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237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37화
청려에게 건 전화는 몇 번의 신호음 이후 연결되었다.
다만 ‘여보세요’ 같은 상식적인 인사는 안 나왔다.
-살아 있네요.
이럴 줄 알았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아, 죽길 바랐다는 건 아닌데.
“특별히 꼭 살아 있길 바랐단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내가 뒤지면 대상 경쟁자 하나가 낙오되니 개이득이라고 생각했다면 모를까.
그러나 전화 너머 목소리는 웃지 않았다.
-재시작 못 한다며.
“…….”
-그럼 살아 있어야죠. 희한한 소리를 하네.
얼씨구.
이 또라이에게 비상식으로 질책당하는 상황이야말로 희한하다.
그러나 좀 유쾌한 측면이 있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코마에서 봤던 미친놈이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다니, 진짜 시간이 약인 모양이군.
물론 리셋 버튼을 뺏겨서겠지만.
“뭐, 걱정은 고맙습니다. 어쨌든 전 멀쩡합니다.”
-그래요. 그런데 왜 전화했어요?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나는 계산을 마친 후, 곧바로 말했다.
“혹시 모레나 그다음 날 오전에 시간 됩니까?”
-묻는 이유는?
간단하다.
“병문안이 가능해서.”
환경상 내가 나갈 순 없으니 이놈을 불러야겠지.
전화 너머에서 그제야 웃는 소리가 들렸다.
* * *
청려는 몇 가지 딜과 조율 끝에 사흘 뒤 주말 오전에 방문하겠다는 말을 뱉었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 때문에 거의 매일 돌아가며 방문하던 다른 놈들이 주말을 맞아 본가에 돌아가기에 기획이 가능한 일이었다.
아, 한 놈 빼고.
“멜론 언제 먹어요?”
“병원이 허락하면.”
“저 물어볼래요!”
“참아라.”
차유진은 주말에도 숙소에 있는 본인을 불쌍히 여겨 병실에 상주 중이다.
이놈이 다쳤다는 소리에 부모님이 입국하셨다고는 하는데, 지난주에 귀국하신 모양이다.
하긴, 직장인이 타국에 2주 이상 체류하는 건 힘든 일이다. 아무리 미국이라도 더 휴가를 잡기 어렵겠지.
나는 멜론 대신 큼직한 개량품종 귤 몇 개를 놈에게 던져주었다. 선아현이 사 온 것이다.
아마 보관성이 좋으니 식이 허락이 떨어졌을 때 바로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산 것 같으나… 그때까지 남을 것 같진 않군.
“먹어라.”
“당도 최고예요?”
큰세진한테 배웠냐.
“어.”
“와!”
나는 귤을 까먹는 차유진을 보았다.
사실 이건 일종의 뇌물이다.
“…30분쯤 뒤에 누가 올 건데, 다른 멤버들한테는 굳이 말하지 말지.”
“형 손님이요?”
“비슷해.”
“누구세요?”
“VTIC 청려.”
“오우.”
차유진은 귤을 덥석덥석 삼키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Okay~”
됐군.
이런 건 깔끔한 놈이라 편했다. 토 안 다는 개인주의 성향이 빛을 발하는데.
“그런데 왜 와요?”
이게 귀찮아서 그렇지.
“다음 활동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
“저한테 물어봐요!”
“…오래 활동한 사람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야.”
“에이.”
다행히 질문 공세는 여기서 마무리되었으나, 청려가 도착하면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건 뻔했다.
그리고 삼십 분 뒤.
“저도 들을래요!”
역시.
“가서 간식이나 사 먹어라.”
“우우…….”
그래도 앞에서 상대해 준 덕에 단호한 명령이 먹히는군.
차유진은 투덜거리면서 나갔다. 그래도 청려에게 한국식 유교 인사를 잊진 않았고.
“선배님 안녕하세요!”
타탕!
허리를 꾸벅 숙인 놈이 병실 문을 호쾌하게 닫고 나간다.
청려는 나가는 놈을 빤히 보다가 웃었다.
“까다로운 타입인데, 팀 분위기가 좋은가 보네요. 제어가 가능하고.”
“…….”
“비슷한 놈을 다뤄본 적이 있는데… 16개월 만에 스케줄을 펑크내더라고요. 음, 그게 6번째였나? 하하.”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데에 정말 재주 있는 놈이다.
어쨌든, 나는 팔짱을 끼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널 초청한 이유는 당연히 긴급 상황 때문인데.”
“네.”
“미션을 실패할 것 같다.”
“…….”
굳이 감출 건 없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판에, 리셋도 막힌 불발탄 정도야 적재적소에 활용 가능하지.
“이번 미션이?”
“40만 명 관객 동원.”
“…….”
청려는 잠시 생각이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굉장히 구체적이네?”
“…….”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재밌네.”
역시.
‘뭔가 눌렸군.’
상태창 이야기는 만일의 경우라도 더 미뤄야겠다.
그러나 이 정도는 구체적 조건을 안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해야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더 정밀한 예측값이 필요해.’
투어가 취소된 이상 돌연사 확률은 끝도 없이 치솟고 있으니까.
놈이 맨땅에 헤딩하던 자신과 나의 차이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거기서 더 발상이 나아가지 않도록 잡아야 한다.
‘환기한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건 나쁘지 않지. 안 그래도 미션이고 나발이고 교통사고 때문에 황천 앞까지 갔다 왔는데.”
“…원래, 이 직업이 변수가 많긴 하죠.”
“그래, 덕분에 활동 2년 동안 벌써 두 번이나 죽을 뻔했지.”
“두 번?”
“어, 첫째는 너.”
놈이 웃음을 터뜨렸으나, 곧 약간 미안하단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머리가 돌아온 것 같군.
개 사진 20장을 받고 건 도박이 성공한 모양이다.
‘역시 약간의 부채감과… 동지 의식 같은 게 남아 있다.’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개 사진 보내줄 정도의 호의는 된다는 뜻이다.
그래도 이 새끼가 정상은 아니니 다른 생각 하기 전에 빨리 넘어가자.
“어쨌든, 덕분에 투어는 취소되었고 난 병원에 발이 묶여 있지. 그런데 관객을 30만 명은 더 만나야 해.”
“흠, 연말에 돔 투어를 새로 잡는 건 힘들 텐데요.”
“그래.”
연말연시는 대목이다. 이미 테스타가 돌 규모의 공연장은 대부분 주말 대관이 다 끝났다.
게다가 이놈에게 말할 순 없지만, 소송까지 들어가면 투어는 무슨, 올해 연예계 활동 자체가 물 건너갔고.
그리고 청려는 제일 상식적이고 고려할 법한 대안을 들이밀었다.
“비대면 공연은?”
“…그게 문제지.”
나는 미간을 눌렀다.
“카운트 기준이 애매해.”
“…….”
내가 사고당하기 직전에 했던 팬미팅.
그 공연은 온라인으로 동시 송출되었으나, 실시간 유료 관람객과 불법 관람객은 모두 카운트되지 않았다.
오로지 현장 관객만이 ‘관객’으로 카운트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비대면은 소용이 없는 것 같지?
하지만 또 아예 비대면을 기준으로 기획했던 몇몇 공연들은 일부 카운트된 것들도 있다.
‘실시간 유료 W라이브로 진행한 컴백쇼 라이브 몇 번은 카운트됐었지.’
시청 중인 관객의 문자나 피드백이 전광판에 뜨는 구성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경향성을 고려했을 때, 매우 모호한 기준 하나가 나왔다.
“공연 내에서… 내가 관객을 인식했을 때만, ‘관객’으로 인정해 주는 것 같던데.”
내가 관객을 인지해야만 한다. 숫자가 아니라 그 자체를.
그 열정과 기운을.
“아.”
청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연극적 의미의 관객이었나.”
“연극?”
“리액션(Reaction)의 존재도 공연의 일부라는 거죠. 음, 좀… 촌스럽긴 하지만.”
“…….”
나름대로 먹물 좀 먹은 삶도 살아본 모양이다. 빠르게 개념을 설명할 줄 아는군.
청려는 턱을 쓸었다.
“어쨌든… 그럼 좀 까다롭긴 하겠는데요.”
“맞아.”
나는 혀를 찼다.
“실시간으로 소통이 가능한 관객을 동시에 30만 명쯤은 모아야 하는데, 힘들지.”
단순히 VOD 구매가 아니라, 30만 명을 컴퓨터 앞에 동시에 붙잡아 둬야 한다.
‘…횟수를 늘려도 한계가 있다.’
아마 공연 구성을 계속 바꿔서 하더라도 2회를 넘는 순간 집계되는 실시간 관람객 수치는 계속 하락할 것이다.
한계 효용과 희소성의 법칙에 따라서.
바쁜 현대인이 결제만 해둔 뒤 시청은 뒤로 미뤄서.
그리고 ‘하나 정도는 결제했으니 나머지는 무료로 봐도 괜찮겠지’라는 자체 발부된 면죄부를 통해서.
청려가 내 고뇌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음, 정 그러면 VTIC 투어 게스트라도 할래요? 한두 달만 고생하면….”
“돌았나.”
“하하!”
본인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 뻔뻔히도 묻는군.
VTIC 콘서트에 게스트 출연?
그야말로 지옥이 도래한다.
내가 부상에서 회복하자마자 남의 콘서트에 게스트 출연하면 테스타 팬덤이고 VTIC 팬덤이고 황천의 지옥 불처럼 달궈질 것이다.
그러나 청려는 태연했다.
“죽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생각해 봐요.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
물론 VTIC은 변명거리가 테스타 보단 많을 테니 버틸 만할 것이다.
‘그래도 손해는 손해인데.’
그것도 완전무결 탑티어 아이돌에 편집증 수준으로 집착하는 이놈이 이런 미친 제안을?
코마 상태에서 받았던 VTIC 메인보컬 합류 제안이 떠오를 지경이다. 나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왜 굳이 손해를 보려는지 모르겠는데.”
“음, 미안하니까요?”
“…….”
지금 나랑 농담하는 건가 싶어서 놈의 기색을 살폈으나, 기만질이나 정신 나간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신 제법 차분했다.
“내가 한두 번… 심하게 방해한 적이 있으니, 빚을 갚는다고 치죠. 어때요.”
“…흠.”
아무래도 이번 사고로 내가 뒈질 뻔한 꼴을 보며 이놈도 자신의 지난 행적을 뒤돌아본 모양이다.
‘개 키우는 게 정말 멘탈에 도움이 되긴 하나 보군.’
그러나 저런 하책에 투자할 생각은 없다. 다시 지금까지 논의를 검토해 본다.
‘내가 쓸 수 있는 자원이….’
내 능력치, 인맥, 시간, 돈…….
‘…돈?’
“…!”
나는 눈을 부릅뜰 뻔했다.
찾았다.
“아니, 그 방식은 안 쓸 거다.”
“그럼?”
“…비대면 공연을 할 거야.”
나는 단호하게 말을 끝냈다.
“전면 무료로.”
“…!”
다른 한계점들은 모르겠으나, 돈으로 생기는 진입장벽은 내가 커버할 수 있다.
‘콘서트 올리는 비용 정도는 댈 수 있겠지.’
안 쓰고 그냥 둔 돈이 꽤 돼서 말이다. 남의 지원은 필요 없다.
“아, 합의금이라도?”
그러니까 이런 제안도 말이지.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니. 다른 걸로 받고 싶은데.”
무료 공연의 가장 큰 걸림돌은 돈이 아니다.
기존 계약이다.
‘테스타는 W앱과 3년 독점 계약을 했어.’
그리고 W앱은 무료 공연을 지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테스타의 온라인 콘서트 송출은 무조건 W앱을 통해야만 했기 때문에, 나는 우회로가 필요한 것이다.
“너희 플랫폼 좀 빌리자.”
바로 LeTi가 해외 펀딩 업체와 합작으로 만든 전시·공연 플랫폼 말이다.
‘테스타가 아니라 멤버 솔로는 계약서에 명시 안 되어 있었어.’
나머지 상도덕이나 대중 여론 문제야 공연 방식을 조절하면 되기 마련이고, 이놈 끼고 하면 훨씬 수월하고 빠를 것이다. 회사 간판이니까.
‘지금은 이게 제일 필승 조합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청려 놈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요.”
네놈 제안보다야 그렇지. 나는 혀를 찰 뻔한 것을 참으며 덤덤히 대답했다.
“VTIC 투어 따라다니는 것보다야 당연히 낫겠지.”
“네? 하하. 당연히 그렇죠.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겠어요?”
“…….”
“그냥 그런 것까지도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는데, 그럴싸하게 들렸나 보네.”
X새끼 기만질 맞았잖아.
분명 코마에서 만난 새끼도 VTIC 메인보컬은커녕 단물만 빨아먹고 팽했을 것이다, X발.
* * *
박문대는 순간 극대노했으나, 곧 침착함을 되찾고 청려와 빠르게 세부 사항 합의를 끝마쳤다.
그리고 곧바로 회사에 연락하여 ‘새로운 플랫폼과의 컨택’을 심도 있게 이야기했다.
‘쉽네.’
시선을 돌려 뒤숭숭한 분위기를 잠재울 수 있다는 계산속에서, 회사는 초토화된 상태면서도 제법 빠르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주말을 지나 월요일 아침에 바로 결재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예, 감사합니다.”
물론 택도 없는 오판이었으나, 박문대는 즐겁게 그들의 오판을 용인했다.
‘이대로 순조롭게 가면 좋겠군.’
이제 멤버들만 설득하면 되겠다며, 박문대는 월요일 오후 멤버들의 방문 시각이 겹치도록 조정했다.
‘한 번에 논의하는 편이 좋겠지.’
그리하여 며칠 뒤.
박문대는 식은땀을 흘리며 멤버들에게 자숙과 반성의 시간을 강력히 강요받게 된다.
“박문대, 앉아서 들어.”
어찌 된 일인지 멤버들은 다 관련 소식을 이미 전해 들은 상태였다.
차유진은 참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에 물어봤어요!”
‘이놈이.’
물론 본인 업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