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412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412화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이건 내가 자신을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걸 알고 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아니, 그 전에….
‘…말을 할 수 있다고?’
이게 소통이 가능한 것이었단 말인가?
[내 존재에 의문을 품고 있구나.]윤곽만 남은 세계가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일그러진다.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미물에게 견딜 수 없는 엄청난 압력을….
‘닥쳐.’
뭐라는 거야 X발.
사람 숙주 삼아 갈아타는 기생충 새끼가 퍽이나 어마어마하겠군. 쓸데없이 말려들지 말고 정신이나 차려라.
나는 입안을 씹었다. 통증에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허공에서 웅웅댄다.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대단히 인간적인 어휘다. 그래서 더 소름이 끼치는데.
“네가 만들었냐.”
[그래.] [이런 행위를… 피드백을 받는다고 표현하지.]쿵.
공간이 휘몰아친다.
골조가 떠오르고, 이윽고 모호한 형체와 흔적마저 사라지며 탈색된다.
남은 건 색 없는 공간뿐.
[부족한 부분이?]하지만 나는 여기 있다.
나는 혀를 짓씹으며 입을 열었다.
“부족하고 나발이고, 남의 부모님으로 사기 치는 놈이 말이 많군.”
의지가 요동친다. 동요인지 웃음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더럽기는 매한가지군.
나는 몸을 펴서 정면을 보고 섰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러나 힘을 줘서 미동하지 않는다.
“좋을 리가 없지. …그리고, 나와.”
나는 담담히 말했다.
“더는 허공을 보고 이야기할 생각 없다.”
잠시 침묵.
천천히, 느릿한 의지가 울린다.
[그게 절차구나.]그리고 나는,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라는 감상평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게 된다.
“…!”
그건 갑자기 나타났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땅에서 치솟은 것도 아니다.
그냥 불쑥,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나타났다.
내 눈앞에.
[안녕.]아는 생김새다.
큰 키, 극한까지 관리한 전신, 20대 초중반의 남성.
청려.
놈이 검은 제복을 입고 있다.
VTIC이 그 유명한 6년 전 혼(Horn) 컴백 첫 스테이지에서 입었던 의상.
내가 데이터를 팔던 그 시절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시스템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VTIC 전성기의 신재현이 거기 서 있었다.
소름 끼치도록 그대로.
‘X발.’
[너와 가까운 외관을 골랐어.]딱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색소.
색 없는 공간에 소속이라도 된 듯 색소 없이 허옇다.
“…….”
나는 등골을 타고 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고개를 다시 들었다.
소리가 울린다. 더 거대해진 존재감이 보이지 않는 허공까지, 틈 하나 남기지 않고 채운다.
[이건 너에게만 주는 제안이야.]그러나 부드럽다.
마치 정말로 좋은 제안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스템은 선언했다.
[네 피드백을 이 세상에 수용할게.]“…!”
뭐라고.
[나이와 시대 상황을 네 선호에 맞춰 조절할까? 소속을 바꿀까? 아니면… 박문대의 몸으로 돌려줄까.]“…!”
[네가 의견만 낸다면 거의 모든 일이 환경 설정에선 이론상 가능해. 핍진성이 허락하는 하에서.]나는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는 더 교묘하게 물결친다.
[여기엔 너와 가까운 사람들도 다 있어. 네가 깨웠잖아. 부족한 건 없지.] [그래도 혹시 부족한 게 있다면 구매할 수 있게 해줄게.]구매라면.
명성치.
이 게임 시스템에서 경험치 역할을 하는 재화.
[그간 사용처가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많이 풀어줄게. 새 챕터니까.]시스템은 업데이트를 이야기한다.
[부모님도 더 완벽하게 구현해 보자. 프로토타입이라 이번엔 미흡했지.]이 미친 새끼가.
[거부하는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전과 같은 조건이잖아. 그렇지?]…나는 원래도 부모님이 안 계셨다, 그거냐?
나는 확실히 인지했다.
이 새끼는 인간이 아니다.
단순히 외관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하다못해 청려 놈도 이해했던 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말려들지 않는다.’
짧게 심호흡했다.
‘진정한다.’
내가 해야 할 것.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질문을 한다.
“내가 나가서 널 또 없애려 들까 봐 비위라도 맞춰주는 거냐? 원하는 게 뭐지.”
[—]세상이 다시 흔들린다. 나는 그 의미를 알았다.
조소다.
까마득하게 고압적인 진동이 저 높은 곳에서부터 바늘처럼 내려오다가, 목소리로 바뀐다.
시스템이 손가락을 든다.
[아이돌.]그 직업의 화신 같은 모습이 입을 움직인다.
[은퇴하지 않고, 그냥 아이돌을 계속해. 네가 질릴 때까지.] [어렵지도, 힘들지도 않은 선택이구나.]나는 일부러 피식 웃었다.
“웃기고 있네.”
[…….]“권유? 나 같으면 바로 죽였어. 아이돌 하는 놈, 하겠다는 놈이 얼마나 많은데.”
이 새끼가 말을 시작했을 때부터 일부러 살살 강도를 올리며 긁었는데, 그래도 날 죽이겠다는 말이 안 나온단 말이지.
이건 어떠냐.
“너 나 못 죽여서 이 짓 하는 거 아니냐.”
나는 선언했다.
시스템은 가만히 서 있다.
“내가….”
[죽일 수 없다고?]평이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이 쏟아진다.
우
우
웅-
압력이 더없이 무겁게, 갑작스럽게 머리와 뇌를 짓누르며 전신을 짜내는 것 같은 심해의 압박감이 사람을 누른다.
시스템이 이 세상이다.
놈이 구성한 세계가 묻는다.
[죽일 수 없다고?]빌어먹을 새끼.
식은땀과 열로 몸이 탈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를 물며 대답했다.
오히려 확실히 알았다.
“그래!”
못 죽이니까 과민반응하는군.
‘동요했어.’
여기서 찌른다.
“그리고 너… 지금 모습.”
나는 상태창으로 동화되던 큰달을 떠올렸다.
놈은 거의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아 시스템으로 흡수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시스템에 영향력을 행사했지.
그렇다면.
“고른 게 아니지.”
이 새끼는 아주 장시간 청려와 수없이 많은 삶은 반복했다.
상태창 없이 날 것으로.
그렇다면.
“그 모습밖에 못 하는 게 아니냐?”
나는 외쳤다.
“너도 사람한테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거 아니냐고.”
세상이 멈췄다.
그리고.
목소리의 진동이 사라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거의 인간처럼 들리는 소리로, 시스템이 중얼거린다.
[한 정신에 오래 관여하다 보면 매몰되는 것. 큰 부작용이지….] [하지만 얻은 것이 더 크기에, 성공적인 방향이었어.]순간, 시스템의 목소리에서 희열을 읽은 것 같았다.
‘X발.’
나는 몸을 편 뒤, 다시 물었다.
“넌 대체 뭐냐.”
[나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어.] [지성체들의 정신 속에.]기생충 맞네, X발.
[한 지성체의 열망을 이뤄주며, 그 과정에서 생산되는 강렬한 감정과 혼돈은 자원이지. 정신 에너지.] [그 에너지가 내 지성을 유지하고, 성장시키지.]말은 번지르르하게 한다. 나는 침을 삼켰다.
“그럼 왜 아이돌이냐.”
왜 그걸 강조하는 거지.
게다가 청려부터 권희승까지, 셋이 연달아 아이돌이란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게 우연 같지는 않다.
“넌 뭘 기준으로 우릴 고른 거지.”
시스템이 사진처럼 웃는다.
[이토록 효율이 좋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효율?
손을 든 놈이 예절 바른 영업사원처럼 말한다.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에너지를 찾았어…. 그러다가 새로운 개체를 만났지.]청려.
성공적인 아이돌 그룹을 향한 염원과 집착.
[그토록 직접적이고 방대한, 살아 있는 감정의 격류가 한 지성체에게로 모이다니.] [압도적인 선망과 짓눌려 죽을 것 같은 부담감. 행복, 고통, 왕과 광대. 교단의 교주가 받을 만한 무량무수의 감정들.] [참 많은 에너지를 수확했어.]“…….”
취한 것처럼 목소리에 열기가 깃들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식은 아니다. 시스템은 단정히 말한다.
[우상(Idol)이라는 뜻을 가진 너희의 정체성은 얼마나 많은 숭배와 애정과 증오와 혐오를 동시에 받는지.] [정말… 훌륭한 개체야.] [아주 좋았지. 하지만 끝났어.]청려도 상태이상을 끝내는 데에 결국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슷한 지성체를 찾았지.]나.
[너.] [너도 아주 훌륭했어.]“…….”
놈이 손을 내밀었다.
[너는 행복했지. 나는 알아.] [여기서 그렇게 영원히 하는 거야. 네가 질릴 때까지 이 국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우상으로 살아라. 그리고 실수하면 다시, 넘어질 것 같으면 다시, 끝이 보이면 다시.] [영원한 별!]찰칵.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 빛나는 광채가 번뜩인다.
[질리고 지치는 그 날 그때까지 너는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어.]그리고 다시 속삭인다.
[그러나 마지막에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어지면, 그만둬도 괜찮아.]다음 숙주를 찾을 수 있다면.
[그때까지만 이 권리를 누리면 되는 거야. 원하는 만큼.]세상이 빛난다.
이걸 승낙하면 모든 게 잘 될 것 같은 이상야릇한 벅찬 감동이 몰려온다.
현실의 장점만을 수용한 완벽한 세상이 만들어질 듯이.
나는 어느새 색채가 돌아온 시스템을 쳐다보고, 물었다.
“권희승은?”
[…….]“그놈은 어떻게 되지.”
세상의 빛이 사라진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서버는 서버의 역할을 해.] [그건 너와 상관없는 타인의 일이야. 세상에는 무수한 죽음과 고통이 있어. 너 개인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란다.]그래?
[그래도 원한다면 이곳에서 만들 수 있….]“내 부모님처럼 말이지.”
나는 낮은 목소리를 끊어 말했다.
“진짜는 네가 서버로 써먹고 말이야.”
[—.]긍정.
나는 목소리도 되지 않은 진동을 해석했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이건 권희승이 꾸는 꿈이냐?”
[그런 건 아니야.]목소리가 돌아온다.
[하지만 그 매개체의 정신 구조를 기반으로 삼아야 단단해져. 꿈이 아닌 현실로 구현하려면 필요한 게 서버지.] [그게 전부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바뀔 건 없으니, 네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타인의 사정일 뿐이고.]시스템이 다시 손을 내민다.
마디가 또렷한 하얀 손이 강력하고 압도적으로 느껴진다. 모든 것을 다 이뤄줄 것처럼.
나는 입을 열었다.
“거절한다.”
“나는 믿을 수 없는 것과는 거래하지 않아.”
진동이 멈췄다.
연산이라도 하는 것 같은 백색소음.
고민.
결과.
[그렇다면.] [역할을 바꿔야겠구나.]시스템이 조용히 말한다.
“…!!”
나는 내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X발.’
형체를 가지고 있던 몸이 서서히 사라지며, 촉감이 천천히 사라진다.
시각과 청각만 간신히 남는 괴이한 상황에서 소리가 웅웅거린다.
[널 서버로 삼아야겠다.] [그리고….]모든 것이 흐려진 세상에 하나의 윤곽이 선명해진다.
그렇게 또 인영이 나타난다.
“…….”
진짜 청려.
시스템보다 훨씬 윤곽이 선명한 놈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동요하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한다.
생김새가 똑같은 두 인영은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같은 자세로 서로를 마주 본다.
[보고 있었지? 바로 제안할게.] [네가 GM을 하는 대신 직접 플레이하는 게 효율적이겠는데. 류건우는 캐릭터 역할을 하기엔 비협조적이야.]같은 말투와 목소리의 시스템이 말한다.
[서버를 잘 사용하면 부작용도 더 진행되진 않겠지. 네가 원하는 완벽한 아이돌의 삶을 영원히 살자.] [너의 가장 핵심적인 욕망이야.]청려는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니.”
그 순간, 놈이 GM의 권한을 발동한다.
내게 상태창이 뜨는 것이다.
‘…플랜 B.’
-대안은 있어야죠.
그렇다.
일이 틀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구상해 놓았던 다른 오류 발생 방법.
-내가 시스템이 왜곡한 모든 기억을 다 되찾으면 어떨까.
-아주 최초에… 박문대 몸에 들어오면서 잘린 기억부터.
각성은 이전 생의 잊힌 기억을 돌려준다.
그리고 두 가지가 형태가 있다.
첫 번째, 동료를 각성시키는 것.
지금까지 내가 다른 놈들에게 기억을 돌려주며 써온 방법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나 자신을 각성시키는 것.
[각성하시겠습니까?]-Exp 1000 사용
나는 버튼을 눌렀다.
모든 명성치를 쏟아서.
-Exp 2000 사용
-Exp 4000 사용
-Exp 8000 사용
-Exp 16000 사용
-Exp 32000 사용
-Exp 64000 사용
…….
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