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79
279화
“방주 상단이라. 기록된 것보다 마차 수가 적은데. 문제라도 있소?”
의자에 기대앉은 이안은, 심드렁하게 저 앞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아마도 성문을 지키는 경비조장일 터였다.
미드퍼트. 바스무트를 떠난 지 이틀 반나절 만에, 이 성벽이 높은 대도시에 도착한 것이다.
파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차 절반 이상은 미리 보르타로 돌려보내서 그렇소. 지금은 납품할 소량의 포도주만 싣고 있지. 이번에 도시를 방문한 건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기 위해서요. 주문 제작할 물건들이 있는데, 이곳의 장인들이 워낙 기술이 좋잖소.”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도 마차가 네다섯 대는 되는 것 같은데. 머물 곳은 구하셨고?”
“손님용 저택을 며칠 빌릴까 하는데. 남은 집이 있소?”
“운이 좋으시군. 마침 딱 한 채가 남은 상태요.”
“오. 잘됐군. 그렇다면-”
여기도 더럽게 평화롭겠군.
이어지는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시민이나 여행객, 귀족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겠지만.
용병에게 법과 평화는 그다지 달가운 단어가 아니었다.
용병들이 죄다 변방이나 북부로 몰려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딘가에 장기적으로 고용될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라면, 밥을 벌어 먹고사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확실히, 침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계속 이 모양이겠네.’
이안은 중앙에 접어든 이래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이렇게 보면, 게임에서의 주요 사건들을 미리 해결한 게 무작정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볼일을 끝내고 곧바로 제도로 향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지는 않았다.
제도에 발을 들이는 건, 검은 벽이 준동하기 시작한 이후가 되어도 충분했다.
그전까지는 이렇게 계속 떠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아무리 평화롭더라도, 찾다 보면 서브 퀘스트 몇 개쯤은 더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 친구가 안내할 거요. 따라가시오.”
“고맙소. 그 술은, 아껴 드시고.”
그때, 앞에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파엘과 필립이 돌아오고 있었다. 필립이 마부석에 오르는 가운데, 마차 문을 연 파엘이 싱글대며 안으로 들어왔다.
“요 반나절은 심심하셨겠습니다. 제가 없어서.”
엘리야의 건너편에 앉은 그가 넉살 좋게 말했다.
언제 그렇게 어려워했었냐는 듯, 파엘은 이동하는 내내 이안의 마차를 들락거렸다. 상단 인원 대부분을 먼저 돌려보낸 뒤엔. 거의 살다시피 했다.
마차가 출발하는 가운데, 이안이 짧게 웃음 지었다.
“조용해서 좋던데.”
“며칠만 참아 주십시오. 하하. 그런데, 영애께선 뭘 이렇게 열심히 보고 계십니까?”
파엘이 마주 앉은 엘리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마석 등을 옆에 놓은 그녀는, 파엘이 온 것도 모른 채 책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락, 책장을 넘기는 그녀를 돌아본 이안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흑마법사가 탄생하는 과정을 보는 중이랄까.”
“과정이라니요…?”
“목 날아간 놈의 일지거든.”
“……!”
“원래 진작 읽어 볼 생각이었는데. 단주 덕분에 오늘에야 겨우 봤소.”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이자, 눈을 치켜뜬 채 굳어 있던 파엘이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그,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런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계셔서 놀란 겁니다. 아시다시피,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잖습니까.”
목소리를 낮춘 파엘이 쏟아내듯 말했다. 눈을 깜빡인 이안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내 목을? 누가?”
“아… 하, 하긴. 경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 그런 터무니없는 의심을 받지는 않겠군요. 하지만… 그래도 영애께서 이런 불길한 책을 읽으시는 건 좀….”
머쓱하게 대답하면서도, 파엘이 꺼림칙한 눈길로 일지를 바라보았다.
아 그래. 이제 후원자라 이거지.
“검은 벽을 연구하는 건 위험하지. 그러니, 이렇게 미리 조심해야 할 부분들을 알아두게 하는 것이오. 나와 필립이 곁에 있는 동안.”
담담하게 덧붙인 이안이, 파엘을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일지엔 사실, 별로 위험한 내용도 없고.”
파엘은 못 미더운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이안의 아공간에는 저 일지보다 위험한 물건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많지 않던가.
어쨌건, 엘리야는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아마 저 일지의 주인의 최후를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일 터였다.
‘경각심이 더해지긴 하겠지.’
이안의 뇌리로, 몇 시간 전 읽었던 내용들이 스쳐 지나갔다.
저주 술사의 이름은 다리오였다. 그리고 그는 예상대로, 여전히 청색 마탑 소속이었다. 용병으로 활동한 건 연구 재료를 충당하기 위한 부업이었다.
다른 마탑들이 그렇듯, 청색 마탑도 마력의 황혼기를 극복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다리오도 그랬다.
주문 술식의 효율을 높여 적은 양의 마력으로 주문을 완성할 방법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연구는, 당연히 실패로 끝났다.
다음은 마석에 담긴 입자화된 마력을 인체에 축적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물론, 실패.
반복된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는 자연스럽게 선후배들과 같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벽.
검은 벽이 때때로 토해내곤 하는 공허의 마력을 여과할 방법이 있으리란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 이후는 보편적인 수순이었다.
공허의 마력 자체에 매료되고, 흑마법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이다.
아마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인체 실험까지 하고 있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회색 마탑처럼.
생각하며, 이안은 거리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잘 포장된 길을 오가는 행인들은 모두 말끔하고, 걱정이 없어 보였다. 하늘에 점점 짙게 뒤덮이고 있는 구름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혼돈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댔지.’
일지 끝부분의 문구를 떠올린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저들과 달리, 다리오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다른 타락자나 마족들도 마찬가지일지도 몰랐다.
아직은 전조만 보일 뿐이지만. 검은 벽의 침식이 시작되면 모든 게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하기 시작할 터였다.
그때는 중앙의 시민들도 밤과 성벽 밖을 두려워하게 되리라.
“흠흠….”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한 헛기침 소리가 번진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이미 제도에 바스무트의 소식이 전해졌겠군요.”
이어진 파엘의 말에, 이안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파엘이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걱정하는 건 아닙니다. 이안 경께서 증명해 주셨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겠죠.”
“연맹의 이름도 알려지고 있겠군. 단주에게 중요한 건 그거잖소?”
“솔직히, 마냥 기쁘지는 않습니다. 이제야 막 결성된 참이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대형 상단들도 우리 목숨을 대놓고 노리기는 어려워지겠지요. 적어도 한동안은 말입니다.”
그 이상일걸.
속으로만 대꾸하며,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황실이 움직일지 교단이 움직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타락자를 자객으로 고용했다는 좋은 명분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심지어 육각 연맹이라는 대체재까지 생기지 않았는가. 자본을 바탕으로 권력을 휘둘러 대던 상인들의 목줄을 틀어쥐려 할 게 분명했다.
아니면, 그냥 목을 날리고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황금을 챙기거나.
“이 도시에, 강철 금고의 지부가 있다던데.”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에게도 상인의 목을 날리고 손에 넣은 황금이 있지 않던가.
“어디로 가야 있소?”
“대로를 따라 도시 서쪽으로 가면 있을 겁니다. 교회의 반대편이죠. …설마, 미드퍼트에 있으시다던 볼일이 강철 금고였습니까?”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일단은.”
이안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파엘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뜻밖이군요. 은행 같은 곳에는 관심이 없으실 줄 알았는데요.”
“돈에 관심 없는 용병도 있소?”
“놀라서 드린 말씀입니다. 물론 강철 금고를 배정받는 건 돈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긴 합니다만, 그래도 상당한 재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보관 중인 자금의 규모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글쎄. 금화가 천 개도 넘는다던데.”
“처, 천 개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것도 잠시, 이내 파엘의 고개가 슬며시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런데 왜, 전해 들은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그러게. 왜 그럴 것 같소?”
이안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그의 검은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파엘이, 이윽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의뢰 보상으로 받으시기라도 하셨던 모양이군요. 하하…. 오, 마침 거의 다 왔군요. 보십시오.”
과장된 목소리로 말하며 창문을 연 그가 밖을 가리켰다.
“숙소로 쓰게 될 저택입니다.”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안도하는 파엘의 얼굴에 내심 웃음을 삼킨 이안이, 엘리야 쪽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길을 안내하는 경비병이, 나지막한 담장이 딸린 저택의 대문을 열고 있었다.
그 너머로, 작은 마당을 가진 저택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소 빛이 바랬지만, 어쨌든 제법 널찍한 2층 높이의 저택이었다.
마당이 좁긴 해도 마차를 전부 세워둘 수는 있을 정도였고, 집 역시 상단 인원들까지 묵기엔 충분해 보였다.
‘상단을 따라다니니 이런 건 편하네.’
“세 분은 위층의 가장 좋은 방을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안을 슬쩍 곁눈질하며 말 한 파엘이, 이내 은근하게 덧붙였다.
“오늘은 일을 보기에는 시간이 늦었으니, 쉬면서 한잔하시겠습니까? 바스무트에서도 연회가 있긴 했습니다만, 그때는 자축의 의미는 아니었으니까요.”
“그건 단주가 떠나기 전날에 합시다. 오늘은 쉬면서, 미뤘던 다른 일을 처리하고 싶거든.”
“무슨 일을 미루셨는데요?”
“영애에게 보여 드릴 흑마법사를 검열할 생각이오. 느긋하게.”
“흐, 흑마….”
“그보다 위험한 것도 조금 만질 예정이니까, 되도록이면 내 방 근처로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시오. 나야 걱정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혹시 모를 일이잖소?”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입을 뻐끔댄 파엘이, 이윽고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경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저도 포함해서요.”
***
“오셨군요.”
낮. 전실 구석의 탁상 앞에 앉아 있던 파엘이 벌떡 일어섰다.
무장을 완벽하게 갖춘 이안과 필립, 그리고 엘리야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쁘실 줄 알았더니.”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말했다. 파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필요한 일은 오전에 다 끝낸 참입니다. 포도주도 다 넘겼고, 휘장의 제작도 의뢰했고요. 이제 제가 할 건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빈말이 아닌 듯, 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는 이들의 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이안이 그대로 문을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가지 쓰지 않게 옆에서 잘 지켜봐 주시오. 필립 경은 흥정을 잘하는 편이 아니고, 영애는 세상 물정에 어두우시니.”
“솔직히 저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나리께서 유달리 재능이 뛰어나신 거죠.”
태연하게 덧붙인 필립이, 갑주를 걸친 자신의 양팔을 슬쩍 들어 보였다.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갑옷까지 걸치고 나왔지 않습니까.”
이안이 파엘을 돌아보았다.
“보셨겠지. 딱 이런 수준이오.”
너털웃음을 지은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 믿으십시오. 영애의 보호 장구와 보급품을 구매할 예정이라고 하셨었지요?”
“필립 경이 쓸 좋은 검과, 쓸만해 보이는 마도구나 마법 무구도.”
저택을 나서 거리로 들어서면서,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돈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염려 마십시오.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으니까요. 가슴이 묵직합니다. 아주 기분 좋은 묵직함이에요.”
필립이 흉갑을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그의 가슴에는, 이안이 의뢰를 끝내고 받은 금화 전부와 그가 받은 금화까지 들어 있었다.
엘리야의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제도까지 들려 보낼 계획이었다.
“일이 끝나면, 교회 뒤편의 공방 거리로 오시겠습니까? 근처에 용의 날개라는 이름의 주점이 있는데, 음식이 훌륭합니다. 물론, 술도요. 남부에서 올라온 술들을 취급하는데, 열매부터 약초까지 재료가 아주 다양한 편입니다.”
갈림길에서 파엘이 덧붙였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거기서 먹으면 되겠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필립이 안면 가리개 사이로 고개를 갸웃했다.
“강철 금고를 가시는데, 문제가 생길 게 있습니까?”
“강철 금고 자체가 문제야.”
덧붙인 이안이, 엘리야에게 잘 다녀오라는 눈짓을 보내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걸음이 조금 느긋해진 건, 일행들과 찢어진 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역시, 혼자가 속 편하긴 하네.’
미드퍼트는 현대인인 그의 눈에도 도시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크고 작은 건물들과 대로 사이사이로 이어진 골목길. 나쁘지 않은 냄새. 길가에 늘어선 가판과,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복장뿐 아니라 종족도 다양했다. 요정은 물론이고 코나 송곳니에 금장식을 건 오크들도 있었고, 한 명뿐이지만 수인도 보였다.
‘대륙의 모든 도시가 이 정도 수준만 돼도, 훨씬 살기 편할 텐데.’
이안이 보기에, 중앙의 도시들은 교통의 요지 따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게 무의미했다. 모든 도시가 저마다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거미줄처럼 이어진 길의 교차 지점에 위치했다.
제국이 대륙의 패권을 쥘 수 있었던 건, 지형적인 이점뿐만 아니라 그걸 제대로 활용한 방향성에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 세계가 현실이 되었다는 실감을 하는 건 이런 순간들이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선 말도 안 되는 것투성이인 세상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느끼게 되는 순간.
‘…설득력은 개뿔.’
거리 저 너머의 건물을 눈에 담은 이안이 입맛을 다셨다.
회백색의 직사각형에 가까운 건물이었다. 활짝 열린 대문 위에는, 금괴를 움켜쥔 강철 손의 조각상이 솟아 있었다.
강철 금고. 방금까지와는 반대로, 이 세계가 게임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광경이었다.
심지어 이안의 기억과도 흡사했다. 그때는 다른 지부였건만.
‘죄다 똑같이 짓는 건가.’
생각하며 아공간에서 금고 열쇠를 꺼낸 이안은, 장갑을 벗은 왼손 중지에 깊숙이 끼워 넣으며 걸음을 옮겼다.
활짝 열린 문 옆에는 정복 차림의 덩치 큰 오크가 서 있었다.
“…….”
이안이 내민 반지를 확인한 그가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삭막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고풍스럽게 장식된 복도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아주 고요해서, 발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역시, 게임에서 본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광경이었다. 강철 금고는 모든 지부를 통일성 있게 구성한 모양이었다.
하긴.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서 신뢰감을 느끼는 법이었다.
물론, 겉모습만 비슷한 것은 아닐 터였다.
‘내가 거쳐야 할 절차도 비슷하겠지. 더 개 같아졌거나….’
통로는 목조 칸막이로 완벽하게 분리된 세 개의 창구로 나뉘었다.
각 창구 중앙의 커다란 책상 너머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인간이 한 명씩 앉아 있었다.
그들 뒤편의 벽면에는 닫힌 문이 하나씩 있었고, 그 옆에는 정복 차림의 오크들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황색 눈동자만 움직여 이안의 움직임을 좇았다.
이안은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정면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건너편에 앉은 직원이 미소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용무로 방문하셨습니까?”
그린 듯한 미소를 짓는 그를 바라보며, 이안이 담담하게 내뱉었다.
“돈을 찾으러 왔소.”
그가 내민 왼손의 열쇠를 확인한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의 눈짓에, 뒤에 서 있던 오크가 앞으로 나섰다. 몸을 숙인 그가, 책상 아래에 양손을 넣고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누런 팔뚝에 근육과 힘줄이 돋고, 위로 솟은 엄니 끝에 달린 금 사슬이 흔들렸다.
꾸웅….
곧 그가 묵직한 금속 상자를 책상 위에 얹었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표면을 덮고 있는, 금고처럼 생긴 정사각형의 상자였다. 내부에 아주 복잡한 마력 회로와 기계 장치가 내장되어 있으리라.
이안 쪽의 단면에는 옆으로 길쭉한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안으로 손을 넣어 주십시오.”
선선히 의자에 앉은 이안이 구멍 안으로 왼손을 넣었다.
쿠구구….
곧 상자 내부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뿜어져 나온 마력이 그의 손을 훑고 있었다. 정확히는 열쇠를 훑는 것일 터였다.
철컥, 철컥, 철크럭-
상자 내부에서 수많은 태엽 장치들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안은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게임에선 클릭 한 번으로 끝이었는데….’
아마 이 인식기는 이 세계의 기술력이 총집결된 물건일 터였다.
난쟁이 명인과 세공 명인, 마법사가 여럿 갈려 나갔으리라.
틱. 틱. 틱.
소리는, 직원이 바라보고 있는 쪽의 단면에서도 이어졌다. 아마도 금고에 보관 중인 금액을 표시해 주는 것일 터였다.
“……!”
태엽 돌아가는 소리가 멈출 때마다 직원의 얼굴에 점점 더 큰 놀람이 번졌다. 그의 뒤에 선 오크도, 황색 눈동자를 굴려 상자와 이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뒤이어 상자가 고요해졌다.
“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눈을 깜빡이던 직원이, 한 박자 늦게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그가 더 깍듯해진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찾으시겠습니까, 고객님?”
“전부.”
“예…?”
직원의 미소가 그대로 굳어졌다.
당황이 번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이안이 다시 한번 대답했다.
“전부 찾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