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55
255화
이어진 말에 이안의 표정이 다시 한번 떨떠름해졌다.
이미 다 말했다니.
하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말하지도 말라고 하진 않았다.
주문쟁이 난쟁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사고의 흐름이었다.
이안이 속으로 세 번째 규칙을 만들어내는 사이.
“복장을 정리하고 내려 와라. 식사를 준비해 두라 이를 테니.”
느긋하게 말한 메브가 다시 식당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필립이 의미심장하게 일행을 돌아보았다.
“올라가시면 또 놀라실 겁니다.”
“…….”
서로를 돌아본 이안과 샬롯, 테사이아가 곧바로 계단으로 발을 들였다.
“…그 짧은 팔다리로,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람.”
2층의 복도로 들어선 테사이아가 중얼댔다.
그러게.
속으로만 읊조린 이안이 헛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2층 복도 역시 아주 깨끗하고 밝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곳곳에 저주와 죽음의 흔적이 가득했건만. 이제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전혀 몰랐는데, 이제보니 꽤 그럴듯한 제국 양식의 저택이었다.
그건 일행들이 묵던 방도 마찬가지였다 장내의 모든 가구와 물품들이 깨끗해진 건 물론이고, 침구류도 각이 딱딱 잡힌 채 있어야 할 위치에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술 냄새는 물론 곰팡내도 나지 않았다.
장비들을 풀어헤치며,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능숙하다더니….”
이건 그런 말로 끝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엘리야는 청소와 정리정돈의 달인, 아니 명인이 분명했다.
어느 순간부터 위생을 거의 포기한 채 살아온 현대인 출신에게는 감동적이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어지르기 미안해지네.”
말과 달리 걸치고 있던 장비들을 허물 벗듯 떨어뜨리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안과 샬롯은 그녀에게 눈총을 주면서, 벗어 놓은 장비를 한 곳에 고이 모셔 두었다.
“백금룡께선 둥지가 깔끔한 걸 좋아하셨나 보군.”
“마법이야. 분명히 뭔가 주문을 쓴 거야.”
방을 나서는 이안의 뒤를 따르며, 샬롯과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이안도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비전 스킬 트리에 청소와 관련된 마법 같은 건 없었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그의 스킬 창에는 없는 주문이 수없이 많지 않던가.
‘문을 닫았다가 열면 알아서 정리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1층으로 내려오던 이안은, 좀 전의 자신과 같은 얼굴로 들어오고 있는 나세르를 발견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셋을 올려다본 나세르가, 쌍꺼풀이 짙은 눈을 잔뜩 치켜뜬 채 내뱉었다.
“저택에, 찬란한 여신의 기적이라도 내렸던 겁니까?”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갔다. 그가 나세르의 앞을 지나치며 대꾸했다.
“그 비슷한 일이 생기긴 했지.”
“대체… 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는 또 뭐고요?”
“우리도 지금 확인하러 가는 길이야. 짝귀.”
녀석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셋의 뒤를 따랐다. 무장을 전혀 하지 않은 터라, 다른 셋과 달리 위층을 들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안은 곧바로 식당으로 들어섰다. 부엌과 이어진, 본래는 시종이나 하인들이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음식 냄새가 한층 더 짙어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거의 다 준비됐으니까.”
부엌 쪽에서 엘리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문 너머로 고개만 내민 채 서로 다른 색의 눈을 빛내며 말한 그녀가, 대답도 듣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안은 군말 없이 원형 식탁의 빈 자리에 앉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맛도 모른 채 허기를 채우기 위한 식사를 했던, 바로 그 식탁이었다.
맨 마지막으로 식당에 들어온 나세르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그거… 혹시 차를 드신 겁니까?”
지금 식탁 위에는 백금룡과 먹다 남긴 술병과, 두 개의 찻잔만이 놓인 상태였다. 놀랍게도 필립 역시 술 대신 차를 마신 모양이었다.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세르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었다.
“루 솔라여, 감사합니다…. 이렇게 문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시는군요. 드디어 문명인으로 되돌아온 느낌이에요.”
요란 떨긴. 이안은 짧게 콧방귀만 뀌었다.
하긴. 저 녀석은 중앙의 대교회에 소속된 정화자였다. 심지어 제국의 귀족 출신이기도 하지 않던가. 본래는 제국 중앙의 문화에 더 익숙할 터였다.
필립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저는 출신이 변변치 않아서 그런지, 차는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 입엔 값싼 맥주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메브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향으로 마시는 것이다, 필립. 차는 머리를 맑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지. 거기다 비싸기까지 하니, 기회가 있을 때 마셔 두는 게 좋아.”
“차 맛을 아실 줄은 몰랐군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차는 마실수록 몸에 좋죠.”
빈자리에 앉으며 대답한 나세르가, 옆의 필립을 돌아보았다.
“필립 경도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대교회에 들게 되실 테니까요. 거기선 음주가 금지되어 있어서, 모든 사제와 기사들이 차만 마십니다.”
“뭐라고요…?”
필립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나세르가 특유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물론 서임을 받으신 후엔 밖에 나가서 술을 드실 수 있지만요. 그래도 차에는 맛을 들여 두시는 게 좋을 걸요. 드시다 보면 분명 눈을 뜨실 겁니다. 차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끝이 없죠. 잎을 어디서 재배했는지, 어떻게 말렸는지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거든요. 제가 특히 좋아하는 건-”
“…여기가 제국이라는 걸, 이런 식으로도 체감하게 될 줄이야.”
이안이 몇 번째인지 모를 헛웃음을 흘리며 읊조렸다.
커피도 없는 세상에서 차라니. 하긴. 게임에서도 있던 아이템이었고, 여긴 그의 고향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차 예찬론을 늘어놓는 나세르에게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이 된 필립이, 이내 이안의 좌우에 앉은 샬롯과 테사이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일은 잘 끝내신 겁니까? 원하던 정보는 얻으셨고, 그 타락한 수인도 처리하셨고요?”
샬롯이 슬며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네가 말하라는 뜻으로 턱만 까딱였다. 출출하고 귀찮았다. 비슷한 심정이었던지 혀를 날름대며 입맛을 다신 샬롯이 내뱉었다.
“팔메르는 죽이지 않았다.”
“예…?”
“그놈은 지금, 우리가 내일 타고 갈 상선의 짐칸에 처박혀 있지.”
“뭐라고요…? 그자를 혼자 두셨다는. 아니, 애초에 왜 살려둔 겁니까?”
필립이 미간을 찌푸리는 그때, 부엌에서 쟁반 하나가 둥둥 뜬 것처럼 다가왔다.
온갖 음식 그릇을 담은 쟁반을 머리 위로 치켜든 엘리야였다.
오래 전, 어딘가의 난쟁이 여급이 선보인 것과 거의 흡사한 묘기였다.
…난쟁이들은 전부 저걸 할 수 있는 건가.
이안이 생각할 찰나, 엘리야가 쟁반 위의 접시들을 식탁 위로 옮기기 시작했다.
“입에 맞으시면 좋겠네요.”
그녀가 일행 사이사이로 접시를 배분하며 말했다. 그녀의 능숙한 움직임을 눈에 담던 이안이 물었다.
“이게 다, 그분을 모시면서 습득한 기술들이야?”
잠시 푸른색과 갈색의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린 엘리야가, 이윽고 되물었다.
“네, 아니오로 대답해야 하는 건가요?”
“그래.”
“그렇다면, 네. …어느 정도는요.”
뭔가 뒷 사연이 더 있는 거겠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못했다. 앞에 놓인 접시들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선 대가리나 육포가 아니라 이름 모를 야채들과 깍둑썰기한 고기가 떠다니는 우윳빛 스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 후추와 소금으로 밑간을 한 게 분명한 구운 고기까지.
전부, 현대인 출신이 그의 눈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들며, 이안이 내뱉었다.
“기술을 제대로 익힌 모양이군.”
눈을 끔뻑인 엘리야의 얼굴에, 조금은 안도한 듯한 미소가 번졌다.
이안이 고기를 써는 사이, 포크로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찍어 든 테사이아가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음침하고 커다란 동굴에서 혼자 외롭게 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그녀의 행동이 당황스러운 듯 눈을 깜빡인 엘리야가, 이윽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둥지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요. 아이들이 사는 곳은 따듯하고, 안락하죠. 심지어 해를 볼 수 있는 지하 숲도 있어요. 우리는 거길 정원이라고 불렀고요.”
“처음부터 혼자였던 건 아니란 거네.”
“확실한 건.”
이안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잘랐다. 그는 고기를 한 조각 씹어 삼키고, 스튜까지 한 입 맛본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은 빵을 찢어 스튜에 찍고 있었다.
“네 요리 실력이 청소 실력만큼 뛰어나다는 거다. 그게 가능한 일일 줄은 몰랐는데.”
물론, 빈말이 아니었다. 엘리야가 만든 음식들은 이 개 같은 세계에서 먹은 그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건 이 요리들에 대한 모욕이었다.
현대인이던 시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맛이었으니까.
맛 좋은 술에 이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라니.
연달아 이어진 호사가, 이제는 오히려 비일상적으로 느껴졌다.
“그래. 정말 대단한 실력이지.”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엘리야의 얼굴에 한 박자 늦게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앞으로도 노력할게요.”
그녀가 처음으로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식탁의 빈 자리를 턱짓했다.
“술잔만 모아서 가져다주고, 너도 앉아라. 바빴을 텐데.”
“네. 그런데 술이 조금 모자란데… 물을 조금 탈까요?”
“많이 타도 괜찮아. 그래도 먹을 만할 테니까.”
“네. 저, 필립 경. 죄송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뻗은 필립이 술병을 내밀었다. 깍듯하게 인사한 엘리야가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이제 보니 예의도 바르군.
이안은 내심 읊조렸다. 깨끗한 실내와 맛있는 음식 덕분이겠지만,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진 느낌이었다. 물론, 그래도 세 번째 규칙에 대해선 알려줄 생각이었다.
필립의 나지막한 웃음이 이어졌다.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은 답을 듣기에 적당한 때가 아닌 것 같군요.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드십시오.”
식사 중인 네 사람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사이 돌아온 엘리야가, 식탁에 술병과 술잔들을 올려놓았다. 어느새 고기 한 덩어리를 다 먹어치운 테사이아가, 스튜 접시를 들며 읊조렸다.
“정말 대단하네. 반 토막을 진작 만났어야 했는데.”
“식재료를 좀 사다 달라고 했을 때는, 이런 결과가 나오리란 상상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술잔을 식탁 중앙에 가지런히 정렬하며 필립이 말을 이었다.
“반성하게 되더군요. 사실 엘리가 식재료 목록을 적은 종이를 내밀었을 때, 역시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나 했거든요.”
“맛대가리 없는 육포나 곰팡이 핀 빵은 다신 못 먹을 것 같아. 물론, 비린내 나는 생선도. 나한텐 그게 최악이었어.”
테사이아가 스튜를 그릇째로 들어 홀짝대며 말했다. 그 모습도 놀랍다는 듯 바라본 엘리야가 덧붙였다.
“적은 재료들로도 맛을 낼 방법을 고민해 볼게요. 남은 향신료도 전부 챙겨갈 생각이거든요.”
쿵, 그 순간 손을 뻗은 이안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엘리야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이안이 고기를 우물대며 덧붙였다.
“챙긴 재료들은 전부 이 안에 넣어 둬라. 내가 안전하게 보관해줄 테니까.”
그 쓰레기 같은 보존 식량을 맛있게 만들어 준다는데, 이보다 더한 도움도 줄 수 있었다.
눈을 깜빡인 엘리야가 말했다.
“어떻게 하신 거죠? 마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는 데요. 이건 어디서 나온 거예요? 마도구인가요?”
“…글쎄.”
한 번에 질문 네 개라니. 빵 조각을 스튜에 깊이 적시며 이안이 낮게 웃음 지었다. 엘리야가 화들짝 덧붙였다.
“죄송해요. 두 번째 규칙을 잠시 깜빡 했어요. 너무 놀라서 그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럼… 대답해 주시는 건가요?”
“아니. 이건 일종의 영업 비밀 같은 거거든.”
사실은 나도 원리를 전혀 모르는 거지만.
속으로 덧붙인 이안이 축축해진 빵을 입에 넣었다.
아직 음식이 남은 건 그와 나세르 뿐이었다. 샬롯과 테사이아의 그릇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맛에 그렇게 감탄하면서도, 허겁지겁 먹어 치우던 습관을 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자는 왜 살려둔 겁니까?”
이윽고 필립이 물었다. 혀를 날름대며 입가를 핥던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살려 달라더군.”
“그래서, 살려 주신 거라고요?”
“그래.”
“그럼 배에는 왜 태우신 겁니까? 설마….”
“내 일을 돕겠다고 했다. 나를 대전사로 섬기면서.”
“…그걸 또, 믿어 주셨고요?”
“그냥 믿진 않았지.”
“…….”
필립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설명을 들을수록 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물로 입을 헹군 테사이아가 웃음 지었다.
“너무 많이 생략했잖아. 이 멍청한 야옹아. 설명을 꼭 이안 처럼 하네.”
지금 날, 욕으로 써먹은 건가?
마지막 고기를 입에 넣으며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필립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그럼 현명한 테사이아 에레노스 공께서 첨언해 주시겠습니까?”
“야옹이네 일족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전혀 몰랐더라고. 싹싹 빌던데. 일족을 위해 싸우다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전에, 야옹이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거든.”
샬롯을 묘한 눈으로 돌아본 테사이아가 말을 이었다.
“수인은 마족의 편에 선 이들조차, 이념이 다른 일족이라 여겼다고. 요정과 달리. 보니까, 반대의 경우에도 통하는 말이더라. 정말 다른 야옹이들을 구하고 싶어 했어.”
“결국, 그 자의 말을 믿어주셨다는 거군요. 타락자의 말을.”
“전 마족의 앞에서 할 말은 아닌걸?”
이어진 테사이아의 말에 필립이 허를 찔린 듯 헛기침했다.
엘리야의 눈이 반짝이는 가운데, 나세르도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전해듯긴 했지만, 일행들의 자세한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테, 테사는 경우가 좀 다르죠.”
“물론 그렇지. 결정적으로, 이안도 그 야옹이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어. 그래서 결정을 내린 거지.”
“…그 말씀을 먼저 해 주셨더라면 더 간단했을 텐데요.”
“그거야 내 마음이지. 그런 의미에서,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말야.”
말을 멈춘 테사이아가 은근한 눈빛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부두로 가는 동안, 그 녀석한테 군도에 대해서는 왜 물어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