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97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97화
* * *
이슬은 짐짓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그새 내 목소리를 까먹은 것이냐. 박연이다.
“아, 네. 오빠. 서울은 잘 올라가셨어요?”
-덕분에 잘 올라왔다. 그보다 연락이 많이 늦었지?
“이 정도 가지고 뭘요.”
-도착하는 대로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그 말을 못 지켰다. 미안하구나.
“그게 뭐가 미안해요.”
-아니다. 약속을 지키는 일은 친구로서 신의를 두터이 하는 일. 내 그걸 저버렸으니 미안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정 미안하면 나중에 밥 한번 사세요.”
-물론이지.
“비싼 걸로 사 달라고 해야겠다. 헤헤헤.”
-아, 끊어야겠다.
“네? 벌써요?”
-오늘은 일찍 시작하는구나. 문자하마.
띠이이이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왠지 그녀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오빠 모태 솔로라더니 밀당까지 하네?”
지금 시각은 밤 9시.
서울에 도착해도 한참 전에 도착했을 박연은 일부러 전화를 늦게 했을 것이다.
왜?
“도착하자마자 연락하면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겠지. 귀여워라.”
상상이 갔다. 모태 솔로 박연 오빠가 조언을 받는 모습이…… 그리고 조언자는 서준 씨였겠지.
뭐…… 모름지기 썸 탈 때는 이렇게 밀고 당기는 맛 정도는 있어야 되니까.
쿨하게 전화기를 내려놓는 이슬에게 불시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이년아, 뭘 그렇게 구시렁거려? 시끄러워서 TV를 못 보겠네.”
“아! 아파!”
“아프라고 때렸지, 간지러우라고 때렸겠니?”
“이거 아동 학대야! 친구랑 통화 좀 한 거 가지고.”
“아동 학대는 퍽이나 아동 학대다. 그리고 친구?”
“그래!”
“친구 누구?”
“석진이!”
“퍽이나, 박연 총각한테 연락 온 거겠지.”
“……!”
“얼씨구. 붕어가 친구하자고 하겠네.”
“……어떻게 알았어?”
“얼굴만 봐도 알겠다. 포커페이스가 그렇게 안 돼서야…… 이슬이 너 사실대로 말해 봐. 여태 남자 친구 몇 명이나 사귀어 봤어?”
“하…… 엄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그래서, 얼마나 사귀어 봤어?”
“나 몰라 엄마? 나 남해 여신 김이슬이야. 반년 이상 사귄 남자애들만 해도 열은 넘지. 내가 살면서 남자가 없었던 건 최근 2년밖에 없었어.”
가자미눈으로 이슬을 흘기던 그녀의 엄마는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다행이고.”
* * *
-아! 니킥! 니킥 정면으로 들어갑니다! 이민석 선수 데미지가 있어 보이는데요.
-그렇죠. 저 정도 니킥을 정타로 맞고도 데미지가 없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죠.
-과연 몸을 비틀거립니다! 아아! 뭐죠? 중심을 잡았어요!
-말씀드리는 순간 이민석 선수 사이드 스텝으로 빠집니다!
-아아아! 경이로울 정도의 맷집입니다! 서 있기도 버거울 텐데 스텝이 죽질 않았어요! 각성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TV도 안 끄고 뭘 하는 건지.”
서준은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전화를 받으며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 박연에 혀를 찼다.
리모콘을 잘못 조작한 건지 스포츠 채널에서 격투 경기가 송출되고 있었다.
“이야…… 저걸 맞고도 버티네. 젊은 친구가.”
황태수는 어느새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오, 그래! 잘한다! 한 방! 어퍼! 어퍼! 그래, 지금! 와…… 저걸 피해? 괴물이 따로 없네.”
야단법석인 황태수에 TV를 끄려다 만 서준이 말했다.
“각성자들인가?”
“예?”
“저기 선수들.”
뚱한 표정으로 서준과 TV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황태수가 말했다.
“사장님은 스포츠 경기 같은 거 안 보십니까? 꼭 FC-1이 아니어도요.”
“딱히 스포츠에는 관심 없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다고요?”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서준은 딱히 스포츠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굳이 스포츠 경기를 찾아본 기억이라면…… 월드컵에 이따금 축구를 본 정도랄까?
“사장님 남자 맞으십니까?”
“여자겠나?”
“그럼 학창 시절에 축구도 안 하셨어요?”
“체육 시간에 하는 거 말고는.”
“사장님 골키퍼만 하셨죠?”
“어떻게 알았지?”
황태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왠지 사이즈가 딱 나와서요.”
“사이즈라니?”
“아닙니다.”
풉……!
서준은 눈을 잘게 치켜떴다. 그러자 황태수가 헛기침을 터뜨리며 화제를 돌렸다.
“각성자들끼리 붙으면 무슨 재미로 보겠습니까. 비(非)각성자라 박진감 넘치는 거죠.”
“그럼 다른 스포츠들도 그런 건가?”
“당연하죠. 생각해 보십쇼. 축구 경기하는데 각성자가 저 멀리서 장거리 슛 쐈는데 쏘는 족족 다 들어가. 이게 무슨 축구겠습니까? 각성자 재롱 잔치지.”
“…….”
“야구도 그래. 각성자가 투구를 했어. 이걸 누가 받아칩니까? 아니…… 그 전에 일반인들 눈에 보이기나 하겠어요?”
아무래도 황태수는 굉장한 스포츠광인 것 같았다. 신이 난 채로 주절주절 떠들더니 어느 순간에는 말이 반토막 나기 시작했다.
“하물며 FC-1같이 치고 박는 스포츠는 말할 것도 없지. 각성자가 나와서 한 대 팍 때리면 안와 골절은 기본에 강냉이는 옵션으로 털려 나갈 텐데.”
“…….”
“관중 있고 시합 있는 거지, 시합 있고 관중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금지시킨 겁니다.”
“그런 거군.”
황태수가 마카로니를 입에 털어 넣으며 케이지 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민석이란 선수를 가리켰다.
“근데 확실히 저 친구는 맷집이 각성자라고 착각할 만큼 좋긴 하네요. 정타가 저렇게나 나왔는데도 버티고 있네.”
황태수는 어느새, 옆에 있는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까지 꺼내 왔다.
냉장고와 하나가 된 듯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서준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맥주까지 더해지자 황태수는 무아지경에 빠지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서준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 건지 TV에만 집중했다.
“오오! 그렇지! 거기서 태클!”
“우워워……! 탄력 봐라, 저걸 저렇게 받아친다고?”
“자자…… 30초 남았다. 버텨라! 어어어? 그렇지! 가! 가! 쳐! 쳐! 그렇지! 바디 비었잖아! 바디, 바디!”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와 버린 서준.
그 순간 황태수가 벌떡 일어나며 환호했다.
“이야! 저걸 역전시켜? 그것도 KO로? 캬…… 간만에 명경기 봤다. 술맛 참 좋…… 응?”
황태수는 문득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
“…….”
“……사장님.”
“음.”
“……외람되지만 혹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안 듣는 게 좋을 것 같다.”
* * *
서준은 가게 셔터를 닫고 거리를 걸었다. 12구역의 밤거리는 한여름에도 스산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서준에게는 익숙한 분위기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학을 떼던 분위기였지만…… 아무래도 부작용 같았다.
자꾸 생각이 나는 걸 보면…….
걷기만 하던 서준이 문득 멈춰 섰다.
“음.”
간판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편의점에서 살 게 있던가?
서우 간식은 마트에서 미리 사 뒀고 집에 들어가서는 곧바로 이부자리에 누울 생각이다. 그러니 살 건 없다.
하지만 발걸음은 의지와 다르게 편의점으로 움직였다.
딸랑!
“어서 오세요!”
눈인사를 건넨 서준은 턱을 어루만졌다.
뭘 사지.
음…… 역시 괜히 들어왔나.
마침 카운터에 있는 식품 진열대가 눈에 들어왔다. 안에는 먹음직스러운 꼬치들이 한가득이다.
옛날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침 일찍 신문 배달을 하다 보면 갈증 때문에 편의점에 들를 때가 종종 있었다.
늘 500ml 생수를 샀었다. 그러다 식품 진열대에 있는 닭꼬치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살 수는 없었다. 무려 천오백 원이나 하니까.
지금은 그 수배에 달하는 팔천 원이었지만 발길을 돌릴 일 따위는 없었다.
“닭꼬치…….”
“마일드 하나.”
“저기, 이 손님이 먼저 오셔서요. 먼저 계산해 드리고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담배 먼저 주면 되잖아.”
곤란한 표정의 점원에 서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꾸벅 인사한 점원이 새치기 손님에게 말했다.
“마일드는 6mg짜리로 드릴까요, 1mg 짜리로 드릴까요?”
“항상 피우던 거.”
점원, 신성현은 생각에 잠겼다.
항상 피우던 거?
모르겠다. 이곳은 담배 매출만 수천만 원이 넘어가는 매장이었다. 그만큼 담배를 사 가는 이들도 많았고.
그런데 그걸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하지만 확률은 50대50.
성현은 눈치껏 6mg짜리를 꺼냈다. 그러자 새치기 손님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담배를 휙 내던졌다.
“아, 어리버리하기는. 항상 피우던 거라니까, 1mg 짜리.”
“아…… 죄송합니다.”
계산을 마친 새치기 손님이 오만 원권을 휙 내던진 채 가게를 빠져나갔다.
“죄송해요. 먼저 계산해 드렸어야 하는데…….”
“얼마나 기다린다고요.”
“편의점 일 하다 보면 그 얼마의 여유도 없는 분들이 참 많더라고요. 뭐 달라고 하셨었죠?”
“여기 이 닭꼬치 하나만 주시겠어요?”
“네! 팔천 원 결제 도와드릴게요.”
카드를 건넸다. 리더기가 정보를 처리하는 사이 성현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 귀여운 손님이랑은 안 오셨네요?”
이 편의점에 들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서준은 성현의 미소가 참 해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편의점만 찾게 되는 건가?
“오늘은 혼자 들어가게 됐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계산이 끝났다. 점원이 닭꼬치를 건넸다. 데리야끼 소스 특유의 달짝지근한 향이 묻어 나왔다.
“다음에 또 오세요!”
성현은 예의 해맑은 웃음으로 서준을 배웅했다. 꾸벅 인사한 서준은 편의점에 나오자마자 손에 든 닭꼬치를 앙- 베어 물었다.
맛은 모두가 다 아는 데리야끼 소스를 듬뿍 입힌 닭꼬치 맛이었다.
그래서 더 맛있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닭꼬치를 해치운 서준이 문득 입맛을 다셨다.
“두 개 먹을 걸 그랬나.”
아무래도 하나는 너무 아쉽단 말이지.
* * *
침대에 엎드려 누운 이슬은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얼마나 깊게 생각 중이었으면 기척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애가 불러도 대답이 없어. 이슬아!”
“응? 왜?”
“택배 왔더라. 무슨 택배를 하루가 멀다 하고 시켜?”
“화장품 좀 샀어.”
그렇게 대답한 이슬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는 다시 드러누웠다. 그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이슬의 엄마가 말했다.
“왜, 잘 안 돼?”
흠칫!
“이 지지배, 귀신을 속여라. 뭔데?”
“아, 몰라.”
“뭘 몰라. 뭐가 잘 안 돼?”
“엄마는 말해 줘도 몰라.”
“이 지지배는 누군 연애 안 해 본 줄 알아?”
고민하던 이슬이 입을 댓 발 내민 채 말했다.
“……나 까였나 봐.”
“까이다니?”
“박연 오빠한테 까인 것 같다고.”
“아니 왜? 연락을 하면 뭐 얼마나 했다고?”
썸이란 게 아침에 확 타올랐다가도 저녁에 훅- 식어 버릴 수도 있는 거라지만 이건 너무 대중이 없었다.
이슬의 어머니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김이슬이 말없이 휴대전화를 건넸다.
액정에는 박연과 김이슬이 주고받은 문자 내용이 보였다.
[나] 오빠 지금 뭐 하세용? 🙂 [박연 오빠] ㄷㅡ람ㅏ ㅂᅟᅩᆫㄷㆍ