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그… 으으으…!”
“하나… 위대한… 순환을….”
사방에서 권속들의 숨소리와 마력이 담긴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포도송이들이 누런 속살을 뚝뚝 떨어뜨리고, 그럴 때마다 출렁대는 독 안개도 점점 더 자욱해졌다.
파드드드-
안개 속을 헤엄치듯 날아든 날벌레들이 뒤이어 날아든 화살을 맞고 떨어졌다. 화살은 놈들의 두꺼운 갑피나 날개도 꿰뚫었다. 화살촉에 마력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달려! 야옹아! 뒤처지지 마!”
하지만 정작 그 화살을 쏜 테사이아는, 자신이 지금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품에 안은 이안을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 추스르던 샬롯이, 으르렁대며 속도를 높였다.
솨아아아-
권속들보다 안개의 물결이 밀려드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일행의 눈에는 좌우에서 황색 해일이 밀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쨌건, 일행의 질주는 충분히 빨랐다.
저 독의 물결에 휩쓸리기 전에 충분히 수도원의 대문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문 너머에 모여 울부짖는, 저 권속들의 장벽을 뚫을 수만 있다면.
“…….”
적어도 메브는 그럴 수 있다 확신 하는 게 분명했다.
신성을 두른 것도 아니건만. 선두를 내달리는 그녀의 질주는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순환의… 합일을…!”
“워… 어어어억-”
메브를 마주보던 권속들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저마다 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잇몸도 남지 않은 아가리를 딱딱대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이 움직일 때마다 주위로 흐릿한 독 포자가 피어 올랐다.
“필립!”
“예! 나리-!”
몸을 비스듬히 튼 메브가 양손으로 쥔 검을 흉갑 앞까지 바짝 치켜들며 외쳤다. 그 뒤를 따르던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위로 치켜들었다.
슈화아아아-
검날을 타고 솟구친 빛무리가, 그대로 메브의 앞까지 감싸는 빛의 장막을 그려냈다.
곧 장막이 가장 먼저 수도원의 울타리를 넘었다.
치이이이이-
권속들의 몸과 그들이 뿜어낸 독 포자들이 타들어갔다. 놈들은 그런 와중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내뻗은 손을 허우적댔다.
그리고.
콰장창-!
전신 판금 갑옷의 기사가 포탄처럼 놈들을 들이 받았다. 권속 네 다섯을 으스러뜨리며 튕겨낸 메브가 멈추지 않고 양손 검을 힘껏 휘둘렀다.
콰지지지직-!
커다란 호선이 앞에 걸린 모든 것들을 휩쓸었다. 베는 것이 아니라 찢어발기고 터뜨리는 것에 가까웠다. 신성의 장막에 타들어 가던 권속들이 썩은 고깃덩어리처럼 썰려 나갔다.
돌진하는 속도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메브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양손 검이 만들어내는 호선이 무한을 그리며 휘몰아쳤다.
때때로 어깨와 팔꿈치, 강철 주먹이 사정 없이 뻗어 나가 궤적의 빈틈을 매꿨다.
콰직-! 빠가각!
주위에 일렁이던 빛의 장막이 사그라들었음에도 그녀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필립의 눈에는 인간 분쇄기가 따로 없어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성기사의 육체는 기본적으로도 평범한 인간과는 궤를 달리했다. 근육은 훨씬 더 촘촘하고 유연하며, 뼈는 쇠에 버금갈 만큼 단단했다.
“뒤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필립도 뒤처지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메브와 이안에게 배운, 그리고 수많은 반복 훈련과 대련으로 체화된 전투 기술이 있었다. 성물에 담긴 신성의 근원도 그의 육체에 힘을 보텠다.
신성이 맺힌 검이 빈틈을 매꾸려 다가오는 권속들을 찌르고 후려쳤다. 왼손의 원형 방패도 그저 권속들의 손길을 밀어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콰직! 콰직!
제국 강철을 두른 방패 날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둔기나 다름 없었다.
휘두르고 찌르고 후려치는 와중에도, 필립은 때때로 신성의 장막을 넓게 펼쳐 독 포자를 불태우고 일행의 공간을 확보했다.
물론,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공간은 한쪽 측면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캬오오오-!”
이안을 품에 안은 샬롯 역시, 어떻게든 제 몫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팔과 어깨를 온전히 이안을 안전하게 감싸 쥐는 데에만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흉포하게 번쩍였다.
갈기가 거세게 나부끼고, 온몸의 털이 뻣뻣하게 곤두선 채였다.
퍼석-!
일순간 솟구친 그녀의 무릎 보호대가, 다가오는 권속의 머리통을 수박처럼 터뜨렸다.
그대로 몸을 휘돌린 그녀가 반대편 발을 휘둘렀다.
끝부분이 발톱처럼 날카롭게 다듬어진 강철 장화가, 다가오는 권속들을 칼날처럼 할퀴며 지나갔다.
물론 모든 공간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곰팡이에 뒤섞인 권속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저 마구잡이로 샬롯에게 다가들며 손을 내뻗고 아가리를 벌려댔다.
“……!”
몸을 웅크리며 착지한 샬롯의 미간이 구겨졌다. 운 좋게 발길질을 피한 몇몇 권속들이 코앞에서 손을 내뻗고 있었다. 그녀가 품에 안은 이안을 보호하듯 휙 등을 돌릴 찰나.
퍽- 퍼벅-
가장 가까이 다가온 권속들의 머리에 연달아 화살이 틀어박혔다. 머리가 움푹 들어간 놈들이 허우적대며 쓰러지는 사이.
“뭘 봐? 뛰어!”
샬롯의 시선을 받은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씩 웃은 샬롯이 곧바로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화살통에서 두 발의 화살을 뽑아든 테사이아가 득달같이 시선을 돌렸다.
“이안만 멀쩡했어도…!”
그녀가 연달아 활시위를 당겼다. 울타리 위로 솟구친 벌레 두 마리가 균형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일행이 땅에 선 적들만 신경쓸 수 있는 건, 그녀가 있어서였다.
일행의 가장 후미를 달리는 그녀는 전방위적인 지원은 물론, 단 한 마리의 벌레도 일행에게 도달하지 못하게 했다.
쉬악-!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화살은 전혀 빗나가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는 매번 두 개에서 세 개씩의 화살이 연달아 끼워져 있었다. 차례로 발사하는 데에는 눈 깜짝할 사이면 충분했다.
연습할 때에는 제대로 되지 않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테사이아의 얼굴에는 그런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감탄이나 뿌듯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더 빨리! 빨강 머리! 빨리 가!”
어느새 자욱한 독 안개의 물결이 수도원의 담벼락 위로 넘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돌파한 공간이 다시 채워지는 건 물론이고, 밖에서 따라오던 것들도 우글우글 들어서고 있었다.
고블린이나 트롤 따위의 마물들부터 가지각색의 짐승. 찰흙을 대충 주무른 것처럼 이어 붙은 커다란 놈들까지도 서로 먼저 대문을 통과하기 위해 뒤엉켰다.
오히려 그게 놈들의 전진을 느리게 만들고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부분이었지만.
어쨌건, 고작 넷이서 상대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게다가 반대편 저 너머.
“그… 으으….”
“위대한… 합일을….”
언덕 꼭대기, 돌계단 위에 솟은 수도원에서도 여전히 권속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활짝 열린 대문 너머의 부자연스러운 어둠은, 벌써 수십의 권속들을 더 토해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난 안 죽어. 절대로…!”
주문처럼 씹어 뱉으면서도, 테사이아는 멈추지 않고 화살을 쏘아댔다.
눈가의 핏줄이 터질 듯 꿈틀대고 어느새 코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인지하지도 못한 채였다.
콰직-! 빠각!
어쨌건 일행은, 충실하게 포위망을 돌파하고 있었다. 메브는 오로지 저 앞의 수도원만을 바라보며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어느 순간 호흡을 가다듬는 것조차 잊었다. 그저 기계처럼 앞을 가로막는, 한때는 나병 환자와 수도사였을 권속들을 베고 또 벨뿐.
그런 그녀의 노력은 착실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느새 앞을 가로막는 권속들의 끝이 보였다.
건물 사이나 수도원의 대문 너머에서 빠르게 걸어 나오는 것들의 숫자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쿠… 구구구구…
활짝 열려 있던 본원의 대문이 닫히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문을 닫는 이는 없었지만, 육중한 나무 문이 스스로 움직여 그 너머의 어둠을 가렸다.
-큭큭큭큭….
메브의 뇌리로, 아주 낮고 부드러운 웃음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안면 가리개 사이의 녹색 눈동자에 차가운 분노가 타올랐다.
“—-!”
조금씩 느려지던 메브의 움직임이 다시 빨라졌다. 그녀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고 찌르고 후려치며, 말 그대로 온몸을 흉기처럼 휘둘렀다.
콰지직-!
그렇게 마침내, 그녀는 앞을 가로막는 권속의 장벽을 뚫어냈다.
하지만 그리고도 곧바로 달려가지 않고, 주위의 권속들을 베어 넘기며 공간을 확보했다.
빠각-
불그스름하게 변색 되던 양손 검이 기어코 부서졌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반 토막난 검을 계속 휘둘렀다.
“나리! 달리십시오! 다들 달려요!”
필립의 외침이 터져 나온 순간, 메브는 비로소 굳게 닫힌 대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안을 품에 안은 샬롯이 뒤따라 포위망을 돌파했다.
포자와 핏물을 머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필립이 고개를 돌렸다.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온 힘을 다해 외치며, 그가 빛을 머금은 검을 내뻗었다.
눈부시게 피어오른 빛의 장벽이 넘실대는 독 안개와 그 너머의 권속들을 불태웠다.
상반신만 뒤로 돌려 연달아 화살을 쏘아대던 테사이아가 장벽을 뚫고 지나쳤다.
그녀가 코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필립을 돌아보았다.
“고마워 주근깨-!”
“인사는 나중에. 뛰십쇼!”
테사이아는 이미 필립을 두고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길을 막던 빛의 장벽이 일순간 휘청대듯 깜빡였다. 최대한 버티던 필립도 이윽고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행과 권속들의 거리는 충분히 여유가 생겼다.
넘실대며 밀려드는 독 안개의 물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필립의 시선이 아치를 그리며 솟은 수도원 건물로 향했다.
평범한 교회 정도의 크기였지만, 내부도 그렇지는 않은 게 분명했다.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건물을 중심으로 시야가 왜곡되는 게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닫기만 한다면, 권속과 독 안개로부터 도망칠 시간을 더 벌 수 있으리라.
“문! 문 여십시오!”
아직도 대문이 닫혀있다는 걸 깨달은 필립이 계단에 발을 들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메브가 힘껏 당기고 있음에도 그랬다.
이안을 대문 옆의 움푹 들어간 벽면에 조심스럽게 기대 놓은 샬롯도 합류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뭐해? 안 열어?”
날아드는 벌레들을 연신 쏴 맞추던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샬롯과 함께 안간힘을 쓰던 메브가, 이윽고 폐가 터질 듯 숨을 몰아쉬며 내뱉었다.
“안 열린다….”
“뭐라고…?!”
테사이아가 홱 뒤를 돌아보는 가운데, 계단을 다 오른 필립이 육중하게 솟은 문 앞으로 다가갔다.
검을 내팽개친 그가 문을 힘껏 밀고 당겨보고는, 이내 문에 기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제기랄, 정말 안 열리는군요.”
“그럼 어떻게 해! 이제 도망칠 곳도 없다고!”
소리치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 테사이아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화살도 없고!”
그녀가 손에 든 활을 짜증스럽게 계단 너머로 던져버리고는 문 앞으로 달려왔다.
“익…! 이익-!”
그녀가 거의 문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안간힘을 썼다. 물론 코피가 더 심하게 터졌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헛 힘 쓰지 마라… 귀쟁아….”
그녀를 문에서 떼어낸 샬롯이, 계단 너머를 돌아보며 내뱉었다.
“진짜 힘은 저쪽에 써야 할 것 같으니까.”
“어떻게 써, 멍청아! 이안. 이안? 눈 좀 떠봐! 이안?”
소리친 테사이아가 바닥을 기듯이 이안에게 다가갔다.
미동도 없는 그의 뺨을 찰싹찰싹 친 것도 잠시. 곧 욱, 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그녀가 한 모금의 피를 왈칵 토해냈다.
“어…? 이게…?”
멍하니 중얼대던 그녀가, 이내 비틀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력 탈진 증상이었다. 단시간에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한 것이다.
“쉬고… 있어라. 이안 곁에서.”
그녀의 어깨를 샬롯의 손아귀가 내리눌렀다. 테사이아가 홱 고개를 들었다. 비틀대는 와중에도, 샬롯이 등에 멘 전투 도끼의 고정 끈을 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야. 안 돼. 야옹아.”
테사이아가 손을 뻗어 그녀의 종아리를 움켜쥐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샬롯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온몸에 포자를 뒤집어쓴 건 물론이고, 팔과 목덜미 따위에 긁히고 물린 흔적이 잔뜩이었다.
이안을 보호하며 온몸을 부딪쳐 가며 싸우다 생긴 상처들이었다.
델라 루의 은총으로도 정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터였다.
이미 그녀의 몸속에는 독이 퍼지고 있었다.
“달리 방법이 없군….”
주저앉아 숨만 몰아쉬던 메브가, 힘겹게 다시 일어섰다.
필립은 비로소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면 가리개 탓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할 게 분명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신의 축복을 받았다 해도, 그녀는 결국 인간이었다. 홀로 선두에서 그토록 많은 적을 상대로 쉬지 않고 싸운 여파가 적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이 더러운 공기. 온갖 포자와 독이 가득한 공기도 그들의 체력을 빠른 속도로 앗아가고 있었다.
“…….”
필립은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누런 안개의 물결. 그 사이로 권속들의 실루엣이 그림자처럼 끝도 없이 이어졌다.
다시 고개를 돌린 필립이 이안과 테사이아, 샬롯, 그리고 검조차 쥐지 않은 메브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그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 건 그때였다.
결국, 이 순간이 왔다는.
아겔 란에서 정체 모를 해결사와 함께 흑마법사를 찾아가던 때부터, 언젠가 찾아오리라 직감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필립의 눈에 번지던 떨림은 오히려 잦아들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무의미하게 끝나지는 않아야 했다.
문득 오른손에 온기가 번졌다.
검 자루를 힘껏 움켜쥔 그가, 메브를 바라보았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뭐라고? 너 혼자 말이냐?”
숨을 헐떡대던 메브가 필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필립은 이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을 받은 샬롯이 미간을 좁히는 가운데, 필립이 내뱉었다.
“샬롯. 테사. 나리를 제압해 주십시오. 당장.”
“…그게 무슨 말이냐, 필립? 왜 갑자기-”
“당장이요! 이게 최선입니다! 이안 나리까지 죽게 두실 겁니까?”
필립이 버럭 윽박질렀다.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눈을 치켜떴던 샬롯이, 그대로 몸을 날려 메브를 덮쳤다.
와장창-
기습에 널브러진 메브가 바닥을 나뒹굴고, 샬롯은 삽시에 그녀의 등에 무릎을 내리찍고는 양팔을 등 뒤로 결박했다.
“귀쟁아!”
“응…? 으응!”
눈만 끔뻑이고 있던 테사이아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메브의 다리를 내리눌렀다.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숨만 헐떡이던 메브가 비로소 내뱉었다.
“필립, 너, 설마-”
“반드시 제 복수를 해주십시오, 나리. 이 두 분은 제 부탁을 들어주셨을 뿐이니, 너무 미워하지 마시고요.”
여유 부릴 틈이 없다는 듯 빠르게 내뱉은 필립이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널 진정한 전사로 기억하겠다.”
“주근깨, 너, 설마. 정말…”
샬롯의 말을 듣고서야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떴다. 손을 떼려는 그녀에게, 필립이 검을 내밀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안 돼. 필립? 그러지 말거라. 이거 놔! 당장 놓지 못해? 샬롯!”
헐떡이며 내뱉던 메브가 몸을 들썩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샬롯은 팔을 쥔 손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 주었을 뿐, 오히려 등을 더 무겁게 짓눌렀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독 안개를 힐끔 돌아본 필립이, 메브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제대로 인사 올릴 여유가 없어 아쉽군요.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나리.”
“안 돼! 필립! 멈추거라! 제발…!”
메브의 갈라진 절규를 등진 채, 필립은 계단을 내려갔다.
자욱한 독 안개의 파도. 그리고 계단으로 발을 들이는 권속들의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느리고 선명하게 눈에 담겼다.
‘이게 이안 나리께서 보시는 세상인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필립은 거꾸로 고쳐 쥔 검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검 끝을 계단에 찍으며 눈을 감았다.
반지에 담긴 얼마 남지 않은 신성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게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빛이여….”
눈을 감고 기도문을 읊조리며, 필립은 성물에 담긴 신성력을 모조리 뿜어냈다.
솨아아아-
그의 전신을 중심으로 흐릿한 빛의 장벽이 피어올랐다. 그 위를 독 안개가 뒤덮었다.
필립의 바람과 달리, 그가 펼쳐낸 장벽은 불과 몇 초도 버티지 못했다. 장벽을 깨뜨린 독 안개가 그의 전신을 뒤덮으며 밀려들었다.
하지만 필립은 도망치지도, 기도를 멈추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으로 말미암아 메브가 엄정한 여신의 은총을 받길. 그래서 그녀의 복수가 성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이안이 살아남길. 그래서 언젠가 대륙의 어둠을 모두 몰아내고, 자신과 같은 고아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게 해주길 기원했다.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진심을 다해서.
다음 순간 고통이 사라졌다.
찬란한 빛이 그를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