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95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95화
* * *
평소에는 절대 안 반갑지만 오늘만큼은 반갑기 그지없는 손님이 사무실을 찾았다.
“잘 썼다.”
서준이었다.
돌려받은 차 키에 황태수의 머릿속으로 지난 며칠이 스쳐 지나갔다.
아아…… 얼마나 힘들었던 날이던가. 부하들한테는 내색도 못 한 채 땀만 뻘뻘 흘려야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크흑.’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새삼 서준에게 고마웠다.
따지고 보면 돌려받아야 할 걸 돌려받는 건데도 말이다.
“……감사합니다.”
“내가 더 고맙다.”
“휴가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덕분에. 아…… 그리고 사고가 좀 있었다.”
철렁-!
황태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사고……?
어떤 사고?
에이, 설마.
“나무에 살짝 부딪혀서 뒷범퍼가 상했더군. 현지에서 교환했다만 그래도 알리긴 해야 될 것 같아서.”
‘이런 씨!’
황태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그게 얼마짜리 차던가?
그런데 조심히 타진 못할망정 사고를 내다니!
‘아니…… 아냐. 이만하길 천만다행일지도 몰라.’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괴물1과 2의 손에 들어갔다 나온 자신의 차가 멀쩡히 돌아온 게 아닌가?
‘어차피 뒷범퍼는 소모품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하. 그 정도야 뭐, 생활 흠집이나 다름이 없죠.”
“그럼 이만 가 보지.”
“벌써 가시게요?”
“내가 여기 더 있는 게 좋나?”
“…….”
피식 웃은 서준이 사무실을 나섰다.
서준이 사무실을 나서고 얼마 후.
황태수는 차를 확인하러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차를 이모저모 살폈다.
“내부는 깨끗하네.”
나름 빌려 탔다고 아예 청소까지 한 것 같았다. 담배 전 냄새가 났었는데, 지금은 산뜻한 라벤더 향이 난다.
“뒷범퍼도 새걸로 교환했나?”
오히려 이전 것보다 더 깨끗했다. 이전 범퍼는 뒤에 흠집이 나 있었는데 말이다.
담배를 꺼내 문 황태수는 피식 웃었다.
괴물1도 별거 없구먼.
하긴, 어쩌면 착한 녀석일지도 모르긴 하지. 이렇게 청소까지 해 둔 걸 보면.
그러고 보면 저번에는 전까지 맛있게 얻어먹었잖아?
“자식.”
불혹의 나이에 여자들이 겪을 법한 나쁜 남자의 매력을 몸소 느낀 황태수의 시야에 문득 휠이 들어왔다.
“어?”
뭔가 이상했다.
“어어?”
황태수는 쪼그려 앉아 휠을 살폈다.
“…….”
마치 시간이 멎은 것 같았다.
아끼고 아끼던…… 그래서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고 닦았던 휠에 흠집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네 쪽 다!
“대자…… 딱 한 대만 대자. 그러니까…… 대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 * *
후비적, 후비적.
“왜 그러십니까, 마신님?”
“갑자기 귀가 간지러워서.”
“제가 봐 드릴까요?”
“괜찮다.”
그렇게 말한 서준은 가게 문을 열었다. 딱히 영업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연준이에게는 이번 휴가가 6년 만의 휴가였다. 그러니 오늘까지는 푹 쉬게 해 둘 참이었다.
가게에 나온 건 이왕 연준이를 쉬게 두는 김에 대청소를 하기 위해서였다.
“난 화장실 청소부터 하지.”
마왕과 용사의 관계에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바뀌어서 그런 걸까?
웬일로 박연은 군말 없이 밀대를 든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마신님, 전 뭘 하면 되겠습니까?”
“형이라 부르라니까.”
“하지만 아직 입에 안 익어서…….”
“그러니 불러 버릇해야지. 누가 들으면 뭐라 변명하려고?”
“그건…… 그렇겠군요.”
“그러니 앞으로는 편히 불러.”
“알겠습니다, 서준이 형.”
“잘했다.”
“네, 서준이 형.”
“그래.”
“예, 서준이 형.”
“……그만해라.”
“알겠습니다, 서준이 형. 그럼 전 뭘 할까요?”
“유리 닦을 수 있으려나?”
“그럼요. 드라마에서 많이 봤습니다.”
“드라마에 그런 것도 나오던가?”
“에서 보면 나오던걸요? 주인공이 이런저런 알바를 뛰거든요.”
“그렇군.”
“이거 뿌린 뒤에 닦으면 되는 거죠?”
두식이 유리세정제와 극세사 타올을 가리켰다. 그에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은 테이블을 닦았다. 평소에도 깨끗이 닦는 편인지라 크게 이물질이 묻어 나오진 않았지만, 청소란 게 때로는 자기만족 아니겠나.
내친 김에 바닥도 쓸고 닦았다. 그렇게 대청소를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밀걸레로 바닥을 밀고 있던 서준이 익숙한 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가게 입구에는 의외의 사람이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선생님 아니세요?”
“아…… 안녕하세요.”
전(前) 박연의 여신, 현(現) 서우 어린이집 선생님인 이라희였다.
“청소 중이셨나 봐요.”
“네. 그런데 선생님께서 어쩐 일로?”
“그게, TV에 보니까 통영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더라고요. 그래서 다들 괜찮으신가 겸사겸사, 또 휴가는 즐겁게 잘 다녀오셨나 해서…….”
말꼬리를 흐린 이라희가 고개를 기웃거린다. 이윽고 얼굴에는 아쉬움이 잔뜩 묻어 나왔다.
왜 왔는지 알 것 같은 서준이었다.
“연준이 같은 서우 보러 오신 거 맞죠?”
“네?”
“서우요. 서우 보러 오신 거 맞죠?”
“……네. 맞아요.”
“서우는 연준이랑 집에 있어요.”
“아…….”
“오라고 할까요?”
“아뇨, 아니에요. 휴가인 거 알면서 찾아온 제 잘못이죠. 다들 잘 다녀오신 거 확인했으니 됐어요.”
심하게 아쉬워하는 이라희에 서준은 턱을 긁적거렸다.
“이왕 오셨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실래요?”
“네?”
“아직 저녁은 안 드셨을 것 같아서요.”
“아뇨, 아뇨. 아니에요. 그럼 전 가 볼게요. 내일 뵙겠습니다!”
손사래를 친 이라희가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런 이라희의 모습을…….
“화장실 청소 벌써 끝냈나?”
“진작.”
밀대를 든 박연이 쳐다보고 있었다.
‘위대한 여신은 잘 계시려나.’
조만간 찾아가야겠군.
* * *
“이게 김밥이지.”
김밥을 입에 한껏 넣은 채 오물거리던 박연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준은 그런 박연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청소를 끝내고 저녁 식사로는 김밥을 말았다. 마트에 가서 새로 재료를 사 온 것도 아니었다.
얼마 전 최성균과 그의 팀원들에게 해 주고 남은 재료들이 곧 상할 것 같아서 만 것뿐이었다.
김밥에 들어갈 햄은 수분이 빠져서 딱딱하게 굳었고 맛살은 쉰 것 같았다.
그래서 서준도 두어 개 집어 먹다 말았는데 박연은 맛있게 잘 먹는다.
서준이 신기해하거나 말거나.
박연은 입에 김밥을 한가득 넣은 채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떡볶이었다.
숟가락으로 떡볶이 소스를 푼 뒤에 젓가락으로 그 위에 떡과 어묵을 얹었다. 그리고 입에 넣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이게 떠뽀기지.”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줄 알겠네. 천천히 먹어라, 용사 놈아.”
“천처니 머고이다.”
“뭐라는 거야.”
“오크라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냐? 천천히 먹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사람 말처럼 안 들려서 말이지.”
“마물 주제에 건방지군.”
“용사 주제에 건방지군.”
언제나처럼 기 싸움을 하던 둘.
그러다 문득 두 사람의 휴대전화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알람이 울렸다.
“일곱 시군.”
“일곱 시네.”
“일곱 시가 왜?”
알람이 동시에 울린 것처럼 대답도 동시에 튀어나왔다.
“ 할 시간이다.”
“ 할 시간입니다, 서준이 형.”
두 사람은 나란히 TV 앞으로 향했다.
“오늘은 태수가 노동청에 신고를 하겠지?”
“태수 녀석 성격이 너무 물렀어. 나 같았으면 그런 악덕 사장 놈은 진작에 신고했을 텐데.”
“오늘은 신고해야 할 텐데.”
“예고편 보니까 하겠던데 뭘.”
“그럼 다행이고.”
그때였다.
“어이!”
누군가 위풍당당하게 가게로 들어왔다.
* * *
“괜찮다니까.”
“아닙니다. 안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다.”
“아니, 빌려 간 거면 빌려 간 거지, 휠에 흠집까지 내놓고 아무 말도 없는 건 또 뭐랍니까?”
“변상해 줬다.”
“그래도요. 대체 그 술집 사장 부친한테 얼마나 큰 빚을 졌길래 그러십니까?”
“……좀 많이 졌다.”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까?”
“그래…… 마음의 빚이 좀 크다.”
고형건이 답답하다는 듯 씩씩거렸다. 다른 덩치들도 제가 당한 일이라도 된다는 듯 한마디씩 거들었다.
“형건이 형님 말씀이 맞슴다. 이게 얼마짜리 찹니까? 게다가 뽑으신 지 반년도 안 됐지 말입니다.”
“빌려 간 건 빌려 간 거여도 사람이 그렇게 안면몰수하면 안 되지 말입니다.”
“저희가 가서 본때를 보여 주겠슴다!”
눈을 부라리는 덩치들에 한숨을 내쉰 황태수가 고형건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빠악!
“이 새끼들은 내가 괜찮다니까 왜 지들이 더 난리야.”
뒤통수를 한 대 맞으면 늘 시무룩해지던 고형건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
“사장님! 만약에 이게 13구역 애들 귀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쇼! 가오 상하는 일이지 않겠슴까?”
“형건이 말이 맞습니다, 사장님. 사장님께서 애써 버스 운송사업이라는 거창한 플랜까지 세우셨는데 그게 말짱 도루묵이 될 수도 있지 말입니다.”
이게 영화에서나 보던 과잉 충성이라는 건가……. 영화에서 볼 때는 졸라 멋있어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까 X 같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황태수가 덩치들을 흘겼다. 기세들이 아주 당장이라도 술 한잔해요에 쳐들어갈 기세들이었다.
‘새끼들 이러다 사고치면…….’
그 덤탱이는 모두 자신이 쓰게 된다. 그리고 덤탱이에 대한 대가는…….
‘……아공간이겠지.’
생각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만큼 끔찍했다.
고개를 흔들어 아공간을 떨쳐 낸 태수가 입을 열었다.
“듣고 보니 시현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존나 처맞는 말.
“그렇지 말입니다.”
“무릎까지 꿇려서 확실하게 사과받으면 너희들 마음이 좀 풀리겠냐?”
“예!”
황태수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채 차에 올랐다. 그리고 술 한잔해요로 향했다.
흔히 말하는 떼빙이라도 하듯 그 뒤를 검은색 세단들이 뒤따랐다.
“뭐지? 황태수파 아냐?”
“맞는 것 같은데? 저거 황태수 차잖아.”
“근데 저렇게 떼로 몰려서 어디 가는 거지?”
“혹시 전쟁?”
“에이, 12구역은 다 잡아먹었는데?”
“13구역 남았잖아.”
“그런 건가?”
잠시 후.
술 한잔해요 앞에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밤바다에 새까만 파도가 일렁이듯 황태수와 덩치들의 차가 줄줄이 들어선 것이다.
그들은 기세등등하게 차에서 내렸다.
“너희들은 모두 여기서 기다려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사장 체면도 있는데 너희들 다 보는 앞에서 무릎 꿇게 할 순 없잖냐.”
“아,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대인배이십니다!”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럼 다녀오마.”
황태수가 목을 좌우로 까닥거리며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슬쩍 덩치들의 눈치를 살핀 뒤 호기롭게 가게 문을 열며 소리쳤다.
“어이!”
찰랑!
풍경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닫혔다. 씩씩 콧김을 내뿜던 황태수의 코도 덩달아 닫혔다.
“……를 아십니까?”
“어이?”
“예. 맷돌 손잡이를 어이라고 한다네요.”
“안다.”
“역시 박학다식하십니다. 하하.”
“근데 여기서 어이는 왜 찾는 거지?”
“아…… 그게.”
황태수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날이 덥지 않습니까. 그리고 더운 날에는 살얼음 동동 띄운 콩국수가 딱인데 또 콩국물은 맷돌로 갈아야 제맛이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틀린 말은 아니군.”
황태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런 황태수를 보며 서준은 피식 웃었다.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던 탓이다.
“콩국물은 맷돌로 갈면 되는 거고, 이제 무릎 꿇으면 될 차례인가?”
“…….”
꿀꺽!
식은땀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괴물 새끼…… 그걸 들었다고?
아무리 괴물이라지만…… 이건 무슨 보청기 스킬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들어?
힐끔.
쥐 앞의 고양이처럼 얼어붙은 황태수가 눈알만 살살 굴려 서준을 흘겼다.
‘뭔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그의 표정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설마 날 아공간에 처박으려는 건가?
그건 안 된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돼!
‘이왕지사, 죽기 아니면 무릎 꿇기다!’
털썩!
학창 시절, 잘못을 저지르고 무릎 꿇고 손 들라는 선생님의 말에 바락바락 대들며 무릎 꿇기만은 거부했던 황태수.
아버지 몰래 차를 타고 나갔다가 단속에 걸려 철창 신세를 졌을 때도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잘못을 빌어 본 적 없었던 황태수.
그런 황태수의 무릎이 너무나도 쉽게 꿇렸다.
그의 무릎, 향년 3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