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44
344화
밀드레드가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직접 확인하시는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군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 않습니까?”
“대답한 거랑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피식한 이안이, 성벽 쪽으로 걸어가 슬쩍 주저앉아 버리는 닐라를 일별하며 덧붙였다.
“경이 지금 관문 대장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의외군. 전선에 있을 줄 알았는데.”
밀드레드의 미소가 순간 옅어졌다.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요.”
말투나 눈빛에 은근한 수치심이 묻어났다. 전선으로 보내지지 않은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리라.
물론,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이안은 관문을 열고는 반대편에 대기 중인 두 경비병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상주 병력이 많아 보이진 않던데. 몇이나 있소?”
“병사는 열 명에 불과합니다. 검문과 만약을 대비한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 남은 셈입니다.”
정말 얼마 없군.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새 열린 관문 너머로, 다가오는 야인 병단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두에 기병대. 그리고 짐마차를 중심으로 한 전사들이 그 뒤를 따르는 형태였다.
밀드레드가 낮은 탄성을 흘렸다.
“정말 새로운 병단을 꾸리셨군요. 아니, 저만하면 군단이라 부르기에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소문이 전부 사실이었다니 놀랍군요. …하긴.”
그의 시선이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각하께서 설원 변경백으로 부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습니다.”
“파견직일 뿐이지. 계속 남아서 저들을 다스릴 생각은 없으니까.”
“많은 이들이 서운해 하겠군요. 저들은 특히 그럴 겁니다.”
대답하며, 밀드레드가 관문으로 들어서는 선두의 기병들을 돌아보았다. 관문이 큰 덕분에, 셋씩 나란히 통과하고 있는데도 좌우에 공간이 남았다.
“아는 분이셨소?”
백인장들과 자연스럽게 섞여있던 미구엘이, 이안과 나란히 선 밀드레드를 힐끔대고는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옛 전우라고 할 수 있지.”
“전우…? 아하. 그래. 여기서 함께 싸우셨던 분인가 보군.”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가라.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이오.”
고개를 끄덕인 미구엘이 지나치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한 놈만 남아 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인장들 사이에서 한 명이 옆으로 빠져나왔다. 붉은 바위의 올데르였다. 선수를 빼앗긴 다른 백인장들이 혀를 차며 지나쳤다. 그들의 뒤로 마차를 호위하듯 늘어선 야인 전사들이 이어졌다.
“날이 어두워졌는데, 정말 이대로 바로 떠나시려는 겁니까? 야영지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각하.”
그들을 훑어보던 밀드레드가 말했다.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밤새 걸으면 내일 아침쯤엔 정착지에 도착할 테니까. 휴식은 그때 취할 거요.”
“야간 행군이라니. 병사들의 체력 안배를 잘하셨나 봅니다. 여기까지 며칠이나 걸리셨습니까?”
“내일이면 일주일 째 같은데.”
“…설원지대에서 여기까지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밀드레드의 입이 순간 설핏 벌어졌다.
이윽고 앞을 지나치는 전사들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 그가,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맙소사… 망자 군단보다도 빠르게 내려오셨군요.”
“뭐,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전사들의 면면을 훑던 밀드레드의 얼굴에 감탄이 번졌다.
“역시 야인 전사들은 강인하기 그지없군요.”
추위 속에서 내내 걷기만 했으니 표정이 좋을 리는 없었지만. 지옥 같은 급속 행군을 해 온 이들 치고는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다.
밀드레드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물론 타오르는 여신의 축복 덕분이었다.
전사들과 말들은, 추위도 타지 않고 피로도 거의 느끼지 않는 상태였던 것이다. 수면 시간도 평소의 절반이면 충분했다.
물론 그런 만큼 축복의 지속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겠지만.
어쨌건 전선에 도착할 때까지는 충분히 유지되고도 남을 터였다.
오히려 이안은 남겨 두고 온 성화의 수명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무장만 완벽하게 갖추면, 더할 나위 없이 강한 새로운 군단이 탄생할 게 분명합니다.”
밀드레드가 덧붙인 말에, 슬쩍 입술을 말아 올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군. 다들 실력에 비해 무장이 빈약하지. 그래서 이동하면서 도움을 받고 있소.”
“어떤 도움 말씀이십니까?”
“장벽 요새를 거쳤잖소. 여분의 병장기와 군마를 빌렸지. 병력이 많이 줄었어도, 물자는 늘 여분을 남겨 두잖소.”
이안이 슬며시 밀드레드를 돌아보았다.
“그건 벨리움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
속뜻을 곧바로 눈치챈 듯, 밀드레드가 눈을 깜빡였다. 이안은 조금 더 짙게 미소 지었다. 처음부터 이 얘기를 꺼낼 생각이었는데, 마침 저쪽에서 먼저 꺼내준 것이다.
“맙소사. 정말 하나도 안 변하셨군요. 각하.”
이윽고 밀드레드가 탄식하듯 내뱉었다. 말과 달리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이안과 계약서를 작성하던 옛 기억이 떠오른 것이리라.
“그런데 굳이 이렇게 지원을 받으실 필요가 있으시겠습니까? 전 병력을 무장시킬 만큼도 아닐뿐더러, 대공 전하께서 합당한 물자를 내어 주실 텐데요.”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투 물자는 아무리 많아도 과하지 않은 법이니까.”
…대공만 믿을 생각도 없고.
뒷말은 속으로만 덧붙인 채였다.
물론 그가 보기에도, 울라프 대공이 군수 물자로 장난을 칠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카링기온의 병기고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 쓰면 될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건 대공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안은 그에 대한 신뢰가 아예 없었다. 병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양으로 던지던 작자가 아닌가.
카링기온의 병기고에 저장된 물자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전선의 병력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쓸만한 물건들을 죄다 빼갔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거느린 병력이 가장 소중할 테니까.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병력을 최대한 중무장 시켜둘 생각이었다.
최소한 제국 강철로 만든 무기는 들게 해야, 검은 벽의 광기에 절어진 마물들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저들을 많이 아끼시는군요, 각하.”
밀드레드가 어느새 완전히 지나친 행렬을 돌아보며 읊조렸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덧붙였다.
“병기고를 열어 주겠다는 말로 이해하면 되겠소?”
“물론입니다. 기꺼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인 밀드레드가, 야윈 손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쓸만한 물건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겁니다. 저희가 사용하는 물건들을 제외하고 전부 내어드리겠습니다. 전마도 다섯 필 있습니다. 가져가십시오.”
“훌륭하군. 고맙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저만치에 대기 중이던 올데르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활짝 펼쳤다.
“…….”
씩 미소지은 올데르가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곧 멀어지는 행렬을 따라붙은 그가, 후미의 짐 마차 한 대와 야인 전사 다섯을 이탈시켰다.
“병사들이 안내해 줄겁니다.”
그사이, 경비병들을 불러 간단한 몇 가지 명령을 끝낸 밀드레드가 덧붙였다. 두 경비병을 돌아본 이안이, 다가오는 야인 전사들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안내를 부탁하지.”
“옛!”
척,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한 경비병들이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갔다. 북부의 영웅에게 나름대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것이리라.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물건은 저 친구들이 가져올 거요. 나는 마지막으로 검수해서 분류만 할 거고.”
“예. 그리 하십시오. 각하께선 정말이지, 여전하시군요.”
새삼스러운 눈길로 이안을 바라보며, 밀드레드가 말을 이었다.
“전선으로 가시는데도 조금도 두려워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때도 그러셨듯이요.”
“그럴 리가.”
성벽 계단으로 향하는 야인 전사와 병사들을 눈에 담으며, 이안이 옅은 실소를 흘렸다.
“두렵소. 그때도, 지금도. 그러니까 대비하려는 거지.”
“…각하께서도 그런 감정을 느끼시는군요.”
“대체 왜들 아닐 거라 여기는 건지 모르겠군.”
코웃음을 치는 이안과 달리, 밀드레드는 웃지 않았다. 이안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문득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각하께선 두려움을 무릅쓰고 또다시 전선으로 향하시는데, 저는 이런 후방에나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이안의 입꼬리가 조금 더 말려 올라갔다.
“별걸 다. 기사는 명령에 따르는 게 당연하지.”
“저는 사실… 벨리움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안심했죠.”
밀드레드가 머뭇거리며 덧붙인 말에, 이안은 비로소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막상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며, 밀드레드가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전투를, 또다시 겪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속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다시 발령을 받게 된 걸 지도요.”
고해성사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안은 그제야, 그가 전선으로 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나약한 진심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보다 다소 야윈 것도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고개를 숙인 밀드레드를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툭 내뱉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
밀드레드가 고개를 들어 이안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때 같은 전투를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요.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다들 오해하지만, 그게 진실이오.”
“…….”
밀드레드의 표정은 다소 멍해 보였다. 어쩌면 이안이 질책이라도 해주길 바란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모두가 과거의 끔찍한 기억에서 손쉽게 벗어나고 극복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해서, 그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후방을 지켜야 하는 법이지. 쓸데없는 생각 말고 맡은 일이나 충실히 수행하시오. 밀드레드 경. 정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무덤덤하게 덧붙인 이안이,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간 병사들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가장 좋은 물건들만 골라서 챙겨주든가. 전선의 정보도 아는 대로 털어놓으시고.”
“…….”
눈을 깜빡인 밀드레드의 입꼬리가, 비로소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그러겠습니다. 각하.”
***
“대전사께서 돌아오셨다!”
“새 보급품…!”
“다들 물건에 손대지 말고 기다려! 똑같이 분배할 거니까!”
외침과 함께, 백인장들이 우르르 행렬의 후미로 몰려갔다. 새로 합류한 마차에 실린 보급품들을 나눠 가지기 위해서일 터였다.
백인장들은 휘하의 전사들을 무장시키는 부분에 있어선, 서로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 사이를 거슬러 선두로 나서는 이안을 돌아보며, 미구엘이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
“따라잡는 데 한 시간도 넘게 걸린 것 같은데, 일찍은.”
이안이 실소를 흘렸다.
그의 명령대로, 병단은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정착지가 머지않아서인지, 오히려 더 빠르게 걷고 있었다.
“옛 전우라고 하셨잖소. 물건을 받고 나서도 말씀을 더 나누실 줄 알았소.”
아까 전, 밀드레드와의 대화를 떠올린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뭐, 나눌 말은 다 나눴어.”
“그러시다면 다행이고…. 그래서, 쓸만한 물건은 건지셨소? 영 뭐가 없어 보이던데.”
“아예 없진 않더군.”
물론, 빈말로도 많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장벽 요새가 그랬듯, 벨리움의 병기고에도 제국 강철로 만든 병장기는 몇 개 찾아볼 수 없었다. 전부 전선으로 보낸 것이리라. 어쨌건, 이안은 제국 강철로 만든 병장기는 전부 다 챙겼다.
그가 백인장들이 언쟁을 벌이는 후미를 슬쩍 돌아볼 찰나.
“전선 쪽 소식도, 뭔가 들으신 게 있나요?”
루시아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아무래도 네 예상이 적중한 것 같던데.”
“……! 정말요?”
“그래. 얼마 전에 한 무리의 주문쟁이들이 트라벨가에 들렀다가, 동쪽으로 떠났다는군. 병사들과 함께 말이야.”
루시아의 눈이 번뜩였다.
“적색 마법사들이군요. 대공 전하께서, 적색 마탑을 불러들이는 데에 성공하신 거예요.”
“아마도.”
분명히 뭔가 그만한 대가를 지불했겠지만, 그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고개를 주억거린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분명 몇 명쯤은 카링기온으로도 갔을 거예요. 우리 쪽에는 마법사가 한 명도 없으니까.”
녀석과 달리, 미구엘은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아예 없지는 않다는 뜻이리라. 이안이 그를 슬쩍 노려보는 가운데, 루시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첫 침식 때 큰 혼란이 이어졌던 건 제대로 된 전선이 구축되지 않아서였어요. 실제로 그 뒤로 잃었던 요새를 전부 되찾고, 잔당들도 토벌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고요. 물론, 일부는 마경의 골칫덩어리들로 남았지만.”
고개를 돌린 그녀가, 뒤따르는 전사들을 눈에 담았다.
“대공 전하도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이 합류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실 거예요. 아마 많아야 절반 정도를 생각하고 전력을 배분하셨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합류하면, 카링기온은 오히려 북부에서 가장 단단한 요새가 될 거예요.”
“…글쎄. 침공을 막아 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하면 좋겠네.”
이안이 심드렁하게 읊조렸다. 그를 돌아본 루시아가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도 불안하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뭐,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루시아를 마주 본 그가 덧붙였다.
“이번 침공이 예전과 같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잖아.”
“…….”
루시아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미구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염병할… 이런 부분에서 형씨 예감이 틀리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럼 성자 대행께선, 요새가 함락되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미간을 좁힌 채 듣고만 있던 칸토가 물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하지만 이미, 그의 뇌리로는 게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는 북부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던가. 물론 망자 군단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은 데다, 여러모로 지금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그러지 않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을지도 몰랐다.
침식이 일어나던 순간 전선에 정확히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그도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으니까.
그가 경험한 건 그 후에 이어진 상황들뿐이었다.
‘그때도 나름대로 대비를 했을 텐데. 그래도 개판이 됐었으니까….’
그러니 끝까지 긴장을 늦추는 일 없이, 최선을 다해 대비해야 했다.
한순간 사방이 밝아진 건 그때였다. 하늘에 뒤덮인 먹구름에 붉은빛이 번쩍였다.
콰르릉-!
하지만 이안은 물론, 그 누구도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았다.
“염병. 또 시작이네. 귀 아프게.”
겁 많은 미구엘 조차, 심드렁하게 혀를 차며 귀를 막을 뿐이었다.
이미 다들 검은 벽의 발작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것이다.
‘이번에도 정확히 나흘이네.’
이안도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째, 발작의 주기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미 그의 예상보다는 더 많은 발작을 일으킨 상태였지만,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아직 침식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검은 벽의 발작을 끝으로, 다들 더 이상의 대화 없이 묵묵히 걸음만 재촉했다.
“하… 시부럴, 드디어.”
미구엘이 문득 탄식을 흘린 건, 주위가 어슴푸레하게 밝아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관도 저 너머에, 성벽 대신 목책을 두른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야인 정착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