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294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294화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몰아쳐서 들어간다.’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책상 위에 잘 보이게 올려두었다.
그리고 마치 지난번에 이 새끼가 나한테 그랬듯이 녹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대상 노리는 거죠?
-가수면 다 그렇겠지.
채서담이 녹음한 것보다 훨씬 깨끗한 음질의 음원.
“…!”
내가 녹음한 것이다.
“녹음을 그쪽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나는 재생을 중지시키며 피식 웃었다.
“설마 내가 선배랑 반말 좀 했다고 질질 짜면서 밝히지 말아 달라고 할 줄 알았나.”
“…….”
“당장 예능이라도 하나 나가서 그 선배랑 친한 증거 삼아 풀면 그만이야.”
채서담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해보려 애쓰는 것 같았다.
상황에 별 도움은 안 되지만, 현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반사적으로 반박할 말을 찾게 되는 것이다.
‘기다려 줄까.’
놈은 몇 초가 더 흐른 후에야 다급히 입을 열었다.
“신곡 뜬 거! 다 기획한 거라는 말도….”
아, 그거.
“글쎄. 내가 그랬나. 말 길어지기 싫어서 그냥 넘어간 건데… 다 상황 붙이기 나름 아닌가.”
나는 긴말 없이 다시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주소록에 들어가서, 전화 걸기.
[VTIC 신청려 선배님]띠리링, VTIC의 이번 신곡 어쿠스틱 버전 멜로디가 잠시 통화음으로 가다가… 끊긴다.
달칵.
-안녕하세요, 후배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저희 지난번에 대기실에서 대화했던 거 말인데, 예능에 소스로 좀 줘도 괜찮을까요.”
전화기 너머로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게 좀 거슬렸으나, 어쨌든 청려는 예정대로 대답했다.
-그럼요. 그렇게 해요. 말 놓으라고 한 건 나니까.
“감사합니다.”
-뭘요.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렇다고 하는데.”
“…….”
자, 네가 약점이라고 희희낙락하던 건 둘 다 날아갔다.
눈앞의 멍청이는 아까 희번덕거리며 달려들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얌전해졌다.
‘눈 뒤집힌 것도 오래 못 가나.’
자기 보신 욕구 한번 정말 강한 놈이다.
나는 여기가 한 단계 더 압박 수위를 끌어올릴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빠르게 대화를 바꿨다.
“그래서 이건 그쪽 의문에 답변이 된 것 같고… 다음은 원래 이야기하려고 했던 학교폭력 제보 말인데.”
내 약점을 막았으니, 이번엔 네 약점을 말해보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냥 피해자가 기자와 인터뷰하는 게 깔끔하지 않나.”
“…!!”
“아무래도 이런 건 공식적으로 하는 편이 사회적으로도 좋은 메시지가 될 것 같고. 증거도 충분하니 다들 믿을 것 같다.”
증거.
지금 이 새끼 머릿속에 선아현과 했던 대화가 떠오르고 있다는 데에 녹음을 걸겠다.
나는 말을 마무리했다.
“그쪽이 지금도 녹음하면서 다른 사람 약점 잡으려고 했다는 정황까지 붙이면 딱 떨어질 것 같아서. 바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끝.”
나는 스마트폰을 도로 집어 들며 자리를 정리했다.
할 말 다 끝났다는 제스처다.
“…그!”
채서담은 폭격 맞은 듯이 놀라서 일어났다.
“자, 잠깐. 이건… 왜, 이걸 왜.”
그래, 왜 너 같은 놈한테 구구절절 이런 걸 이야기하는지 물어봐 주는 거지? 고맙군.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포기하라고.”
“…….”
“그냥 다 풀기로 이야기됐으니까, 당사자한테 공지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통보였다.
“…….”
채서담은 자리에 굳었다.
평범한 반응이다. 이쯤 오면 보통 사람은 압도당한다.
상대에게 협상 의지도 없고, 자신의 준비는 다 파훼당했고, 이제 네 약점을 치명적으로 공격할 것이란 예고까지.
당장은 마치 빠져나갈 구석 없이 몰렸다는 생각부터 드니까.
후회와 불신.
그리고 자아 비대한 이 새끼는 색다른 결과를 머릿속에서 도출해 내는 것이다.
“대체 저한테 왜 이래요?”
남 탓이다.
“제가 그쪽한테 뭐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 선아현과 학교 다닐 때 사이 나빴다는 이유로 이렇게 되는… 이게 말이 돼요? 진심인… 왜 이런 짓이.”
채서담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선아현 말만 믿고 사람을 이렇게 만들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일방적으로 매장하려고….”
“그런가.”
나는 무심히 말했다.
“네가 선아현한테 했던 건 그 환경에서 누구나 할 만한 일이고, 네가 다른 놈한테 당하는 건 비겁하고 억울한 일이다?”
“…….”
“너도 선아현한테 그 짓 할 때 어떻게 상대에게 피해를 줄지 다 알고 있었잖아. 날 녹음할 때도 마찬가지고.”
채서담은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이런 새끼들은 꼭 자기가 X 같이 고통받아야 반성 비슷한 거라도 하더라.
“나라면 창피해서라도 그 소리 못할 텐데. 결과에 승복하는 게 낫지 않나.”
물론 승복할 놈이 아니라는 걸 알고 꺼낸 말이다.
“아니, 선아현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피해를 입….”
그래, 이런 걸로 반성할 놈이면 여기까지 안 왔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본인이 하겠다는데 내가 그런 것도 생각해 줘야 하나. 알게 뭐야.”
“…!!”
“내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채서담은 입을 딱 닫았다.
이쯤 오면 이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새끼 진짜 미친 또라이다.’
‘진짜 X발 멤버든 그룹이든 타격이 있든 말든 다 풀어버려서 날 조질 생각이다.’
…라는 게 절절히 다가오겠지.
더불어 자신을 조지는 수위에 대해서도 아마 본인의 상상력을 있는 대로 써서 끌어올려 지옥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저 새끼가 내 사회적 죽음을 준비하는구나!’
‘음.’
물론 뻥이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릴 생각은 없다.
‘그냥 위협이지.’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지는 거지. 안 그래? 증거 있다잖아.”
“아, 아니…….”
이것도 마찬가지.
선아현이 정황 녹음을 했던 것을 우리끼리 토의하며 깨닫긴 했다. 그러나 그 파일은 음질 문제로 채서담 본인을 확인하기 어렵다.
남은 건 선아현이 처음 거론했던 상담기록뿐인데, 이건 온갖 여론이 달라붙어 개싸움될 가능성이 크다.
뭐, 그런 걸 다 떠나서 안 그래도 다사다난했던 이 그룹에 또 활동 외 사생활적 요소를 올려줄 생각은 없단 말이다.
하지만 채서담은 그걸 모른다.
“…….”
놈은 이 거대한 블러핑에 완전히 휘몰려서 침몰했다.
그리고 전의를 상실하고, 울거나 화낼 생각도 못 할 만큼 패닉 상태에 빠진 것 같다.
‘이대로 한 일주일 두고 싶지만….’
그러다간 또 변수가 튀어나올 수 있으니, 슬슬 동아줄처럼 보일 걸 줘볼까.
나는 스마트폰을 탁자 밑에서 한번 만졌다.
슬슬 마지막 조력자가 등장할 타이밍이었다.
몇 초 뒤.
-똑똑똑!
황급한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혀, 형들.”
“…!!”
골드 2다.
놈은 다급과 긴장 사이 어딘가의 표정이었다.
“…권희승.”
채서담은 질린 와중에도 별 시나리오를 다 쓰는지, 휙 고개를 돌려 놈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골드 2의 다음 말이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변했다.
“회의에서 이야기, 듣고 왔는데…. 문대 형, 그, 아무리 그래도 공식발표까진 참아주시면 안 될까요.”
“……음.”
나는 의도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갈등하는 것처럼.
“…!”
그러자 채서담의 눈에 순간 번뜩임이 돌아왔다.
희망이다.
“서담이 형도 진짜 많이 반성하고 있을 거예요. 그, 그렇지 형?”
채서담이 진심 어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급히 입을 연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해볼 만한 타이밍이란 걸 깨달았군.
“예.”
“녹음해서… 그, 이용하려고 해서요.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오해를 해서….”
“음….”
나는 적당히 뜸을 들인 후에 대답했다.
“이런 상황 안 됐으면 사과 안 했을 것 같긴 한데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지금 상황이라 서담 형도 딱 이해를 했다니까요?? 혀, 형. 뭘 이해했는지 말 좀.”
골드 2의 말에 채서담이 머리를 굴리는 게 보인다.
결국 놈은, 아까 내가 했던 말을 거의 답습했다.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까지, 잘해보려고 하면 안 되겠구나… 그건 잘못된 노력이구나, 하는걸. 예.”
‘좋아.’
결국 이 말이 나왔군.
저 뻔한 명제를 지금까지 실컷 어기며 살았던 놈이 말하는 게 진심일진 모르겠다만, 충격적인 상황에서 자기 입으로 말한 게 중요했다.
시간이 지나서 자신의 행동을 긍정으로 합리화하려면 저 인정도 긍정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정적이 흐르는 순간, 골드 2가 다시 상황을 부추긴다.
“새, 생각해 보세요, 문대 형! 서담 형이 그렇게 안 좋게 탈퇴하면…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질 수도 있고… 그럼 올해 일정이 힘들 수도 있는데….”
“…….”
나는 말없이 골드 2를 쳐다보았다.
골드 2는 식은땀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마주 보며 침을 삼킨다.
꿀꺽.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어깨를 으쓱했다.
“뭐… 회사에 피해가 생기면 일이 많아지니까.”
“……!”
나는 한숨을 참는 것처럼 힐끗 채서담을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뿐이다.”
* * *
그 후로는 간단했다.
안도한 채서담은 골드 2의 부추김을 연료 삼아 순식간에 계약서를 쓰고 제 발로 팀을 탈퇴했다.
‘계약서 내용도 뉘앙스가 중요했지.’
채서담이 방금 오간 대화를 비밀로 지켜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채서담의 약점을 입 닫아주는 것을 확실히 했다.
채서담의 루머 유포 시도와 학교폭력 이야기를 묻어주는 대신, 놈이 조용히 나가고 팀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계약이다.
그리고 빠르게 기사와 발표가 떴다.
[ 새 시즌 10위 채서담 데뷔 불발, “건강 문제”]어차피 여러 가지 사건 때문에 데뷔조 팬덤에 밉보이기도 했고, 사유도 ‘건강’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큰 문제나 파란 없이 넘어갔다.
그리고 대화 막판에 치고 들어와서 꿀을 쭉 빤 골드 2는 싱글벙글 그 자체였다.
눈치챘겠지만, 큰세진이 판 짜면서 채서담에게 당근 주는 역할로 꼬셔 온 놈이다.
-그래, 문대는 채찍만 막 휘둘러~ 희승이가 딱 마지막에 당근 한 입만 주는 걸로 하자!
부정할 순 없겠다. 괜찮은 인선이었다.
“연기 잘하던데.”
“저요? 완전 진심이었잖아요.”
당일, 채서담이 방을 빼자마자 골드 2는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길게 심호흡을 했다.
“후… 아니, 어떻게 이번에도 저 형이 데뷔를… 아 몰라요! 암튼 데뷔 전에 조용히 보내 버려서 속이 시원하네, 진짜!”
시한폭탄 같은 놈이 같은 팀이면 속이 탈 만도 했으니, 탓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다시 한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감사할 건 없어.”
“에이, 형은 진짜 다시 봐도 대단하십니다! 언제든 형한테는 제가 진짜 잘하겠습니다!”
골드 2는 그 후로 안부 문자를 더 자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엔 데뷔조의 매니저를 통해 다른 부류의 문자도 하나 들어왔다.
발신자는 채서담이었다.
장문 문자였는데, 재밌게도 수신자로 부탁한 게 선아현이다.
[나는 모든 게 경쟁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경쟁적으로 임했던 건데, 내 생각이나 의도보다 더 네게 큰 상처를 줬던 것 같아서 미안해. 이번에 정말 뼈저리게 깨달았어. 내 방식에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는…….]이 구구절절한 소리를 요약하자면, 학창시절 선아현에게 자신이 지나쳤던 것 같다는 말이었다.
물론 반은 자기변명에 가까웠다만.
“…‘의도보다 더’? 이걸 지금 사과라고 붙였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괘, 괜찮아요…!”
대리 분노하는 배세진을 도리어 선아현이 말렸다.
“사과를, 받을 줄 몰랐어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과는… 저도 받고 싶었나 봐요.”
“아현아….”
“고, 고맙습니다.”
선아현은 주변에 고개를 꾸벅거리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고마워 문대야…. 도, 도와주려고 했는데, 내가 매번 도움을 받는 것 같아.”
“…?”
네가 밑밥 잘 깔아서 채서담 보내놓고 무슨 소리냐.
물론 이렇게 대답하면 또 끝없는 공치사가 이어질 테니, 나는 그냥 간단히 대답했다.
“협력한 거지. 나도 고마웠다.”
“으응…!”
선아현은 밝게 웃더니, 시원하게 채서담의 문자 캡처를 내려버렸다.
“오오!”
멤버들이 무슨 세레머니를 본 것처럼 박수를 보낸다. 선아현은 좀 쑥쓰러워하는 것 같고.
“음.”
나는 그 사과문 비슷한 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저 새끼는 또 저거 잊어버리고 뽕찰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그것도 고려해서 짜놓은 판이다.
‘본인한테 불이익 오는 건 기가 막히게 피해갈 인성이니 입 다물고 있겠지.’
그리고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차이로 한번 X 될 뻔하면, 상대에 대한 복수심보다 경외감을 가지면서 정신승리를 하더라고.
‘그 상황에서 그래도 내가 잘 대처해서 빠져나왔지.’
이런 식이다.
고로 이놈은 이제 다시 관련 문제로 아가리 털 생각은 못 할 것이다. 선아현은 이놈을 잊어버릴 것이고.
‘다시 볼 일은 없겠군.’
깨끗하게 업계에서 털어냈으니 말이다.
“……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날 밤 문자를 하나 넣었다.
[잘 끝났습니다. 고맙습니다]뭐, 이 일에 도움이 됐다는 건 담백한 사실이니 이 정도는 할 만하지.
띠링.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익은 개가 앞발을 든 사진이 도착했다.
인사냐.
“……음.”
나는 턱을 만졌다.
의외로 안 긁는군. 이 새끼도 슬슬 정신을 차린….
“…….”
미쳤나.
[VTIC 신청려 선배님 : 농담이에요^^]나는 답장하지 않고 문자를 껐다.
그걸로 채서담을 보내 버린 이후 임팩트는 전부 정리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회의에선 이때 채서담을 보내 버리지 않았다면 같이 일할 뻔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소속사 콘서트 안건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일정이 나왔는데요….”
바로 성공한 소속사의 상징, 소속 아티스트 단체 콘서트 일정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