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95
095화
“그 말을 어디서 들으셨소? 누군가 귀하를 그렇게 부르던가?”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어젯밤, 카르하의 성상 앞을 지난 순간 생성된 퀘스트의 이름이었다.
북부의 대전사. 카르하의 앞에 의지를 내보이라는, 게임이었다면 클릭 한 번으로 해결됐을 목표가 설명의 전부였다.
보상은 투쟁의 축복.
심지어 선택 퀘스트조차 아니었다. 야만 전사의 전용 퀘스트라 그럴 터였다. 야만 전사는 이걸 거절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이안은 이것이 카르하의 사도가 되는 퀘스트이리라 짐작했었다.
하지만 카르하가 사도를 두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조금 더 알아볼 가치가 생긴 것이다.
“전사는 누구나 때가 되면, 카르하께 자신의 영혼을 내보이는 의식을 치르오. 일종의 성인식이지.”
“정말 그가 영혼을 들여다보나?”
“전부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가끔 관심을 보이시는 경우는 있지. 그런 전사들은 보통 마을의 대전사로 임명된다오. 카르하께서 인정하셨다 여기는 거지.”
물을 한 모금 마신 우르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진정 위대한 영혼을 가진 전사에게는, 카르하께서 직접 살피시고 축복을 내리시지. 그런 전사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대전사요.”
“결국은 카르하를 섬겨야 한단 얘기 같은데.”
“그렇지 않소. 카르하께선 설사 대전사의 목표가 천상에 올라 자신의 머리에 도끼를 내리찍는 것이라 해도 상관하지 않으시니까.”
“그런 자가 정말 있었나?”
“있었소.”
우르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전쟁의 시대에 탄생한 대전사가 그랬지. 죽인 마족의 머리를 성상 앞에 놓으며, 당신의 머리에 도끼를 찍어 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웃던 자였소. 그는 카르하를 섬기지 않았소. 자신이 넘어서야 할 경쟁자로 보았을 뿐. 그런데도 때때로 축복을 내려주셨었지.”
“호오….”
“대전사는 상징적인 단어일 뿐이오. 책임지거나 얽매여야 할 것도 없소. 운명을 거스르고 자유를 위해 투쟁한 카르하가,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구속할 리가 있겠소?”
…하긴, 그런 설정이긴 했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안을 향해, 우르드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카르하께선 그저 지켜보실 따름이오. 언젠가 자신처럼 신격에 다다를 또 다른 초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내킬 때 축복이나 던져 주면서 말이지. 제 멋대로인 작자로군.”
“정확히 보셨소.”
우르드의 대답에 이안이 결국 풀썩 웃음을 흘렸다.
카르하가 사제나 사도 따위를 두지 않는 건, 단지 필요 없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뜻을 대행하고 교리를 설파하는 대신 축복과 신성을 내리는, 그런 관계 자체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그럼 그 놈의 축복은, 게임에선 확률적으로 작동한 건가? 그럼 정말 다른 리스크나 제약이 없을 수도 있겠는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확률형 옵션이나 스킬은, 그 자체로 이미 제약의 역할을 했다.
지하 궁전에서 손에 넣은 고대의 운철 단검에 붙은 장비 파괴 확률 옵션이, 아무런 소모 값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 대전사는 승천해 신이 되었소?”
이윽고 이안이 물었다.
우르드가 문득, 자신의 텅 빈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과거를 헤집는 듯한 시선.
“그건 모르겠소. 그는 결국 어떤 마족과의 전투에서 죽었으니까. 그것이 그의 정해진 운명이었는지, 운명을 거부하고 삶을 개척하다 맞이하게 된 최후인지는 알 길이 없소. 본인과 카르하만이 알겠지.”
우르드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적어도 카르하의 머리에 도끼를 찍지는 못한 것 같소. 아직 카르하께서 건재하신 것을 보면.”
‘…대전사가 된다고 운명이 정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란 거군.’
그저 가능성을 본 것뿐이리라.
그것만으로도 이안은 묘한 감흥에 휩싸였다.
카르하가 자신에게서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가능성을 보았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에도 허무맹랑한 말은 아닌 것 같소.”
다시 이안을 눈에 담으며, 우르드가 말했다.
“카르하는 마을의 그 누구에게도 귀하에게 보인 것 같은 관심을 두신 적이 없었소. 마을의 대전사인 꼬마 놈은 물론이고, 죽은 내 아들놈과 내게도. 귀하가 전사의 의식을 치른다면 카르하가 인정한 대전사가 탄생하게 될지도 모르지.”
“나 같은 외부인도 의식을 치를 수 있나? 심지어 난 북부인도 아닌데.”
“의식은 그저, 같은 인간들에게 보이기 위한 절차일 뿐이오. 카르하께선 그딴 건 신경도 쓰지 않으시겠지. 게다가….”
우르드가 이안의 얼굴을 가만히 훑었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진 혈통은 그리 흔하지 않소. 그리고 그중 하나가 북부에 있지. 귀하의 몸에 북부인의 피가 섞여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단 얘기요. 사실, 나도 그래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이건 그냥 랜덤하게 배합된 기본 외형을 선택한 결과일 뿐이야.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덕분에 호기심을 해결했군. 고맙소, 영감님.”
“별말씀을. 나도 이런 얘긴 오랜만이오. 어린 놈들은 이제, 이런 건 궁금해하지도 않거든.”
“그럼, 이제 영감님이 물으시려는 것도 들어봅시다.”
이안이 느긋하게 물었다.
입가에 옅게 맺혀 있던 우르드의 미소가 흩어졌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평소와 같은 덤덤한 얼굴로 되돌아온 그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우리 마을이, 정말 고난을 극복한 것이 맞소?”
“…….”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우르드가 덧붙였다.
“솔직한 대답을 원할 뿐이오.”
“당장은 넘어섰소. 하지만….”
이윽고 입을 연 이안이, 우르드의 외눈을 마주 보았다.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겠지. 이번보다 더할지 덜할지는 알 수 없겠소만.”
“그렇군….”
우르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제 즐거웠냐는 듯 칙칙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노인이, 이윽고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귀하께 의뢰를 하나 더 하고 싶소만.”
“일단 들어는 보겠소.”
“마을을 떠나실 때, 아스켈을 함께 데려가 주실 수 있겠소?”
***
이안은 마을 인근의 숲을 몇 시간이나 뒤져, 간신히 청설모 두 마리를 붙잡아 돌아왔다.
사냥감이 씨가 말랐다던 에스켈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마도 매일 밤 몰려오는 마물 무리에 겁을 집어먹고, 죄다 도망쳐 버린 것이리라.
“왜 이렇게 늦나 했네.”
테사이아가 이안을 반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느새,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샬롯은?”
“잠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어.”
“나갔다고?”
“지랑 비슷한 것들을 만나서 신난 모양이던데. 무슨 도끼 어쩌고 하는 별명도 붙었다던데. 촌스럽긴.”
하긴, 대우가 달라진 건 샬롯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그녀를 대단한 전사로 대우했다. 홀로 수십의 언데드를 도륙하는 것을, 마을의 모든 전사들이 본 덕분이었다.
보편적인 도시였다면 그녀를 더 두려워하거나 꺼렸겠지만.
문명화되었어도, 야인 전사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좀 살 만한가 보군.”
“낮보다는. 그거, 내 거야?”
“그래.”
이안은 꼬리를 잡아 들고 있던 청설모를 테사이아에게 던졌다.
재빨리 받아든 그녀가 냉큼 한 마리를 입에 물고는 읊조렸다.
“…이젠 피만 마셔도 무슨 짐승인지 알 것 같아.”
“맛이 그렇게까지 다르냐?”
무기를 풀며 이안이 물었다.
비쩍 말라 버린 청설모를 툭 내던지며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다양하게 맛없어. 사실, 맛있는 건 인간 피뿐이지만.”
“…….”
“왜 그렇게 봐?”
“마지막으로 사람의 피를 빤 게 언제지?”
“오래됐지. 네가 죽인 그 제국인들 피가 마지막이니까. 이젠 인간 피 맛이 가물가물할 지경이라고.”
잘하고 있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말했다.
“충동을 잘 다스려라. 계속 살아남고 싶다면.”
“…나쁜 놈들 피도 안 돼?”
잠시 침묵한 이안이 이윽고 대답했다.
“그놈들 피를 마시고도, 충동을 억누를 수 있다면.”
“자신 있어. 걱정 마. 나 갈수록 인내심이 늘고 있다니까. 요즘은 야옹이가 때려도 참잖아.”
“안 되겠군. 허락부터 구해라.”
“…방금 내 얘기 어디가 못 미더웠던 거야?”
“전부.”
“…….”
입술을 비죽인 테사이아가 또 다른 청설모를 입에 물었다.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화들짝 청설모를 집어 던진 테사이아가 빽 소리쳤다.
“노크 좀 해! 이 멍청한 짐승아!”
눈을 끔뻑인 샬롯이, 뒤따라 들어오던 아스켈을 몸으로 막으며 내뱉었다.
“깜빡했다. 앞으로 주의하지.”
“…뭘 주의하신다는 겁니까? 왜 들어가다 멈추신 거고요.”
아스켈의 물음에, 샬롯이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태연하게 대답한 건 테사이아였다.
“벗고 있었어. 옷 입는 중이니까, 훔쳐보지 마.”
“아… 네.”
탄식한 아스켈이 입을 다물었다.
테사이아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입가의 피를 꼼꼼히 닦았다.
평소라면 함께 피식댔겠지만, 이안은 웃지 않았다.
“됐어. 들어와.”
“목욕물부터 준비해라, 아스켈.”
이어진 이안의 말에, 아스켈이 재빨리 냄비를 챙기며 말했다.
“어제도 하셨는데. 목욕을 참 좋아하시는군요.”
“이안의 특이한 부분 중 하나지.”
샬롯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어차피 여정 중엔 잘 못 씻으니까, 씻을 수 있을 때 매일 씻을 뿐이다.”
“네 취향은 존중한다, 이안.”
언제부터 목욕이 취향이 된 거냐고.
이안이 고개를 젓는 사이, 목욕물을 능숙하게 준비하던 아스켈이 말했다.
“테사이아 님과 그런 관계이실 줄은 몰랐군요.”
이안의 머릿속을 한 번 더 헝클이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런 관계?”
“남녀 간의 관계요.”
“…….”
이안의 미간에 골이 패이는 사이, 테사이아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몰랐다니 의외네, 아스켈. 한눈에 알아봤을 줄 알았는데.”
…쟨 또 뭐라는 거야.
아스켈이 고개를 저었다.
“전 샬롯 님과도 잘 어울리신다고 생각했거든요.”
“엥…? 무슨 그런. 너 눈이 좀 이상한 거 아니니?”
테사이아가 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샬롯이 턱을 슬쩍 치켜들었다.
“안목이 뛰어난 거지. 애초에 너랑 나는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귀쟁아. 나는 너보다 크고, 강하고, 아름답지.”
“키 크고 힘센 건 알겠는데. 다른 건 동의 못 하겠는걸. 큰 게 키를 말하는 게 아니면, 그것도 포함해서. 애초에, 넌 짐승이잖아?”
“또 무식한 소릴 하는군. 우리 수인은-”
“그만.”
못 들어 주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말을 잘랐다.
둘을 싸늘하게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애 앞에서 헛소리하지 마라.”
“전 애가 아닙니다, 이안 님.”
아스켈이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안이 칼 같이 덧붙였다.
“나보다 어리면 애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내 동료지 연인 같은 게 아니야.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 펼치지 마라. 목욕물이나 부어.”
“…네.”
아스켈이 곧바로 움직였다. 입술을 비죽댄 테사이아가 드러눕고, 샬롯은 동료란 말도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벽면에 기댔다.
곧 이안이 욕조에 몸을 담갔다.
…이제야 좀 살겠네.
생각하던 그의 시선이, 다음 물을 올리는 아스켈의 움직임을 좇았다.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아스켈의 얼굴에는 아무런 그늘이나 고민도 없었다.
마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기쁜 듯 생기만 돌고 있을 따름이었다.
뇌리로 우르드의 목소리가 스쳤다.
트라벨가까지 저 녀석과 함께 가 달라는.
도시 인근의 야인 정착민들에게만 데려다주면, 나머지는 충분히 알아서 해나갈 수 있으리란 게 우르드의 생각이었다.
우르드가 그런 의뢰를 한 이유는, 물론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국 마을이 무너질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동의하는 부분이었지만, 이안은 그의 의뢰를 거절했다.
아스켈은 우르드와 함께가 아니라면 이주하지 않을 것이고, 녀석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르드는 걱정하지 말라며, 녀석은 마을을 떠나게 될 것이라 장담하듯 말했다.
날이 예리하게 선 장검을 보수로 내밀기까지 했다.
희귀 등급인 북부 전사의 장검.
이안은 아스켈을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리란 조건으로 의뢰를 받아들였다.
손자라도 살리려는 늙은 전사의 마음을, 아예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영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우르드가 저 녀석을 어떻게 설득할지는 여전히 의문인 데다, 퀘스트가 뜬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퀘스트는 일종의 이정표였다.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흐름이 있음을 알려 주는.
퀘스트가 없다는 것은,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테사이아가 그렇듯이.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스켈이 불쑥 물었다.
이안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오늘 샬롯 님과 마을을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세 분이 계속 마을에 남아 주시길 바라더군요. 산맥에서 내려온 분들이니, 카르하가 보내 주신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카르하가 보낸 것도 아니고, 마을에 계속 남을 수도 없다. 연회가 끝나고 나면 떠날 거야.”
“…아쉽군요. 남아 주신다면, 머잖아 대전사가 되셨을 텐데요.”
“…….”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퀘스트 창에 멈춰 있었다.
북부의 대전사.
“그래도 내일 연회는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전사들이 전부 사냥을 다녀와서, 고기를 마음껏 드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퀘스트 창을 닫으며 대답한 이안이,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