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안개 사이로 드러난 나무들의 형태가, 하천 건너편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곧게 뻗어야 할 줄기는 이리저리 휘고 굽어졌다. 앙상한 가지는 넓게 퍼져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빛을 완전히 가리려는 듯이.
“그것들도 신경 써야지. 이런 곳에 있는 놈들이, 평범할 리 없으니까.”
나지막이 내뱉으며,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천 너머의 풍경이 이상하게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감각이 미세하게 교란되고 어긋나고 있었다.
사방에 자욱한 오염된 마력의 영향일 터였다. 보통 사람은 몇 분만 더 지나도, 이 안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리라.
“타락자라도 숨어 사는 걸까?”
옆에 벗어 뒀던 투구를 집어 들며, 메브가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마법이나 주문 회로 같은 건 느껴지지 않소. 오염된 마력뿐이지.”
“…그렇다면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든 것이겠군.”
“아마도. 내가 볼 땐 이미 물든 정도를 넘어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샬롯을 일별한 이안이 말을 맺었다.
“…마경이 완성되기 직전 같은데.”
“마… 마경이요…? 하지만 그러려면 이 일대가 광기에 완전히 침식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눈을 치켜뜬 필립이 더듬댔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게 아니고서야, 소문이 나기도 전에 마경이 만들어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요….”
“광기가 그만큼 빠르게 번진 모양이지. 잊었나 본데, 변방은 지금 전쟁 중이다.”
덤덤하게 내뱉으며, 이안이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사방이 죽음과 광기로 가득 차 있단 얘기지.”
“그, 그런….”
꺄아아악-
멀리서 터져 나온 괴성에 필립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였다.
필립이 어깨를 들썩이는 가운데, 비명이 메아리치듯 멀리까지 번져나갔다. 신호를 주고받는 것처럼 이어지던 비명이 곧 뚝 끊어졌다.
불길한 적막.
“…이게 뭐건, 우릴 그냥 보내 주진 않겠군요.”
“그렇겠지.”
이안이 턱짓했다.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마차를 멈춰 세웠다. 이안이 말을 그 옆으로 바짝 붙였다.
“받으십시오.”
필립이 재빨리 말을 고정할 끈을 던졌다. 반대쪽으로 다가온 샬롯도, 자신이 탄 말을 옆에 이어 붙였다.
엉성한 사두 마차 같은 형태가 순식간에 완성됐다. 말과 마차가 단단하게 이어진 것을 확인하며,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말을 지켜라. 전부 지키기 힘들다면, 최소한 둘이라도 지켜.”
“가능하면 전부 지켜보겠다.”
샬롯이 송곳니 검을 뽑아 들었다. 이 말들 위를 자유자재로 타 넘으며 싸울 수 있는 건, 이안 이외에는 그녀밖에 없었다.
“너도 샬롯을 도와 마차를 지켜라, 필립.”
마차에서 내린 메브가 덧붙였다. 그녀는 투구를 고정하며, 안장에서 내리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망령의 비명이었나?”
“내가 듣기론 육성 같았소.”
“다행이군.”
비로소 안면 가리개를 내린 메브가, 몸을 돌려 마차 반대편으로 향했다.
이안은 그녀의 말에 담긴 속뜻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메브는 이제 복수의 대상이 아닌 것들에게는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칼을 잘 다루는 전투 기사에 불과했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적은 상대할 방법이 없으리라.
‘그런 것들은 전부 내 차지겠군….’
생각하는 그때, 나무 바스락대는 소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걸 바람 소리라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산기슭을 타고 뭔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바람 소리는 아까 비명이 그랬듯,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안은 안개 너머로 일렁이기 시작한 불그스름한 안광들을 놓치지 않았다.
“탐색이라니….”
읊조리는 이안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아른거렸다. 샬롯을 돌아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예고 없이 달려 나갔다.
쉬하악-!
그의 신형이 쏜살같이 숲을 내달렸다. 고여 있던 안개가 그의 전신에 맺힌 바람에 밀려나 휘몰아치고, 안광 하나가 삽시에 가까워졌다.
“끼아악-?!”
놈이 당황한 듯 소리쳤다.
소녀 같은 목소리와 달리 아주 역겹게 생긴 마물이었다.
짙은 녹색의 피부. 단춧구멍 같은 눈꺼풀과 충혈된 붉은 눈. 진흙을 대충 뭉친 것 같은 코. 기포가 맺힌 길쭉한 입술 사이로는 깨진 유리 조각 같은 이빨이 돋아 있었다.
변방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고블린과 아주 흡사한 외모였다.
하지만 이놈의 신장은 놈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컸다. 짧은 다리에 비해 괴상할 정도로 발달한 상체와 기다란 팔까지.
게임에서 본 비슷한 몹을 떠올린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이놈들, 설마…?’
그 와중에도 그의 육체는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수행해 냈다.
콰직-!
발작적으로 팔을 치켜드는 놈의 목덜미에 검이 깊숙이 박혔다. 일반적인 고블린과 다른 검붉은 체액.
“끼… 아악-!”
놈이 피거품 맺힌 신음을 토하며 팔을 뻗었다. 이안의 눈동자에 잿빛 마력이 번쩍였다.
펑-
진공 폭발이 놈의 목덜미와 가슴 한쪽을 찢어발기며 소리 없이 터져 나왔다.
“그르륵- 그륵-!”
튕겨 나간 놈이 바닥을 구르며 가래 끓는 듯한 숨소리를 냈다. 이안은 쓰러져 바둥대는 놈에게 달려들어, 다시 검을 내리찍었다.
머리를 몇 차례 찍히고 나서야, 놈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고블린의 그것과 같은 역한 누린내. 붉은 체액과 질긴 생명력.
‘이것들, 정말 혼혈 고블린인가…?’
아직 나올 때가 아닐 텐데?
다시 한번 같은 의문을 떠올리던 이안이, 불현듯 바닥을 굴렀다.
퍼엉-!
날아든 불덩이가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폭발했다. 맞았다 하더라도 좀 뜨거울 뿐, 타 죽지는 않았을 것 같은 화력이었다.
‘마법을 쓰는 걸 보면 맞는 것도 같은데…. 마법은 또 왜 이렇게 엉성해?’
바닥을 구른 이안이, 저만치의 나무 아래에서 손을 내뻗고 있는 고블린을 눈에 담았다.
이번에는 머리가 거대한 놈이었다.
팔다리는 방금 죽인 놈보다 훨씬 짧았다. 그래도 일반적인 고블린보다 크긴 했지만, 머리 크기를 생각하면 균형이 맞지 않았다.
‘생긴 건 왜 이렇게 제멋대로고.’
빠각-!
생각하며 달려간 이안이, 놈의 머리통을 걷어차 넘어뜨렸다. 당황한 듯 비명도 지르지 못한 놈의 몸 위로, 이안이 무릎을 내리찍었다.
“끼아아악-!”
놈이 비로소 아이 같은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그대로 머리통 한복판에 떨어진 검날에 비로소 조용해졌다. 이안은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뇌수와 체액이 터져 나올 때까지 몇 번 더 검을 내리찍었다.
끼아악-! 끼악-!
이제야 먼저 습격당했음을 깨달은 듯, 사방에서 비명이 번졌다.
‘이 정도면 혼혈보다는 돌연변이에 가까운 거 아닌가.’
이안은 곧바로 다시 몸을 날렸다.
오른쪽 반신만 유독 거대하게 발달한 놈을 향해 달려가는 이안의 뇌리로, 게임에서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혼혈 고블린과 변종 코볼트는, 마경 천지가 된 3챕터의 변방 지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마물이었다.
흔하다고 해서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마경 안에선 특히.
놈들은 덩치에 걸맞게 호전적이고, 무리를 형성해서 움직였다. 몇몇 놈들은 마법을 다루기까지 했다.
한 놈을 건드리면 순식간에 수십 마리가 몰려들어서, 결국은 게임 오버 화면을 봐야 했다.
마경 어딘가에 존재하는 우두머리를 죽여 달라는 퀘스트는, 당연히 클리어하지 못했었다.
그때의 그는, 놈들을 마경 밖으로 유인해 잡는 게 고작이었다.
꽈앙-!
하지만 지금 이 혼혈 고블린들은 그때보다 훨씬 약했다. 그가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랬다.
거기다 외형적으로도 엉망진창이었다.
혼혈 고블린이 내리친 주먹을 어렵지 않게 피한 이안은, 잠시 놈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오른쪽 반신만 비대하게 발달한 놈은, 균형이 잘 맞지 않는지 비척대며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주먹을 휘두르는 자세도 아주 엉성했다.
‘아직 공허의 광기에 완전히 물들지 않아서 이런 건가…? 그럼, 여기가 이놈들의 시발점일지도.’
아직 마경도 완성되지 않은 시점이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비로소 검을 휘둘렀다. 엉거주춤 자세를 다잡던 혼혈 고블린의 옆얼굴로 검이 틀어박혔다.
펑-
이어진 진공 폭발이, 놈의 머리를 아래턱 일부만 남기고 완전히 날려 버렸다.
단면에서 체액을 토해내며 주저앉는 놈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안은 마차 쪽을 돌아보았다.
‘…사람이 늘어나니까, 뒤가 든든하긴 하네.’
메브는 그와 마찬가지로 고블린들에게 돌격한 듯 보이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몇몇 놈들은 샬롯이 상대하고 있었다.
필립도 한 마리의 어깻죽지에 검을 찔러 넣고, 방패 옆면으로 머리를 마구 후려쳐 으깨는 중이었다.
당분간 마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광경.
타탓-
다시 내달리는 이안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그는 한 놈 한 놈 확실하게 죽이는 대신, 달리던 속도 그대로 힘껏 일격을 먹이고는 그대로 다시 달려 나갔다.
‘어쨌거나 이것들은 고블린이니까….’
그의 시선은 주춤대며 마차로 다가가는, 아직 본연의 습성을 다 버리지 못한 혼혈 고블린들의 뒤편을 훑고 있었다.
‘…지휘하는 놈이 있겠지.’
뒤틀린 숲을 내달리며 사방을 오가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산비탈로 이어진 나무 사이에서 멈췄다.
덩치가 커다란 고블린 여럿을 근처에 둔, 유독 균형 잡힌 외형을 가진 고블린을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길고 우람한 팔다리. 흉측하지만 대칭이 맞는 얼굴. 결정적으로, 꽤 그럴듯한 검과 방패까지 들고 있었다.
‘…족장은 아니군. 부족장인가.’
아쉽네,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이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부족장이 그를 돌아보았다.
놈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붉은 눈동자에 자주색이 번져나갔다.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뒤틀린 혼종의 제단.
‘제단…?’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진 것과, 놈이 검을 그를 향해 내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
지금까지와는 다른 굵직한 포효화 함께, 안개가 물결칠 정도의 충격파가 숲 너머에서 터져 나왔다.
“……?!”
고블린 한 마리와 뒤엉켜 놈의 옆구리에 검을 찔러 넣던 필립이 눈을 치켜떴다. 고블린의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신음이 뚝 끊어졌다. 동시에 방패 위를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졌다.
필립은 충격파가 터져 나온 방향을 응시하는 고블린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놈의 붉은 눈 한복판에 자주색이 잉크처럼 번지고 있었다.
“끼아악-!”
곧이어 소리친 놈이 발작적으로 필립을 밀쳐냈다. 검날이 속을 헤집으며 빠져나가서, 놈의 옆구리에 체액이 철철 흘러내렸다.
타타탓-
하지만 놈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그대로 달려나갔다. 밀려난 필립이 자세를 다잡기도 전이었다.
“엥…?”
뒤늦게 고개를 기울인 필립이,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돌렸다. 안개를 헤치고 달려가는 고블린들의 모습이 유령처럼 아른거렸다.
“이안 나리께서… 뭔가 하셨군요.”
붉은 체액을 뒤집어쓴 채 우두커니 선 샬롯에게 다가간 필립이 이윽고 내뱉었다. 샬롯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에 묻은 피를 탁 털어냈다.
필립은 마차 주위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눈에 담았다.
그가 세 마리 째의 고블린을 겨우 상대하는 동안, 샬롯은 그 두 배가 넘게 쓰러뜨렸다.
물론 필립이 주목한 건 놈들의 숫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피부색이나 면상은 고블린 같은데….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들어 변이된 걸까요.”
“글쎄. 잘 모르겠군.”
입에 들어간 체액을 탁 뱉으며, 샬롯이 덧붙였다.
“고블린 같은 냄새가 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피 맛은….”
“피 맛은, 뭐요?”
필립이 되물은 그때였다.
콰아아-!
안개를 뚫고 샛노란 불기둥이 일순간 솟구쳤다. 아까 충격파가 터져 나온 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고블린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진 것도 잠시.
“……?!”
뒤이어 번진 불길이 물결처럼 넘실댔다. 몇십 미터는 떨어진 거리임에도 열기가 전해졌다. 멍하니 바라보던 필립이 뒤늦게 탄식했다.
“정말이지… 대단하군요….”
이안이 펼친 마법이 분명했다.
이만한 재주가 있다면 굳이 용병으로 살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당연한 생각이 새삼스레 뒤를 이었다.
아무리 마력의 황혼기라도, 어디서든 한 자리 차지하고 눌러 앉는 건 일도 아니리라.
심지어 이안은 검까지 잘 다뤘다.
옛날 이야기에나 등장할 법한 마검사인 것이다.
바꿔 말하면, 두 분야에 모두 두각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였다.
그걸 해내고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신, 변방의 산속에서 마물과 맞서는 삶을 택한 이안에 대한 경외심이 새삼 차올랐다.
“역시, 이안이 괴물들을 불러들일 방법을 찾은 거였군….”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필립이 비로소 뒤를 돌아 보았다. 전신이 붉게 물든 그녀가 마차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리,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그래. 내 피가 아니니 염려 말거라.”
대답하며 안면 가리개를 올린 메브가, 불길이 잦아드는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고블린들의 비명은 어느새 전혀 들리지 않았다.
숲에 불이 옮겨 붙지도 않았다.
나무들은 그저 매캐한 연기만 자욱하게 뿜어댔다. 순식간에 다시 밀려들기 시작한 안개가, 연기와 뒤섞여 사방을 잿빛으로 물들였다.
필립이 중얼댔다.
“끝난… 걸까요.”
“글쎄. 내가 아는 이안이라면 마물들의 소굴을 찾으러 갔을 것 같구나.”
“그럼, 따라갈 준비를 하시죠.”
필립이 메브와 샬롯을 돌아보았다.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함께 고개를 끄덕이려던 샬롯이 멈칫했다.
“…이안이 내게 마차를 맡겼다. 여긴 내가 지킬 테니, 둘이 가라.”
“그래 준다면-”
“아주 훌륭한 책임감이다만.”
메브의 말을 덤덤한 목소리가 잘랐다. 일행의 고개가 동시에 잿빛 안개 쪽으로 돌아갔다.
낮은 기침을 흘리며, 이안이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