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438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438화
술이나 얻어먹던 동아리 선배가 갑자기 영상통화에서 내 팬으로 등장하는 상황.
그리고 내 직업이 아이돌인 이 순간.
굉장히 당혹스럽다.
그러나 다년간의 직업 경험으로 단련된 입은 맞는 소리를 한다.
“…네. 서진 누나.”
[네.]미치겠다.
흡족해 보이는 화면 속 류서진의 얼굴을 보니 더 심란해졌다.
저 선배가 술자리에서 했던 말이 기억나서 노래방 캐스팅에 성공적으로 낄 수 있었긴 하지만 말이다.
‘저 선배가 아이돌을… 좋아했던가?’
나 먹고살기 바빠서 동아리 놈들 취향이야 알 바 아니었다만, 저쪽은 주로 포트폴리오용 사진만 찍었던 것 같은데.
나한테 대리로 찍어오는 일감 준 적은 확실히 없거든.
그런데….
‘그냥… 사회생활을 위해 비밀로 한 거였냐.’
심지어 홈마였다니.
이세진과 박문대의 사진을 올리는 ‘퍼피베어’라면 나도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이름값 있는 샷을 많이 뽑았던 계정이다.
‘사진 올리는 간격이나 운영 지침을 보면 절대 테스타가 첫 아이돌은 아닌 것 같았는데.’
내가 관심이 없어서 몰랐던 건지 저 선배가 잘 숨긴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말이다.
‘…어쩐지 구도가 유독 자연스러워 보이더니.’
동아리에서 비슷하게 배워서 그랬던 거였나? 아니, 그만하자.
‘일해라, 일.’
그냥 이벤트 참여해 준 고마운 팬으로 생각해야 한다.
녹화 중인 실시간 영상통화 중에 이상한 낌새가 들어가게 할 순 없지.
‘팬으로서만 생각하면….’
그런데 여기서도 의문이 있긴 하군. 왜 나한테 사연을 넣었지?
큰세진이 아니라 말이다.
‘큰세진을 좋아하는데 영업 규모 키우려고 일단 1위인 나도 끼워 찍어준 거 아니었나.’
그러다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급하게 진행하느라 1인 1멤버 신청 제한을 못 걸었군.’
치밀한 성격이라면 아마 모든 멤버에게 각각 맞춤형 사연을 만들어서 넣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면 신문방송학과가 무조건 유리하지.
…그리고 저 선배, 아니, 팬이 나한테 넣은 사연은 바로…….
-고등학생 때 언니와 비슷한 진로를 잡은 나, 과연 이젠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언니와의 경쟁과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서바이벌을 통해 1위로 데뷔한 내 경험과 비교해 아주 그럴싸한 사연을 적어뒀었단 말이다.
당연하지만 그 언니의 정체는 작가 류서린이다.
[우선, 언니는 굉장히 목표 의식이 강하고 추진력이 좋은 사람이에요.]어, 동감한다.
나는 한창 잘나가는 그 어그로 장인 작가를 떠올리며 눈을 꿈틀거릴 뻔했다.
그러나 티 내지 않고 제법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분이시네요.”
스스로가 놀랍다.
[네. 그래서 제가 같은 분야의 일을 하는 게 조금 힘들었던 것 같아요. 비교하게 되더라고요.]류서진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신방과답게 재구성한 사연을 쭉쭉 풀어갔다. 날조한 자소서 같은 스토리란 뜻이다.
그래도 큰 흐름이 보여서 나도 대답이 편했다.
“저도 처음에 아이돌 서바이벌에 나갔을 때 다른 참가자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침착하게 그 흐름에 탑승하자 마치 대본 방송하는 것처럼 점점 괜찮아졌다.
그리고 끝이 다가올 즈음에는 나도 완전히 페이스를 되찾았다.
“…이렇게 저희가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서진 누나도 그분 못지않게 추진력이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뻔하지만 스스로를 더 믿고 주변과 비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아름다운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화면 속 팬은 분명 자소설급 사연에 대한 아이돌의 뻔한 방송 스타일 피드백일 텐데도 진지하게 경청해 준다.
“…….”
그래.
선배든 뭐든 저 사람이 나한테 돈과 시간 기꺼이 써주는 하드코어한 팬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
[그러면 혹시 문대의 강아지 버전 화이팅 한번 받을 수 있을까요?]입가가 떨린다.
“…그럼요.”
‘X발 진짜.’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수치심?
“화이팅!”
그러나 나는 기꺼이 한쪽 볼을 쥐어뜯고 머리 위로 손을 퍼덕거리며 응원해줬다.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어쨌든 몇 가지 팬 사인회 특유의 모션을 더 취해주고 난 뒤에 첫 통화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띠릭!
“…….”
재가 된 기분이다.
나는 기력이 쭉 빨려서 잠시 바닥에 누웠다. 스탭은 날 말리지 않았다.
다만 벌컥 문이 열렸다.
“문대문대, 이거 재밌는데? 좀 뜻깊기도 하고~”
옆 방에서 진행하던 놈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지 제법 신나게 외친다.
“네 팬하고 했다.”
“…??”
저놈이 조금만 섣불리 들어왔어도 사연 투고한 시간 대비 이득이셨을 텐데 안타깝군.
* * *
첫 타에 좀 기겁하긴 했다만 그래도 이 일 자체는 무리랄 것도 없었다.
스탭 끼고 펜션에 앉아서 팬과 몇 분 대화하는 거? 돈 안 받아도 하겠군.
심지어 멤버 하나가 맡은 팬은 7명뿐이다. 콘서트 VCR에 나올 만한 영상을 뽑으려면 그 정도 명수를 받아서 한두 명 건지는 식으로 합의됐기 때문이다.
‘좀 더 뽑았어도 될 것 같은데.’
인당 5분, 10분 정도 통화를 하고 중간에 10분씩 쉬는 스케줄이라 2시간이면 끝난다. 일 벌인 것치곤 영 뽕을 덜 뽑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지.
나는 화면을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문대는 숙소에서 지내면서 힘들었던 적 없어요?]무슨 대답을 해도 지뢰밭이지만 악의는 없단 건 압니다.
“음… 벌레가 나왔을 때 멤버들이 방에 못 들어가게 해서 거실에서 합숙한 적이 있어요.”
답은 관련 있는 듯 보이는 동문서답이다.
[헐! 누가?]좋아 낚여주셨군.
그렇게 일화 하나를 털며 또 하나의 영상통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주로 사람들이 공감하기 좋을 만한 사연 중에 원인과 결과 구조가 뚜렷한 것을 여럿 골라서 랜덤으로 추렸다.
그래서 아까처럼 아예 아이돌과 통화를 생각도 안 해봤던 사람도 반절은 돼서 꽤 신선한 일이었다.
물론 자주 보던 얼굴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놀랍게도 네 번짼가 다섯 번째엔 첫 홈마가 나왔다.
[세상에, 안녕 문대야!]“저 말고 다른 아이돌이 좋아졌다는 사연인가요.”
[…?! 아, 아니…??]농담이다. 친구와 진로 문제로 고등학교를 자퇴할까 고민했던 사연이었지.
하지만 시작 후 3분도 지나지 않아서 고민 상담이라기보단 전형적인 팬 사인회식 대담으로 흘렀지만, 나는 대화를 끊지 않고 받아줬다.
[완전 고마워 문대야, 진짜 우리 또 봐요!]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느꼈다.
‘…오랜만인가.’
테스타로 이런 일을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체감상으로는 1년이 훌쩍 넘는다.
시스템 박살 내고 돌아온 후에도 앨범을 안 내고 투어만 했으니까.
이렇게 직접적으로 내가 테스타라는 걸 느끼는 일은 감회가 새로웠다.
“…….”
뭐, 빼지 말고 계속 열심히 해보자고. 나는 얌전히 머리스타일 수정을 받은 뒤 다시 스마트폰을 응시했다.
벌써 마지막 고민 상담이었다.
그리고 이번 사람은….
[아, 안녕하세요! 와, 어떡해!]“…!”
화면 속에 비치는 것은 며칠 전에 봤던 얼굴이었다.
어두운 콘크리트 벽 사이에서 응원봉 불빛으로 봤던 사람.
“…안녕하세요.”
대학원생이라는 팬이다.
[저 이런 거 당첨된 거 처음이에요!]붕괴된 건물을 경험한 적 없는 밝은 얼굴이다. 나는 탁자 아래로 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
신난 팬은 고민을 말하기 전에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이미 아는 이야기였다. 그때, 무너지는 비품실 너머로 들었던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도 이렇게 밝고 낙천적인 성격인가 보다.
나는 무심코 말했다.
“…대학원생이시구나.”
[네!]학업에 관한 고민이어서, 검정고시를 본 박문대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새로운 시각이 나올 줄 알고 고른 거였는데.
대학원 이야기였구나.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하고 싶은 연구나 공부가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누나는 대단한 사람이네요.”
[으헝흐헝,]좀 이상한 소리가 나긴 한데 팬 사인회 때마다 듣는 소리라 아무려면 어떤가 싶다.
나는 앞선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최대한 성의껏 말을 경청하고 반응했다.
끝날 때를 알리자 대학원생은 한결 긴장감이 가신 얼굴로 눈을 빛내며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사실 지금도 계속 고민 중인데, 이런 고민을 이겨낼 힘을 문대랑 테스타한테서 얻는 것 같아요, 진짜.]화면 속 팬이 밝게 웃는다.
“아뇨.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통화를 끊고 나서야 이 팬이 나에게 아무런 대사나 포즈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뽕 못 뽑으셨군.
어쩌면 다음에 팬 사인회에서 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저녁 7시부터 시작된 영상통화는 거의 밤이 다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방 밖으로 나가서 가벼운 엔딩컷을 찍고 나면… 오늘 촬영의 마무리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재밌었어요!”
일이 고되지 않았던 덕에 스탭들도 표정이 밝다. 멤버들도 마찬가지고.
“이런 형식으로 가끔 팬미팅 진행해도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현장에서 줄 서서 하시는 건 일대일로 대화하는 느낌은 아니니까.”
“팬분들을 만나는 방식을 현대문물을 이용해 다각화하는 것이로군요.”
“저는, 좋아요…!”
제법 재밌었나 보군.
나는 피식 웃으며 오늘의 후기를 찾아 화면을 넘겼다.
-배세에게 전공서적 추천을 요구받았다 질문 안 받는다
-청우에게 하트 챌린지 요청함 내 고민과 X또 상관없는 이런 말을 하기 민망했지만 정말 가치 있는 쪽팔림이었음 (동영상)
-김래빈ㅅㅂ미친놈감히꽁지머리를해? 누나라고불러? 쇄골니트 손민수한다 내가
여기도 다들 인상 깊은 경험을 했나 보다.
나는 큰세진의 ‘카톡 남친 프사 생성기’ 후기와 ‘여행용 스페인어 1타 강사’ 같은 차유진의 후기를 마저 읽으며 스마트폰을 넘겼다.
마지막 놈이 은근히 물었다.
“문대 형 지금 즐거워요?”
“그래.”
스마트폰을 빼돌린 본인 덕분이니 부디 잘 기억하고 맛있는 걸 해달라는 뜻이다.
그리고 차유진뿐만 아니라 분위기는 어느새 회식 직전이 돼 있긴 했다.
“여기 배달이 될까? 안 되면 내가 나가서 사와도 괜찮은데.”
“아, 저희가 갔다 올게요. 마침 마트 가려고 했거든요.”
대화에 끼어든 기부 콘서트 스탭들이 기꺼이 피자를 사 오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고맙지만 사실 낯선 연예인과의 회식이 싫어서 도망치는 건 아닌가 싶다. 직장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지.
아무튼 그렇게 부리나케 나가는 스탭들을 배웅하고 난 뒤였다.
“그럼 우린 오시기 전에 테이블 좀 세팅하고….”
“Ohhhh, 고양이 또 왔어요! 우리가 이 고양이 책임져요!”
“유진아 배세진 형이 고양이털 알러지가 있어….”
“오우.”
잠시 개판… 아니, 고양이판을 지나서 회식 준비를 어느 정도 진행했을 때.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잔 놓던 놈들이 번쩍 고개를 든다.
“음?”
“벌써 오셨나?”
그럴 리가 있나. 스탭들이 나간 게 10분 전이었다. 피자가 화덕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뭘 두고 갔나 보군.’
“제가 가볼게요.”
현관에 가장 가까이 있던 죄로 내가 나섰다.
띵-동.
알았다니까.
나는 걸음을 빠르게 바꿔서 바로 현관 문고리를 잡아챘다.
달칵.
그리고 열린 문틈에서, 빛과 소리가 쏟아졌다.
“안녕!”
이 목소리는…
“서프라이즈~”
“와. 박수.”
“…!!”
나는 굳었다.
사복 차림의 VTIC 놈들이 다짜고짜 펜션 정문 밖에 서 있었다.
뭐야.
“문대 씨, 안녕하세요!”
이게 무슨 상황이냐.
청려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생각하고도 이게 X발 무슨 개소리 같은 묘사인가 싶지만 현실이다.
그리고 원인이 뒤로 보인다.
카메라 위, 빛나는 조명들이 반짝인다. 그리고 그 조명을 들고 있는 건… 아까 나간 스탭들이다.
‘오.’
동시에 상황을 파악하고, 나는 서서히 주먹을 쥘 뻔한 손을 내렸다.
사실 서프라이즈로, 기부 콘서트 VCR 끝에 간이 무대를 하나 하겠다고 합의를 봐놨는데….
‘…이렇게 할 생각이었나.’
이렇게 우리가 서프라이즈를 당할 줄은 몰랐다.
“테스타와 함께 하는 특별 무대를 위해 왔어요!”
조명 앞에서 진채율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군대 가서 눈에 뵈는 게 없냐.’
좀 열 받는 이상한 재회였다. 그렇지만….
“……어서 오세요.”
“…!”
안 될 것도 없지.
나는 피식 웃으며 살짝 비켜섰다.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