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74
074화
아무런 전조도 느끼지 못했건만.
어느새 불길한 마력이 사방에 자욱하게 깔려있었다.
“힉……!”
옆에서 숨 삼키는 소리와 파드덕대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눈을 치켜뜬 테사이아가 천장 구석의 벽면에 등을 대고 붙어 있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입술을 떨며 내뱉었다.
“놈이야…! 놈이 왔어…!”
“알고 있다.”
이안은 덤덤하게 내뱉으며 일어섰다. 바닥에서 주황색 안광이 번졌다. 샬롯이 나지막히 물었다.
“심판자가 왔단 말이냐?”
“이게 느껴지지 않아?”
테사이아가 도리어 되물었다.
샬롯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무래도 그녀의 감각은 이런 마법적인 부분에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방을 하나만 빌리길 잘했군.’
이안은 방어구들을 착용하기 시작하며 생각했다.
저 둘이 헛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불편을 감수한 게 이런 식으로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소리 없이 단숨에 몸을 일으킨 샬롯도 갑옷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너희 둘은 서로를 지키는 게 우선이야. 잊지 마라.”
이안이 내뱉었다. 샬롯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둘을 멍하니 지켜보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속삭였다.
“뭣들 하는 거야? 그냥 여기에 있자. 저 괴물도 결국은 뱀파이어야. 이 안까진 들어올 수 없다고.”
“겁에 질려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군.”
흉갑 착용을 끝낸 샬롯이 코웃음을 쳤다.
“이런 일을 벌이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무슨 방법이 있다는….”
“방법이야 여럿 있겠지.”
각반의 사슬 이음매를 차례로 잠그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네 위치를 특정하면 건물을 부숴버리거나. 마을 주민을 홀릴 수도 있고… 나라면 그냥 주민 몇을 죽여서 널어놓을 거다. 네가 저지른 짓인 것처럼. 그것만 해도 넌 더는 여기 있을 수 없겠지.”
“그럼 그냥 새벽까지 숨어있다가 곧바로 도망치면 안 돼?”
정말 마족이 할 법한 생각이군.
이안은 부츠를 발과 종아리에 딱 붙게 조이면서 싸늘하게 되물었다.
“왜 그래야 하지? 여기서 저놈을 쳐 죽이면 그만인데.”
“…그러고 나면, 뒷감당은?”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고.”
검을 허리춤에 찬 이안이 테사이아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네가 날 찾아온 이유를 잊지 마라. 정말 복수를 이루고 싶은 거라면, 도망치려는 습관부터 버려.”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린 테사이아의 눈빛이 이윽고 가라앉았다.
“…알았어, 이안.”
한 번만 더 이딴 식이면, 심판자가 하려던 것처럼 팔다리를 잘라서 가지고 다닐 거니까.
속으로 읊조리며 걸음을 옮긴 이안이,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
“…….”
여관 문을 연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발아래, 그림자처럼 새카만 연무가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주위 건물의 지붕 아래 드리워진 어둠마다 박쥐들이 흑요석 같은 안광을 흘리며 매달려 있었다.
뱀파이어 아니랄까 봐. 박쥐라니.
생각하며 이안은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발목을 스치는 서늘한 한기.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흑마법의 진원지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관에서 이어진 대로 너머.
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한복판에, 새카만 형체 하나가 불쑥 솟아 있었으니까.
초승달 아래에서도 그의 모습만큼은 이질적일 정도로 선명했지만.
살아있는 존재라면 응당 느껴져야 할 온기나 숨결,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 핏기없는 흰 피부. 제국의 정복으로 보이는 검은 옷. 적당히 곱슬 거리는 흑발.
심판자의 붉은 눈동자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살의는커녕 느긋한 여유와 기품마저 느껴지는 눈길.
“이 한복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닐다니. 대단한 용기를 지녔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안이 피식댔다.
“넌 이런 도시 한복판에서 정체를 드러낼 만큼 정신 나간 마족이고.”
심판자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이안의 비아냥이 오히려 즐거운 모양이었다.
“용기와 배포를 모두 지녔군. 요즘 같은 시대에는 드문 인재로다. 난 너 같은 인간을 좋아한다. 내가 필멸자이던 시절을 떠오르게 해.”
고풍스럽게도 미친 놈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주위의 지붕에 매달린 박쥐들을 돌아보았다.
놈들은 여관 문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여관을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지만, 어쨌건 나란히 움직이고 있기는 했다.
심판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사를 표하마. 너희들의 용기 덕분에 오늘 밤,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게 됐군.”
“그렇지. 오늘 밤 죽음은….”
내뱉은 이안이 검을 뽑아 들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너 하나로 충분하니까.”
달려오는 그를 응시하는 심판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음에 드는 인간이군. 너는 돌아가는 길의 양식으로 삼아주마.”
그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마도구…?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솟구칠 찰나, 그가 곧바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편히 잠들거라, 인간아.”
꺄-아아아아아-!
상자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거대한 마력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
“……?!”
저항할 틈도 없이 휩쓸린 이안이 추락했다.
그의 정신력과 저항력으로도 견디기 힘든 저주였다.
시야가 흐려지고 온몸의 힘이 빠지며 수마가 몰려들었다.
땅으로 떨어지는 찰나에도 뒤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짚단처럼 쓰러지는 샬롯과, 귀를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지르는 테사이아.
철퍽, 떨어진 이안이 연무 사이로 쓰러졌다.
도시 전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든 생명체를 잠재운 심판자가 느긋한 걸음으로 그를 지나쳤다.
푸드드득-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박쥐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놈들이 가뜩이나 희미하던 주위를 더 어둡게 물들였다.
“오늘은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잡종아. 저번 네가 선보인 잔재주는 귀여웠다만. 두 번 통하리란 기대는 하지 말거라.”
“웃기지 마…!”
주저앉은 테사이아가 소리치고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을 벌렸다.
그대로 쓰러진 샬롯의 팔뚝을 깨문 그녀가 피를 삼켰다.
검붉은 눈동자가 번들댔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입을 뗀 그녀가 일어섰다.
파스스-
연무에 파묻혀 있던 그녀의 그림자가 매의 형상으로 변하며 날아올랐다.
심판자가 탄성을 흘렸다.
“이젠 그림자 사역마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내는군. 확실히, 너는 지금까지의 실험체들과는 달라.”
“그딴 칭찬 필요 없거든? 이안…! 설마 이 짐승처럼 기절한거야? 이안!”
씹어 뱉은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그 사이 두 마리로 변한 그림자 매가 그녀의 주위를 호위하듯 맴돌았지만, 주위를 뒤덮은 박쥐들에 비하면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이렇게 어이없게 쓰러진 거냐고!”
건물 벽까지 뒷걸음질 친 테사이아가 분통을 터뜨렸다.
심판자의 웃음이 이어졌다.
“소용 없을 것이다. 이건….”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느긋하게 이어지던 그의 걸음이 멎었다.
심판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솨아아아-
휘몰아치는 돌풍이 주위의 연무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퉤, 입에 물고 있던 살점을 뱉어낸 그가 내뱉었다.
“…잘난 척해서 미안하군.”
“이안…!”
테사이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심판자의 탄성이 이어졌다.
“이건 증폭한 인어의 비명인데…. 대단하군. 이걸 듣고 잠들지 않은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아, 그래. 덕분에 누가 끼어들 걱정 없이 싸울 수 있겠군.”
이안이 태연하게 내뱉으며 검을 고쳐 쥐었다.
입안을 깨문 고통 덕분에 정신만큼은 명료했지만, 몸의 감각은 아직도 온전하지 않았다.
“기어코 싸울 생각… 호오. 이건…?”
내뱉던 심판자가 별안간 눈을 감더니, 음미하듯 숨을 들이켰다.
그의 입가를 타고 송곳니가 삐죽 돋아났다.
입술 끝이 귀 아래까지 찢어졌다.
“그래… 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참을 수 없는 향기로군.”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그 직후였다.
그림자의 심판자.
이것들은 퀘스트를 준단 말이지. 잘 됐군.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닥쳐! 이안은 내 꺼야! 건드리기만 해!”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잡종아.”
손짓하며 심판자가 눈을 떴다.
여관 건물 주위를 날아다니던 박쥐들이 테사이아에게 달려들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가 번들대는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날 끝이 초승달처럼 앞으로 구부러진 기형검이었다.
“운명이란 재미있는 것이지. 저 잡종이 이토록 특별한 피를 가진 자를 곁에 두고 있을 줄이야. 너를 먹으면 더 강해지리란 확신이 드는군.”
“비슷한 입장이네. 나도 널 죽이면 경험치를 얻을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대답 대신 투척용 단도가 파공음을 흩뿌리며 날아들었다. 옆으로 몸을 틀어 가볍게 피한 심판자가 왼손을 들었다.
치솟아 오른 검은 연무가 그대로 이안을 덮쳤다.
푸악-!
돌개바람이 연무를 흩어버린 건 그 직후였다.
그 사이를 뚫고 이안이 쇄도했다.
싸늘하게 번뜩이는 눈빛.
“하하……!”
참지 못하고 웃음을 토해낸 아스콜드가 마주 몸을 날렸다.
자욱한 연무가 그가 내딛는 걸음마다 치솟으며 밀려났다.
쩌엉-!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서로를 향해 돌진하던 둘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손아귀를 타고 전해지는 묵직함.
쉬학-
먼저 뒤로 물러난 건 이안이었다.
아스콜드가 손목을 살짝 당긴 순간, 초승달 검의 검 끝이 어깨를 찍을 것처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아스콜드는 기다렸다는 듯 따라붙었다.
그의 손이 쉬지 않고 이안을 향해 움직였다.
채앵! 쩌엉-!
공방이 연달아 이어졌다.
검을 휘두르는 아스콜드의 눈동자에 점점 더 희열이 넘실댔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잘 숙성된 와인 같은 피 냄새가 숨결마다 번졌고, 검격을 주고받는 중에도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검술 솜씨는 기대보다 떨어졌지만. 체구보다 월등하게 강한 힘과 빠른 움직임, 마법 무구로 보이는 바람 마법의 도움. 그리고 빈틈을 과감하게 찌르는 담대한 판단이 그 부족함을 상쇄하고 있었다.
촤르륵-
때때로 초승달 검이 놈의 팔다리를 감싼 사슬 위를 긁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옅게 번지는 피 냄새가 점점 더 아스콜드를 희열로 몰아넣었다.
여유와 기품으로 덮여있던 광기가 그의 붉은 눈에 넘실댔다.
자욱하게 깔린 연무가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출렁댔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몇 년만 더 갈고 닦았다면 필시 달인의 경지에 오른 검객이 되었을 터!”
쉴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아스콜드가 소리쳤다.
“허나 상심치 말거라. 네 의지와 용기는 이미 능히 그들과도 견줄만한 수준이니!”
그는 수비 일변도인 와중에도 동요 없이 고요한 이안의 눈동자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이 싸움을 조금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또한, 이 자리에서 단숨에 먹어 치우기엔 아까운 진미이리란 확신이 들었다.
저 무표정한 얼굴이 공포와 절망에 물들고, 눈동자에 맺힌 의지의 빛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그래서 더는 피가 향기롭지 않게 될 때까지 살려둔 채 음미할 생각이었다.
쩌엉-!
서로를 향해 내리친 검이 맞부딪쳤다.
카가각, 단죄의 검이 초승달 검의 검날 위를 긁으며 불똥을 튀겼다.
손목을 움직이려던 아스콜드는, 재차 이어진 압력에 일순간 뒤로 밀려났다.
검에 실린 힘이 더 강하고 유연해진 것 같은 느낌.
아스콜드의 미간이 꿈틀댈 찰나.
“…이제야 몸이 가볍군.”
검을 맞댄 채로 이안이 읊조렸다.
아스콜드의 눈을 응시하며 그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감사를 표하지. 네가 날 죽일 생각이 없었던 덕분에 시간을 충분히 벌었다.”
“뭐라…? 하하!”
“부디 이게 전부가 아니길 바란다. 그럼 네 놈이 줄 경험치는 형편없을 것 같으니까.”
“그 경험치라는 게 대체 뭐냐?”
퍼엉-!
대답은 이번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일순간 놈의 검으로 엄청난 인력이 느껴지더니, 다음 순간 그보다 더 강력한 무형의 폭발이 그를 덮쳤다.
영문도 모른 채 튕겨 나가던 아스콜드의 눈앞으로, 어느새 이안이 따라붙었다.
쩌엉-!
부자연스럽게 내리치는 검을 아스콜드는 팔을 들어 막았다.
오랜 시간 검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이런 정직한 공격은 부지불식간에도 막거나 흘려낼 수 있는 것이었다.
치지직-
검과 검을 맞댄 채 밀려나던 그가 멈춰 설 때쯤. 연무를 머금은 돌개바람이 이안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아스콜드는 휘몰아치는 장막에까지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이안의 동공에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사? 이렇게까지 강한 힘과 뛰어난 검술을 지닌 마법사가 존재할 수…?
콰아아아-!
의문을 채 끝맺기도 전에, 아스콜드의 발아래에서 불기둥이 폭발하듯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