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295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295화
* * *
밀폐 용기를 열자마자 시큼한 김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은은하게 풍기는 산미를 보니 아주 잘 익은 것 같았다.
“슬슬 김치찌개 해 먹어도 되겠네.”
작년 김장철에 서준은 과하다 싶을 만큼 김치를 담갔다.
그리고 절반은 반찬으로 먹었고, 나머지 절반은 김치 냉장고에 보관을 했다. 묵은지로 먹기 위해서 말이다.
용기에서 김치 반포기를 꺼낸 서준은 도마에 김치를 올렸다. 시뻘건 김칫국이 시큼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흘러나왔다.
김치 꽁다리를 잡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자 배춧잎들이 시원한 비명을 내질렀다.
아삭! 아삭!
아사삭!
흡족하게 미소 지은 서준은 접시에 김치를 담아내고는 화구에 프라이팬을 올렸다.
김치하면 또 빠질 수 없는 음식이 있지 않은가.
스팸.
게장이 부르주아들의 밥도둑이라면 스팸 김치는 모두의 밥도둑이다.
식탁에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이 둘만 있어도 밥 두 공기는 뚝딱이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스팸의 두께와 굽기였다.
스팸은 너무 두껍게 잘라도 안 되고, 너무 얇게 잘라도 안 된다.
그 어떤 음식보다 중용의 미학이 필요했다.
혀에 닿는 순간, 그래서 오물오물 씹는 순간 입안에서 풀어져 버리는 두께가 딱 적당했다.
이건 스팸을 구울 때도 마찬가지다.
스팸을 바싹 굽는다면 구운 식빵을 먹는 건지 스팸을 먹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게 된다.
스팸에 윤기가 좔좔 흐르는 정도.
그게 잘 구워진 스팸이었다.
서준이 적당한 두께로 썬 스팸을 후라이팬에 넣었다.
치이이익!
치익!
듣기 좋은 소리와 함께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서준은 지글지글 익는 스팸을 주시했다.
“5, 4, 3, 2, 1…… 지금!”
그리고 이때다 싶을 즈음 반대로 뒤집었다.
간단하게 침이 절로 넘어가는 스팸 구이가 완성되었다.
* * *
한국의 추위는…… 특히 강원도의 추위는 필설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추웠다.
그런 맹추위에도 배꼽시계는 정직했다.
꼬르륵-
주린 배를 움켜잡아 보지만 허기는 가시지 않는다.
하염없이 식사 시간만 기다리다가 고대하던 식사 시간이 되었다.
취사병들이 참호 속을 돌아다니며 배급을 한다.
메뉴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주먹밥과 김치.
주먹밥은 너무 딱딱해 씹히지도 않았고, 김치는 입에 넣자마자 욕지기가 솟을 만큼 역했다.
“퉤!”
“우웩!”
곳곳에서 속을 게워 내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개중에는 시멜리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웨엑!”
연신 내용믈을 쏟아 내던 시멜리스는 다짐했다.
내일 아침에도 김치가 배급된다면 아침은 무조건 굶겠노라고.
하지만 막상 아침에도 김치가 나오자 극한의 굶주림에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갔다.
대신 이 빌어먹을 김치를 만든 사람에 대한 욕만 주구장창 하게 됐다.
욕은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했다. 전쟁이 지속되며 식단이 점점 부실해진 것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나오던 김치가 저녁 때마다 나왔고, 그나마 소금 간이라도 쳤던 주먹밥은 밍밍한 상태로 보급이 됐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한국군이 인민군을 격파하며 보급로를 확보했다.
보급로가 확보된 뒤로 에티오피아군은 미군의 보급을 받게 되었다.
배급은 보다 풍성해졌다. 더 이상 딱딱하게 굳어 버린 주먹밥은 식단에 나오지 않았고, 김치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드디어 사람다운 밥을 먹게 됐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자 김치가 그리워졌다.
그러나 한국은 전쟁 중이었다. 김치를 찾아다닐 여유 따위는 없었다.
결국 시멜리스는 전장을 전전하다가 귀국을 하게 됐고, 그렇게 81년이란 시간이 쏜살처럼 흘러갔다.
* * *
눈앞에 놓인 김치를 멀거니 바라보던 시멜리스가 포크로 김치를 집었다.
킁킁 냄새를 맡아 본 시멜리스가 조심스럽게 김치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이윽고 시멜리스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그래, 이 맛이었다.
죽어도 먹기 싫었지만 자꾸만 생각나던…… 반역자로 핍박받던 때는 가슴에 사무칠 만큼 생각나던 바로 그 맛이었다.
매큼하고 코를 팍 찌르는 생선 비린내와 입안을 얼얼하게 만드는 마늘…….
모두 기억대로였다. 씹을 때마다 한쪽 눈을 찡긋하게 되는 산미도 기억에 있는 그것과 같았다.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맛있어서 그래요. 너무 맛있어서…….”
시멜리스가 아련한 표정으로 김치를 바라봤다.
먹을 때마다 신물이 나던 김치였다.
그래서 이걸 계속 먹느니 차라리 인민군한테 죽는 게 낫다 싶을 만큼 먹기 싫었던 김치였다.
한데 시간이 흐르며 그토록 싫어하던 김치가 그리워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먹을 때마다 욕지기가 올라오고 신물이 나던 김치를 왜?
젊었을 때는 왜 김치를 그리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젊음의 패기보다는 늙음의 지혜가 늘어나며 알게 되었다.
내가 반세기 넘도록 그리워했던 건 김치가 아니라 전장에서 산화한 전우들이었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눈앞에 전우들이 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다.
늘 분위기를 주도하던 스욤…… 음치 주제에 만날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훈데사…… 항상 배고프단 말을 달고 살아서 식충이란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던 타카텔, 그리고…….
“시멜리스.”
무심코 고개를 든 시멜리스는 두 눈을 의심했다.
“마루…… 상병님?”
“내 얼굴 용케 안 까먹었네.”
어떻게 잊겠는가.
평생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바로 따라오신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왜…… 왜 안 오셨어요. 흑흑흑.”
마루 상병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따라가기 싫더라고.”
“그럼 편히 쉬기라도 하지 그러셨어요…… 뭐 한다고 81년 동안 그 산중을 지키고 계셨습니까, 대체 뭐 한다고…… 흑흑흑.”
“오랜만에 봤는데 질질 짜기만 할래?”
시멜리스가 훌쩍거리며 고개를 가로젓자 마루 상병이 피식 웃었다.
“좌우지간 그동안 잘 지냈지?”
잘 지냈지.
이 한마디가 뭐라고…… 참았던 눈물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못 지냈습니다, 어떻게 잘 지냈겠습니까. 혼자 도망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남아서 같이 싸웠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흑흑흑.”
“시멜리스.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하지만, 하지만…….”
“죄책감 갖지 말고 남은 여생 편히 살아. 그게 우리가 바라는 거니까. 그리고 고맙다. 늦게라도 찾아 줘서.”
생긋 웃은 시멜리스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 * *
“상병님, 상병님…….”
잠꼬대를 하는 시멜리스를 보며 시데가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많이 피곤하시긴 하셨나 봐요. 안 하던 잠꼬대까지 하시는 걸 보면.”
“피곤할 법도 하죠. 연세도 있으신데 장거리 비행에 차까지 탔었으니…….”
“그래도 할아버지가 행복해 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다 기자님 덕분이에요.”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보훈처 직원분한테 다 들었어요. 이번에 저희 할아버지 한국에 초청하는 계획 제안했던 게 기자님이셨다는 거요.”
김주훈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시멜리스 할아버지를 한국에 초청하자는 계획을 제안한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꾸벅 인사한 시데는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데는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 냉모밀을 만들고 있던 서준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뭐 더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아뇨. 그건 아니고 덕분에 식사 맛있게 잘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요. 할아버지도 너무 좋아하셨어요. 옛날에 먹었던 그 김치 맛이라면서.”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리고 미리 계산 좀 하려고 하는데 얼마인가요?”
“계산은 이미 다 하셨습니다.”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던 시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계산이 다 됐다니?
설마 김 기자님이?
시데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기자님이 하신 건가요?”
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께서 81년 전에 이미 하셨습니다.”
* * *
코카콜라 코리아의 고진욱 홍보부장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할까요, 부장님.”
“수습은 안 된대? NK엔터 정도면 충분히 수습할 수 있잖아?”
“그게, 박시윤이 친 사고가 사고인지라…….”
“하아.”
사실 고진욱도 안 된다는 걸 모르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금번 사건은 NK가 아니라 대통령이 와도 수습 못한다.
20대 초반의 하이틴 스타가 불륜을 저질렀는데 이걸 어떻게 수습하겠는가?
다만 문제는 광고다.
식음료 업계의 대목은 바로 여름이었다.
이때 판매율은 동절기 대비 30퍼센트 이상 증가한다.
그리고 고진욱은 이 여름 대목을 위해 지난 4개월간 부하 직원들과 철야 근무를 하며 광고를 기획했다.
이미 광고 촬영도 마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7월에 광고를 내보내는 일뿐이었다.
한데 7월을 사흘도 안 남기고 이런 사건이 터졌으니…….
광고 모델을 갈아치운다 해도 기존의 컨셉을 가지고 가긴 어려웠다.
기존의 광고 컨셉은 철저히 박시윤에게 맞춰진 컨셉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새로운 컨셉을 기획하고 촬영도 다시 해야 된다는 말인데…….
사흘 만에 이 모든 걸 해낸다는 건, 수능 9등급이 사흘 만에 1등급으로 껑충 뛰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도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느낌이었다.
한숨을 내쉰 고진욱이 말했다.
“박시윤 문제는 김 대리 선에서 NK랑 알아서 잘 매듭 지어.”
“부장님은 어쩌시려고…….”
“난 잠깐 머리 좀 식히면서 생각해 볼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고진욱이 회사를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세상은 칠흑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침부터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나 보다.
“벌써 한 시네.”
시간이 늦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을 정리할 때는 산책만한 게 없었다.
고진욱은 가로등 불빛을 등대 삼아 걷고 또 걸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아저씨!”
상념을 깨뜨리는 소리에 고진욱이 뒤를 돌아봤다.
이제 고등학생이나 됐음직한 학생들이 껄렁껄렁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죠, 아저씨.”
“나?”
“그럼 여기에 아저씨가 아저씨 말고 또 있어요?”
“그래서 왜 불렀니?”
“돈 좀 줘요.”
“뭐, 돈?”
고진욱은 어이가 없었다. 다짜고짜 돈을 달라니?
“주기 싫으면 빌려 줘요, 갚을 테니까.”
“허.”
실소를 흘리는 고진욱을 보며 학생1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시발, 뭐가 웃긴데?”
“하…… 아니다.”
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하고 입씨름 할 시간이 어디 있겠나.
생각을 정리하는 게 먼저지.
“얼마 필요한데?”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50만 원?”
“그래, 줄게. 더 이상 방해하지만 마라.”
고진욱이 지갑을 꺼내는 순간 학생들의 눈이 반짝였다.
지갑 속을 가득 채운 돈다발 때문이었다.
“뭐야, 시발! 아저씨 돈 많네?”
“킥킥. 50만 원 가지고는 안 되겠다.”
“거기 있는 거 다 줘 봐요. 학용품 사게.”
“큭큭큭. 담배가 학용품이냐?”
“병신이 뭐래.”
학생들이 저희들끼리 낄낄거렸다.
“뭐? 너희 학생 아니야?”
“맞는데요.”
“근데 학생이 이래도 돼?”
“어쩌라고요.”
“안 되겠다. 너희 학교 어디야.”
“아, 시발. 아저씨. 좋게 좋게 말하면 좋게 좋게 알아 쳐들어야지, 뭘 학교를 묻고 자빠졌어.”
“뭐, 시발?”
“그래, 시발. 하…… 시발, 이 아저씨가 사람 X같게 하네. 아저씨. 요즘 애들 무서워요, 그거 몰라?”
“큭큭. 이 아저씨 요즘 애들 무서운 줄 모르네.”
“아저씨 지갑 줘 봐.”
“뭐, 뭐 하는 거야!”
“하,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아저씨들이 있다니까.”
그렇게 말한 학생1이 주먹을 휘둘렀다.
후웅-!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주먹이 고진욱의 턱에 작렬했다.
퍼억!
한 방에 나자빠진 고진욱을 보며 학생들이 낄낄거렸다.
“X도 아닌 게 깝치고 있어.”
“그러게. 뒤질라고.”
예의 학생1이 쪼그려 앉더니 고진욱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는 고진욱의 지갑을 뺏어 들고 뺨을 툭툭 건드렸다.
“잘 쓸게, 아저씨. 그리고 어드바이스 하나 하자면, 앞으로는 어려운 학생들이 돈 좀 달라고 하면 그냥 줘. 이게 무슨 꼴이야. 어?”
그렇게 말한 학생1이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야, 얼마 들었냐?”
“얼른 확인해 봐.”
“와…… 시발. 500만 원은 족히 들었겠는데?”
“크크. 어디 갈까?”
학생들이 희희낙락해 하던 그때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아리랑치기인가. 아라리가 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