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94
094화
비명이 마을 구석구석까지 메아리쳤다. 잠에서 깬 주민들이 하나둘씩 집 밖으로 나왔다. 저마다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을 하나씩 움켜쥔 채였다.
“…….”
외눈 외팔의 노인, 우르드만이 맨손으로 집을 나섰다.
“그 하얀 악마의 비명인가…?”
“왜 전사들이 다 저기 모여 있지?”
마을 사람들이 술렁였다.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키엑-! 키에엑-!”
또다시 비명이 메아리쳤기 때문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현기증이 이는, 끔찍한 비명.
주민들이 숨을 헐떡이는 가운데, 우르드는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
마물 사냥꾼들이, 정말 그 하얀 악마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로 시작할 줄이야.”
읊조리며, 우르드는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키아아악-! 키엑-!”
높고 낮은 비명이 이어졌다.
목책 위에 선 병사들의 모습이 노인의 외눈에 담겼다.
“정말 고작 셋이서….”
우르드의 탄식이 순간 잦아들었다.
광장 한쪽에 솟은 석상으로 시선을 돌린 노인이, 이윽고 탄식했다.
“북부의 초인이시여….”
성상의 대검에서 붉은 신성이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 끝에 맺힌 피가 증발하면서 신성력으로 화하고 있었다.
“오… 오오….”
“카르하의 화신이 마을을 구원하고 계신 건가…?”
성상을 본 마을 사람들이 탄식을 흘렸다. 몇몇은 성상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카르하는 기도 따위에 응답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키에에엑-!”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가장 먼저 조용해진 건 방벽 위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적막은 마을로도 전염되어, 술렁이던 주민들의 입을 하나씩 닫게 만들었다.
“…….”
카르하의 성상에서 번져 나오는 붉은 빛만이 소리 없이 주위를 밝히는 가운데.
“…오, 온다.”
“맙소사… 정말 저걸 혼자…?”
“둘? 단 둘뿐이라고…?”
이윽고, 방벽 위에서 탄식과 경악이 번지기 시작했다.
전사들이 하나둘씩 주춤주춤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조금씩 아래로 굽어졌다.
“문! 당장 문을 열어요!”
이어진 외침은 우르드에게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스켈.
비로소 성상에서 시선을 뗀 우르드는, 목책의 난간을 내달리듯 걷고 있는 아스켈을 발견했다.
언제나 덤덤한 손자의 얼굴은 지금, 경악과 환희로 뒤섞여 있었다.
반대로 그 뒤를 따르는 발레리의 얼굴은 밀랍을 바른 것처럼 무표정했다.
허둥지둥 목책 아래로 달려 내려온 전사 몇이, 마을의 대문을 막고 있던 빗장을 풀었다.
끼이이이-
대문이 느릿느릿 열렸다.
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 이윽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마을에 들어섰다.
검은 털의 마족이 뒤따라 들어왔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꺼림칙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카르하시여….”
“정말 저 악마를 죽이다니…!”
다들 검은 머리 이방인이 품에 안은 거대한 머리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건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털 한 올 없는 새하얀 머리는, 비늘이 돋은 것처럼 윤기가 돌았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밋밋하게 비어있고, 깨진 유리 조각이 박힌 것 같은 아가리만이 그 아래 거대하게 벌어져 있었다. 축 늘어진 두꺼운 혀는 뱀처럼 두 갈래. 머리 앞뒤로 각각 두 개씩 돋은 뿔은 서로에게 휘어 있어, 마치 왕관을 쓴 것 같은 형태였다.
“하얀 악마….”
오랫동안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그 괴물이, 목이 잘린 채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저분하게 잘린 목의 단면에서 광택이 도는 새카만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그리고 자신을 이안 호프라고 소개했던 흑발의 남자는, 그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미 그의 얼굴과 몸은 똑같은 검은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우르드의 시선이, 문득 다시 옆으로 돌아갔다.
성상의 빛이 더 짙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착각이 아니었다.
이안이 가까워질수록, 카르하의 대검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도 더 짙어지고 있었다.
“카르하께서, 어째서 저런 이방인에게…?”
“혹시 저자도 북부 출신인 건가.”
그 모습을 목격한 주민 몇몇이 속삭였다.
‘설마, 정말 북부인인가…?’
같은 생각을 하며, 우르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적당히 흰 피부.
북부인 치곤 털이 없고 골격도 얇아 보였지만. 혼혈이라 생각하면 또 이상한 부분은 아니었다.
이윽고 고요한 마을을 가로지른 이안이 그의 앞까지 도착했다.
“하… 오늘 씻었는데.”
우르드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읊조린 이안이, 그의 발치에 손에 든 머리를 내던졌다.
거대한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의뢰는 완수되었소. 이의 있소?”
그 무심한 검은 눈을 잠시 바라본 우르드가, 이윽고 대답했다.
“없소. 귀하는 의뢰를 완수하셨소.”
목소리가 절로 경건해졌다.
“보수는 내일 받으러 가겠소.”
고개를 끄덕이며 말 한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가 가까워지자 카르하의 성상이 더 밝은 빛을 흩뿌렸다.
“……?”
미간을 설핏 찌푸린 이안이 걸음을 멈추고 성상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이제야 성상의 상태를 알게 된 몇몇 주민들과 전사들의 얼굴에도 경악이 번졌다.
그가 멈춰선 건 아주 잠깐이었다.
낮게 코웃음 친 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자신이 묵고 있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끼익, 철컹.
낡은 문의 경첩 소리가, 마을의 악몽 같은 밤이 끝났음을 알렸다.
닫힌 문과 성상. 이윽고 자신의 발 앞에 놓인 마물의 머리를 내려다본 우르드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저자가 정말…?”
***
“토할 것 같아.”
침대에 드러누운 테사이아가 신음했다.
그녀는 어제 새벽부터 쭉 이런 상태였다.
“부정한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드러내는군. 한 것도 없는 주제에.”
“없긴 왜 없어. 내가 그 마물 위치도 찾아 줬는데.”
“아주 대단한 일을 하셨군, 귀쟁아.”
“조금만 견뎌라. 곧 마을을 떠날 거니까.”
대충 닦아서 널어 뒀던 장비들을 몸에 걸치며, 이안이 말했다.
“카르하는 왜 갑자기 지랄이래? 이안 너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
테사이아가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물론, 이안은 그 부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성상은 그저 신성을 뿜어대기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보는 퀘스트까지 선사했다.
“뭐,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전에는 루 솔라의 성상도 그렇게 빛났었지.”
설마 야만 전사들의 신도 나한테 관심을 보낼 줄은 몰랐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뒷말을 삼켰다.
게임의 야만 전사들은, 마법사 혐오에 있어선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이다.
“천상의 모든 신들이 널 탐내나 보군. 이안.”
샬롯이 감탄하듯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일처럼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안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어느새, 그저 존경과 애정만이 가득했다.
이안은 심드렁하게 코웃음 쳤다.
“뭐, 마음대로들 하라지. 힘을 빌려 준다면 기꺼이 쓸 거니까.”
절대 그 누구도 섬기진 않겠지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에게 이 세계의 신들은 이용해야 할 대상일 뿐,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될 순 없었다.
감정적인 부분을 떠나, 실리적으로도 그랬다.
제약은 지금도 충분히 많았으니까.
게다가 신의 낙인이 혼돈의 파편과 어떤 상호 작용을 일으킬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땠어? 그 하피 여왕.”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힘들다더니 주둥이는 살았군.
생각하며, 이안이 대답했다.
“별거 아니었다.”
거인 망령들이 워낙 강해서인지, 변이된 하피 여왕과의 전투는 그리 위험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건 상성의 문제이기도 했다.
변이된 하피 여왕은 강력한 현혹 정신파와, 상태 이상은 물론 실질적인 대미지도 주는 죽음의 비명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둘 다 이안의 정신력과 저항력을 뚫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차라리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더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안은 날개의 피막을 먼저 공격해 비행 능력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공략법도 미리 알고 있었고, 놈의 방어력은 바람 칼날로도 뚫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공격 마법을 더 활용했다면, 몸에 체액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잡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지 않은 건, 북부의 야인들에게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일 뿐이었다.
‘확실히, 처음보단 훨씬 강해지긴 한 것 같은데.’
이안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생각했다.
물론 망국의 군단장처럼 강한 적을 상대하다, 비교적 상대하기 쉬운 네임드와의 전투여서 더 크게 와닿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어쨌건 능력치 자체만 놓고 봐도, 처음보다는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시나리오가 초기화되면서 퀘스트 보상이 중첩된 효과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 마법사로서의 성장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계속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채비를 끝낸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이안?”
“보수 받으러 간다.”
테사이아의 물음에 심드렁하게 답하며, 이안이 문을 열었다.
그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아스켈이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냐?”
“두 시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대답은 덤덤했지만,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외가 담겨 있었다.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거북한 감정이었다.
그의 행동에는 그 어떤 숭고한 뜻이나 의지도 담겨 있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그를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이들이 상대하기 편했다.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냐?”
“예. 혹시 며칠 더 마을에 머물러 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요.”
“왜?”
“내일 낮에 연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 하얀 악마를 토벌해 주셨으니, 꼭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결속을 다지려는 거군.
현실 도피일 뿐일 텐데, 하고 생각하며 이안이 대꾸했다.
“너희 대전사가 싫어할 텐데.”
“이안 님을 꼭 모시고 싶다고 한 게, 바로 발레리입니다만….”
“그래…?”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지. 난 이제 너희 집으로 갈 거다.”
“보수를 받으러 가시는 거군요. 저희 영감님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뒤따라 나온 샬롯 쪽을 턱짓했다.
“혼자 가도 되니까, 넌 샬롯을 안내해라. 여정에 필요한 것들을 살 거다.”
아스켈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샬롯이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마차는 구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안.”
“짐 마차라도 상관없어. 지붕을 달아 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없으면 그냥 없는 대로 사라. 그것도 없으면, 그냥 말만 있어도 충분하고.”
“알았다.”
이안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지나치던 주민들이 그를 보고는 하나둘씩 고개를 숙였다.
의뢰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는 건 흔히 겪은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그렇다고 기대하진 마. 댁의 사도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
어젯밤의 퀘스트를 떠올리며 카르하의 성상을 일별한 이안은, 이내 낮게 콧방귀를 뀌고는 광장을 지나쳤다.
***
“오셨소.”
노인, 우르드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표정이나 말투의 변화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훨씬 공손해진 태도였다.
‘어제 같은 일을 한두 번만 더 하면, 카르하가 아니라 날 숭배할지도 모르겠군.’
이안이 식탁에 앉자, 오르드가 곧바로 작은 주머니를 앞에 놓았다.
“약속한 보수요.”
이안은 돈주머니를 쥐어 들었다.
금화 두 개. 다 죽어가는 노인의 쌈짓돈이라기엔 큰 액수였다. 어쩌면 과거 전쟁에 참전하고 받은 돈인지도 몰랐다.
“훌륭하군.”
탁, 주머니를 탁자 위에 놓은 이안이 우르드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어떻게 하셨소?”
“연회장에 가져다 뒀소. 내일 연회에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보복을 걱정하시더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소. 몇몇 전사들이 그러더군. 카르하께서 화신들을 보내 마을을 구하셨다고.”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난 카르하를 섬기지 않소. 그의 사도가 될 생각도 없고.”
“오해가 있으시군. 카르하는 따로 대행자를 두지 않소.”
“두지 않는다고…? 그럼 카르하는 사제도 없고 사도도 없단 말이오?”
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우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하는 자신의 힘으로 신이 된 초인이기 때문이오. 그렇기에 다른 그 무엇도 필요치 않으시지.”
“…하지만 성상도 있고, 전사들에게 축복도 내려 주지 않던가?”
“그건 그저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전사들을 어여삐 여겨서지. 다른 이유 따윈 없소. 전사들이 카르하께 때때로 공물을 바치는 것도, 그저 공적을 자랑하려는 의도일 뿐이오.”
이안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사도 퀘스트가 아니면, 이건 무슨 의미인 거지.’
퀘스트창을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다시 우르드를 바라보았다.
이 노인이라면 답을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묻고 싶은 게 있소.”
“잘 됐군. 나도 귀하께 여쭐 게 있던 참인데. 먼저 말씀하시오.”
“북부의 대전사라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요?”
“……!”
느긋하게 미소짓던 우르드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