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67
367화
“……!”
눈을 부릅뜬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너희가 추락하는 걸 본 걸지도 모르겠군. 꽤, 화려하게 떨어졌거든.
이어진 느긋한 속삭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였다. 입씨름이나 할 때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
“…….”
주위를 빠르게 훑어본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속삭임과 달리, 그에게는 아무런 습격의 전조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감각이 계속해서 교란되고 있지 않던가. 이곳에서 그의 감각은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더 뛰어난 수준에 불과할 터였다. 그리고 그의 특성인 육감은, 오감의 범위 안에서만 효과가 극대화됐다.
그렇다고 속삭임을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다. 짧게 혀를 찬 이안이 입을 열었다.
“루시.”
“…네. 네. 말씀하세요, 이안 님.”
루시아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대답했다. 다시 갑옷을 내려다본 이안이,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덧붙였다.
“걸을 수 있겠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루시아가 곧바로 대답했다.
“확인해 볼게요.”
손으로 땅을 딛고 일어난 녀석이, 이내 다시 비틀대며 주저앉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정신적인 충격은 물론이고, 방금까지 피를 토하고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에 앞서선 무리해서 기도를 올리고, 화신체에게 붙잡힌 채 정신을 잃기까지 했었다.
신의 사도가 아니었다면 진작 목숨을 잃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일어선 루시아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걸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뛰는 건, 아직 무리일 것 같지만요.”
걷는 것도 안 될 것 같은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녀석의 전신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루시아가 착용한 장비들은 곳곳에 금이 가고 찌그러진 데다, 흙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쨌건 대부분이 그대로였다. 심지어 허리 뒤편에 비스듬하게 고정해 둔 철퇴조차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거의 다 됐으니까.”
내뱉은 이안이, 대충 정비를 끝낸 갑옷을 뒤집어썼다.
각 연결 부위를 빠르게 고정한 그가 팔을 한차례 돌렸다.
몸에 완전히 밀착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움직이는 데에는 아무런 불편함도 없었다.
이안은 바닥에 떨어진 루시아의 두건 망토를 집어 들며 일어섰다.
곧바로 몸을 돌린 그가 망토를 팔에 칭칭 감으며 걸음을 옮겼다.
계곡 한복판, 그의 키만 한 바위가 가까워졌다.
“이안 님…?”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왼손으로 아공간을 훑던 이안이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들며 멈춰 섰다. 언제 넣어 둔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대로 망토를 바위 앞에 가져다 댄 그가, 왼팔을 치켜들었다.
콰드득-!
마력 실린 단검 날이 망토를 관통하고 그 뒤편의 바위에도 깊숙이 박혀 들었다.
다행히 엄청나게 단단한 바위는 아니었다. 날이 상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박아넣은 이안이, 동시에 혼돈력을 끌어 올렸다.
단검 자루를 타고 밀려든 혼돈력과 마력이 바위에 고정된 망토로 번져 나갔다.
솨아아….
망토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기 시작했다. 신성력을 아주 잘 받아들이던 이 두건 망토는, 마력과 혼돈력도 마찬가지로 아주 잘 빨아들였다.
이안의 뇌리로 나지막한 속삭임이 이어진 건 그때였다.
-호오… 미끼로 만들려는 건가. 훌륭한 눈속임인데.
아는 척하긴.
콧방귀를 뀌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마력과 혼돈력을 밀어 넣었다.
화신체의 것을 흡수한 덕분인지, 본래라면 텅 비어있어야 할 파편에 혼돈력이 가득했다.
구구국….
망토 너머의 바위에도 혼돈력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거뭇한 표면으로 보랏빛 균열이 번져 나갔다.
어떤 것들이 습격해 올지 알 수 없었지만, 관심을 완전히 돌리려면 이 정도는 할 필요가 있었다.
-내게도 조금 나눠 주지 않겠어? 도움이 될 거야. 방금처럼.
거, 새끼. 말 많네.
생각하며, 이안은 너풀대는 망토를 내려다보았다. 자락이 넘실댈 때마다 주위로 보랏빛 아지랑이가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머금은 마력과 혼돈력을 단숨에 전부 토해내지는 않은 채였다.
보랏빛 균열이 번진 바위까지 확인한 이안이, 비로소 자루를 놓고는 몸을 돌렸다.
“혼돈을 왜… 밀어 넣으신 거예요…?”
그가 다시 다가오자, 멍하니 서 있던 루시아가 물었다.
녀석의 앞에 멈춰 선 이안이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자.”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속으로만 덧붙인 그가, 루시아의 등과 오금에 각각 팔을 둘러 단숨에 안아 들었다. 전에 한 번 해봐서인지,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루시아는 버둥대지 않고 몸을 맡겼다.
“…이렇게 안긴 건, 어릴 때 이후로 처음 같아요.”
그저 머쓱하게 속삭였을 뿐이었다.
“넌 아직도 어려.”
낮게 코웃음 치며 대답한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이제는 그에게도 묘한 불길함이 전해지고 있었다.
“몸을 숨길만 한 공간이 있는지, 잘 살펴봐라. 루시.”
말을 마친 그가,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비탈길 위로 달려 올라갔다.
***
푸스슥….
이안과 루시아는 절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바위 아래에 몸을 숨겼다. 지붕처럼 비스듬하게 비죽 튀어나온 바위여서, 둘 다 바닥을 기어서 들어가야 했다.
다행히 안쪽은 반대 방향으로 경사가 져 있었다. 덕분에 둘 다 몸은 완전히 숨긴 채, 고개만 위로 내밀 수 있었다.
저 먼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왕이면 굶주린 놈들이면 좋겠는데.’
그래야 저들끼리 죽고 죽일 테니까. 생각하며, 그는 보랏빛 균열이 번진 바위를 눈에 담았다. 바위 아래에 그가 고정해 둔 망토 자락이 넘실댔다.
-이제 보니 아예 싸울 생각이 없었던 거군. 뜻밖인걸. 나는 네가 싸우는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속삭임이 뇌리를 간지럽혔다.
좋아하긴 개뿔. 생각하며, 이안은 콧잔등만 씰룩였다. 어차피 이곳에 들어온 이상, 앞으로 싸움은 신물이 날 만큼 하게 될 터였다.
재정비는커녕 회복도 제대로 되지 않은 지금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더 좋았다.
“뭘 기다리시는 건데요…?”
루시아가 입술만 달싹이듯 속삭였다. 녀석의 눈에도 어느새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본 이안의 시선이, 불현듯 그 너머로 향했다.
“저한텐 아직 아무것도-”
덧붙이는 루시아의 입술을, 이안의 손바닥이 덮었다.
놀란 듯 멈칫한 것도 잠시.
“……!”
루시아의 눈이 비로소 커졌다. 그들이 숨은 바위틈으로 희뿌연 안개가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웅…
그 순간, 방금까지만 해도 전혀 들리지 않던 발소리가 번졌다.
반대편이 아니라, 그들이 몸을 숨긴 뒤편의 절벽에서.
쿠우웅…. 쩌적….
몇 번의 진동 끝에, 흘러내리는 안개 사이로 아주 길고 새카만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아가 숨을 멈추는 가운데, 이안은 자욱해지는 안개 사이의 다리를 눈에 담았다.
말라붙은 듯한 새카만 가죽. 코끼리의 다리를 늘려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 희뿌연 안개는 저놈이 뿜어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쿠웅….
안개에 휩싸인 거대 마수가 계곡을 내려갔다. 느려 보이지만 상당한 속도였다.
흘러내리는 희뿌연 안개도, 움직이는 놈의 윤곽까지 완벽하게 감춰주지는 못했다.
기다란 여섯 개의 다리.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몸과 불길하게 넘실대는 촉수. 그 사이로, 수많은 자줏빛 안광이 일렁이다 안개에 가려져 사라졌다.
‘…저걸 가까이에서 보게 될 줄이야.’
이안이 게임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에도 충분한 모습이었다.
저 멀리, 경계를 걸어 다니던 거대한 그림자가 딱 저렇게 생겼었으니까. 그때는 그저 분위기를 잡기 위해 만든 배경에 불과한 줄 알았건만.
쿠웅….
현실이 된 지금은 아니었다.
어느새 골짜기 깊은 곳까지 내려간 거대 마수가 마침내 멈춰 섰다.
흘러내리는 안개 사이로 놈의 머리가 설핏 드러났다.
나선을 그리며 제멋대로 돋아난 검은 뿔들. 그 아래로 제멋대로 흩뿌려 놓은 것처럼 번쩍이는, 동공이 가로로 긴 수많은 안광.
주위로 촉수가 가득한 흉측한 아가리를 쩍 벌리며, 녀석이 안개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무엇을 삼키려 드는 건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꽈드드득-!
안개 사이로 바위 부서지는 소리가 번졌다.
놈이 뿜어내는 안개는 소리와 기척을 줄이는 효과가 있는 게 분명했지만, 저 소리까지 완전히 다 감춰주지는 못했다.
까드득- 우득- 우드득….
느릿느릿 이어지던 소리가 문득 잦아들었다. 뒤이어 안개 사이로 보랏빛이 꽃이 피듯 번지기 시작했다. 놈의 뿔과 안광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저런. 아무래도 자극이 너무 과했나 본데….
느긋한 속삭임이 이어지는 가운데, 거대 괴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부- 오오오오오-
계곡을 뒤흔드는 듯한 포효가 번져 나갔다. 놈의 뿔과 눈동자에 맺힌 보랏빛이 더 또렷하게 명멸하고, 몸에서 뿜어져 흘러내리는 안개가 한층 더 짙고 격렬해졌다.
파사사사사-
그 사이로 자줏빛 안광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훨씬 더 작은, 이안의 눈에는 박제된 익룡 같아 보이는 날것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 안개 속에 몸을 숨기고 공생하는 관계인 것이리라.
-광기에 눈이 멀었군. 이걸 노린 건가, 친구? 제법인데.
속삭임이 나지막이 감탄했다.
…전혀 아닌데.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울부짖는 거대 마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혼돈 과다 복용 상태인 놈이 어디로 움직일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여라도 이쪽으로 돌진한다면, 당장 피해야 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 오오오오오-
계곡 반대편으로 몸을 돌린 거대 마수가, 골짜기 전체를 울리는 듯한 울부짖음과 함께 멀어졌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안개 덕에 발소리도 남기지 않은 채였다.
“…….”
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이안은 루시아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세상에….”
루시아가 기다렸다는 듯 탄식을 흘렸다. 멍하니 이안을 돌아본 녀석이 더듬더듬 덧붙였다.
“앞으로는… 저런 괴물들을 상대해야 하는 건가요…?”
“글쎄….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안개가 흩어지고 있는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대답했다. 루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아니라고요…?”
“벽을 넘어온 것들을 생각해 봐. 저런 건, 여기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놈이 아닐 거다. …아마도.”
안개 사이로 드러난 일대는 포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파헤쳐진 상태였다. 이안이 망토를 고정해 두었던 바위는, 물론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쨌든 저런 괴물이 난동을 부리고 있으니, 일대의 다른 마수들도 한동안은 숨죽이고 있겠지.”
…이런 결과까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안이 속으로만 덧붙이며 말을 맺혔다. 비로소 긴장이 풀린 듯, 긴 한숨을 내쉰 루시아가 툭 고개를 떨궜다. 그나마 남아 있던 기운도 다 떨어진 것이리라.
이안의 뇌리로 속삭임이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내 조언이 도움이 되어서 기쁘군. 감사 인사는, 기꺼이 받도록 하지. 친구.
슬쩍 미간을 좁힌 이안이, 비로소 자신의 오른손을 돌아보았다.
중지에 감겨 있던 검은 뱀. 늪지의 원한이, 흑요석 같은 눈을 빛내며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끝이 갈라진 얇은 혀가 날름댔다.
-드디어 이쪽을 봐 주는군.
능청스러운 속삭임에, 이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 사역마의 몸을 차지하는 걸, 허락한 적은 없는데.”
이 녀석의 정체는, 속삭임을 들은 순간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제는 어렴풋하게만 떠오르는 꿈속. 마지막 순간 움켜쥔, 그 이름 모를 놈이 남기고 간 꿈틀대던 손가락.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리둥절하게 되물으며 고개를 든 루시아가, 곧 자연스럽게 이안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사이, 낮게 웃음 지은 놈이 속삭였다.
-나도 이런 미물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 본래는, 네 영혼에 파고들어 자리를 잡을 생각이었지.
이안의 눈빛이 더 서늘하게 가라앉게 하기에도 충분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