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50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50화
“그래요. 박문대 참가자님,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려는 가타부타 더 말 붙이지 않고 깔끔하게 거절을 수긍했다.
좀 더 대화를 뽑아서 절실한 컷을 뽑아내겠다는 계획대로 진행해 보고 싶었지만, 그런 시나리오가 통할 만한 상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이름값이 너무 크다.’
작년 대상 수상자라 급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도리어 ‘박문대’만 구질구질해 보일 확률이 높았다.
“그럼 이 계약서는 파기하겠습니다.”
청려는 계약서를 집어 들고, 카메라에 잘 보이게 들어서 두 쪽으로 찢었다.
‘퍼포먼스군.’
아마 사전에 언질 받은 행위인 것 같았다.
“어려운 결정 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도 건승하시길 바라요.”
“감사합니다. 청려 선배님께서도 활동 건강하게 마치시길 바랍니다.”
대충 파장 분위기에 맞춰 악수하고 허리를 숙였다.
“아, 저희 이번 활동 보셨나요?”
“예? 예.”
이만 촬영 끝내는 거 아니었나.
이유는 모르겠는데 대화를 잇는다. 성의껏 대꾸해주자.
“이번 앨범 정말 잘 듣고 있습니다.”
“와~ 혹시 제일 좋아하는 곡이?”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건가? 설마 거절했다고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음, ‘별 보라’를 특히 좋아합니다.”
나는 적당히 수록곡을 뽑았다. 사실 시간 없어서 들어본 적은 없고, ‘박문대’ 서치하다가 SNS에서 공유된 팬 글에서 본 곡이었다.
“아, 그거 제가 작사한 건데.”
청려가 반갑게 자신을 가리켰다.
‘홍보도 알뜰하게 챙겨가는군.’
이미 이 이상 잘나갈 수 없을 만큼 잘나가는 와중인데 말이지. 과연 짬 있는 아이돌다웠다.
“아하, 저 왔다고 일부러 말해주셨구나.”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여기서 아니라고 해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해도 이상하니까 별수 없었다.
청려는 마주 웃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갑자기 문밖으로 나갔다.
‘뭐지.’
다시 들어온 청려의 손에는 웬 봉투가 들려 있었다.
“별건 아니고 홍삼인데, 먹고 힘내시라고 가져와 봤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빨간 봉투에 금색으로 적힌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걸 봐서는 확신의 PPL이었다.
‘어찌 됐든 홍삼은 환영이지.’
얼른 받아들자, 청려가 다시 한번 마무리 인사를 했다.
“그럼 화이팅!”
“네, 화이팅.”
싱글벙글 마주 보며 웃는 것으로 촬영이 끝났다.
곧바로 스탭들이 들어와서 청려를 챙기기 시작했다.
몇몇은 카메라를 조정하고 태블릿 PC를 만졌지만, 다수가 청려에게 붙은 것은 확실했다. 아마 VTIC 쪽 인원인 것 같았다.
‘지극 정성이군.’
하기야 몸값이 얼만데 나라도 저런다.
청려는 스탭이 옷에 붙은 마이크를 수거해 가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말을 걸었다.
“문대 씨.”
“예.”
아까와 달리 별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굳은 표정이라는 건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말 거는 사람 표정이었다는 말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LeTi 괜찮은 소속사 맞아요. 정산도 괜찮고. 혹시 프로그램 끝나고 상황 되면 연락해요.”
“…!”
탈락하면 컨택해 보자는 뜻이었다.
‘진심인가.’
아니, 소속사 임원도 아니고 뭐하러 여기서 연습생을 섭외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 회사 주식 가지고 있나.’
그러면 말 된다.
그래도 굳이 박문대한테 이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뭐… 데뷔조에 쓸 만한 메인 보컬이 없을 수도 있겠지.
나는 긴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나는 스탭의 인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방에서 퇴장해서 대기실로 이동했다.
아마 스포일러를 유출을 막기 위해, 아직 이 깜짝 심리 테스트를 받지 못한 참가자와 격리한 것 같았다.
“형!”
들어가자마자 먼저 앉아 있던 김래빈이 말을 걸었다.
“혹시 어디서 제안받으셨어요?”
“LeTi였어.”
“저도 LeTi였습니다!”
역시 VTIC 멤버가 더 왔었군.
김래빈이 답지 않게 흥분해서 VTIC을 만난 이야기를 풀었다. 고개 끄덕이며 들어주고 있자니, 피곤한 얼굴로 들어오던 류청우가 아는 척을 했다.
“아, 너희 먼저 끝냈구나.”
류청우는 표정만 봐도 심적 갈등했다는 티가 났다.
‘설마 여기도 VTIC인가.’
3/10은 너무 후한 확률인데.
옆에서 안면만 있는 참가자가 치고 들어왔다.
“형님! 어디서 캐스팅 콜 받으셨습니까!”
“나는… 원더홀.”
티홀릭의 소속사였다. 오랜 기간 아이돌 잘 뽑기로 유명한 대형소속사.
‘이쪽도 괜찮은데.’
물어본 놈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류청우는 기 빨린 표정으로 입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의왼데.’
거의 데뷔가 확실한데도 탈주각을 본 것 같다는 점이 좀 신기하긴 한데, 뭐 사정이 있겠지.
대기실은 속속들이 참가자들이 돌아왔다. 곧 첫 타자였던 10명이 다 모였다.
‘일단 첫판에는 다 거절했군.’
솔직히 하위권 한둘쯤은 탈주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생각보다도 소속사 라인업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판에도 전원이 대기실로 돌아왔다. 이쯤 되니 이상한 공명심이라도 생기는지 뿌듯해하는 놈들이 속출했다.
“조, 좋은 분 같았어.”
느지막이 돌아온 선아현이 밝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솔로 활동 중인 모 가수가 몹시 친절하게 격려의 말을 해준 듯했다.
“그래도 거절했네.”
“으, 으응?”
장난삼아 한 소리에 선아현이 펄쩍 뛰었다. 선아현은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 당연히 끝까지 해야지…! 거, 거기 가면… 같이 데뷔 못 하잖아…….”
“…….”
아무래도 선아현은 처음 찍어 먹어본 긍정적인 또래 관계에 극도로 과몰입한 것 같다.
‘딜이 조금만 더 좋았으면 다른 놈들은 다 튀었을 텐데.’
나는 약간 안쓰럽게 놈을 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
“으, 응!”
선아현은 기운차게 긍정했다. 김래빈은 신기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선아현을 옆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오묘한 판에 3번째 그룹이 슬슬 돌아오기 시작했다.
“레티 아깝네~ 아까워!”
첫 번째로 돌아온 큰세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싱글벙글 웃으며 저렇게 말했다.
이놈도 LeTi에서 제안을 받았다는 거군.
‘김래빈, 큰세진, 그리고 나인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대충 소속사 경향성이 보이는 게 제법 흥미로웠다.
그리고 큰세진의 말은 더 웃겼다. 아깝다니.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군.’
목표가 최대한 빨리 데뷔하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사리에 밝은 놈이 LeTi로 갈 리 없었다.
그러나 큰세진은 마이크가 없고,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 갈아탈 걸 그랬나. 좀 아쉽네.”
“…….”
생각보다 고민을 좀 한 것 같은데?
기존에 본인 소속사가 영 믿음직스럽지 않다 보니 저절로 흘러나온 말인 것 같았다.
사실 드문 기회이기도 하다.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더 좋은 소속사로 갈아타는 건 사실 업계 환경상 불가능한 일이니까.
에서 최종 데뷔하는 연습생들의 소속을 양도받는 것은 사실 거대 방송사의 횡포나 다름없었다.
속된 말로 깡패짓.
소속사야 울며 겨자 먹기 식이긴 했지만, 어차피 데뷔조 탈락한 연습생이니 방송에 내보내서 재활용하는 것 같았다.
‘방송국과의 관계의 윤활유 역할이지.’
하지만 이번 시즌이 너무 잘되다 보니 은근한 압박이 있는 모양이다.
자진 탈락해서 소속사에 남아줬으면 하는 압박 말이다.
나는 촬영 쉬는 기간에 큰세진에게 지나가듯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어, 요새 그런 말 좀 듣지. ‘지금까지 같이 연습한 동생들하고 같이 데뷔하는 게 더 좋지 않겠냐’… 사람들 진짜 재밌다니까?’
무슨 혜택이라도 걸고 꼬시는 것도 아니고, 저러고 있으니 사람 마음이 내킬 리가 없다.
“농담이야. 여기서 데뷔 가야지~”
큰세진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농담이 아니라 진짜 고민했던 게 분명했다.
‘의외로 상위권에서 흔들리는 놈들이 많았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라도 하나 나가서 경쟁률 좀 줄여줄 생각은 없나.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탈주한 것은 하위권 한 명뿐이었다.
“최원길 참가자는 소속사 트레블러의 캐스팅 콜에 응답하여, 오늘부터 를 떠나게 됩니다.”
나는 감탄했다.
‘각 잘 봤네.’
이번 화 여론 보고 빨리 손절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려서 그런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머리는 좀 쓰는 것 같았으니 싱글벙글 웃으며 가진 않았겠지.
“우, 우리 소속사?”
뒤에서 골드 1이 당황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저놈 트레블러 소속이었지.’
티홀릭 소속사의 제안을 어렵게 거절했다던데. 아무래도 원소속사에 어느 정도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계속해 보겠다는 배짱도 있던 것 같고.’
어쨌든 그걸로 이벤트는 마무리되었다.
목적을 못 이뤘다는 것에 약간 입맛이 씁쓸했지만, 분량은 확보했다.
‘VTIC 분량을 자르진 않겠지.’
기껏 섭외해 놓고 날릴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제작진들은 최원길 하차에 대한 연습생들의 리액션을 몇 컷 따고는 곧바로 순위 발표식 준비에 들어갔다.
덕분에 참가자들은 이벤트가 시작되기 전 착석 했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지루한 대기 시간을 견디게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화 소재가 화려해서 그런지 다들 떠드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헐, 그 기획사가?”
“대박.”
“와… 청려 님 실물 어때요?”
순위 발표식 직전의 긴장감마저 수위가 낮아졌을 정도였다.
“후~ 라인업 장난 아니었네. 갈등한 애들이 많을 만했다.”
큰세진이 휘파람을 불며 소속사 이름을 하나씩 꼽았다. 그리고 살짝 주변을 살피더니, 희한한 미소와 함께 속닥거렸다.
“야 그거 아냐?”
“뭐.”
“저기 앉은 내 동명이인 형님도 엄청 갈등했대.”
아역배우 출신 이세진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제일 늦게 합류했군.’
이세진은 거의 최원길 하차 소식과 동시에 도착했었다.
별 관심이 없어서 신경을 안 썼는데, 음… 사실 지금도 별 관심 없다.
큰세진은 예전부터 이세진에게 별 좋은 감정이 없어 뵀지만, 어지간히 ‘박문대’가 편해졌는지 웃으면서 본심을 슬슬 풀어놨다.
“원래 배우 소속사였잖아. 진짜 아이돌로 갈아타고 싶었나?”
“그럴 수도 있지.”
탈락할 것 같은데 아이돌이 계속하고 싶으면 갈아타는 것도 고려해 볼 법했다.
나이 때문에 당장 데뷔하지 않는 이상 차기 팀 노리기는 힘들어 보이지만.
‘자기 알아서 할 일이지 뭐.’
내가 별 관심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큰세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
자투리 시간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순위 발표식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참가자들이 순위 발표식을 준비할 무렵.
이벤트로 깜짝 출연했던 소속사 연예인들은 이미 다른 스케줄로 자리를 뜬 후였다.
활동 시작하면 스케줄이 분 단위로 있다는 VTIC도 마찬가지였다.
밴에 탄 두 사람은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점심을 주문할 때야 겨우 말문을 텄다.
“형, 어땠어요?”
“그냥 일한 거지.”
청려는 덤덤히 대답했다.
“형도 세 명 봤나, 눈에 띄는 애 없었어요? 난 만난 애들 괜찮던데.”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