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438
438화
준비를 끝내고 밖으로 나온 이안과 루시아는, 나선을 그리며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루시아는 물론, 이안도 갑옷에서 망토를 분리해 아공간에 넣어 둔 상태였다.
숲에서의 전투를 대비한 것이다. 재질 상 나뭇가지나 풀숲 따위에 엉킬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이나스 커글은 광전사 같지 않던가. 물론 혼돈의 힘을 다루긴 하겠지만, 망토로 막아낼 수준은 아닐 터였다.
곳곳이 깨지고 금간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며, 이안은 아래로 펼쳐진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꼭대기에서 할 줄 알았더니….’
의식은 1층에서 치르려는 게 분명했다. 회관 중앙에 솟은 단상 위에, 발목만 남은 석상 대신 거무튀튀한 원형 탁상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탑에 남아 있던 흑요정의 골동품 같았다.
-어설픈 제단이군…. 하긴. 제 역할만 다할 수 있다면, 형태 따위는 중요하지 않지.
이어진 속삭임에, 이안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보기에도 저건 일종의 간이 제단 같았다.
탁상 좌우에 두건 망토를 깊이 눌러쓴 두 사제가 나란히 서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게임에선 고대 신관이었지만… 저자들은 암흑 사제나 혼돈 사제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나?’
뭐, 번역 문제였을지도.
이안은 어깨를 으쓱여 잡념을 떨쳤다. 그가 본 히케드는 겉치레를 중시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제단을 저곳에 설치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쨌건 늦지 않은 건 분명했다.
늑대들은 2층의 통로 난간을 빙 둘러싸며 모여들고 있었고, 1층의 사자들은 늑대들의 도움을 받으며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투구를 눌러쓴 히케드는 단상 뒤, 마구간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두 명의 늑대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마도 저들이 남은 이들의 지휘를 맡은 것이리라.
단상 옆, 석상처럼 우두커니 선 히케드의 전마끼지 일별한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모르니까, 그 가면은 다시 쓰는 게 좋겠다. 루시.”
“그러게요.”
그와 마찬가지로 장내를 돌아보고 있던 루시아가, 선선히 다시 가면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뒤이어 통로에 늘어서는 늑대들의 시선을 받으며, 이안은 1층으로 발을 들였다.
철컥- 절그럭-
장내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흑사자마다 한 명씩 붙은 늑대들이 전신 판금 갑옷과 장비들을 구석구석 점검하고, 곁에 선 전마들도 분위기를 느낀 듯 고개를 떨군 채 콧김만 뿜고 있었다.
“이안.”
그들 사이로 모로의 고삐를 쥔 디아나가 다가왔다.
궐련을 다 피운 듯, 다시 나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하지만 눈구멍 너머로 드러난 늪색 눈동자는 여전히 차분했다.
“고생하셨어요, 디아나.”
루시아가 인사를 건네는 가운데, 이안은 새삼스럽게 모로를 눈에 담았다.
기품마저 느껴지는 히케드의 전마와 달리, 녀석은 육중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덩치가 크고 근육질이었다.
다른 마수 전마들 사이에서 보니 그런 부분이 더 도드라졌다.
‘내가 안 죽을 말을 원해서, 거기에 맞게 변이된 건가…?’
아니면 그냥 나를 닮는 건가.
어쨌건, 사자도 발길질 한 번이면 죽여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로가 반기듯 그르렁대며 멈춰 서는 사이, 미련 없이 녀석의 고삐를 놔버린 디아나가 이안의 앞으로 다가섰다.
“곧 권역을 각인할 거라는군. 그 직후에 바로 출발할 거랬어. 전하께서 뭔가, 생각이 있으신 것 같던데.”
암거래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
“그건 사자나 늑대들도 정확히 모르는 것 같던데. 저자들은 알고 있겠지만….”
단상 위에 나란히 선 두 사제를 돌아본 디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도저히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라서.”
두 사제의 얼굴은 여기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잠긴 것처럼 흐릿한 턱선의 윤곽만이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거, 더럽게도 분위기 잡네.
내심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유가 있는 거면 됐지.”
모로가 콧김을 뿜으며 그르렁댄 건 그때였다. 루시아가 다가가자 보인 반응이었다. 아마도 루시아의 성흔에 다시 신성이 담겼기 때문일 터였다.
“괜찮아. 모로. 적이 아니야.”
루시아가 타이르듯 속삭이며 걸음을 옮겼다. 손도 앞으로 살짝 내뻗은 채였다.
당장이라도 뿔로 찔러버리거나 씹어버릴 듯 콧김을 뿜던 모로가, 이내 그르렁대며 고개를 숙였다.
이안이 녀석을 빤히 노려보고 있어서였다. 옆으로 다가선 루시아가 녀석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고삐를 잡는 사이, 이안이 다시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저런 상태라 루시아가 나랑 타야할 것 같은데. 너는?”
“이미 세렌 경과 얘기해 뒀어.”
예상했다는 듯 대답한 디아나가, 옆의 흑사자들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미 대열도 다 정해져 있어. 이안 네가 우측 후미고, 그 바로 옆이 세렌 경이야.”
“또 후열 담당이군.”
“전하의 좌우는 폴린 경과 그웰로드 경의 자리니까. 창이 필요하냐고 묻던데. 가져다줄까?”
그러고보니 다른 전마의 안장에는 전부 기다란 도끼창이 고정되어 있었다. 창날과 그 아래의 도끼날 모두 육중하고, 거뭇하게 빛이 바랜 물건들이었다.
“…균형을 맞추려면 필요하겠네. 한 자루 가져다줘. 제대로 쓸 자신은 없지만.”
“네 전투 망치랑 별반 다를 바 없을 거야. 오히려 다루기는 더 쉬울걸.”
대답하며 몸을 돌리던 디아나가 멈칫했다. 히케드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비하던 늑대들과 흑사자들이 자세를 바로 하는 가운데, 눈치를 살핀 디아나가 슬며시 옆으로 빠져나갔다.
“채비는 다 끝내셨습니까, 성자 대행?”
계속 하라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친 히케드가 이안의 앞에 멈춰 섰다.
“마땅한 투구를 찾아오라 이를까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웠지만, 동시에 서늘한 한기를 머금고 있었다.
안면 가리개 너머 고요하게 일렁이는 검푸른 안광을 마주 보며, 이안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투구는 사양하겠습니다. 답답한 걸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요.”
“과감하시군요, 머리는 심장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인데 말입니다. …하긴. 카르하께서도 투구를 쓰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놈의 카르하는. 이안은 내심 혀를 차며 물었다.
“표식은 온전히 물들이셨습니까?”
“생각보다 쉽지 않긴 했습니다만, 예.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성자 대행.”
“의식을 치르신 후에 바로 떠난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그러니 미리 준비해 주십시오. 제가 선봉에 설 테니, 앞 기수의 등만 보고 따라오시면 될 겁니다.”
“등만 봐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모양이군요.”
이안이 선선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히케드의 안광이 설핏 휘어졌다.
“가는 길을 방해 받고 싶지 않아서요. 한 번에 해 버리는 게, 저 친구들이 덜 고생스럽고 말입니다.”
사제들이 뭔가 하는 건가. 이안이 내심 읊조리는 사이, 히케드가 말을 이었다.
“출발한 후에는 마땅한 순간이 없을 듯하니 미리 말씀드리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자 대행.”
“저야말로.”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다시 한 번 미소 지은 히케드가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시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정말 전하께서 선봉에 서시는 거군요. 예상은 했지만… 대단하셔요.”
다가올 일들에 대한 걱정과는 별개로, 어쨌건 히케드라는 인물 자체는 마음에 든 게 분명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흑사자들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야 아래 사람들도 더 열심히 할 테니까. 물론, 실천하는 건 말로 하는 거랑은 다른 문제긴 하지만.”
어쨌건 그에게는 아주 달가운 상황이었다.
본래는 여차하면 한 줌 정도 남겨둔 능력치 포인트와 스킬 포인트를 써버릴 생각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나스 커글과의 전투에서 가진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소모값을 최소화한 채 대마족 하나를 토벌할 수 있다면 여러모로 남는 장사일 터였다.
루시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긴. 그건 이안 님도 그러셨죠. 언제나.”
“난 서고 싶어서 선 게 아니야.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한 거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걸음을 옮긴 이안이, 등자를 밟고 훌쩍 모로의 안장 위에 올라탔다.
준비를 거의 끝낸 다른 흑사자들도 저마다의 전마에 올라타고 있었다.
이안이 뻗은 손을 붙잡은 루시아가 뒤따라 올라탔다. 이안의 안장 앞이, 이번 그녀의 자리였다.
덩치가 워낙 큰 덕분에 그녀가 앉을 자리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애초에 안장을 2인용으로 만들어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생각하는 사이, 루시아가 모로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목덜미를 토닥였다.
“고마워, 모로. 내가 신성을 다뤄도, 너무 놀라지 말고.”
모로가 대답하듯 낮게 그르렁댔다.
이쪽도 별 걱정이 없겠고. 속으로 덧붙이며, 이안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가 양손으로 기다란 도끼창을 받쳐든 채 돌아오고 있었다.
무게가 제법 나가 보였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채였다. 겁이 많아서 그렇지, 그녀의 근력은 평범한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더 필요한 건?”
디아나가 받쳐든 도끼창을 머리 위로 들며 물었다. 왼손을 뻗어 자루를 움켜쥐며, 이안이 대답했다.
“없어. 너도 가서 준비해.”
“그러지.”
디아나가 선선히 몸을 돌렸다.
출진을 앞두고 있건만, 말투와 행동 모두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궐련의 효과일 터였다. 이안이 그렇듯, 앞으로 적어도 반나절은 지속되리라.
“흠….”
세렌의 전마로 다가가는 디아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안은 손에 쥔 도끼 창을 내려다보았다.
정보창을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흑사자의 도끼 창. 희귀 등급에 약간의 속성 보정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옵션이 없었지만, 능력치는 아주 준수했다.
다루기 어려울 정도의 무게도 아니었다. 물론 묵직했지만, 전에 쓰던 대검이나 전투 망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러다 진짜, 무기란 무기는 다 써보겠네.’
소리 없이 콧방귀를 뀐 이안이, 안장 옆의 고정 고리에 도끼 창을 걸었다. 그동안은 가방을 거는 용도로만 쓰던 부분이었다.
다각- 다각-
흑사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뻥 뚫린 아치형 출입구를 앞에 두고, 중앙에 히케드가 들어설 공간을 남겨둔 채 좌우로 늘어서고 있었다.
좌측에는 폴린과 세렌, 그리고 그녀의 뒤에 탄 디아나가. 우측에는 그웰로드가 멈춰 섰다. 그는 상반신을 돌려 다가오는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뒤로 서십시오. 성자 대행.”
그웰로드가 말하자,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로 말을 몰았다.
이안과 루시아를 일별한 그가 이내 덧붙였다.
“뒤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마시오. 앞도 잘 부탁드리겠소.”
“물론입니다.”
그웰로드가 대답하는 그때,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눈빛을 교환한 이안과 루시아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히케드가 단상 위에 올라 서 있었다. 가슴 앞에 양손을 모아 쥔 채였다. 그 사이로 익숙한 돌덩이가 보였다. 공허의 표식.
본래는 자줏빛을 머금고 있던 표식은 검푸른 어둠을 머금고 일렁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흑사자들을 바라보고 있던 히케드가 제단 쪽으로 돌아섰다. 이안과 흑사자들을 완전히 등진 채였다.
고오오오….
그의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검푸른 어둠이 단상을 중심으로 스멀스멀 번져나갔다.
벽면을 따라 듬성듬성 이어지며 장내를 밝히던 횃불의 빛이 삽시에 잦아들었다. 어둠이 빛을 밀어내고 있었다.
“루 엔테르여….”
하지만 그 한복판에 선 히케드의 뒷모습은 여전히 선명하게 분간할 수 있었다. 뿔이 돋아난 대마족처럼 보이기도 했다.
루시아가 나지막한 탄식을 흘린 것도 그래서이리라.
제단 좌우에 서 있던 사제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돌아서는 가운데, 제단을 중심으로 번진 어둠이 이윽고 탑 중앙의 빈 공간을 따라 솟구치기 시작했다.
장내가 일식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어두워졌다. 모로가 긴장한 듯 자세를 낮추며 숨을 죽였다.
-호오….
혼돈의 정수가 공명하듯 낮은 울림을 토해내는 가운데, 요그의 탄식이 이안의 뇌리를 간지럽혔다.
-아까도 느꼈지만… 저 녀석은 확실히,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은데.
이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솟구쳐 오르는 어둠을 올려다 보았다.
탑 바깥까지 치솟은 어둠은, 하늘을 먹구름처럼 물들이며 번져나가고 있었다.
-너 만큼은 아니지만 말야, 친구. 저 정도면 아주 훌륭하게 혼돈과 융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어. 내면의 어둠을 외면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였군….
요그가 속삭였다.
또 자기도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하는 말들을 지껄여 대는 게 분명했다. 이안의 한쪽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지는 가운데, 녀석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심지어 그 무엇도 섬기지 않는 것 같군. 현명한 선택이야. 공허의 존재를 섬기는 건 너희 필멸자들에게는 아주 달콤한 유혹이겠지만… 결국은 견디기 힘든 대가를 치러야 하거든. 물론 저렇게 홀로 싹을 틔운다면….
요그가 재미있다는 듯 킥킥댔다.
-무방비 상태의 먹잇감이나 다름없어지긴 하지만 말야. 친구, 네가 그렇듯이…. 물론 너는 그다지 걱정할 필요 없어. 내 본신의 비호를 받고 있으니까. 이젠, 나도 있고.
이안의 눈매가 조금 더 가늘어졌다. 어렴풋한 기억들이 뇌리를 스쳤다. 때때로 그를 가로막곤 하던 정체 모를 무언가.
‘역시, 그게 그 머리 긴 놈의 그림자였나….’
하긴. 그가 그토록 여러 번 환영을 보고서도 무사히 살아남은 건, 그저 운이 좋거나 상태창의 가호를 받고 있어서만은 아닐 터였다.
솨아아….
그사이 일대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탑의 무너진 외벽 틈새와 창문 너머로, 검푸른 어둠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일렁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밖에서 본다면 탑뿐만 아니라 일대 전체가 검푸른 어둠에 뒤덮인 것처럼 보일 터였다.
이건 좀 과하지 않나.
-그러니까 말야, 친구….
이안이 내심 생각할 찰나, 요그의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저놈은 네가 먹어버리는 게 어때? 다른 것들에게 빼앗기거나, 더 크게 자라기 전에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