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36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36화
제작진의 설명은 간단했다.
릴렉스도 할 겸 놀면서 상품도 타가라.
즉, 속뜻은 이런 의미였다.
‘니들끼리 재롱 좀 떨면서 수학여행 바이브 좀 즐기다가 T1에서 PPL 받은 상품 홍보 겸 좀 받아가라.’
아마 다들 뉘앙스를 짐작했겠지만, 그래도 순위 발표식 직후보다 분위기가 괜찮아졌다.
상품이 괜찮았고 룰이 헐렁했던 것이다.
“등수 없고, 자원으로 진행되는 거에요~”
“아….”
“일단 나오시면 뽑기로 상품 중에 하나 무조건 타가실 수 있어요!”
“…네!”
대답하는 목소리들이 한결 편했다.
손해 볼 것 없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MC가 없으니 좀 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점도 한몫했을 테고 말이지.’
…솔직히 나도 건조기는 솔깃했다.
어차피 원룸이라 둘 곳도 없긴 했지만, 급조한 기획의 상품으로 대형 전자제품이 나올 줄이야.
‘프로그램이 엄청 잘되고 있긴 한 가 보군.’
상품에 포함된 김치냉장고 사진을 보며 그렇게 생각할 때, 스크린에서 상품 사진들이 사라지고 커다란 글자가 떴다.
[장기자랑 : 랜덤 댄스]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승자!]‘얘네 폰트도 안 만졌네.’
함초롱바탕체가 영롱했다.
내 감상이 어쨌든 간에, 곧 스크린에는 5초 카운트다운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나마 상태가 괜찮던 놈들이 몇 명 달려 나와서 대기하기 시작했다.
[시작!]그리고 유명 KPOP 후렴구들이 쉴새 없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어어억.”
“야 너 틀렸어! 들어가야 돼!”
“악, 뭐야.”
처음에는 분량 때문인지 기계적으로 참가했던 참가자들이 끝에 가서는 거의 콩트를 찍으며 승자를 가렸다.
그렇게 대충 12곡쯤 지났을 때, 승자가 나왔다.
“아, 감사합니다~”
큰세진이었다.
“아무도 안 물어보셨지만, 소감 말할게요. 이날을 위해 PR 라이브에서 실력을 갈고닦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하하!”
“우우우~”
PR 때 유사한 컨텐츠를 했던 큰세진이 뻔뻔하게 웃으며 말하고, 얼른 뽑기 통에 손을 넣어 쪽지를 뽑았다.
“자, 제 상품은…….”
[(진)직화무뼈닭발 1 Box]“문대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큰세진의 빠른 태세전환에 참가자들이 폭소했다. 스탭들까지 입을 가리고 웃는 통에, 이쪽을 보며 눈을 찡긋거리는 큰세진에게 정색할 각은 나오지 않았다.
‘대체 이 닭발 이미지는 언제까지 갈까.’
계속 이렇게 회자되다간 은퇴할 때까지 따라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쨌든, 큰세진이 큰 웃음을 주고 들어간 탓에 분위기가 한층 더 풀렸다.
“다음 거 주세요!”
“이건 내가 타간다, 진짜.”
그런 식으로 네댓 번 승부가 더 이루어진 후에는 참가자들 대다수가 장기자랑에 진심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아직 비싼 가전제품 몇 점이 상품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장기자랑이 스크린에 떴다.
[장기자랑 : 랜덤 노래방] [1절 완창하는 사람이 승자!]“이건 날 위한 종목이지.”
“와, 나 진짜 나가고 싶은데 이미 이겨 버렸네? 어쩌지?”
나는 깐족대는 큰세진을 무시하며, 잠시 망설이다가 앞으로 나갔다.
“오~~ 문대 자신 있나?”
사실 별 자신은 없었다. 크게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등수가 오른 다음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 거만해 보일 수 있다는 점을 방어한 것뿐이다.
…기왕이면 이겨서 건조기 가져가면 더 좋고.
남은 상품이 7가지라 14%는 될 테니, 희망을 품어 볼 법한 확률이다.
나는 안면만 있는 네 명의 참가자와 함께, 카운트다운이 끝나길 기다렸다. 제작진이 슬그머니 바닥에 마이크를 두고 갔다.
[시작!]화면이 바뀌자마자 곧바로 전주가 흘렀다.
쿵짝쿵짝 쿵짜라 꿍짝~
중독성 넘치는 뽕짝 멜로디가 강당을 울렸다.
“……?”
“응?”
KPOP이 나올 줄 알았던 참가자들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렇다. 흘러나온 것은 K-트로트 노래방 반주였다.
“어…….”
“잠깐, 잠깐.”
참가자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열심히 전주를 들었으나, 도저히 전주만 듣고는 무슨 곡인지 알 수가 없었다.
트로트에 신나는 뽕짝 리듬으로 시작하는 전주가 한 두 곡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나는 갈등하다가, 슬그머니 앞으로 가서 마이크를 주웠다.
“…!!”
“문대가 트로트…?”
골드 1의 중얼거림이 여기까지 들렸다.
“그냥 잡은 거 아닐까?”
“형, 그 곡 진짜 알아요?”
나는 수많은 아우성에 대답하지 않고, 그냥 전주가 끝나는 타이밍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서울 남대문 거리에 비는 오는 데~ 내가 찾는 사람이 없네~”
“…!!”
참가자들이 수군거렸다.
“헐.”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많이 봐서 안다.
행사 촬영을 몇 번 가다 보면 트로트 가수의 무대를 보는 일도 많았다.
특히 아이돌 무대 직전에 배치되는 경우가 잦아서, 행사 후반에 나올 만큼 어르신들에게 인기 있는 곡들은 나도 제법 많이 들었었다.
이 곡도 원곡 가수의 무대를… 흠, 많이 봤을 때는 하루에 두 번도 봤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가수가 날 알아보고 카메라에 윙크도 날려주더라.
양심상 위튜브에 직캠을 업로드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음,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
“아~ 내가 찾던 그대는~ 내가 바란 그대는~”
제법 유명한 곡이라 후렴구에 들어가자 참가자들이 따라 불렀다. 행사에서 그 가수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다.
“서울을 떠나 버렸네~”
“오오.”
괜히 분위기를 타서 1절을 열창하고 나니, 참가자들이 감탄사와 함께 박수를 보냈다.
이건 환호보다는…… 마술쇼에서 신기한 장면을 봤을 때의 반응 같았다.
좀 민망했지만, 어쨌든 성공했으니 상품 뽑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는 몇 번 참가자들을 향해 인사하고는 마이크를 내려놓고 뽑기 통을 잡았다.
뽑은 쪽지를 펼치자 사진에서 언 듯 은색 몸체가 보였다.
‘설마 건조기…!’
[김치냉장고]“…….”
미쳤다.
“야! 김치냉장고!!”
“문대 운 무슨 일이야~!”
“문대가 찾던 그대가 냉장고였던 거임.”
참가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서 나를 둘러싸고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쪽지를 보다가, 문득 현실을 깨달았다.
‘…상품은 세금 떼고 주지 않나?’
세금으로 납부할 돈이 없었다.
아무래도 상품 수령하자마자 중고거래로 팔아서 세금부터 내고, 통장이나 채워놔야겠다.
어쨌든, 비싼 걸 잡으니 기분이 좋긴 했다.
옆에서 축하하던 큰세진이 은근하게 속닥였다.
“문대야 우리 상품 바꿀….”
“안 해.”
“넹.”
닭발이나 먹어라.
* * *
마지막 닭싸움을 끝으로 장기자랑이 화려한 막을 내린 뒤, 한결 풀린 분위기로 팀전 촬영이 시작되었다.
MC는 조정된 촬영 스케줄 상 진행이 힘들었는지, 놀랍게도 영린이 진행을 맡아 새로운 팀전을 발표했다.
“, 벌써 3차 팀전입니다. 참가자 여러분, 77명으로 시작해서 30명이 된 지금까지 버틴 스스로를 칭찬해 주시길 바랍니다.”
MC의 활기찬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영린은 차분하고 진중하게 상황을 진행했다.
무엇보다 이미 성공한 아이돌의 말이라 참가자들이 더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당장 옆에서 골드 2가 히죽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셀프로 쓰다듬고 있었다. 가관이었다.
“이번 3차 팀전은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팀원을 짰습니다.”
어디 보자, 지금까지는 참가자의 선택에 의해 팀이 구성되었으니, 슬슬 다른 요소가 개입할 타이밍이긴 했다.
하지만 그 요소가 좀 특이했다.
“바로 빅데이터 알고리즘입니다.”
“…네?”
“빅데이터요?”
갑자기 IT 뉴스에서 볼 개념이 등장하자, 참가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영린을 쳐다보았다.
영린은 미소 지으며 멘트를 이었다.
“는 주주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주식을 사는 패턴을 분석했습니다. 그래서 다수의 주주분께서 동시에 함께 매수하신 주식들을 중심으로 팀이 구성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돈 쓰는 시청자가 묶어서 좋아하는 참가자들끼리 팀을 정해줬다는 뜻이었다.
“자세한 분석 데이터는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럼 주주분들의 빅데이터가 선택한 여러분의 팀원들을 만날 준비가 되셨나요?”
“허억.”
“너무 신기해.”
참가자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수군거리며, 과연 누구랑 될 것인지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도 적당히 참가자들을 둘러보았다.
‘일단… 선아현, 큰세진은 있을 것 같고.’
이 둘은 그냥 SNS만 봐도 알만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아현까지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나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큰세진은 한술 더 떠서 내 등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야, 잘 부탁한다.”
“어. 그래.”
큰세진은 덤덤한 내 대답에 혼자 낄낄거리며 폭소했다. 아무래도 놀리려고 말을 걸었던 것 같았다.
“준비가 되신 것 같군요. 그럼 순서대로 나와서 상자를 받아가시면 됩니다.”
영린의 뒤로 검은 상자가 주르륵 놓인 탁자가 세팅되었다.
“상자 안에는 배지가 들어 있습니다. 상자를 받으신 뒤 복도로 이동하셔서, 그 배지의 모양이 표시되어 있는 방 안으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영린은 가나다순으로 참가자를 불러서 상자를 건네기 시작했다.
당연히 ‘박문대’는 꽤 초반에 불렸다.
“박문대 참가자. 상자를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박문대’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은 상자를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복도에도 당연히 카메라를 든 스탭이 대기하고 있었다. 눈치껏 그 앞에서 상자를 개봉하니, 토끼 대가리 모양 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토끼?”
나는 약간 황망하게 중얼거리다가, 카메라를 의식하고 얼른 입을 닫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복도에 늘어선 방들을 확인했다. 방마다 명패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방에 찾던 이름이 보였다.
“…….”
전체적으로… 유치원 교실 같은 네이밍 센스가 돋보였다.
‘뭐, 팀만 나누는 거니까.’
유머를 잡을 의도일 것이라 짐작하며, 나는 곧바로 방문을 열었다.
같은 팀이 될 가능성이 있는 참가자들이 모두 나보다 늦게 불릴 것이기 때문에 큰 긴장은 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이겠지.’
하지만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서는 순간, 바닥에 앉아 있던 사람이 번뜩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
김래빈이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
“박문대 형.”
김래빈은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서더니,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서 옆으로 물러났다.
가운데 앉으라는 배려인 것 같았다.
둘밖에 없는데 굳이…?
“또 같은 팀이 될 수 있을 줄 몰랐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게. 잘 부탁한다.”
“예.”
평온한 대화가 오갔지만, 머릿속에서는 복잡한 추리가 오갔다.
‘왜 김래빈이 같은 팀이지?’
내가 김래빈과 교류가 있는 장면이 송출된 것은 직전의 7화뿐이었다.
그럼 7화 이후의 득표율이 그놈의 ‘빅데이터 알고리즘’에 영향을 줄 만큼 컸다는 말인가?
‘물론 직전 순위 발표식의 주식만 고려했다면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가능성을 가늠해 보다가, 간단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하.’
김래빈이 엮인 참가자가 드물어서였군.
어떤 식으로 가중치를 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김래빈과 연관성이 있는 참가자가 그나마 나와 차유진뿐이라서 내가 있는 팀에 들어오게 됐다는 것이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뭐, 등수 높은 참가자가 있으면 좋지.’
깔끔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방바닥에 착석했다. 김래빈이 곧바로 또 말을 걸었다.
“형, 방금 장기자랑에서 부르신 곡, 저도 좋아하는 곡입니다.”
“…그래?”
김래빈이 트로트를 좋아한다는 것을 내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어쨌든 다음 팀원이 들어올 때까지 대충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음 팀원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