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t or Die RAW novel - Chapter 68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68화
“…….”
잠시 거짓말 같은 침묵이 흘렀다.
본부장은 뜬금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마법소녀? 애들이 보는 거 말이야? 루나문 같은?”
“예.”
박문대는 본부장이 불쾌해하기 전에,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탁.
“물론 정말 유아용 마법 소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PPT가 한 장 더 넘어가며, 몽환적 색채의 소품 컷들이 보였다.
노을빛에 반짝이는 교실 창.
금 간 피처폰의 하늘 바탕화면.
보랏빛 효과가 넘실거리는 교실 시계.
…….
“다만 그 장르가 가진 상징적 모티브만 따서 재구성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종목입니다. 최근 레트로 감성이 유행하니 대중성과 선구안을 모두 잡을 수 있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으음.”
박문대는 레트로 마케팅의 사례를 몇 가지 PPT에 띄웠다. 그중에는 소속사의 모기업인 T1에서 진행한 SNS 바이럴도 있었다.
“또한 몽환적인 곡 분위기와 ‘청춘’, ‘마법’이라는 키워드가 어우러진다면, 아트 필름 등의 구성으로 예술성도 충분히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
본부장 같은 높으신 분의 약한 부분을 콕 찌르고 들어간 것이었다.
박문대는 본부장이 자체제작 아이돌 이야기를 할 때, 그가 이 소속사 사업에 어떤 이미지를 기대하는지 알아차렸다.
‘있어 보이고 싶어 하던데, 잘 먹힐 수밖에 없지.’
앞에서 실컷 대중성 이야기도 떠들어놨으니 상업성에 대한 변명도 충분히 해뒀다.
“관련 이미지 레퍼런스 및 편곡 시안입니다.”
박문대는 PPT를 넘기며, 멤버들과 함께 선별한 추가 이미지 자료를 보여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7번 곡을 짧게 재생했다.
코러스 부분이었다.
하지만, 데모와는 느낌이 달랐다.
“…!”
“이런 방향으로 전체적 편곡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함께 서서 발표 자료를 보던 김래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편곡을 주도한 본인이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보는 건 묘한 편안함을 줬기에, 나머지 멤버들도 슬쩍 안도했다.
‘저것 때문에 한숨도 못 잤지.’
류청우에게 차가 있고 운전면허가 있어서 그들에겐 다행이었다. 매니저에게 문자만 넣고 작업실로 갈 수 있었으니까.
물론 아침에 깨서 문자를 본 매니저는 기겁했지만 말이다.
“오…….”
본부장은 묘한 감탄사를 내더니, 곧 고개를 까닥 까닥거렸다.
그리고 박수를 쳤다.
“아, 확실히 젊고 재능 있는 친구들이 있어야 돼. 이렇게 하루 만에 딱! 발표까지 준비해 오고 말야~”
‘마음에 들었나 보군.’
박문대는 코웃음을 참았다.
본부장은 ‘요새 입사하는 애들보다 나은 것 같다’라는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을 실무진들에게 떠들더니, 겨우 본론을 이야기했다.
“좋아~ 이렇게 진행해 봐요.”
“…!”
“감사합니다!”
“아, 이거 나라서 오케이하는 거예요. 다른 본부장, 늙은 사람들은 이런 거 잘 몰라~”
박문대는 생색을 내는 본부장을 보며, 최대한 건실하게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 상대하던 바이브였다.
참고로 그 꼴을 본 멤버들은 ‘대체 얼마나 7번을 하고 싶었던 거냐’며 뒤에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렇죠. 본부장님 믿고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응?”
박문대는 끝난 줄 알았던 PPT를 한 장 더 넘겼다.
“바로 회사에서 진행해 주셨던 곡에 대한 의견입니다.”
“……?”
“아, 야구부라는 컨셉은 저희도 정말 좋았습니다. 그렇죠?”
“그럼요!”
“한번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본부장님께서 정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문대와 멤버들은 이미 예정된 호응을 열심히 주고받았다.
‘회사 사람들이 정신 차리기 전에 끝내 버린다.’
“그러니까 전통 야구부 느낌을 더 살릴 수 있도록, 디스코 대신 다른 장르를 가미하면 어떨까 합니다.”
“뭐, 뭐?”
박문대는 희미하게 웃었다.
“록(Rock)을 쓰면 어떨까요?”
“…!”
* * *
소속사에서 공인했던 테스타의 데뷔 날짜 2주 전.
포털 사이트에 기사가 걸렸다.
[ 테스타 6월 18일 전격 데뷔] [오디션 출신 대형 신인 테스타, 데뷔 초읽기] [테스타(TeSTAR)까지 등장… 6월 가요계 대란]기존에 데뷔 기간으로 잡은 마지노선보다 닷새쯤 늦은 날짜였지만, 그래도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난 보름간 아무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 드디어
-뭔가 진행 중이긴 했나보다. 휴…
-20일 남았구나. 드디어 맘 편히 기다릴 수 있겠네.
-애들 SNS에도 첫 글 빼고 아무것도 안 올라왔잖아ㅠㅠ 얘들아 잘 부탁한다며! 다들 앨범 준비하느라 바쁜 거지?ㅠㅠ
-리얼리티 일정도 잡혔던데 빨리 예고 떴으면 좋겠다
몇몇 팬들은 VTIC과 일정이 겹치는 것을 살짝 우려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날짜까지 뜬 데뷔를 미루자고 할 수는 없었기에 현실에 만족했다.
-애들은 좋아하겠네ㅋㅋ VTIC 존경한다는 멤버들 꽤 있었지?
-뭐 이대로면 완전 동시 발매도 아니고 한 주쯤 차이 날 테니까 괜찮을 듯.
-문댕댕 청려님하고 만나는 거 또 볼 수 있겠다
└생각만 해도 흐뭇함
팬들은 소식 한 줄을 떡밥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불만을 표출하는 팬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은 기다려 보자는 반응이 대세였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
컴백까지 2주도 안 남은 시점.
-왜 아무것도 안 나와?
사람들은 폭발했다.
-소속사 일 안 하냐
-티저 이미지라도 나올 때가 됐는데 왜 안 뜨냐고 애들 SNS도 감감무소식
-아니 어떻게 이정도로 떡밥이 없냐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얘네 기사만 내놓고 애들 어디 섬에 처박아둔 건 아니지?;;; 목격담도 없고
-애들 방치하고 소속사 투자금 먹튀하는 건 아니겠지 가만 안 둔다.
금방이라도 성명문을 발표할 것 같은 무시무시한 전운이 감돌았다. 급조된 소속사 홈페이지는 이미 트레픽 오버로 접속 불가 상태였다.
폭발한 분노로 랜선이 찢어지기 직전이었던 그날.
-미미미친 뭐 떳어 (링크)
티저가 뜬 건, 그날 밤 자정이었다.
* * *
[TeSTAR(테스타) ‘마법소년’ Official Teaser]“…….”
썸네일에는 하늘로 뻗은 두 손이 떠 있었다. 노란빛과 보랏빛이 오묘하게 섞인 하늘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재생을 클릭하면, 갑작스럽게 검은 화면이 떴다.
달칵.
영문 내레이션이 자막과 함께 흘렀다.
차르르륵- 달칵.
필름이 상영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노을 지는 하늘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황금빛과 자줏빛, 붉은 햇살이 어지러이 부딪혔다.
오르골 소리가 울렸다.
♬♪♩♪- ♬♪♬♪- ♪♩-
두 음계가 물방울처럼 화면을 적시며 몽환적으로 물들였다.
어느새 카메라는 점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환상적인 색채의 하늘을 하얀 테두리가 감쌌다.
커튼이 휘날리는 창틀이었다.
그리고, 창틀에 기대 잠든 인영이 보였다.
하얀 여름 교복을 입은 검은 머리 소년의 뒷모습.
주변에는 낡은 글로브와 야구공 따위가 흐트러져 있었다.
소년은 살짝, 뒤척였다. 그 사이로 노을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 ♬♪♬♪- ♪♩-
소년의 하얀 교복이 노을에 분홍빛으로 물드는 순간.
휘날리던 커튼이 크게 펼쳐지는 듯하더니, 하얗게 빛나며 결정처럼 부서져 내렸다.
파스스스…….
그 투명한 결정 조각들은 소년의 뒷모습에 쏟아지며, 보랏빛 노을을 사방으로 난사했다.
황홀한 색채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화면이 검게 바뀌었다.
[마법소년] [06.18. 00:00]“…….”
30초짜리 짧은 영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조회수가 반응을 증명했다.
[조회수 : 5,191,045]미친 기세였다.
심지어 삼백만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테스타가 해외에 별 기반이 없다는 걸 고려하면 기함할 수준이었다.
“어때?”
“사, 사람들이… 좋아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 다행이다…!”
데뷔를 앞두고 멘탈을 위해 인터넷 디톡스를 하던 몇몇 멤버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눈을 캄캄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솔직히 반응이 안 좋았다면 나도 멘탈이 살살 녹았을 것이다.
지금 25일째 불면증 걸린 소처럼 일만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날짜가 아슬아슬해.’
사실 티저는 좀 더 후에 공개될 예정이었다. 아직 ‘마법소년’ 뮤직비디오 편집도 안 끝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더 두면 기다려 주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로 피라도 토할 것 같아서 어떻게든 앞당기려고 다들 애 좀 썼다.
‘소속사는 드디어 겁 좀 먹은 것 같았고.’
어쨌든, 반응은 압도적으로… 좋았다.
-미친 퀄리티 왜 이래
-세상에 컨셉을 어떻게 이런 걸;; 정말 당혹스럽네 계좌번호 좀 불러줘
-얘들아 벌써 재밌다 벌써 갓곡이다
-뭐라구? 마법소년? 너희가 내 마법이야… 아흐흑
-이래서 소식이 없었구나 이런 걸 만들고 있었다니… 그럼 어쩔 수 없지 오케이 이해했음
-제 지갑은 테스타의 것입니다. 티저로 예약됨.
팬들 살살 긁는 댓글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불호가 다 떠밀려 내려갈 만큼 평이 좋다는 뜻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티저는 잘 나왔다. 곡에서 공개할 부분을 잘 골랐고, 연출도 적당했다.
‘뒷모습만 나와서 누가 출연한 건지 잘 모르게 만든 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서바이벌로 데뷔하는 그룹 티저에 대놓고 한 명만 딱 집어서 나오게 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을 쏟아 넣은 영상미가 일품이었다. 부족한 시간을 돈으로 때운 꼴이긴 했지만.
‘사람들 기대치가 너무 커진 것 같긴 한데… 곡이 좋으니, 웬만하면 커버할 수 있겠지.’
며칠 내로 추가 컨텐츠가 계속 뜰 테니, 팬들이 불안해할 일도 없을 것이다.
“…얘들아, 정신 차리고 다시 준비하자.”
“넵…….”
류청우의 피곤한 목소리에 멤버들이 좀비처럼 흐늘흐늘 몸을 일으켰다.
나도 스마트폰을 대충 던져두고 합류했다.
“고생했어. 이제 뮤직비디오는… 이 곡만 찍으면 끝이니까.”
“와…….”
“안무 연습 중심으로 스케줄이 돌아올 거야.”
“…….”
지옥의 강행군이 따로 없었다.
“네!”
지독한 침묵 속에서, 차유진의 대답만 신나게 울렸다.
그때, 스탭이 다가왔다.
“세팅 끝났습니다~”
“옙!”
두 번째 뮤직비디오 촬영이 슬슬 마무리되는 중이었다.
사실, 보통 늦어도 한 달 전에는 찍기 시작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신 나간 스케줄이 따로 없다.
‘…관계자는 다 철야 확정이라는 뜻이지.’
참고로, ‘마법소년’을 찍은 감독이 이것도 찍는다.
‘이 회사, 실무진들은 확실히 일을 잘하는데.’
뮤직비디오 감독을 어디서 끌어온 건지, 이름 있는 신진 감독을 순식간에 섭외했다. 아마 인맥으로 중간에 가로채 온 것 같았다.
T1에서 야심 차게 모은 경력직다운 행보였다.
…문제는 의욕만 있는 본부장과 중구난방 회사 체계라는 불발탄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점이지만.
특히, ‘테스타의 소속사는 여기’ 언플에 눈이 멀어서 한 달 내 데뷔 같은 기사부터 때려댄 윗분은 당장 퇴사해 줬으면 한다.
……이건 일단 머리에서 지우자. 일해야 하는데 괜히 스트레스만 받는군.
“다들 자기 촬영 분량은 다 숙지했어?”
“저는 특별히 숙지할 것도 없었습니다.”
“저도요!”
“아, 맞아~ 우리는 뭐 특별히 없더라. 세진 형님이 고생하겠던데?”
“…별로.”
이세진은 불퉁하게 대답했지만, 비협조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어쩌다 보니 찍는 두 뮤직비디오에 전부 스토리라인이 들어가서, 기왕 있는 아역배우 출신을 잘 써먹기로 했었다.
‘흠, 기왕이면 좀 더 열심히 하게 바람을 넣어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세진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보면서 좀 감명받았습니다. …정말 잘하시던데요.”
“…….”
완전히 빈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짬은 어디 가질 않더라고. 이 중에서 유일하게 무편집 상태에서 한 컷도 아마추어처럼 보이지 않았다.
“문대의 심정이라면 이해합니다. 티저에 뒤통수만 나오는 컷도 단독이라고 민망해하는 놈이니까~”
엉뚱한 놈한테서 헛소리가 돌아왔다.
큰세진은 내가 돌아보자 순식간에 시선을 돌리고는 딴청을 피웠다. 저 새끼가 진짜….
“…그걸로 벌어먹고 살려고 했는데, 잘해야지.”
“예?”
이세진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약간 가라앉은 얼굴로 스탭을 따라갔을 뿐이다.
‘칭찬을 해도 저러냐.’
나는 한숨을 참았다. 짜증 날 체력도 아까웠다.
“자, 단체 안무 씬부터 들어갈게요~”
“넵!”
나는 안무 대형에 맞춰 자세를 잡으며, 머릿속으로 일정을 다시 정리해보았다.
원래는 컨셉 포토가 먼저 떠야 하겠지만, 티저 영상 푸느라 일정이 미뤄져서 앨범 발매될 즈음에야 풀릴 예정이었다.
‘그럼 아마… 리얼리티가 제일 먼저 풀리겠군.’
사실 늦어도 전주면 영상 예고편이 뜰 줄 알았는데, 지금도 많이 늦은 감이 있었다. 본방까지 며칠 안 남았으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이날 밤에 리얼리티 예고편이 올라왔다.
[테스타의 같이 살기 TEST] [6월 8일 금요일 저녁 7시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