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505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505화
첫 단체 녹화 당일.
신인 없이 네임드와 기성으로 꽉 찬 출연진들 속에서 인사가 오고 갔다.
테스타도 예외는 없었다.
“세상에, 너무 오랜만이다 얘들아!”
“뮤디 선배님!”
우선은 뮤디.
에서 보컬 트레이너이자 심사위원이었던 이 가수 대기실로 인사를 가자, 상당히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와,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지? 다들 너무 잘 돼서 이제 내가 너희한테 싸인 받아야겠어, 정말!”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 지금 선배님 싸인 앨범 받으러 온 건데~ 이렇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싸인해 주세요 선배님!”
“아하하! 뭐야 정말!”
이세진 저놈은 정말 사람 듣고 싶은 말만 싹싹 골라 해서 해주는군.
-일단 제가 최대한 이야기 잡아볼 테니까 다들 차분하게 갑시다~
참고로 저놈은 테스타 기억이 싹 날아간 리더 류청우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거의 일일 토크쇼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분위기는 더없이 화기애애해졌다.
“아현이는 여전히 꽃사슴이고~ 문대는 이제 명절에 홍삼 그만 보내도 괜찮아! 매번 받아서 내가 라디오에서 이야기도 했어!”
“하하하!”
뮤디는 기분 좋게 멤버 하나 하나에게 덕담과 농담을 하더니, 마지막으로 테스타의 리더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본인이 리더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로.
“청우도 오랜만이다. 리더로 고생 많지?”
“하하, 저야 멤버들이 워낙 잘해줘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 참가해 보컬 트레이너 뮤디를 만났던 것은 이 스티어 청우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대응에는 문제없었다.
나는 녀석이 미소를 지으며 뮤디와 잡담을 나누는 것을 체크했다.
‘괜찮군.’
아무튼, 뮤디가 섭외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분명 초반엔 테스타랑 엮을 게 있는 네임드들한테 섭외 요청이 많이 갔을 거다.’
상대가 ‘편집에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계산이 서려면 이렇게 대중이 다 아는 친목도 중요한 법이다.
‘테스타가 딱 출연 계약하자마자 1차로 그걸 강조해서 섭외 돌렸겠지 뭐.’
그 후에 서넛쯤 출연진 라인이 완성되면 거기서부터 또 섭외 컨택 지평을 더 넓히는 거지.
그래서인지 우리와 연관이 있는 출연진은 뮤디로 끝나지 않았다.
“문대 씨! 아이고 세상에!”
다음 대기실에 찾아가자마자 열렬히 손을 흔드는 것은… 말랑달콤 멤버들이다.
그렇다.
VTIC과 같은 LeTi 소속사의 전설적인 병맛 컨셉곡 ‘POP☆CON’을 남긴 여자 아이돌 그룹.
여기 말랑달콤도 출연진이다.
심지어 이미 배우로 성공한 멤버 하나까지 포섭되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소현 선배님.”
“아니~ 와, 이렇게 또 만나네요!”
원년 멤버가 완전히 재결합해서 서바이벌에 나오는, 아주 독특한 케이스였다.
다만 멍청한 선택은 절대 아니다.
‘영리하긴 하군.’
어차피 전성기가 지난 그룹이니, 출연진 중 네임드가 많은 여기서 성적이 안 나와도 딱히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잘 나가는 한 사람도 배우로 성공했으니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이미지 악영향은 없을 것이다.
인성 논란만 피하면 되는데, 그거야 방송 하루 이틀 해보는 아이돌도 아니고 알아서 잘 피해 가겠지. 병맛 컨셉 때도 살아남은 사람들 아닌가.
그렇게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저희 사실 문대 씨 나오신다고 해서 나온 것도 있는 거 알죠? 잘 부탁드려요!”
“……?”
“아하핫 문대 씨 표정 봐!”
뭔 소리냐.
그때, 호탕하게 웃는 말랑달콤 멤버의 어깨를 쓰다듬은 소현이 흐뭇하게 말했다.
“문대 씨가 우리 팬이잖아요! 진지하게 봐주실 분이 하나라도 계시면 용기가 나죠.”
음.
이제 와서 팬 아니라고 해명하기엔 에서 팝콘을 춘 시점으로부터 몇 년이나 지났다. 결국 나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뷰에서 언급이나 좀 하자.
“영광입니다.”
“헐, 우리가 영광인데요!”
그리고 다시 화기애애한 마무리용 대화가 이어지던 찰나였다.
질문이 장난스럽게 튀었다.
“리더로서 보시기엔 어때요? 문대 씨 여전히 저희 팬이신 게 맞나요?”
‘…!’
류청우에게.
아마 질문 성격상 리더에게 자연스럽게 돌아간 것 같았으나….
‘안 돼.’
이 스티어 류청우는 내가 에서 팝콘을 췄는지 팝핀을 췄는지 알 리가 없다.
자연스럽게, 내가 이 사람들 팬이라는 밈이 있는지도 모를 거고.
나는 주먹을 쥐었다.
‘커버 간다.’
오늘 리더 대행쯤으로 활약 중이던 큰세진도 슬쩍 눈을 까닥거린 뒤 끼어들려던 참이었다.
“그럼요.”
스티어 류청우가 그보다 먼저 깔끔히 답변했다.
“문대가 저희 라이브 방송에서도 선배님들 곡 틀어놓기도 하고요.”
“…!!”
“헐! 진짜요? 대박이다….”
“고마워요, 문대 씨!”
그리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스티어 류청우는 별문제 없이 지난 테스타의 활동들을 언급해가며 쓱 인사말을 마무리했다.
이세진은 분위기를 보더니, 더 끼어들지 않고 입을 다문 채로 웃었다.
나나 다른 녀석들도 그 흐름에 편승해서 대화를 잘 끝냈으나, 대가리 속은 혼란했다.
“…….”
설마.
“조금 있다가 봬요~”
“옙, 선배님들!”
탁.
말랑달콤의 대기실을 나오며, 나는 류청우를 돌아보았다.
“방금 그건….”
어떻게 대답했냐.
녀석은 약간 쑥스러운 것처럼 얼굴을 긁더니, 싱긋 웃었다.
“음, 무대를 보다 보니까 알고리즘에 동영상들이 떠서… 팬분들이 테스타 활동을 잘 정리해 놓으셨더라.”
“…….”
“그걸, 다 보셨다니… 감사해요. 대단하세요 정말…!”
“하하, 그럴 건 아니지만… 고마워.”
아니.
이건 ‘대단하다’로 끝날 게 아니다.
‘무대 영상으로 끝난 게 아니라 테스타 활동을 다 봤다고?’
말투로는 대충 알고리즘 타고 얼결에 봤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아까 대답한 내용을 봐서는 거의 팬 위키를 통째로 외운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류청우는 그런 검색을 잘 안 하는 타입이었는데.
스티어 류청우라고 특별히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분명 일부러 따로 알아본 것이다.
‘대체 언제냐.’
이놈 잠은 잔 건가?
애초에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걸 자진해서 다 공부했다는 게 경악스러울 지경이다.
그 와중에 태평한 질문이 돌아왔다.
“혹시 내가 아까 실수한 점 있을까?”
“아뇨. 깔끔했습니다.”
“하하, 고마워.”
아니, 지금 내가 질문을 받는 게 아니라 물어보고 싶다. 무슨 멘탈이면 상태창도 없이 낯선 세상에 떨어졌는데 아웃풋이 이렇게 나오냐?
‘소설 주인공도 아니고.’
하지만 스티어 류청우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을 뿐이다.
“그래도 내가 오해하는 게 있다면 말해줘. 아무래도 팬분들께는 실제 일어난 일보다 좀 더 부드럽게 이야기하게 되니까.”
“…예.”
오냐. 이젠 나도 모르겠다 X발.
‘이 멘탈 때문에 차유진이 무섭다고 한 건가.’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 * *
이후, 이어진 촬영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MBS의 아나운서가 나와서 웅장하게 출연진 하나하나 입장마다 소개해 주더니, 1시간 만에 본론에 들어가긴 했지만.
‘거의 마지막 순서라 우린 개꿀이었으니 됐지.’
다만 MC는 목소리가 벌써 약간 갈라졌다. 안 됐군.
“첫 번째 경연의 주제를 발표하겠습니다.”
전광판에 드디어 거대한 폰트로 주제가 떴다.
[곡 바꿔 부르기]출연진들이 서로의 곡을 돌려서 바꿔 부르는 테마.
전통적이고 잔인하고, 흥미롭다. 괜찮네.
“그리고 경연인 만큼, 오프닝 무대와 다르게 관객들이 출연진 여러분의 무대에 순위를 매기게 됩니다.”
당연한 말이 밑밥으로 하나.
그리고 마찬가지로 당연하지만, 자극적인 말이 다음이다.
“그리고 최하위 한 분은 안타깝지만 탈락하게 되십니다.”
“……!”
다들 알면서도 한 번씩 놀란 표정도 지어주고, 아주 방송들 잘하신다.
그렇게 일부러 조성한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출연진들은 공 뽑기로 커버할 상대의 곡을 골랐고….
“헉, 잘 부탁드립니다.”
테스타는 뮤디의 공을 뽑았다.
‘좋아.’
서로 겹치는 요소가 하나도 없는 참가자다. 이러면 감정 나빠지게 대놓고 비교할 기준점이 애매하고, 다른 맛으로 무대 뽑기도 쉽지.
‘아는 사이니까 편집 각도 좋겠어.’
그래도 인터뷰에서는 말랑달콤 곡도 살짝 바랬다고 립서비스라도 해야겠군.
“허어억?”
마침 말랑달콤이 테스타 공을 뽑고 비명을 지르고 있더라.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나는 인터뷰에서 최대한 이상한 편집점이 잡히지 않을 단어를 생각하며, 정중한 리액션들과 함께 첫 촬영을 마쳤다.
그리고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즉시 돌입하는 연습.
“으음, 편곡은, 완전히 다른 반주를 넣어도, 좋을 것 같아…!”
“그러게, 분위기를 확 바꾸는 게 매력 있긴 하겠다~ 그럼 멜로디만 남기기?”
“중독성 있는 멜로디, 탑 노트가 장점인 만큼 그 요소는 가져가는 것이군요!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그러면 컨셉은… 그래, 문대문대가 할 말 있을 줄 벌써 알았지~ 얼른 말해 봐. …오오? 유진이도?”
“히히!”
곡을 고르고, 컨셉을 뽑는다.
쓸데없는 사설을 빼고 빠르게 토의가 이루어져 결과를 도출했다.
-뮤디의 10년 전 히트곡을 완전히 테스타 버전으로!
그리고 토의 결과를 숙지한 김래빈이 1시간 만에 가편집된 편곡 데모를 내밀고, 그걸 안무 능력이 좋은 녀석들 중점으로 토스 받아서 그림을 짠다.
몇 년의 경험으로 철저히 역할 분담 및 진행 구조가 자리 잡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스티어 류청우는 이 모든 진행 과정을 열심히 관찰하며 흡수했다.
무슨 경력직 신입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회사에 중간보고 겸 연락해야 하는 거구나.”
“예. 아무래도 제작진들이 연습과 정도 찍으러 올 테니까, 그걸 조율해야 해서요.”
“그렇겠지. 알았어.”
이 속도면 얼마 안 가서 리더 역할도 해먹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다.
‘업데이트 끝나면 어차피 기억 돌아올 텐데.’
버티기만 하면 되는 일에 이렇게까지 해주니 좀 미안할 정도로 녀석은 잘했다.
게다가 이런 일도 벌어졌다.
“…류청우.”
“…!”
회의 직후, 배세진이 목이 말라서 물이라도 가져오려던 스티어 류청우에게 선수 쳐서 음료수 하나를 내민 것이다.
“괜찮으면 마셔.”
“…….”
사실, 스티어 시절 배세진과의 괴리를 어떻게 다루냐에 관해서는 더 대가리 박살 나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상태였다.
이미 며칠 전에 대화가 끝났기 때문이다.
-세진 형에 관해서는 좀 이야기할 게 있는데요.
-유진이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거지?
그걸 끝으로 류청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배세진에게 반감을 표출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게 실화냐.’
다만 배세진 입장에서는 묘한 기색을 눈치챈 것 같긴 했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 시험해 보듯이 뭘 건네는 거지.
“목마른 것 같아서… 안 마시고 싶으면 안 마셔도 괜찮아.”
“…….”
나는 확실히 봤다.
거기서 스티어 류청우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나 결국 거부하지 않고 병을 받아들더니, 시원하게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잘 마실게.”
“…! 뭘!”
류청우는 별 내색 없이 그 자리에서 음료를 마시기까지 했다.
배세진은 좀 안심한 것 같았고, 분위기는 더 좋아졌다.
‘흠.’
흡사 스티어 차유진의 상대적 인성 점수가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보는 것 같군….
그리고 이런 분위기로 연습이 저녁까지 흘러가자, 이세진도 진심인지 떠보는 건지 이런 소리를 했을 정도다.
“형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희한테 잘해 주시다니! 우리 유진이는 기억 없다고 가출도 했는데.”
“Yeah.”
“하하, 그랬어?”
류청우는 온화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했다.
“여전하네.”
“…?”
“지금은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Yep.”
문득, 묘한 긴장감이 살짝 흘렀다가 사라진 것 같았다.
‘음.’
나는 즉시 대화에 집중했다.
분위기는 여전히 좋았다. 차유진은 말없이 자신의 물병을 들이키다가, 툭 말을 던졌다.
“그리고 축하해요. 청우 형 이대로면 기억 금방 돌아와요.”
“음?”
“저 무대 좋다고 인정했을 때 기억 돌아올 수 있었어요. 아마도 그게 Trigger? 그렇게 느껴요.”
차유진은 마치 팁을 전수하는 것처럼 덤덤하게 그렇게 말했다.
테스타 때의 기억을 되찾는 방법!
‘그런 소리를 하긴 했었지.’
나는 테스타 차유진이 몸으로 돌아온 뒤, 녀석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 “업데이트”라는 게 빨리 끝난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몰라요. 제 말은, 타이밍이 너무 기가 막히잖아요?]
-[저는 제 깨달음, 혹은 우리의 솔직한 대화가 타이밍에 영향을 줬다는 쪽에 걸고 싶은데요.]
시스템 이 새끼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회사 시스템 업데이트하겠답시고 그 과정에서 멤버들 기억을 롤백시키는 마당이다.
그러니 그 멤버 당사자의 정신적 성장이 업데이트 완료에 영향을 줬다…라.
‘상당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 채택했지.’
이미 큰달에게 공유도 해뒀다.
그리고 저 류청우에게는 아예 ‘당신은 기억을 잃은 상태다’로 전제를 잡고 이야기했었으니, ‘네가 빨리 그 몸에서 꺼지는 방법’보단 ‘기억을 되찾는 팁’이 맞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류청우는 제법 흥미롭다는 듯이 되물었다.
“자동으로?”
“음, 문대 형에게 부탁했어요. 이거 설명했던 이야기예요. 문대 형에게 이상한 유령 같은 거 있어요. 상태창?”
야.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차유진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마쳤다.
나는 미간을 눌렀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그걸로 우리 기억 돌려줬어요. 형도 그럴 거예요.”
“아.”
그 순간이었다.
류청우가 온화한 목소리 그대로 대답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뭐?
“형?”
류청우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격양되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 그대로 말했다.
“내 기억을 꼭 되찾을 필요가 있겠냐는 뜻이야.”
나는 한발 늦게, 그 뜻을 해석했다.
‘저건….’
-테스타 류청우를 되찾을 필요가 있을까?
본래의 테스타 류청우를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소름이 쭉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