 제거함으로써 우내십존의 견제 또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독선 당사등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지의 여부다. 그리고 굉목이 무슨 생각으로 당사등을 찾아갔는지 알 수 없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원호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부처께서 소림을 굽어살피소서!’
원호는 그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그저 소림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원호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가 밖으로 나갔는데, 우연찮게도 방장 굉운이 불당 앞에 서 있었다.
원호는 난감했다.
“나한승이 어디에 있지?”
“아이에게 줄 밥을 가지러 갔습니다.”
“건이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원호는 식은땀이 났다.
‘왜 방장 사백이 찾아온 거지?’
이상함을 눈치챈 굉운이 다시 물었다.
“아이는 안에 있는가?”
“없……습니다.”
굉운은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인지 알아챈 것이다.
“자네, 실수했군.”
“방장 사백! 제 신념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전 어디까지나 소림을 위해…….”
“자네의 신념을 의심하지는 않네. 하지만, 지금 소림으로 청성의 검이 오고 있어!”
“예?”
청성의 검이라면 청성일검 풍진이 아닌가!
“최근에 청성일검이 청성을 떠났다는 정보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청성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 했던 모양일세. 우리도 이제야 그가 소림으로 오고 있다는 걸 알았네.”
“그가…… 어디까지 왔기에…….”
“소림의 지척일세.”
“이럴 수가!”
굉운은 가만히 원호를 보더니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예측할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는 범위의 행동은 최대한 줄이게.”
원호는 울컥했다.
“그러는 방장 사백은 왜 굉목 사숙의 행동을 방관하셨습니까!”
굉운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독선을 데리고 올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네. 또한 그 덕으로 한 가지를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얻었다고요?”
“지금 말해 줄 수 없는 사안이네. 내가 무엇이든 말해 줄 수 있도록 자네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네!”
“으…….”
원호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굉운은 원호를 남겨두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생각 외의 일이 벌어져 다급해진 것이다.
☆ ☆ ☆
장건은 급하게 뛰어나가는 와중에도 경내가 평소와 달리 한산하고 조용하다는 걸 알았지만 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신 때문에 괜한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굉목을 따라잡아서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조급했다.
굉목이 의외로 일을 잘 처리했으며, 오히려 원호 때문에 일이 꼬였다는 걸 장건이 알 리 없었다.
사사삭.
장건은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장건의 걸음은 전보다도 더 ‘이상’해졌다.
딱딱한 건 그대로인데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딱딱하고 경직된 움직임이 도를 지나쳐서 마치 짧은 축지법이라도 쓰는 듯했다. 그냥 쓱쓱 걷는데 잔상이 남을 정도다.
평지에서도 그렇게 걷기가 힘든데 하물며 계단에서 그렇게 내려가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경공을 쓰는 건 쉽지만 내려갈 때에는 조금 더 어렵다는 통설을 반박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장건은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한데 저 아래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
“어라? 할아버지?”
장건은 그토록 빠르게 달리고 있던 중임에도 거짓말처럼 문원의 앞에 멈춰 섰다.
독정에 대환단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장건의 내공은 놀랍도록 불어나 있었다. 홀로 있던 시간 동안 운기행공으로 기를 다스리는 연습도 꾸준히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장건의 모습이었다.
하나 문원은 그런 장건을 보고도 놀라거나 감탄하지 않고 심각한 얼굴이었다.
“할아버지가 어쩐 일이세요?”
문원이 다짜고짜 말했다.
“가지 마라.”
“네?”
“왜인지는 모르겠다만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다.”
문원의 눈이 흔들렸다.
무공보다도 낌새와 기척을 느끼는 기술에 능한 문원이었다. 소림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청성일검 풍진의 기운을 느낀 것이다.
“할아버지…….”
장건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서 노사님을 말려야 해요. 그래야 괜한 싸움이 안 일어나죠.”
“네가 간다고 굉목이를 말릴 수 있겠느냐, 아니면 일어날 싸움이 안 일어나겠느냐.”
문원은 본산에 가만히 있어야 할 장건이 밖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장건에게 닥친 일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문원은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것뿐이다. 이 밖을 나서면 난 네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문원은 소림의 산문 마지막 계단 바로 앞쪽에 서 있었다. 그는 홍오와 마찬가지로 산문을 벗어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제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니 제가 해결해야죠.”
장건은 끝끝내 가야 한다고 우겼다. 문원은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장건의 뒷모습을 보며 문원이 중얼거렸다.
“거대한…… 거대한 살기다. 거대한 살기가 소림을 향해 오고 있어.”
말을 마친 문원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모습을 감췄다.
얼마 뒤, 일단의 무승들이 산문의 계단을 급히 내려왔다. 하나같이 눈매가 날카롭고 안광이 형형하다. 손에도 각기 다른 무기를 들었다.
금빛이 감도는 쇠철장과 계도, 불장들이다. 무게만 해도 몇십 근은 너끈히 나갈 것 같은 묵직한 무기들이다. 하나 무승들은 가벼운 대나무라도 든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서둘러라!”
가장 앞에 선 이는 나한전주 굉소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나한승 중에서도 가공할 무력을 지닌 최고의 십팔나한이었다. 한 문파의 장문인이라 할지라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합격술을 익힌 절정의 나한승이다.
그러나 굉소는 자신과 십팔나한으로도 청성의 검을 막을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백팔나한이라면 모를까 우내십존은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괴물들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