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54
제 5 장 혼인은 과연 인륜지대사요
소림의 정문에서 일어난 대사건을 본 뭇 중인(衆人)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소림의 승려들이 쓰러진 백여 명의 청년들을 경내로 옮기고 상황이 거진 정리된 후에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겨우 열댓 살이나 되어 보일까 말까 한 소년이 건장한 청년 백여 명을 상대로, 그것도 철비각 종유라는 손꼽는 고수까지 덤으로 끼워서 쓰러뜨린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건이 누구인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청성일검 풍진의 검을 받은 아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들의 머리에 떠올랐던 형상과 장건의 외모가 전혀 달랐던 탓이다.
타고난 무골이라는 건 일반인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야 한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과 먹물을 듬뿍 찍어 짙게 일획(一劃)을 그은 것 같은 용미(龍眉)……. 그런 것들이 그들이 생각한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 하더라도 싹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뭇 여성들을 설레게 하는 남성다운 이목구비에 단단하고 건장한 체격은 어딜 가고, 작고 마른 체격에 평범한 소년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소년을 보고 풍진의 검을 받아냈다는 사실과 연관시키기는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었다.
더구나 소년의 무공은 그들이 알던 일반적인 소림사의 무공과는 전혀 달랐다.
과격할 정도로 강맹하고 절도 있는 동작을 위주로 하는 소림의 무공이 아니었다. 그냥 툭 하고 주먹만 대면 뻥뻥거리며 상대가 나가떨어졌다.
아무리 잘 봐줘도 그런 수법은 내가중수법의 일종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나이에 내공 소모가 심한 내가중수법으로 수십 명을 상대한다는 것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계산을 좋아하는 한 무인은 사람 한 명을 일격에 날려 보내는 데 필요한 내공을 따져보았을 때, 백 명을 상대했다면 적어도 내공이 무려 5갑자에 달할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갖은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소년의 정체가 장건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한 작은 문파의 나이 많은 장로에 의해 장건이 사용한 무공이 아무래도 백보신권인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의견도 제시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은 추측이었을 뿐, 사실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소림의 공식적인 발표를 기다렸다.
심지어 몇몇은 대놓고 소림에 항의를 하며 빠른 입장 표명을 촉구했다.
그만큼 장건은 현 강호 최고의 화두였다.
소림으로서는 참으로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 ☆ ☆
급한 대로 마련된 지객실의 방 안에서, 장도윤은 탁자 하나를 두고 건너 앉아 있는 장건을 가만히 보았다.
8년 전, 장도윤이 기억하고 있던 아들이 아니었다. 아직은 아이 티를 채 벗지 못했으나 그래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장도윤은 장건이 약간 왜소해 보이는 것에 가슴이 아팠다. 아무래도 절이다 보니 육식을 할 수 없어 그런 모양이다.
“어디 아픈 덴 없고?”
“네. 괜찮아요.”
장건은 쑥스러워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저기를 베이고 다쳤지만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장건의 몸은 스스로를 빠르게 회복시키고 있었다.
“흠흠.”
장도윤이 괜한 헛기침을 했다.
8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 대면한 부자지간이었다. 약간의 어색함은 있었으나 마음까지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나 장도윤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벌어졌던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스러운 것이다.
사실, 장건이 천하제일 문파인 소림에서 무공을 배운다고 했을 때 이런 결과까지는 바라지 않았었다. 그저 무공을 배워 건강해지고 소림의 간판을 달아 덕이나 좀 볼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속가 제자라는 신분이 어떤 문파에서나 그렇듯 딱히 대접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장도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장건은 상인이라기보다는 무인에 가까웠다. 아니, 완벽한 무인이었다. 그것도 장도윤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의 무공을 배워서 말이다. 더구나 장건을 위해 배분이 높아 보이는 승려-원호-가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장가장이 상인의 가문이 아니라 무가였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나 장도윤은 무림의 생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그게 더 걱정되었다.
칼끝에 목숨을 두고 사는 무림인들이었다. 평범한 민초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작은 원한을 가슴에 품었다가 몇 대에 걸쳐 복수를 하기도 한다.
그런 세계에 하필 독자인 장건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장도윤은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부인이 알면 기겁할 텐데…….’
8년 만에 만난 부자지간 치고는 말이 너무 없어 삭막하기까지 했다.
장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
“응?”
장도윤은 상념에서 깨어나 장건을 보았다.
“이놈아, 다 큰 놈이 아빠가 뭐냐, 아빠가. 아버지라고 불러야지.”
“아버……지……. 으! 이상하다.”
아빠라고 불러본 지도 오래됐으니 아버지란 말은 더더욱 입에 붙지 않았다.
“근데 왜 불렀냐?”
“아니, 말씀이 없으시길래요. 화나셨나 하구요.”
“흠…….”
장도윤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화가 난 게 아니라 너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고 있었단다.”
장건이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제가 무공을 배운 게 싫은 거죠?”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라고는 못하겠구나. 게다가 네 혼인 상대도 모두 무가의 여식들이 아니냐. 이 애비는 가능한 강호의 일에 네가 말려들지 않았으면 했다만.”
장건이 풀이 죽은 표정을 하자 장도윤이 갑자기 껄껄 웃었다.
“기죽을 것 없다. 사실은 이 애비가 잘못한 거지. 네가 소림의 속가 제자가 되는 건 환영했으면서 강호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으면……, 했으니 말이다.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이더냐.”
그제야 장건이 조금 기운을 냈다.
장도윤은 장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다 큰 자식을 애처럼 대할 수는 없다고 애써 참았다.
“그런데 말이다. 무공을 배우니 좋냐?”
장건이 환한 안색으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응. 좋아요. 정말 편해요.”
장건이 말한 ‘편함’은 장도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장건에게 무공은 자신을 지키는 능력이기 이전에 쓸데없는 군더더기 없이 힘을 아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고마운 친구였다.
“네가 무시무시한 칼을 들고 있는 놈들을 뻥뻥 날려 버리는 걸 보면서 이 애비도 실은 피가 끓는 듯하더구나. 어찌나 속이 시워어언하던지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장건이 이상하다는 투로 물었다.
“전 아빠한테 혼날 줄 알았는데요?”
“왜?”
“사람을 때리면 안 되잖아요. 나중에 관아에 신고해서 잡혀가면 어떡해요.”
“흥, 그까짓 것 걱정 말거라.”
장도윤은 집단폭행을 당할 뻔했던 비참한 순간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다 그쪽이 먼저 시작한 일이었다. 따지고 보자면 우리가 피해자이니 관부에서도 이해해 줄 거다. 게다가 천하제일 소림사에서 일어난 일이니 소림사에서도 잘 해결해 줄 것이고. 원래 관부에서도 무림인들간의 일은 어지간하면 간섭하지 않으려 드니 말이다.”
장건은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지 복잡한 표정이었다. 장도윤이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은 말이다, 너무 참고만 살아도 안 되는 거야. 사람이 잘해 주면 고마운 걸 모르고 얕보는 사람도 있거든. 예의는 다하되 우습게보이진 말거라. 그 방법이 무력이든 재력이든, 당한 만큼 그대로 돌려주어야 정신을 차리고 ‘아, 내가 잘못했구나’하고 알게 되는 거다.”
장건이 장도윤의 말을 다시 짚었다.
“당한 만큼 말고요. 이자까지 돌려 줘야죠.”
장도윤이 빙그레 웃었다. 사람을 때리기 싫어하면서도 상인의 본분을 잊지 않는 장건을 보니 참으로 곧게 잘 컸다 생각이 든다.
장건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들었을 때에는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직접 만나고 보니 그런 걱정들이 다 부질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잘 알아들었구나. 그럼 걱정할 필요 없다. 다친 사람들은 내가 소림사의 스님들과 잘 얘기해서 해결하마.”
장도윤이 자신의 넓은 가슴을 탕 하고 쳤다.
“아! 여차하면 이 애비가 치료비 물어주면 되지. 그깟 백 명? 아예 산 아래에 커다란 의방(醫房)을 하나 지어 버려서 거기서 다 치료하라고 해야겠다. 그러면 지들이 어쩔 거야?”
검소하게 살아왔던 장건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배포였다. 장건도 잠깐 잊고 있었다. 중원에서 수위를 다투는 거대한 상단인 진상, 그 중에서도 운성방의 재력은 일반인이 넘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눈썹을 모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그러셔도 돼요. 제가 때린 사람 중에는 다친 사람 없어요. 왜 안 써도 되는 괜한 돈을 써요.”
“뭐라고?”
장도윤은 장건의 얘기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사람이 하늘을 뻥뻥 날아다닐 정도로 맞았는데 다친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그, 그럼 다 죽은 거냐?”
엄청난 배포의 장도윤도 지금 순간에는 아찔했다.
장건이 웃으면서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럴 리가요. 그냥 며칠 쉬면 다 멀쩡히 일어날 걸요?”
“허……. 무슨 점혈인가 하는 그 무공이었나 보구나.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움직이지 못한다는 그…….”
“그게 아니구요. 몸을 지키는 기운의 조화가 깨져서 그런 거예요. 그건 며칠 쉬면 저절로 회복이 되는 거거든요.”
어차피 장도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저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허어, 거참. 신기한 무공이네. 나중에 우리 집 무사들에게도 좀 가르쳐 주거라. 사람을 다치지 않게 때려눕힌다니……. 정말 소림사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대자대비한 무공이구나.”
장건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무공을 가르쳐 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장도윤은 흐뭇해졌다.
“널 이렇게 번듯하게 키워주신 소림사에 내 크게 보답을 해야겠다. 급히 오느라 별로 준비를 못했는데 이보다 몇 배는 더 시주를 해야겠어.”
그러나 말이 준비를 못한 것이지, 장도윤이 끌고 온 수레에는 고가의 약재와 비단 등이 잔뜩 있었다. 남들에게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재화를 챙겨온 다른 사람들과는 단위가 달랐다.
도감승 굉정이 장도윤의 희사 품목을 보면서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으니, 실로 대단한 양이 아닐 수 없었다.
장건은 장도윤의 말에 잠시 움찔했다. 아끼는 것은 장건에게 본능과도 같은 일이라 쉬이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바, 방장 대사님께서 좋아하시겠네요.”
“넌 왜 갑자기 말을 더듬는 거냐?”
“괘, 괜찮아요. 가, 가끔 그냥 이럴 때가 조, 좀 있어요.”
장건은 웃으면서 머리를 긁었다.
장도윤이 ‘녀석……’하고 즐겁게 웃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참, 그런데 말이다.”
“네.”
“저 밖에 있는 처녀들 중에 누가 네 혼인 상대냐?”
장도윤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객실의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장건과 장도윤이 간만의 해후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소림의 승려들이 접근을 막고는 있었지만 시끄러운 소음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혼자서 백 명이 넘는 무인들을 쓰러뜨린 소림의 영웅, 그것도 승려가 아니라 ‘속가!’제자를 본 여인들의 방심(芳心)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아니, 설사 마음이 혹하지 않았더라도 호기심이든 관심이든 생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이렇게 장건과 장도윤이 있는 지객실 밖에 여인들이 몰려든 이유다.
“아! 저기요! 밀지 좀 마요!”
“아얏! 내가 밀고 싶어서 미는 게 아니거든요?”
“진짜 자꾸 밀 거예요?”
“어멋? 누가 날 만지는 거얏!”
온갖 말들이 다 들렸다.
소림의 승려들은 난감해서 어쩔 줄 몰랐다. 여인이라고는 가까이 하기도 어려운 승려들에게 혼기가 찬 여인들이 온갖 꽃내음을 풍기며 밀려드니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손을 대어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냥 얼굴을 붉히면서 ‘아미타불’을 연신 읊조리며 밀려나다가 아예 문 바로 앞까지 밀린 상태였다.
때문에 수십 명이나 되는 여인들이 지객실 바로 앞에서 웅성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아까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여인들이 있으니 남자들이 몰려든 것도 당연한 일, 좁지 않은 지객실 앞마당은 상당한 인파로 바글거리는 중이었다.
장건이 밖의 소음을 신경 쓰며 말했다.
“아까까지는 같이 있긴 했는데요.”
“아, 그럼 들어오라고 해야지. 우리 며늘아기가 될 처녀들을 애비한테 인사는 시켜야 하지 않으냐. 네 엄마는 그냥 빨리 손주가 보고 싶다고 난리더구나.”
“엄마도 참.”
“미리 물어보는 거다만, 그 중에 네가 점찍은 아이는 있고?”
장건은 또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 그러니까 저는요……, 음.”
장도윤은 내심 마음이 놓인다. 이런 착한 아들에게 어떻게 남의 집 여식을 겁탈했다는 둥의 헛소문이 났는지 그게 다 의아하다.
“전 그냥 아빠엄마가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랑 혼인할래요.”
장건의 그 말을 밖에 있던 여인들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귀가 솔깃해지는 말이었을 터다. 여인들은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다음 말을 듣기 위해 더욱 거세게 승려들을 몰아 붙였다.
밖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예측하지 못한 장도윤이 웃으면서 혀를 찼다.
“에이, 쯧쯧.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이 녀석아.”
장도윤은 장건이 기특해서 장난스럽게 머리를 콩 때렸다. 장건은 절로 몸이 반응해서 피할 뻔했지만 가만히 머리를 장도윤의 주먹에 가져다댔다.
“그럼 스님들께 좀 부탁을 해서 들여보내라고…….”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지끈!
방문이 부서지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꺄악!”
“나, 나 살려!”
소림의 승려들이 밀려드는 여인들을 막지 못해 결국 문이 부서진 것이다.
승려들은 여인들의 푹신한 몸들에 파묻혀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마냥 누워 있고 싶은 마음에 여인들을 밀쳐내고 일어날 생각도 못했다.
장도윤은 ‘허허’하고 허탈한 듯 웃었다.
“우리 건이가 이렇게나 인기가 좋았구나. 날 닮아서 그럴 줄은 알았다만.”
“제가요?”
“그럼 저 처녀들이 너 말고 날 보러 왔을까? 아무리 내가 인기가 좀 있어도 그건 소싯적의 얘기지, 녀석아.”
여인의 홍수.
지금 장건이 처한 상황은 딱 그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장건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장도윤은 껄껄대며 마음껏 웃었다.
“일단 넘어진 사람들을 좀 도와야겠다.”
장도윤이 일어서서 여인들을 부축했다.
밀려서 넘어진 여인들과 승려들이 끙끙대며 일어섰다. 그러나 한 번 들어온 여인들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장건과 장도윤의 눈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도 있었고, 좀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어 남은 이들도 있었다.
승려들이 홍조 가득한 얼굴로 여인들을 설득하려 했다.
“여시주들께서는 나가 주십시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승려들은 뭇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원래 남자는 여자들이 많은 곳에서는 눈을 마주치는 것도 힘들어 하는데, 하물며 그들은 승려인 것이다.
‘소림에 언제 이런 적이 있었어야지!’
이제껏 소림에 찾아온 여시주들은 불공을 드리기 위해 경건한 마음으로 조신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승려들도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찾아온 여인들은 다들 불공보다는 다른 데 목적이 있는데다, 아직 스물도 안 된 꽃다운 처녀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조신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소녀 특유의 작은 반항심과 장난기가 집단으로 발동했다고 해도 무방한 사태였다.
장도윤이 또 껄껄 웃었다.
“내버려두시오.”
“하지만…….”
승려들은 한숨을 쉬며 한쪽으로 물러났다.
장도윤이 말했다.
“그래. 소저들 중에서 누가 우리 건이와 혼인을 한다고 했소? 너무 사람이 많아 누가 누군지 모르겠으니 조금만 앞으로 나와 주면 좋겠소이다만.”
그때까지 마음만 졸이고 있던 제갈영은 장도윤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제갈영과 함께 있던 당예도 이리 밀치고 저리 밀쳐지고 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제, 제가……!”
하지만 제갈영이나 당예보다도 먼저 앞으로 나선 소녀가 있었다.
차분하게 길러 내린 새까만 흑발을 뒤로 하고 종종 걸음으로 장도윤의 앞에 나아가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어요. 남궁가의 지라고 해요.”
“응? 남궁가?”
장도윤의 눈이 돌연 크게 떠졌다.
장도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혹시 괄공(适公) 남궁 씨요?”
남궁지가 대답 없이 살짝 끄덕였다.
장도윤은 내색하지 못했지만 깜짝 놀랐다.
안휘의 남궁가라면 팔대 세가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어 가히 강호제일세가로 불릴 만한 곳이다. 게다가 우내십존의 일인인 검왕 남궁호가 있다.
문인들보다야 덜하지만 무인들 역시 상인들을 경시하는 풍조가 강하다. 특히나 전통 있는 무가는 상인들을 업신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장도윤의 재산이 적지 않음에도 실력 있는 무인들을 호위무사로 고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무인들 사이에서도 격이 있어 상인의 돈을 받고 호위 노릇을 하는 무인들을 하류라 보는 탓이다.
장도윤이 오랜 상인 생활의 경험으로 딱 보아하니 남궁지의 외모가 보통이 아니다.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과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은 아담한 키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 얼굴에 별다른 표정이 없어 조금 아쉽지만, 눈도 깜박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으니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허어, 이거 참. 이런 아이라면 남궁가에서도 애지중지할 만한 아이일 터인데.’
무가들 간에도 정략결혼이 성행한다. 남궁지라면 능히 어떤 가문으로 가더라도 이쁨을 받을 만했다.
‘이런 아이가 우리 며느리가 된다?’
장도윤은 굳이 아들의 혼인에 가문의 손익을 따지고 싶지 않았으나, 남궁세가라면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남궁가에서 우리 재산을 탐내나?’
적어도 크게 손해 볼 일은 없다. 강호에서 남궁가의 위세를 등에 업는다면 운성방은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장도윤이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여아가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제가 서방……, 아니, 건 오라버니의 첫째 부인이 될 제갈영이에요.”
장도윤은 소문에 듣던 제갈가의 아이가 바로 앞에 있는 제갈영이라는 걸 알았다.
‘첫째 부인?’
장도윤이 제갈영의 표정을 보아하니 생동감이 넘친다. 장건이 억지로 몸을 탐했다거나 무슨 실수를 했다면 이런 표정이 나올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이 아이가 장건을 좋아해서 스스로 부인이라고 자처하다 보니, 그런 소문이 돈 모양이구나.’
남궁가에 비할 바는 아니나 제갈가 역시 무림에서는 손에 꼽는 알아주는 가문이다. 대대로 지모가 뛰어난 가문이라 황궁에까지 연줄이 닿아 있다. 운이 좋다면 황궁과의 엄청난 거래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앞에 나선 아이 역시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남궁지가 너무 조용하고 표정변화가 없어 차가운 느낌이 든다면, 제갈영은 발랄하고 귀여운 면이 있어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아이다.
‘허어…….’
장도윤은 생각보다 일이 복잡하다는 걸 깨달았다.
소림에 올 때까지만 해도 장건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가 복잡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남궁가와 제갈가, 그 둘은 모두 강호에서는 명망 있는 세가들이다.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면 다른 한쪽은 필히 크게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가문의 명성과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쉽게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해도 골치가 아픈데, 다른 아이가 또다시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천에서 온 당예……라고 합니다.”
당예는 살짝 기세가 죽어 있었다. 장건의 부친을 만나기 전에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으나, 장도윤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많이 위축되었다.
장도윤 같은 화통한 성격의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해코지를 하려 했던 당가에 대해 좋은 생각을 품을 리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장도윤은 연이어 충격을 받아 정신을 놓을 지경이었다.
‘아차! 당가도 있었지!’
사천의 당가는 뒤끝이 지독하기로 유명하다. 남궁가나 제갈가의 혼담을 거절한다면 그나마 대놓고 어쩌지는 못할 테지만, 사천 당가는 그러고도 남을 집안이다.
하루아침에 온 식솔들이 다 해골이 되어 뒹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장도윤의 안색은 점점 죽어간다.
장도윤은 장건이 꽤 센 무공을 배웠다는 정도만 알지, 장건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내로라하는 세가들이 장건의 혼사에 결부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달려든 청년 무인들 백 명을 물리친 거나, 파락호 백 명을 물리친 거나 장도윤에게는 같은 일이었다. 호위무사도 어쩌지 못한 이들을 장건이 보란 듯 해치운 게 다 소림의 대단한 무공을 배워서 당연한 줄 알았다.
‘이거 야단났구나!’
역시나 소림의 속가 제자라는 간판 정도만 다는 게 제일 좋았다. 가뜩이나 무림과 크게 연루되는 것이 좋지 않다 생각한 장도윤에게 이 세 소녀의 존재는 재앙의 덩어리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앞에 좀 비켜봐. 구경만 할 거면 좀 나가줘야 뒷사람이 불편하지 않을 거 아니니? 아…….”
소림의 정문 안으로 들어오면서 창을 빼앗긴 양소은이 투덜거리면서 소녀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왔다. 부친인 양지득의 협박에 못 이겨 어거지로 소림에 온 그녀였으나, 눈치는 있었다.
차후에야 어떻게 되든 지금 나서지 않으면 나중엔 기회조차 얻지 못할 터였다.
장도윤은 어질해진 눈을 들어 양소은을 쳐다보았다.
양소은도 이런 일에 나서서 자신을 소개하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아 뻘쭘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양가장에서 온 양소은이라고 하구요. 음, 나이는 좀 많지만……, 잘 부탁드려요.”
장도윤의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양가장? 제남의 그……?”
“네. 맞아요. 아시는군요?”
“조금 알긴 아오만…….”
“아, 다행이다. 그럼 따로 설명 안 드려도 되겠군요. 여기 나온 애들이 다 쟁쟁한 가문의 딸내미들이라서 전 또 모르시면 어쩌나 걱정을……. 아니, 제가 딱히 걱정한 건 아니구요.”
그러나 장도윤은 양가장의 장주가 사대명창 중 하나라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양가장과 거래하던 동료가 작은 실수를 했는데 그게 하필 남궁가와 관련이 있었다. 당연히 남궁가와 원수지간인데가 성질까지 더러운 양지득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고, 동료 상인은 며칠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았던 것이다.
그래도 무림인이 아니라 일반인이라고 신경을 써서 때렸는지 뼈가 부러지거나 내장은 안 상했는데, 오히려 그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발끝부터 잘근잘근 칼로 다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병석에 누워 눈물을 줄줄 흘리던 동료의 모습을 장도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괜히 무림인들이 다져 버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게 아니더구만. 흑흑……, 잔인한 놈들 같으니……. 크흑흑.”
뒤끝으로 따지자면 당가나 양가장이나 그놈이 그놈이었다.
‘맙소사…….’
장도윤은 눈앞이 노래졌다. 길쭉길쭉하니 시원시원한 몸매와 이목구비를 가진 양소은의 외모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혼인이 아무리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해도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장도윤은 거상(巨商)이다.
한 번에 수만 냥, 수십만 냥의 돈을 주고받기도 하고 연중 수백만 냥 이상의 거래를 한다. 그만큼 담도 크고 배포도 상당하다. 그런 장도윤으로서도 가문의 위기를 느낄 정도로 압박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나둘도 아니고 넷이나 나서자, 다른 소녀들도 서로 눈치를 보다가 너도나도 나선 것이다.
그녀들은 무공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백리연의 추종자들 백 명을 쓰러뜨린 장건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심지어는 손꼽는 고수 종유까지도 장건의 일권을 버티지 못했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오히려 소문이 모자랄 정도야!’
저런 인재를 데려갈 수 있다면 그녀들의 가문이 팔대세가에 합류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알량한 자존심이나 체면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었다.
어차피 남궁가나 제갈가 같은 대단한 가문의 여식들이 있는데 자신들이 어떻게 해보긴 힘들 터였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마는 건데 말 한 마디 해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왜소해서 딱히 매력적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장건에게 반한 소녀들도 있었다. 일부는 장건을 ‘위험한 매력을 가진 남자’라 생각하기도 했다.
곧 이런저런 자신만의 이유를 가진 소녀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서서 자기를 소개했다.
“전 산동에서 온…….”
“제산 황룡장의…….”
“아버님, 처음 뵙겠어요. 저는…….”
성격이 활발하고 자신감 있는 소녀들이 차례대로 나서서 장도윤에게 인사를 건네자, 소심하고 내성적인 소녀들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앞으로 나섰다.
“소녀의 15대 선조께서는 한림학사를 역임하시고…….”
“저희 집은…….”
“저는…….”
서로 먼저 자신을 알리려고 난리다.
장도윤은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어허허…… 허허허허.”
어느 순간부터인가 소녀들이 재잘재잘 내뱉는 말들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황당해진 것은 장도윤만이 아니다.
제갈영과 당예는 기가 막혀서 말문이 다 막혔다.
원래 따지고 보자면 그 둘, 덤으로 남궁지까지 해서 셋 중에 한 명이 결정되어야 했다.
그런데 벌써 스무 명이 넘게 혼담을 위해 왔다며 소개를 하고 난리였다.
‘아니,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건이 오라버니는 내 거야! 너희들이 왜 무슨 자격으로 혼인을 하겠다는 거냐고!’
제갈영과 당예는 순간 마음이라도 맞은 것처럼 남궁지를 째려보았다.
‘아까 저 애, 일부러 막 웃어서 건 오라버니의 시선을 끌었지?’
더구나 가장 먼저 나섬으로써 확실히 장도윤의 머리에 각인을 시켜 주었다. 그 뒤에 나온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존재감이 묻힐 수밖에 없었다.
‘저 계집애! 생긴 건 새초롬하니 숫기도 없게 생겨가지고, 의외의 경쟁자였어!’
제갈영과 당예는 이를 악물었다.
앞길이 순탄치는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솔직히 이건 좀 너무하다 싶었다. 그 순간에도 자신을 소개하는 여인들과 소녀들의 행렬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 ☆ ☆
소림으로 들어오면서 숙소를 따로 배정받아 남궁지와 헤어졌던 문사명은 남궁지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여인들과 뭇 남자들이 잔뜩 몰려 있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향했다. 문이 부서져 있는데다 웅성거리기까지 하니 문사명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비키시오!”
문사명은 신법까지 쓰면서 도약하여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쳐 부서진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남궁지는 그곳에서 무슨 시험이라도 받듯 앞에 서 있었다. 딱히 다치거나 큰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남궁 소…….”
반가운 마음에 남궁지에게 말을 건네려 했지만 남궁지는 빤히 문사명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쭉 서 있던, 바깥을 원을 둘러 서 있던 여인들도 같은 눈빛으로 문사명을 보았다.
마치 중요한 밀담을 나누던 도중에 갑자기 끼어들어 말이 뚝 끊긴 듯한 분위기였다.
문사명이 왜 그런지 몰라 당황하다가, 앞 탁자를 끼고 서 있는 장건과 장도윤을 보았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시야까지 흐려져 있던 장도윤이 퀭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또 누구……신가?”
문사명은 ‘아차’싶었다. 그래도 장건과는 구면인데 방에 들어오자마자 남궁지가 아니라 어른인 그의 부친에게 먼저 인사를 했어야 하질 않은가.
‘그래서 남궁 소저가 날 질책하는 눈빛을 보내셨군.’
문사명은 남궁지의 사려 깊음에 다시 한 번 속으로 감탄하면서 포권을 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화산의 문사명이라고 합니다.”
“…….”
그러나 이상하게도 대답이 없다.
문사명이 어색하게 포권을 풀고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도 더 분위기가 요상하다.
뭇 여인들은 물론이고 남자들까지도 문사명을 꺼림칙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왜들 이러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사부와의 수련 때문에 걸레 같던 의복도 갈아입어 말끔하다. 문사명은 왜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장도윤은 절망하듯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는…….”
그리고 주변에 서 있던 여자들이 아우성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남자든 여자든 새치기 말고 줄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