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98
098화
아스켈과 우르드의 고개가 동시에 이안 쪽으로 돌아갔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성상은 결코 함부로-”
“장담하는데, 카르하는 그딴 건 신경도 안 써. 버리고 가도 그러려니 할 거다.”
“…….”
우르드가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새로운 북부의 대전사는, 과감해도 너무 과감했다.
심드렁하게 걸음을 옮긴 이안이, 문을 나서며 덧붙였다.
“난 이제 손 뗄 거니까, 나머진 알아서들 하시오.”
“…알겠소.”
우르드는 더는 붙잡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나쁘지 않군.”
마차에 올라탄 이안이 중얼댔다.
지켜보던 주민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르드가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오.”
이안 일행을 위해 만든 마차는, 마을의 몇 없는 장인들이 정성을 다한 물건이었다.
바람을 막아 줄 벽면과 천장에 작은 창문도 뚫어 놨고, 짐승 가죽을 깔아 둔 내부에는 널찍한 의자도 놨다.
대전사가 타기에 손색없는 튼튼한 마차.
거기다 말도 가장 건강하고 튼튼한 놈들로 둘이나 붙였다.
체구는 작지만 다리가 굵고 갈기가 풍성한, 북부 혈통의 말이었다.
“트라벨가로 가신다고 하셨죠.”
우르드의 옆에 선 아스켈이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아는 지휘관도 아마 지금쯤 거기에 있을 거다. 그자에게 너희들이 이주를 알려 주마. 관문을 통과할 때 수월하도록.”
우르드를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야인 정착지를 지나게 되면, 거기에도 말해 두겠소.”
“감사할 따름이오.”
“마차와 말을 내준 보답이오. 그 이상은 신경 안 쓸 거니, 알아서들 하시고.”
“우리도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움직일 것이오. 곧 눈보라가 몰아칠 것 같아서 말이오.”
우르드의 말에, 이안이 설핏 미간을 좁혔다.
“눈보라?”
“사냥을 나갔던 전사들이 알려 줬소. 산맥 너머의 구름이 심상치 않다더군. 보통은 산맥 너머로 끝나거나 인근에만 몰아쳤지만, 작년부턴 마을 근처까지 먹구름이 내려왔었소. 그러니 올해는 더하지 않겠소.”
“흐음….”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우르드를 돌아봤다.
“서두르셔야겠군. 여기 갇혀 있는 동안,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의 눈빛에서 불길함을 느낀 우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이안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후려쳤다.
“트라벨가에서 또 뵙겠습니다, 대전사님.”
테사이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가운데, 아스켈이 말했다.
이안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피식댔다.
“그래. 그때까지 내가 거기에 있다면 말이지.”
마차가 멀어졌다.
마차를 가만히 응시하던 아스켈이, 문득 입을 열었다.
“믿어지세요, 영감님? 저 이방인들이, 고작 며칠 만에 마을 전체를 구원했다는 게.”
우르드가 손자의 머리에 하나뿐인 손을 얹었다.
“그렇기에 대전사인 것이다. 대전사는 범인들이 불가능하다 여기는 일조차 아무렇지 않게 해내지.”
운명이라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적을 상대로 싸우는 자들이기에.
뒷말을 삼킨 우르드가 몸을 돌렸다. 한시라도 빨리 준비를 끝내고 이주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북부의 대전사가 마지막 순간 보여 준 눈빛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으니까.
하지만 그의 걸음은 이내 멈췄다.
“…….”
주민들의 뒤에 선 거대한 덩치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이가 빠져 홀쭉해진 입과 긍지를 잃고 주눅 든 눈.
마을의 대전사였던 발레리였다.
“영감님… 나는… 그저….”
발레리가 뭉개지는 발음으로 웅얼댔다. 곁으로 다가선 우르드가, 손목만 남은 팔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야망은 전사의 특권이지. 과거를 변명하지 말게. 자네 같은 젊은 전사는, 뒤가 아니라 앞을 봐야지.”
“……!”
발레리가 우르드를 돌아보았다.
늙은 전사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몸도 다 나은 것 같은데, 잡생각 말고 힘이나 쓰게. 성상을 실을 만한 마차를 만들어야 하니까.”
***
구불구불한 숲길을 빠져나온 마차가 마침내 관도에 올랐다.
의자에 기대앉은 이안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상념은 크게 두가지였다.
야인 마을과, 고위 마법.
레벨이 오른 이래, 그는 아직까지 스킬을 단 하나도 찍지 않았다.
어떤 속성의 고위 마법을 먼저 배울지 전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당장 곧바로 배울 수 있는 고위 마법도 없었다.
고위 마법을 익히려면, 해당 스킬 트리의 경로에 놓인 상위 마법을 전부 찍어야 했으니까.
게임일 때의 이안 호프는 상위 마법을 익힐 수 있는 레벨임에도 중위 마법까지 밖에 배우지 못한 망캐였다.
현실이 된 후로 스킬 포인트를 추가로 얻으면서 상위 마법을 몇 개 익히긴 했지만.
아직도 고위 마법에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를 익히려면 가진 스킬 포인트를 다 써야 할 것 같은데….’
이안이 짧게 혀를 찬 그때였다.
“가는 곳마다 재미있는 일이 생기네.”
가죽으로 만든 넓적한 띠를 만지작대던 테사이아가 문득 내뱉었다.
…그만큼 죄다 개판이란 얘기지.
이안이 심드렁하게 코웃음 치는 사이, 샬롯의 비아냥이 이어졌다.
“그러셨겠지. 넌 구경만 했으니까.”
“재미있는 일이 생긴댔지, 내가 재미있었다곤 안 했거든. 멍청아.”
인상을 찌푸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나도 편하게 돌아다니고 싶다고. 솔직히 이번 마을에선 네가 제일 신났던 주제에.”
“부정하진 않겠다. 결국은 전사들과 함께하는 게 가장 편하더군.”
“앞으론 나도 사이에 낄 수 있을 거야. 이게 있으니까.”
테사이아가 만지작대던 띠를 들었다.
뒤를 돌아본 샬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스켈이 네게 가져다주는 건 봤다만. 또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거냐.”
“어머. 이젠 네가 말한 것도 기억을 못 하는 거니, 짐승아?”
놀리듯 내뱉은 테사이아가 띠를 얼굴에 뒤집어써서 눈을 가렸다.
사락, 잿빛 머리카락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그 위를 덮었다.
테사이아가 보란 듯 이안 쪽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이러면 내가 뱀파이어란 건 아무도 모를 거야.”
“…제정신이냐? 정말 눈을 가리고 다니겠다고?”
샬롯이 되물었다.
이안도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안대를 쓴 테사이아를 내려다보았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이지. 나는 눈이 안 보여도 주위를 식별할 수 있으니까. 밤에는 특히 더 선명하게.”
“어떻게?”
이안이 툭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머리칼을 들어, 끝이 뾰족한 자신의 귀를 드러냈다.
“소리랑 냄새로.”
“…….”
자신만만한 태도로 봤을 때,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건 요정의 특성일까, 아니면 뱀파이어의 특성일까.
잠시 생각한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트라벨가로 간댔지. 거기서도 재미있는 일들이 생길까, 이안?”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안이 턱을 괸 채 말했다.
“글쎄 가 봐야 알겠지. 어쩌면….”
그가 테사이아를 슬며시 내려다봤다.
“오래 머물지 않고 루 사드로 내려갈 수도 있을 거다.”
“……!”
테사이아가 순간 얼어붙었다.
달콤한 꿈을 꾸다 갑자기 현실 한복판으로 떨어진 것 같은 표정.
“루, 루 사드로…?”
그녀가 간신히 되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까지나 내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그 예상이란 게 뭔데?”
“…….”
이안은 대답 대신, 마차 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게임에서의 북부는, 산맥에서부터 쏟아져 나온 언데드들의 물결로부터 상당한 피해를 입었었다.
그 피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검은 벽이 발작을 일으키면서, 결국 국경 지대가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안이 지하 궁전에 잠들어 있는 여왕을 죽인 지금.
어쩌면 산맥으로부터의 침공은 없는 일이 됐을 수도 있었다.
게임 내내 최악의 선택만 했던 그가 알 수는 없는 미래지만.
게임에선 비극으로 끝났던 이야기들을 여럿 바꿔 온 입장에선, 가능성이 아예 없어 보이진 않았다.
심지어 야인 마을만 해도, 게임에선 망령들의 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전멸했었을 터였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면…. 당분간 북부엔 별 볼 일이 없겠지.’
“꼭 바로 루 사드로 가야 할까?”
그때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그녀 역시, 잠깐의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눈을 가리고 있어 눈빛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심판자들이 날 계속 쫓을 테니까, 찾아오는 놈들부터 하나씩 정리하는 게 훨씬 쉽지 않겠어? 거긴 그 흡혈귀들의 소굴인데.”
“그래. 당장은 그럴 수도 있겠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영원히 심판자를 보내지는 않을 거다. 손해가 너무 크니까.”
이안은 아스콜드를 상대할 때, 끝내 놓쳤던 사념을 떠올렸다.
그게 아스콜드에게 일어난 일을 흡혈 일족에게 전달하는 용도였으리라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안이 던진 화염구에 맞아 상당 부분 훼손되긴 했겠지만.
어떤 정보가 끝내 살아남았을지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저들은 네 곁에 나와 샬롯이 있는 것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에 맞는 대비를 했을지도.”
“대비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야?”
“글쎄….”
이안은 턱을 괸 손가락만 까딱였다. 몇 가지 뇌리를 스치는 생각들이 있지만, 굳이 말해줄 생각은 없는 표정이었다.
테사이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긴. 적들은 그녀에 대해 잘 알겠지만, 정작 그녀는 적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뭘 망설이는지 모르겠군.”
샬롯이 한심하다는 듯 내뱉었다.
“네 의뢰고 네 복수다, 겁쟁아. 네 말대로면 우린 언젠가는 반드시 루 사드에 가야 해. 그저 그 순간이 조금 미뤄지느냐 앞당겨지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그래. 간만의 옳은 말이네, 야옹아.”
이윽고 내뱉은 테사이아가 고개를 들었다.
“도망치지 않는 건 참 어렵네, 이안. 하지만 해 볼게. 내가 부탁한 주제에, 괜한 소릴 했어.”
“알긴 하는군.”
피식댄 이안이 덧붙였다.
“내 말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야.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확실한 게 하나 더 생겼어.”
“……?”
“난 앞으로도 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그럴 수밖에. 넌 이 세계가 원래는 게임이었다는 걸, 영원히 알 수 없을 테니까.
내가 그 게임을 플레이 하던 주인공이라는 것도.
쓴웃음을 삼킨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지금은 네가 그걸 끼고도 싸울 수 있을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
“오늘 밤부터 확인해 볼 거다. 나랑 샬롯이 고생할 동안 뒹굴기만 했으니, 밥값은 해야지.”
“…….”
***
테사이아는 정말 눈을 가리고도 잘 싸울 수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마물들의 습격은 다시 매일 밤 이어졌다.
유별나게 사나운, 굶주린 마물들.
물론 놈들을 상대하는 건 테사이아와 샬롯의 몫이었다.
어차피 경험치도 주지 않을 놈들이었기 때문에, 이안은 아예 싸움에 나서지도 않았다.
물론 샬롯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몸이 녹슬 틈이 없겠군. 좋아.”
뜻밖에도 테사이아도 그랬다.
이안이 마물의 피를 빠는 것까진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만성적인 갈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간만에 마음껏 날뛰며 갈증을 풀 수 있었다.
“그래도 특별한 맛이 나는 녀석들은 없네. 죄다 별 볼 일 없어. 쓸데없이 사납기만 하지.”
“굶주린 놈들이니 사나운 거야 놀라운 일도 아니다만.”
사흘째 되는 날, 싸움을 끝내고 돌아온 샬롯이 모닥불 옆에 앉으며 내뱉었다.
“우릴 보고 달려드는 놈들과 그냥 지나치는 놈들의 차이를 모르겠군.”
“지나치는 놈들…?”
육포를 질겅대던 이안이 물었다.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릴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치는 놈들도 있다. 오늘에서야 확실히 알겠군.”
“나도 느끼긴 했어. 그냥 걷기만 하는 것들.”
테사이아가 거들었다.
이안이 어둠 너머를 돌아보았다.
“지금도 그런 놈들이 느껴지나?”
“아까는 느껴졌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차피 멀리 가진 못했을 텐데. 필요한가?”
샬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전에도 다가오지 않는 놈들은 있었지만….’
잠시 생각한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말대로면 내일도 그런 놈들이 있을 테니까, 그때 부탁하도록 하지.”
하지만 다음 날 밤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떨어지지 마!”
“간격 유지해라! 온다!”
관도 저 너머에 또 다른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물의 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렁이는 횃불들과 마차들.
그리고 그 주위를 포위한 채 물결치듯 내달리는 잿빛 마수 무리를 눈에 담은 샬롯이 미간을 좁혔다.
“상단 같은데. 장벽 너머까지 나오는 간 큰 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어쨌건 우리한텐 잘된 일이야.”
마부석으로 나오면서, 이안이 말했다.
“관문까지 함께 갈 동행이 생길 테니까.”
테사이아에게 마차 안에 남아 있으라 말한 이안이, 싸우기 시작한 상단 무리를 바라보며 내뱉었다.
“속도를 올려라, 샬롯.”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