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53
제 4 장 장건은 뒤끝도 좀 있어요
어느 샌가 남궁상의 곁에 다가온 남궁지가 중얼거렸다.
“철비각 종유…….”
남궁상이 흠칫 놀랐다.
“정말 저 사람이 철비각 종유라고?”
남궁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지가 말했던 고수, 그가 바로 철비각 종유였다.
문사명이 ‘흠’하고 침음을 내며 걸어 나오는 종유를 보았다.
“철비각 종유라면 하북의 대융삼마(大戎三魔)와 철가장주(鐵家莊主)를 쓰러뜨린 고수가 아닙니까.”
“……맞아요.”
대융삼마는 십 년 전 하북에서 활동이 잦았던 패악한 세 명의 무인이다. 약탈, 방화, 부녀자 납치 등 할 수 있는 모든 죄는 다 저지르고 다니던 악적들이었다.
하북에 기반을 잡은 팽씨세가에서 그들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대융삼마는 상당한 무공을 가진 고수였다. 어지간한 팽씨세가의 토벌대가 찾아오면 궤멸시켜 버리고 벽력도(霹靂刀)나 건곤쌍권(乾坤雙拳) 같은 팽씨세가의 고수들이 찾아오면 피해 다녔다.
피해는 피해대로 입고 체면마저 구겨진 팽씨세가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이십대 중반의 뒤늦은 나이로 강호에 출도한 철비각 종유가 우연히 대융삼마를 만나 박살을 내 버렸다. 대융삼마는 어디 성한 곳 한 군데도 없이 팽씨세가로 넘겨졌다.
하나 당시만 해도 종유의 평가는 높지 않았다. 그런데 한창 세를 불리던 철가장주 철료환이 종유에게 ‘그저 운이 좋은 애송이’란 말을 했다가 묵사발이 나고 말았다.
철료환은 건곤쌍권에 버금가는 고수였다.
철비각 종유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그때부터다.
“흠.”
문사명은 종유를 보면서 그의 무위를 가늠해 보았다. 결코 쉽지 않은 상대다. 보통 무인들하고는 격이 다르다.
과연 장건은 그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문사명도 둘의 싸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말리는 게 좋지 않겠나?”
“아서게. 애들 싸움에 나섰다가 괜히 노망났다는 소리 들을 게 뻔하네.”
남궁호와 윤언강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남궁호가 말했다.
“철비각 종유라는 녀석, 평소 성격은 조용한데 한 번 손을 쓰면 과하다 싶을 정도라 하더군. 철가장주가 무릎을 꿇고 빌었는데도 팔다리를 분질러 버렸다지.”
윤언강이 픽 웃었다.
“장래의 사위가 다칠까봐 걱정되나? 종유에게 질 정도면 별로 의미도 없을 터인데?”
“그러는 자네는? 사실 저 아이가 어디까지 할까 궁금한 게 아닌가? 풍진의 검을 막아냈다고 해서 그게 궁금한 거지?”
“부인하진 않겠네만…….”
윤언강이 장건과 종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여긴 화산이 아니라 소림이니까. 소림에서 알아서 해야지. 괜한 오지랖으로 끼어들었다가 좋지 않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일세.”
윤언강은 장건을 탐내고 있다가 괜히 홍오에게 타박을 받았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남궁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철비각 종유라는 손꼽는 고수와의 대결.
남궁호가 그러하듯 윤언강 역시 그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특히나 제자까지 데려온 마당에, 이는 장건의 무공 수위를 확실히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다.
“그렇지. 여긴 소림이지. 우리가 끼어들지 않아도 소림에서 알아서 하겠지.”
남궁호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그렇게 대답했다.
서로의 생각은 달랐지만, 둘 모두 장건이 종유를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건 같았다.
더 이상의 비명소리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한승들의 진격은 거의 멈춘 거나 다름이 없었다.
소림이든 소림을 찾아온 방문객이든, 심지어 백리연을 쫓아왔던 추종자들이든.
모두가 장건과 종유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쟁터에서 이름난 두 장수가 마주쳤을 때, 그 둘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것과 비슷했다.
한 명은 이미 강호에서 실력이 검증된 고수이고 또 한 명은 이제 갓 강호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신진 고수였다.
‘말려야 할까?’
굉운은 망설이고 있었다.
말리고자 한다면 굉운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우내십존의 무공 수위에 어느 정도 근접해 있는 굉운이 아니더라도 굉자배의 무승이나 원호라 해도 말리는 건 가능할 것이다.
다들 방장 굉운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굉운은 여러 면에서 갈등했다. 선뜻 명을 내릴 수 없었다.
장건은 이미 엄청난 무공 실력을 선보임으로써 소림의 체면을 크게 살렸다.
장건은 나한승들보다도 더 빠르게 분란을 일으킨 자들을 제압했다. 나한승들이 늦은 게 아니라 장건이 너무 빨랐다.
지금까지의 일만으로도 장건은 소림을 대표하는 무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나,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면 반드시 스스로의 힘으로 종유와 맞서야 했다. 종유와 싸워 이겨내야만 했다.
‘아직 모자라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소림에 대단한 애가 있더라’라는 말과 ‘소림에 정말 대신성이 나왔더라’라는 말은 천지차이였다.
이 와중에 소림이 끼어든다면 여러모로 좋지 않다.
벌써 오십 명 이상의 무인을 쓰러뜨린 장건이었다. 지쳐 있는 상태에서 철비각 종유를 상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굉운은 장건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속된 말로, 소림의 기를 한 번에 살릴 수 있는 대박 기회였다.
굉운은 자꾸만 계산적이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씁쓸하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소림을 이끌어갈 이들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계산을 하기로 했다.
어쩌면 이것은 계산이 아니라 도박일지도 모르지만.
장건의 진실을 아는 건 원호뿐이다.
원호는 무진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건이가 사용한 것은 자신의 무공이지 사조의 무공은 아니었습니다. 사조의 무공은 올바른 생각을 가진 건이에게 길을 열어준 것뿐입니다.”
원호는 침잠했다.
‘그런가. 무진이의 말이 맞았는가…….’
자신이 그렇게나 미워하고 쫓아내려던 아이였다. 그 아이는 몇 번의 커다란 시련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자신만의 길을 찾아냈다.
오히려 이리저리 치이며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은 원호 자신이었다. 장건이 똑바로 길을 가고 있을 때 그는 다른 이를 탓하며 비뚤어지기만 했었다.
“으음…….”
부끄러웠다.
자신의 나이 반의 반도 살지 않은 아이도 자신의 길을 걷는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자신보다 훨씬 나은, 수백을 상대로도 당당하게 맞서는 저리도 멋진 아이를 왜 질시하여 가시덩굴에서 구르게 만들었는가.
“그만큼 나라는 자가 못난 탓이었나…….”
원호는 크게 통탄했다.
가슴이 뜨거웠다. 눈가도 뜨끈하다.
“아무래도 난 그간 이해득실로만 따져서는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던 모양이구나.”
그것을 장건이란 작은 소년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주륵.
눈물이 원호의 주름진 뺨을 타고 소리없이 흘렀다.
그를 바라보던 굉운의 눈가에도 어느 샌가 물기가 맺혀 있었다.
무진은 장건이 자신만의 수법으로 문각의 무공을 이해했다 했지만, 어쨌거나 소림은 결국 절대 고수였던 문각의 무공을 복원해낸 것이나 다름없다.
그 의미가 강호에서 시사하는 바는 크다.
원호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나 미워하던 아이가…… 소림의 오랜 숙원을 풀어냈구나. 이제 소림은 더 이상 외세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모두가…… 이 모두가 네 덕이었구나…….”
원호는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이을 수조차 없었다.
모두가 원하고 있었다.
장건과 종유의 대결을.
그러나 정작 종유는 하늘을 보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일이 꼬여도 어떻게 이리 꼬일 수 있을까?
우스갯소리로 ‘코흘리개도 우습게 본다’고 할 만큼 세가 기울긴 했으나 그래도 아직은 백도 무림의 정신적 지주라는 소림의 영역이다.
소림의 앞마당에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행패라니…….
아무리 소림에 득도한 고승이 많다 해도 이런 사태를 맞이한다면 결코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목적이라도 이루었으면 다행인데, 그것도 아니다. 소림의 속가 제자임이 확실한 아이 한 명에게 수십 명이 얻어맞고 나자빠졌다.
종유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말릴 걸 그랬나?’
사실 종유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백리연이 정략결혼으로 소림에 팔려간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그의 나이가 십 년만 젊었어도 눈을 까뒤집고 함께 난동을 피웠을 것이다.
낫살이나 먹은 놈이 어린 처자나 쫓아다닌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조용히 참고 있었는데, 결국 이제는 그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종유 자신은 비록 일단의 문파에 적(籍)을 두지 않은 야인이라 할지라도 다른 곳에 가면 한 문파의 중견급으로 대우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그가 백리연을 따르는 청년들의 대표가 되어 나서야 한다는 것은 대외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쪽 팔려 죽겠네. 젠장. 그놈의 사랑이 뭔지.’
게다가 이미 종유는 자신의 앞에 있는 소림의 속가 제자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저런 괴물 같은 놈이 그놈 하나밖에 더 있겠어?’
상당한 고수 측에 속하는 종유도 장건의 공격하는 수법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때 이미 종유는 ‘장건’이란 이름을 떠올렸다.
‘저런 괴물 같은 소림의 꼬마가……. 발검즉살(拔劍卽殺)이라는 섬살야차의 일검을 막은 꼬마, 그놈밖에 더 있겠냐고.’
나가서 이겨도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마당에 이긴다는 보장마저도 없어진 것이다.
아무런 이득 없는 싸움을 해야 하다니…….
세상에 이런 거지같은 싸움은 또 없을 것이다.
‘망할! 별수 없지. 백리 소저……. 이게 다 소저를 위해서요.’
종유는 부서져라 이를 갈면서 걸음을 내딛었다.
저벅.
한참 동안 장건을 노려보던 종유가 첫 걸음을 떼었다. 종유는 신중히 장건에게 다가가더니, 약 십여 걸음을 떨어져 장건의 앞에 섰다.
종유는 주변에 널브러진 청년들을 보면서 안색을 굳혔다.
실력이 없는 삼류도 아니고 실력 좀 있다 하는 무인들을 이 정도나 쓰러뜨렸으니 장건도 지쳤을 것이다.
평소라면 아이를 상대로, 그것도 상대가 지친 상태에 있는데 싸우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금의 상황은 그런 사소한 조건들을 따지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 버렸다.
종유는 안다.
자신이 장건을 쓰러뜨리든 그렇지 못하든, 소림의 앞에서 일을 저질렀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그러나 어차피 그에게는 뒤가 없는 걸음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길에 들어선 이상, 추호도 자비를 품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 온 힘을 다해 장건을 쓰러뜨리고 백리연의 체면과 자존심을 세워 줄 것이다.
“제법 실력은 있는 모양이다만, 이젠 무릎을 꿇고 손이 닳도록 빌어도 소용없을 거다.”
무겁게 떨어진 종유의 말에 장건은 기도 안 찬다는 듯 대답했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는데요?”
시비는 네가 걸었으니 나도 싸움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투의 말이었다.
종유의 눈썹이 꿈틀댔다.
“네가 지금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제가 무슨 잘못을 했죠?”
청년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런 뻔뻔한 놈을 보았나!”
“네가 우리의 백리 소저를 때린 사실을 부정할 셈이냐!”
장건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냉정하게 상황을 보고는 있으나 화가 풀린 것은 아니다.
“제가 본 것은 당신들 여럿이 소수를 핍박하는 모습이었어요.”
청년들이 분개했다.
“네가 무공 좀 배웠다고 거들먹거리고 싶은 모양인데, 오늘 단단히 경을 칠 줄 알아라!”
장건이 대꾸했다.
“힘이 있다고 거들먹거린 것은 제가 아니라 아저씨들이었을 텐데요?”
“아, 아저씨?”
“나이도 어린놈이 오만하기가 그지없구나!”
장건도 뭔가 뜨끈한 것이 가슴에서 탁 치솟는 듯했다. 적반하장이라고, 청년들은 장건을 가해자로 몰고 있었다.
장건은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 특히나 염소수염을 한 학사, 이병은 침까지 튀면서 장건을 성토하고 있었다.
장건이 째려보자 이병이 호들갑을 떨었다.
“저, 저놈이 어디 눈을 까뒤집고 어른에게 덤비느냐! 이 아비어미도 없는 후레자식 놈 같으니!”
장건은 화가 나서 숨을 몇 번이나 크게 내쉬었다.
“지금 말 다했어요?”
뻔히 부친이 와 있는데 후레자식이라 부르는 건 뭐란 말인가.
“아직 다 못했다! 네놈은 어디서 족보도 없이 배운 주먹질로 천하를 얻은 줄 아는 모양인데, 에라이, 당랑거철(螳螂拒轍)인 줄도 모르고 어르신 앞에서 까부는 자라새끼야!”
사마귀가 상대도 되지 않는 것을 모르고 큰 마차를 향해 앞발을 휘두르며 싸우려 드는 것을 당랑거철이라고 한다. 하루살이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든다는 말과 비슷하다.
장건은 기가 막혔다.
꼴에 학사라고 문자까지 섞어서 욕을 해내는 꼴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장건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시끄럽다! 철비각 종유 대협께서 나서신 이상, 네놈은 오늘 죽은 목숨이다!”
그것은 거의 발악 같은 외침이었다.
“종 대협! 저놈을 죽여주시오!”
“이 학사께서 그리 말씀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오.”
“아니아니, 그냥 죽이지 말고 죽기 직전까지 잘근잘근 고기처럼 다져 버리시오!”
“그럴 거요.”
종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빛이 서서히 살기를 머금고 빛나기 시작한다.
발끝으로 땅을 비볐다.
스슥.
자세를 잡은 종유는 곧 공력을 끌어올렸다.
콰아아아―
단전이 크게 요동을 치더니 미친 듯 옷이 펄럭이며 흔들리기 시작하고 발아래에서부터 흙먼지가 뿔뿔거리고 피어난다.
뭇 좌중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종유가 발을 굴렀다.
쿠―웅.
강한 진각이다. 심후한 공력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놈!”
종유가 진각을 밟은 탄력으로 쏜살같이 장건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폭발해서 튀어나가는 듯하다.
장건은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대항할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그 순간, 종유가 도약했다.
쿵!
종유는 한 마리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랐으나 그가 박찬 지면은 박살이 났다.
종유는 상승의 경신법으로 공중에서 재차 두어 번을 더 도약하여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높이까지 떠올랐다.
양팔을 끝까지 펼치고 한쪽 무릎을 세워 허공에서 독립보를 선 종유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와 같았다.
구경꾼 중의 누군가 소리쳤다.
“섬뢰분연각(閃雷紛連脚)이다!”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종유의 발이 수 갈래로 늘어난다. 하나하나의 각영(脚影)이 아름드리나무를 부러뜨릴 수 있는 파괴력을 가졌다.
빠르기도 빠르지만 엄청난 공력이 담긴 발차기다.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를 뻔했다.
장건의 눈에 보이는 종유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종유의 몸을 흐르는 위기는 크게 팽창되어 있었다. 잿빛 덩어리의 크기가 사람 머리보다 더 크다. 크기도 크기지만 순환도 엄청나게 빠르다.
마치 종유의 전신이 거대한 잿빛 실타래로 둘러싸인 듯하다. 무진의 위기가 애기 주먹만 한 크기였으니, 수준이 몇 배나 차이가 나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다.
종유는 괴상한 수법을 쓰는 아이도 자신의 섬뢰분연각 만큼은 막을 수 없다 생각했다.
철가장주 철료환도 정면으로 섬뢰분연각을 막으려 했다가 보검이 부러지고 팔목이 부서졌다.
‘네놈이 죽음을 자초했다 여기거라!’
종유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금도 힘을 줄이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대충 감을 잡았으니 처음부터 온 힘을 다했다.
섬뢰분연각의 경력이 장건의 얼굴과 어깨 위로 마구 쏟아졌다.
장건이 질린 얼굴을 했다.
‘이건 유원반배로 못 받겠다!’
유원반배는 상대의 공력을 모두 받아들였다가 내보내는 수법인데, 종유의 발차기는 아직 장건의 내공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무거운 공력이 담겨 있어서 받는 순간 팔이 부러지고 내장이 왕창 상할 것이다.
‘할 수 없어.’
장건은 나한보의 보법을 밟으며 종유의 발차기를 피했다. 청년들을 상대한 것처럼 슬쩍 피하는 정도로는 완전히 피할 수 없기에 처음으로 크게 움직였다.
그래봐야 고작 한 걸음 내였지만.
쿠쿵!
빗나간 섬뢰분연각이 무지막지하게 땅을 부순다.
쾅!
장건이 다시 한 번 몸을 반 회전시키며 옆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 발차기까지 피하긴 했으나, 각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세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세 번째 발차기가 떨어지고, 동시에 장건은 금강권의 공력을 일으켜서 벼락처럼 주먹을 뻗었다.
남들이 보기엔 정말로 어이없는 주먹질이었다.
장건의 주먹은 전연 딴 방향으로 뻗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종유가 가만히 있어도 맞지 않을 거리였고, 서너 뼘이나 종유의 몸에서 벗어나 있었다.
기실 그것은 그만큼이나 종유의 위기가 크게 확장되어 몸 주위를 돌고 있는 탓이었으나, 다른 이들이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주먹질일 뿐이었다.
종유는 ‘이놈이 미쳤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응?’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살얼음이 언 호수 위를 걷다가 얼음이 깨져 발이 빠진 듯한 묘한 감각과 함께 종유의 시야가 새하얘졌다.
쩡―!
무언가 외피를 감싸고 있던 두터운 갑옷이 한순간에 사라져나간 듯했다.
‘이런 썅!’
알 수 없는 한기가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들었다.
‘당했다! 왠지 이럴 것 같았어!’
불안한 기분이 적중된 순간이다.
그리고 종유는 알 수 없는 폭발에 휘말려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우아아악!”
맞지도 않았는데 왜 날아갈까? 하고 생각한 순간 벌써 남보다 몇 배나 더 높고 멀리 날아가는 종유였다.
휘이이잉.
바람소리조차 우렁차다.
“…….”
“…….”
쿠당탕탕탕!
거의 땅에 처박히듯이 종유가 내던져진다.
청년들은 물론이고 구경꾼들까지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뭐야!”
“뭐가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날아가!”
“맞지도 않았잖아! 저놈은 엉뚱한 데를 쳤다고!”
데굴데굴.
종유는 날려진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서 몇 바퀴를 더 굴렀다.
“종…… 대협?”
“종 대협?”
종유는 대답 없이 잠잠했다.
간혹 어깨가 들썩이긴 했으나,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를 기다려도 종유는 미동이 없었다.
한 청년이 다가가 종유를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자고 있어!”
종유는 쌔근거리며 잠에 푹 빠져 있었다.
청년들은 경악했다.
“이게 뭐야!”
청년들은 정신이 잠시 외출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수혈이라도 짚었단 말인가?
청성일검 풍진이라 하더라도 철비각 종유를 일격에 전투불능으로 만들려면 최소한의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다. 철비각 종유에 대한 강호의 평가는 그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고수인 종유가 손쉽게 요혈을 내줄 리는 없을 터였다. 그것도 유성우처럼 무수히 각을 내뻗고 있는 와중에 말이다.
“마, 말도 안 돼…….”
종유가 뭔가 해보지도 못하고 나자빠져서 꿈틀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이 어이없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청년들은 황망한 얼굴로 장건을 쳐다보았다.
청년들이 생각하기에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의미 불명의 말을 장건이 중얼거렸다.
“크고 잘 보이니까 때리긴 더 쉽네.”
만약 생전의 문각이 지금의 장건을 보면 감탄을 내질렀을 터였다.
다른 사람의 위기(衛氣)를 기(氣)로 타격하는 방법을 최초로 알아낸 문각도 위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오랜 수련과 깊은 깨달음으로 상대의 위기를 거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고작이었다.
장건은 위기의 덩어리를 눈으로 보고 적은 힘으로 타격하지만 대신 문각은 좀 더 넓은 범위를 권경으로 가격해 상대의 위기를 무너뜨렸다. 때문에 장건처럼 완전히 위기를 파괴시키지는 못했다.
만일 문각도 장건처럼 위기를 볼 수 있었다면 굳이 백보신권처럼 내공 소모가 심한 수법을 이용하지는 않았을 터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미 장건은 문각을 뛰어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장건의 표정이 잠깐 찡그려졌다.
“윽.”
장건의 다리는 발목 위까지 땅에 파묻혀 있었다. 종유의 내공이 깊은 만큼 위기도 단단했다. 커다란 위기의 덩어리가 깨지는 여파로 장건은 발목까지 묻힌 것이다.
반탄력만으로도 이러니, 실제 종유의 공력을 그대로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고고.”
근육이 잔뜩 비틀려 온몸이 쑤셨다.
종유의 힘을 되돌리지 못하고 금강권의 공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더니 생긴 일이었다. 내공도 한꺼번에 반 이상이 쑥 하고 빠져나간 듯했다.
장건의 이마에도 처음으로 땀이 맺혔다.
잠깐만 지나면 곧 회복이 되지만, 금강권을 무리하게 쓰면 이렇게 빈틈이 생기고 만다.
하나 이번만큼은 알면서도 그리 할 수가 없었다. 종유의 공격이 너무 거세서 장건이 받아 돌릴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거친 비바람에도 견뎌내는 갈대가 폭풍을 만나면 뿌리 채 뽑혀 나가는 것과 같다.
장건으로서는 또다시 개선해야 할 점이 생긴 셈이었다.
장건은 근육통 때문에 다리를 후들거리면서도 어떻게 해야 지금처럼 강한 공격도 되돌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모습을 청년들은 오해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한 탓인지 아니면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정신이 나갔는지, 청년들은 장건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놈도 당했다!”
당한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지쳤어!”
왠지 장건이 힘들어 하는 듯 보였기에.
“지금이 기회야!”
라고 판단을 내렸다.
청년들은 ‘그럼 그렇지’하고 생각했다.
아무렴 철비각 종유의 섬뢰분연각을 제자리에서 막고도 멀쩡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한 번에 덮쳐!”
“몸으로라도 잡아!”
청년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한두 명이 날아가더라도 나머지가 장건을 붙들면 일은 끝나는 것이다.
이미 몇몇의 머리에는 장건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상상까지 들어찼다.
“우와아아아!”
“백리 소저와 종 대협의 복수를 하자!”
장건은 또다시 달려드는 청년들을 보며 호흡을 골랐다.
어차피 덤비지 않는다 해도 그냥 놓아주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덤벼주면 더 고마운 일이다.
장건은 입술을 깨물었다.
“죽어어어어!”
청년들은 이제 거의 마구잡이로 장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몸으로 짓누를 것처럼 수십 명이 한꺼번에 장건에게 몰려들었다.
장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안법으로 모든 청년들의 공격을 머리에 담고 순서에 따라 용조수와 유원반배를 펼쳤다.
텅!
최초의 일격 이후!
터터텅 텅텅텅텅!
한꺼번에 달려든 청년들 십여 명이 거의 동시에 공이 되어 튀어오르고 말았다.
“우아악!”
당연히 장건에게는 손도 대지 못했다. 우격다짐으로라도 막아보려 했으나 그것도 안 된다.
뒤이어 달려든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텅텅텅텅!
“끄아아아!”
쿠당탕탕.
데구르르.
장건의 주변에는 순식간에 널브러진 청년들로 가득해졌다. 한 명도 남김없이 어판장의 물고기들처럼 바닥에 처박혀 꿈틀거리고 있었다.
장건은 그저 낮은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고를 뿐이었다.
이를 보는 구경꾼들은 할 말을 잃었다. 보고 있으면서도 꿈인지 환상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끄으…….”
“으으으…….”
예의 쓰러진 청년들은 작은 신음을 내며 일어나지 못했다.
몇 남지 않은 청년 추종자들이 악에 받혀 소리를 질렀다.
“어떤 새끼가 지쳤다고 했어!”
“생생하잖아!”
청년들은 입술이 터져라 깨물었다.
“부, 분하지만 우리들의 실력으로는 저놈의 털끝도 건드릴 수 없어.”
“목숨을 던져도 어쩔 수 없는 건가!”
분해서 눈물을 쏟는 이들도 있었다.
종유를 포함해 칠십여 명 정도가 바닥에 쓰러져 있고 추종자 중에 서 있는 이는 삼십여 명 정도다. 나머지는 소림을 찾은 일반 무인들과 소림사에 거의 제압당한 상태였다.
구경꾼들은 이제 한바탕 싸움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보통 때였다면 환호성이나 박수가 나올 만도 하건만,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황당해서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지?”
“자네와 나, 둘이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면.”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년을 상대로 백리연의 추종자들 백이 싸웠는데 소년이 승리했다. 그것도 하북의 고수 철비각 종유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남은 청년들을 가볍게 제압한 소림사의 나한승들도 전진을 멈추고 장건을 보고 있었다. 목석같던 얼굴들이 모두 경악의 표정을 담고 있다.
대체 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혼자서 이 엄청난 인원을 시체(?)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저 아이는 어떤 생각으로 싸움을 한 것일까?
설마 철비각 종유까지도 한 방에 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싸웠던 걸까?
장건이 가만히 서서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우물거리자, 뭇 중인들은 쥐죽은 듯 소리도 내지 않고 기다렸다.
궁금하다.
쓰러진 이들 외에 전의를 잃고 남은 이들을 향해 훈계의 말을 할지, 아니면 당당하게 소림의 제자라 자신을 소개하고 싸움의 전모를 뭇 사람들에게 알릴지.
어느 쪽이든 간에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소림 대신성의 탄생!
소년은 그에 어울리는 명연설을 할 것이고 사람들은 훗날 오늘을 기억하며 소년의 말을 떠올릴 것이다. 술 한 잔 하며 자랑스럽게 지인들에게 말해 주어도 좋을 일일 것이다.
마침내 장건의 입이 열리려 한다. 사람들의 기대심은 증폭되다 못해 터질 듯했다.
천천히……, 하지만 결코 낮지 않은 목소리로 장건이 남은 청년들을 향해 말했다.
“얼굴 다 기억해 놨어요.”
장건의 말이 바람을 타고 뭇 사람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퀭.
군중들의 눈이 사흘은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움푹 꺼졌다.
“뭐, 뭐라는 거야?”
“뭘 기억해?”
명연설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잔뜩 실망했다.
그러나 실망은커녕 경악한 이들도 있었다.
바로 남은 백리연의 추종자들이었다.
‘설마?’
그래도 살아야겠다 생각한 이들은 몸을 숨기려고 애썼다. 워낙 군중들이 밀집해 있어서 그들 사이로 몰래 뒷걸음질을 치며 숨었다.
그제야 군중들은 장건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았다.
“설마 그 많은 사람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말도 안 돼!”
그러나 장건은 매의 눈빛으로 백리연의 추종자들 한 명 한 명을 쏘아보고 있었다.
남은 청년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몇몇은 망연자실 해 주저앉았고, 또 몇몇은 쓰러져 있는 동료들처럼 시체 행세를 했다.
장건이 ‘칫!’하고 입을 삐죽거렸다.
“소용없다니까요.”
장건은 자신을 향해 살기를 보내던 눈빛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때려죽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눈으로 보던 이들의 얼굴을 확실히 머리에 각인해 두고 있었다.
주변 사물을 한꺼번에 보고, 그것을 머리에 담는 안법을 하는 장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장건의 성격상 처음부터 일부러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좌중들은 물론이고 몸을 숨긴 청년들조차 장건이 남은 이들을 다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장건은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휙 돌더니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덜 움직이는 것이 장건의 평소 행동 방침이라 해도 부친을 욕보이게 한 자들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장건은 주저앉아 있는 청년들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동공이 풀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들의 몸에 흐르는 위기는 매우 미약했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가 사라지고 포기한 탓에 위기가 흐릿해진 것이다.
이런 흐릿한 위기를 타격하는 데에는 큰 힘이 들지 않는다.
장건은 다짜고짜 주먹을 내밀었다.
“컥!”
“윽!”
장건에게 얻어맞은 청년들은 주저앉아 있다가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그렇게 십여 명을 순식간에 때린 장건은 줄줄이 엮인 굴비처럼 쓰러져 있는 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그중 한 명을 향해 걸어갔다.
팔다리가 힘없이 늘어진 채 눈을 감은 꼴이 영락없이 혼절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장건은 코웃음을 쳤다.
“흥.”
여지없이 주먹이 내려 꽂혔다.
빡!
“꽥!”
놀랍게도 기절한 줄 알았던 청년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건에게는 죽은 척하는 것도 통하지 않았다.
장건이 쓰러뜨린 사람들의 몸에는 잿빛 덩어리인 위기가 보이지 않는데, 맞지 않고 기절한 척하는 이들의 몸에는 위기가 흐르고 있으니 당연히 구별할 수 있었다.
뻑!
“크악!”
장건은 기절한 척하는 청년들을 쏙쏙 골라내 두들겼다.
보는 사람들마저도 기가 막혀 했다.
“정말 저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장건이 추종자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기절한 척하는 사람들까지 골라낼 수 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수군댔다.
“싸우기 시작할 때부터 다 패 줄라고 기억하고 있었나봐.”
“그러게. 때린 놈 안 때린 놈을 다 기억하고 있었어…….”
반은 오해였지만, 사람들은 장건의 그 치밀함에……, 그리고 쪼잔함에 가까운 엄청난 뒤끝에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적어도 장건과는 적으로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는 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장건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위기가 도는데도 기절한 척하는 이들을 찾아내 때려주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장건이 다가가자 벌떡 일어나 절을 하듯 엎드려 빌기도 했다.
“대협!”
그에 대한 대답은 역시나 장건의 주먹이었다.
뻥―!
“으악!”
장건은 청년이 날아가는 것도 보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군중 속에 숨어든 청년들이라고 장건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장건은 그 중에서 정확히 자신을 공격했던, 혹은 자신을 향해 띠꺼운 분노의 눈빛을 보냈던 이들을 정확하게 골라낼 수 있었다.
빡!
퍽!
텅!
한 명 한 명 장건의 손에 끌려나온 청년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나, 난 아니에요! 정말 아니라니…….”
한 청년이 항변했지만 장건은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던 이 중에서 그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거짓말.”
뻥!
열심히 항변했던 청년도 침을 질질 흘리며 바닥을 구르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장내를 정리하는 데에는 채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설마하니 장건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건을 아는 이들은 장건이 착하고 수더분한지라 끈질기게 다 쫓아가 팰 줄은 몰랐고, 장건을 모르는 이들도 장건이 설마 그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건은 해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끄집어내서 성의껏 두들겼다.
오죽하면 소림에서조차 말릴 생각을 못할 정도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장건이 누가 또 없나 고개를 돌리고 있는 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이병.
이 모든 일의 시초나 다름없는 학사 이병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이병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다리를 달달거리고 떨어댔다.
장건이 고개를 돌려 이병을 보자, 이병은 놀라서 딸꾹질까지 했다. 장건의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 심장이 콩알만 하게 찌그러지는 것 같다.
사실 장건은 이병의 몸에서 위기를 거의 찾을 수가 없어서 눈에 힘을 준 것인데 이병은 그 눈빛을 착각했다.
철비각 종유까지 날아간 마당에 자신이 그런 주먹질을 맞으면 대번에 황천을 건너게 될 것이다.
이병은 주춤거리고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자신의 일행들이 모두 제압을 당하고 소림의 나한승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이병은 옳다구나 생각했다.
그가 크게 소리를 쳐댔다.
“어이구야! 천하제일 문파인 소림사에 부처님의 자비는 어디가고 천하의 대살성(大殺星)이 나타났구나! 무공도 모르는 고절한 선비가 죽어나기 일보 직전인데 소림의 중이란 작자들은 남의 일마냥 구경이나 하고 있으니, 아니 오히려 살귀(殺鬼)와 작당하여 애꿎은 이들을 핍박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이더냐!”
나한승들이 흠칫했다.
구경꾼들도 혀를 내둘렀다.
이제껏 벌어진 상황을 모두 본 그들이었으나, 이병의 말을 들으니 섬뜩해졌던 것이다.
강호의 소문이란 무섭다.
이병은 짧은 세치 혀로 지금 일어난 일들이 모두 소림의 탓인 양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나한승들도 난감해졌다. 이대로 손을 썼다가는 정말로 뭔가 잘못된 누명을 쓸 것만 같다.
나한승들이 다가오지 않자 이병은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오오, 통재라! 이것이 백도 무림의 정의를 외치던 그 소림이 맞단 말이냐! 지금 본인이 이대로 억울하게 죽는다 해도 강호의 안녕을 걱정하여 결코 편히 눈을 감지는 못하리로다.”
이병의 입장에서는 소림의 나한승들에게 잡혀간다 해도 장건에게 얻어맞지 않으면 그쪽이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장건에게 맞은 청년들, 특히나 철비각 종유는 그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고수였는데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나가떨어진 이들은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듯하다.
그런데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그가 장건의 주먹에 맞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것이다.
장건은 가만히 있고 나한승들도 어쩔 줄 모르니 이병은 왠지 자신감이 들었다.
이병이 장건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네 이놈! 서창 이씨 38대손 이병, 25년간 대나무처럼 굳은 절개를 지키며 살아온 본인을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았느니라! 너는 당장이라도 뭇 호걸들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대죄를 고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병은 말을 하면서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등에 뭔가와 부딪쳤다.
툭.
“어떤 견자(犬子)가 감히 선비의 길을 막느……, 응?”
다리가 풀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던 이병이 뒤를 돌아보았다.
“헉!”
풍채가 좋은 장도윤이 길을 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장도윤이 이병의 멱살을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딱히 무공을 배운 건 아니지만 비실한 이병에 비해 장도윤의 덩치가 두어 배는 더 된다.
장도윤이 장건을 보며 말했다.
“이런 놈에게까지 네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을 거다.”
이병이 발악했다.
“이 돈만 밝히는 천한 상인이 어디…….”
장도윤이 별 말도 없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이병의 눈이 놀라 커졌다. 다급한 나머지 말투가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 이보시오! 마, 말로……!”
장도윤이 눈에 불을 켜고 소리를 질렀다.
“안됐지만 돈만 밝히는 무지렁이 상인 놈은 고결하신 선비의 말 따위 모르오! 받았으니 갚아야 한다는 것만 알지!”
장도윤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살이 붙은 커다란 주먹으로 이병의 얼굴을 힘껏 쳤다.
뻑!
“우아악!”
이병의 얼굴이 돌아가며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손발을 허우적거리면서 어떻게든 장도윤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장도윤은 멱살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대…… 대협! 대협! 제발 이것 좀 놓고…….”
이빨이 부러져 바람이 샌 소리를 내면서도 구걸하는 이병이었으나.
“대협은 무슨……. 본인은 그냥 천한 상인이올시다!”
장도윤은 가차 없이 한 번 더 주먹을 날렸다.
퍼억.
이병은 뒤로 자빠지며 굴렀다.
백학(白鶴)처럼 다려 입은 말끔한 옷이 구겨지고 더러워져 참담한 몰골이었다.
“에이이, 시원하다!”
장도윤은 손을 탁탁 털면서 장건을 바라보았다. 장건이 놀란 표정을 짓자 장도윤이 험험하고 헛기침을 했다.
“상인은 늘 받은 것 이상을 돌려줘야 하는 법이다. 돈이든 빚이든, 이자는 쳐야지.”
장건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감돌았다. 구경꾼들 역시 장도윤의 호쾌한 성격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이병은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악에 받혀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끝날 줄 아느냐!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너희 놈들은 다…….”
그런데 이병의 말처럼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장도윤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힘이 이병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올렸다.
“허, 헉! 또 누구냐!”
이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랑이 같은 눈으로 원호가 이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원호는 겨우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이병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린 것이다.
“아까 뭐라고 했지?”
이병은 상대가 소림의 고승인 것을 알고 마구 입을 놀려댔다.
“대, 대사! 대사께서는 명망 있는 승려이시온데 어찌 저 같은 선비를 핍박하려는 것이오!”
원호가 입술을 이죽이며 다시 묻는다.
“명망이고 나발이고, 아까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내가 언제 뭐라고 했…….”
“족보도 없는 주먹질이라고?”
이병의 머리가 재빨리 회전했다.
‘아차!’
소년에게 했던 말이 이 소림의 스님을 화나게 한 모양이다.
‘그것이 소림의 무공!’
삼류 문파라도 자파의 무공을 보물처럼 여기는 마당에 소림처럼 자부심 높은 문파의 무공을 두고 그런 소릴 했으니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나, 나는 그것이 소림의 무공인 줄 모르고…….”
이병이 급하게 사과를 하려 했으나, 이미 원호는 이병의 변명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네놈이 감히 대소림의 무공을 짧은 혀로 농락하려 든 것이더냐!”
장건이 문각의 무공을 복원하여 한창 감동하고 있던 원호였다. 그런 와중에 이병의 말은 엄청난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대, 대사! 그게 아니올시다!”
원호는 그대로 이병에게 분노를 쏟았다.
“시끄럽다! 네놈이 말한 족보도 없는 주먹질이 뭔지 보여주마!”
원호는 길게 주먹을 뒤로 뺐다가 그대로 이병의 안면에 시원하게 꽂아 넣었다.
뽀각.
내공은 쓰지도 않았는데 워낙 오랜 세월 수련을 한 주먹이라 한 방에 이병의 코가 주저앉고 이빨이 몇 개나 부러져 튀어 나갔다.
“끄윽!”
원호는 밀쳐내듯 이병을 집어 던졌다.
이병은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개구리처럼 배를 까뒤집고 엎어져 팔다리를 바르르 떨었다.
“흥!”
코웃음을 친 원호는 곧 반장을 했다.
“나무아미타불.”
불호를 외울 때의 어조는 마치 득도한 고승처럼 나직하고 엄숙해서, 방금 전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장건과 장도윤은 물론이고 사람들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
“쿡…….”
남궁상은 자신의 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
늘 무표정했던 남궁지의 얼굴 근육이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하하하!”
사람들의 눈길이 남궁지와 남궁상을 향했다.
모두가 말을 잃은 와중에 까르륵 웃어대는 남궁지 때문에 남궁상은 적이 당황했다.
“그, 그만 웃지 못하겠느냐? 이게 어디 웃을 일이라고!”
하지만 남궁지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배를 잡고 마구 웃어댔다.
“꺄아하하하하!”
눈물까지 찔끔 흘려댄다.
‘진짜 미치겠구나. 집안 어른들은 대체 왜 이런 정신 나간 애를 데려 가라고 해서…….’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 남궁상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궁지가 웃음을 멈추고 장건을 바라보았다.
남궁지의 웃음소리 때문에 장건 역시 남궁지를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남궁지는 장건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남궁지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소란은 끝났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길바닥 위에서 쓰러져 있는 백여 명의 청년들도 평온하고 나른한 얼굴로 내리쬐는 햇살을 즐기며 잠든 듯했다.
물론 거기에는 강호제일미 백리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도 팔다리를 쭉 뻗은 채 자신의 집인듯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 ☆ ☆
불목하니 노인, 문원은 아주 멀찍이서 그 같은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늘 사람들의 이목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문원인 까닭에 그에게는 거의 유일무이한 대화 상대가 바로 장건이었다.
“사형…….”
문원의 노안에 어스름히 물기가 맺힌다.
“사형의 분신이나 다름없던 무공이 나처럼 잊혀질까 그렇게 안타까웠는데…… 저 아이가 결국 해냈수.”
문원은 나이도 잊고 눈물을 훔쳐냈다. 그래도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다.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보나 보오. 저 아이가 뭔가 하나는 해줄 것 같더라니까. 아, 저 녀석이 소림에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이제 누가 소림을 우습게보겠소?”
문원은 코까지 팽 풀었다.
“이 질긴 목숨이 왜 안 끊어지나 했더니만 이런 광경을 보라고 붙어 있었나 봅니다.”
문원은 눈물 콧물을 다 닦고 뒷짐을 지었다.
중천에 뜬 해가 소림 본산을 찬연히 비춘다.
“사형……. 나도 이제 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사형께서도 이제 마음 푹 놓고 쉬시구려.”
세월의 무게와 회한이 담긴 문원의 혼잣말이 아스라한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